하느님의 어린 양

스바 1:7,12-18; 시편 90:1-8;데살 5:1-11; 요한 1:29,35-37

 

김 경 호 목사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29)

다음 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하고 말하였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35-37)

 

대개는 이 본문을 히브리의 희생제사와 관련하여 대속의 의미로 해석했다. 히브리의 제사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어린 양들이 희생제물로 쓰인 것과 같이 예수께서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는 속죄의 어린양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죄라고 하는 것은 지배자들이 설정한 지뢰 같은 것들이다. 규정하고 정죄하고 자유로운 영혼들을 묶어놓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에 민중이 추구하는 것은 자유이고 해방이다 그들은 지배자들이 그들을 묶어놓은 죄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예수님 당시 지배자들은 민중을 시시콜콜한 율법의 조항들을 적용하여 죄의 사슬로 묶어 놓은 채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쥐락펴락하는 방법의 통치기술을 사용하였다. 반면 예수님의 목회는 그들을 해방시키는 목회였다.

 

매튜 폭스는 인간의 근본을 죄로 규정하는 기독교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원복을 강조한다. 그 원복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이다. 예수는 그들이 설정해 놓은 죄를 모두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이 아니다. 어미 양은 이미 길들여져 있다. 세상이 정해 놓은 틀 안에서 순종하지만 어린양은 천방지축 어디를 가야하고 어디를 가지 말아야 할지 알지 못한다. 자기가 가고 싶은 기준으로 들판을 질주할 뿐이다. 세상이 정해 놓은 규정은 어린 양에게는 무용지물이다. 그는 마음껏 달리며 자유를 누리는 양이다.

 

우리들 내면에는 생명에 대하여 즐겁고 유쾌하게 반응하려고 우주 속에서 놀고 싶어 하는 연약한 어린아이가 있다. 본질적으로 기쁨이요, 삶에 대한 긍정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 가운데서 놀고 싶은 신적인 어린아이를 상징하고 한 마리 어린 양처럼 우주라는 들판에서 뛰어 놀고 싶어 하는 세상에 때묻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 자유로운 가능성으로 열려있는 존재이다.

폭스는 인간 중심적인 질서와 통제의 문화가 아니라 우주 전체가 하느님 앞에 응답하는 찬양과 기쁨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기독교의 진정한 영성이란 인간을 포함한 사물의 근원적인 선(Original goodness)을 인정하는 일이다.”고 한다.

 

근원적 은총은 사물들의 내적 본성 그 자체로서 설명될 수 있다. 전통 기독교가 강조하는 원죄론이 이제까지 기독교 신학의 중심자리를 차지했으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폭스의 책 'The Coming of Cosmic Christ'(우주적 그리스도의 오심)는 우주적 기독교 전통을 회복시켜 내고 있다. 즉 그리스도란 역사적 예수에게로 제한되거나 인간 존재와 관계하는 분만이 아니라 오히려 전 피조물 속에 현재하고 있는 하느님의 내재적 지혜이며 상호관계적인 삶의 우주적 원리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적 그리스도는 모든 사물들 속에 현재하는 내재적 신성만이 아니라 전 창조가 추구해 나가는 목적(telos) 곧 우주의 역동적인 성취방향이기도 하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진화하는 우주에 합당한 목적(오메가 포인트)이 계시되어있다고 역설한 샤르뎅신부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또한 폭스에게 있어서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는 심층적인 에큐메니칼 차원(deep-ecumenism)에서 지금까지 이교신앙이라 무시되었던 동양 및 토착종교들과도 연대가 가능해진다. 예수가 우주적 지혜 내지는 근원적 선의 구체화된 역사적 출현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종교간의 대화가 생태학적 감수성을 중심하여 진행될 수 있다는 신학적 언명이라 하겠다. 결국 성례전 전통에 입각한 폭스의 생태학적 신학의 본질은 다음의 말속에서 요약된다. “우주는 150억년 동안 축복이요 은총이었다.”

 

우주가 150억년에 걸쳐 만들어 놓은 혹성, 인간, 다른 모든 종들은 다 은총이요 무제한한 사랑의 결과이다. 아무도 우리가 여기에 존재할 원리에 대해 증명할 필요가 없다. 창조는 은총이다. 원은총, 찬양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고통과 악의 투쟁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은총의 느낌이 있어야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다룰 수 있다. 은총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서로를 축복할 수 있는 상황을 제공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총을 지켜야한다. 죄인이 아닌 은혜를 입은 존재로 자신을 지켜야한다. 우리가 받은 은총과 자유가 침해받지 않도록 그것을 침해하는 세력이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정권이든지 인간을 죄인으로 묶어 놓는 종교든지 간에 우리는 우리가 값없이 받은 것들을 빼앗기지 않도록 그리고 모두가 값없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

 

온 우주적 찬양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만이 찬양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불평하며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고 냉소적이다. 그렇게 할 대상이 없으면 그 다음은 자기 자신을 깎아내린다. ,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된다. 자기 연민은 찬양을 내어 쫒는다. 우리들은 지나치게 철학적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툭툭 털고 이 우주적인 찬양에 합류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은총 가운데 있으면서 서글퍼 하기란 아주 어렵다. 우리 문화가 그렇게도 기쁨이 부족한 이유는 은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은총은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찬양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찬양한다는 것은 주체할 수 없는 내면의 기쁨이자 터트림이며 표현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드러나고 싶은 욕망이 있듯이 은총은 받은 사람은 그것을 알리고 싶어 한다. 그 알림이 찬양이다.

 

에크하르트 선을 찬양과 연결시킨다. “누가 선한 사람인가? 선한 사람들을 찬양하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다.” 선한 사람에 대한 이 특이한 정의는 너무 재미있다. 선한 사람이 어떤 객관적 기준이나 도덕적 기준에 합당한 사람, 어떤 규범을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니고 사물을 선하게 보고 자기가 보는 것에서 선한 것들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먼저 선을 찾는다. 모든 사람들이 선을 찾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잘못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냉소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선을 찾는다. 그리고 선한 사람이 선을 찾게 되면 그는 찬양한다. 선한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을 찬양한다. 도덕성은 선한 일이나 계명에 복종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찬양에 근거하고 있다.

 

찬양은 무엇을 주십시오하는 요구를 성취시켰을 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유아기의 신앙을 가지고 무엇을 주십시오.” “나를 알아 주십시오하는 연장에서 부분 성취가 이루어졌을 때 찬양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찬양이 아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나의 두드러진 점을 드러내는 것이 찬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찬양은 남의 선을 발견하고 그것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그들에게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찬양이고 하느님께 향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하게 사는 사람들을 찾고 그들을 알아보고 찬양하는 것, 이런 사회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이다.

 

시편 19편은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찬양하는 시이다. 여기서 낮은 낮에게 밤은 밤에게 소식전한다.’고 하는데 이 소식은 Bad News가 아니다. 서로를 칭찬하고 찬양하는 영광이 가득한 찬미의 소식들이다. 우리는 찬양이 우리의 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억제한다. 은총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감히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 하지 않는다. 은총으로부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자기 안에 고스란히 축적시켜 놓는다. 그리고 자신이 영웅이 되기를 꿈꾼다. 그것은 성공의 표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기쁨이나 은총을 남과 나누지 않는다. 이것은 은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받을 만큼 훌륭하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다.

 

우리들은 몇 명되지 않는 천재들을 찬양한다. 그러면 우리들 보통사람들은 죽는다. 이럴 경우 예를 들면 다아윈과 같은 선택적 소수만을 찬양하게 된다. 그렇다면 평범성을 가진 대부분의 피조물이 가지는 소중함은 땅에 떨어지고 무시하게 된다. 그 모든 것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더 위대하신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거나 자연 속에 깃들인 은총을 확인하는 대신 과학자나 천재들이 얼마나 똑똑한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의 문화는 그렇게 길들여져 왔고 그렇게 경쟁적인 심성을 키워온 것이다.

 

심지어는 런던에 있는 성 바오로 성당 한가운데서 펀자브 전투에서 수천의 인도인을 죽인 군인과 또 다른 전투에서 수천 명의 인도인들을 죽인 사람의 동상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정말 기려야 할 사람들은 이 자연을 지켜간 사람, 지역공동체의 환경을 지키고 하나님의 창조의 은총을 일깨워 주는 사람들을 기려야 한다. 그리고 이웃의 소중한 가치와 그들 가운데서 찬양의 근원을 발견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존경받아야 한다.

 

은총을 전하는 일은 마치 사랑을 전하는 것과 같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어떤 사람이 사랑 받으려면 사랑하면 된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으라는 제목으로 아무리 피를 토하고 웅변해도 그를 사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은 일정한 분량을 쓰고 나면 없어지고 마는 물질적인 재료가 아니다. 퍼줄수록 넘치는 것이다. 나눌수록 풍요케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은총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당하게 되는 커다란 역경과 시련, 내 앞에 닥친 어려움 앞에 많이 분노하고 당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큰 눈으로 볼 때 내게 닥친 어려움도 은총을 이루어 가는 한 과정일 수 있다.

 

55억 년 전에 일어난 초신성의 폭발로 인해 그 별은 멸망했지만 지금 우리의 몸을 이루는 다양한 성분들이 탄생하였다. 저자는 이것이 하나의 성만찬적 사건이다. 우리가 사랑하던 사물들은 멸망하지만 그들의 양식과 자양분을 다른 진화의 순간들을 위해 넘겨준다.

만일 우리가 용암이 분출하는 화산으로 소풍을 갔는데 때마침 화산이 폭발한다면 우리는 화산에 대해 악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갖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고 보면 화산은 이런 방식을 통해서 특별한 화학물질을 토양에 쏟아 부어 다음번 생산을 위해서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준다. 이런 일은 도저히 다른 방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 어머니 지구도 우리처럼 가스를 품어 낼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도덕적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우리 앞에 닥친 일들에 대해서 너무 빨리 선과 악을 판단하는 데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자연의 큰 눈으로 은총의 넓은 눈으로 우리들의 문제를 보고 찬미할 때 참다운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 앞에 보일 수 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자연의 큰 눈으로 은총의 넓은 눈으로 우리들의 문제를 보고 찬미하십시오. 그럴 수 있을 때 참다운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 앞에 보일 수 있습니다.

이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느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기쁨을 드러내어 이웃에게 전하십시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우주의 큰 찬양에 여러분도 참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