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만나는 길

34:11-16, 20-24, 95 1:15-23; 25:31-46

 

세상 달력으로 보면 오늘이 1123일 넷째 주일인데, 교회력에 의하면 무슨 날이지 아시는가요? 다음 주 1130일은 교회력으로 어떤 날인가요?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어떤 의미를 품고 있지요? 아기 예수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일 년 단위로 보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 새로운 해의 시작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달력으로는 송년주일이 아직 한 달이나 남아 있습니다만, 신앙의 달력으로 보면 바로 오늘이 송년주일입니다. 그런데 교회력에서는 한해를 보내는 오늘을 송년주일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다스림(Reign of Christ)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다스림이라는 말 속에는 통치한다는 의미와 심판한다는 의미가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마지막 주일로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바로 잘 살았는지 바로 살지 못했는지를 성찰하는 주일인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

 

한 달 후에 있을 송년주일은 직장과 동창들끼리 이어지는 송년파티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 해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달 앞서 신앙적인 송년주일을 먼저 맞이하는 것은 퍽이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40일간의 수난절과 마찬가지로 4주간의 대림절 기간은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는 기도 주간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를 시기한 세상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고 유혹을 하여 오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십년 전부터 미국의 기업들은 성탄절을 가족이나 친지간에 선물을 주고받는 날로 만들어 땡스기빙데이(Thanksgiving Day)로부터 성탄절까지를 거대한 세일기간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오늘이 바로 미국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 주일이고 이번 주 목요일이 바로 땡스기빙데이입니다. 이름도 기가 막힙니다. 우리는 그냥 감사절 혹은 추수감사절인데, 영어는 감사주는날입니다. 본래는 하느님께 감사하여 하느님께 예물을 드린다는 의미에서 생긴 말인데, 이게 인간들끼리 서로 주고받는 땡스기빙테이킹데이(Thanksgivingtaking Day)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백화점과 상점들은 성탄절을 축하한다며 거리에 나무마다 불을 밝힌다고 하면서 아기 예수는 어둔 구석으로 내어 쫓고 선물 보따리를 든 인파로 거리를 잔득 메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게들은 일부러 제한된 물품을 매우 싸게 파는 전략을 세웠는데, 이를 선점하기 위해 아예 목요일 밤부터 담요를 들고 가서 가게 앞에서 철야를 하는 일이 생겨났고, 그리곤 아침에 문을 열자말자 모두가 같은 물건을 향해 돌진하는 사태로 말미암아 깔려주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탄절세일운동이 우리나라에 까지 밀려들어와서 이곳 명동이나 강남 백화점들은 성탄트리 불을 화려하게 만들어 온 거리를 불야성의 도시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곤 대부분의 언론들이 블랙프라이데이라는 영어단어를 아무 설명없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여러분 블랙프라이데이(검은금요일)라는 말 최근에 자주 들어보았을텐데, 이 말이 어떻게 생긴 말인지 아시나요? 기업들이 회계장부를 기록하면서 손해가 나면 빨간 잉크, 이익이 나면 검정 잉크로 기재를 하는 일에 근거를 둔 말입니다. 곧 일 년 내내 손해를 보던 기업들이 탱스기빙데인 다음 날인 금요일을 기점으로 기업이 이익을 갖게 된다는 말인데, 우리나라 사람들도 인터넷을 통해 싼물건 구입에 대단위로 동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치군사경제종교적인 면에 있어 미국의 한 주로 전락한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어 문화적으로는 어느 정도 독립을 유지하여 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예속상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문화와 현대 상술이 교묘하게 우리 문화를 파고 들고 있습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 알려진 발렌타인데이가 젊은이들 사이에 확대되어가고 있고 여기에 화이트데이가 더해져 214일 발렌타이데이에는 여성이 남성에게 314일 화이트데이에는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검은초코렛과 화이트초코렛을 선물하는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이 날 중 하루라도 초코렛을 못 먹으면 바보가 되는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10월 마지막 날을 서양에서는 아이들이 광대 옷을 입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축복을 빌어주는 할로윈데이로 지켜왔는데, 이게 강남 일부지역에서 상술에 의해 가면놀이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1111일 빼빼로데이는 이러한 상업적 바보 놀이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진보적 역사관을 유지해 왔습니다. 상황에 따라 엎치락뒤치락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길게 보면 인간 역사는 해방과 자유라는 인간이 주인 되는 역사로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왔는데, 과연 제가 얼마나 더 오랫동안 이런 희망적 역사관을 지탱할 수 있을는지 의문입니다.

 

6,70년대 빨갱이라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입조심 말조심 조심조심 살아왔는데, 40년이 지나 지금 그런 조심은 자기도 모르게 더 심해졌습니다. 국정원과 검찰이 간첩을 조작하다 못해 이런 조작을 밝힌 변호사를 검찰 망신을 주었다고 오히려 고발하고 있습니다. 일베와 더불어 심지어는 서북청년단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삼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는데, 그 이유를 알자고 하는 유가족들이 빨갱이로 몰리고, 심지어는 경제침체의 원인 세력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요즘 예산은 없고 공약지키는 흉내라도 내어야 하는 박근혜정부가 무상급식 예산을 누리교육으로 전환하도록 교육청을 압박하고 있는데, 여기에 필요한 재원은 구입하기로 한 고장 투성이 F35 전투기 몇 대만 취소해도 해결이 될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면 빨갱이로 몰리는 세상입니다. 진실을 말하면 빨갱이로 몰리자 겁이 난 백성들은 상술에 맞물려 초코렛과 빼빼로를 주고받으면 마치 세상이 온통 사랑과 우애로 넘쳐날 것이라는 착각과 환상 안으로 숨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또한 예수만 잘 믿으면 세상 모든 문제가 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착각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함께 손을 들고 소리 높여 기도하자는 통성기도가 도깨비 방망이 주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정말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거짓의 물결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야할 방향을 바로 세우는 일은 정말 우리가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주부터 시작하는 4주간의 대림절을 의미 있게 보내기를 바랍니다.

 

[사랍답게 산다는 것]

 

금요일 저녁 안해와 함께 작은 음악회에 갔었습니다. 휴식시간에 화장실을 가서 일을 보고 손을 씻고 종이를 꺼내려고 하는데 제 앞서 한 남자가 두 장을 꺼내더니 손을 닦았습니다. 그러려니 생각했습니다. 저도 두 장을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냥 가려니 했는데, 또 두 장을 쑥쑥 잡아 빼는 겁니다. 이 사람 참 손 닦는 일에 철저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랬는데 손을 닦는게 아니라, 손가락 끝으로 우물거리더니 그냥 버리는 겁니다. 물기하나 묻지 않는 종이 두장을 그냥 버리고 태연히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사람같이 보이지 않더군요.

 

저는 고백하거니와 그렇게 손을 닦은 종이가 아까워서 버린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젖은 채 접어서 그냥 주머니에 넣습니다. 한두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말라 있습니다. 그러면 또 씁니다. 아내는 저보고 뭐 그렇게까지 하냐고 말하지만, 그래도 인간이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 지구에 무슨 영향을 주고 그래서 내 자식 세대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나요? 좋은 음악 들으면 뭐하나요? 좋은 음악 듣는 것은 좀 더 좋은 사람되자는 것이고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자기 위주의 이기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이웃을 생각하고 미래세대를 생각하고 자연을 생각하고 나아가 지구와 우주를 함께 생각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 아닌가요?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손잡고 축복기도를 나누는 것 다 그런 일을 위해서 하는 것 아닌가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자연으로부터 구별하는 이성적 인간의 주체를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지만, 저는 자연과 더불어 함께 공존하는 감성적 인간으로서의 객체를 강조하는 말로 사용하고 싶습니다.

 

[시비를 가리는 선한 목자]

 

오늘 본문은 이러한 주제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시편의 말씀은 야훼 하느님이야 말로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느님임을 고백하며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 양떼임을 선언합니다. 이 말은 보시기에 좋았다는 창조의 세계를 계속 유지하자는 고백입니다. 에즈키엘 말씀 또한 야훼야 말로 헤매는 양들과 길 잃은 양들을 찾아내고 상처 입은 양들을 싸매주고 먹여주는 선한 목자임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에즈키엘의 야훼의 선한 목자상은 단지 아픈 양과 상처난 양의 치유와 회복만이 아니라, 살진 양과 여읜 양 사이의 시비를 가려주는 곧 사회의 잘못된 구조를 바로 잡아주는 정의의 목자임을 밝혀 말합니다. ‘너희들은 선한 양들을 모조리 옆구리와 어깨로 밀쳐내고, 뿔로 받아 우리 바깥으로 쫓아 흩어버리기까지 하였다. 나는 다시는 그들이 부당하게 노략질당하지 않게 하겠다.’

 

경제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세 모녀가 집단 자살하는 일이 올 초에 있었습니다. 송파구 석촌동의 한 단독주택 지하 1층에 살던 61살의 박모씨와 35세의 큰딸과 32세의 작은딸이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라며 70만원을 남기고 한많은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저는 제가 사는 빌라 같은 동에서 이런 일이 있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의적으로 말하면 목사직 사임해야겠지요. 이웃사랑 맨 날 외치면서, 낮은 자 소외된 자 위해 사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구한날 외치면서 옆집에 사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살았으니 말입니다.

 

정치권에서 세 자매 법 운운하는 사이 지난달에는 세 들어 살던 집이 팔리자 갈 곳이 없었던 독거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분도 그냥 세상 원망 남 원망하며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신을 발견하는 사람을 위해 봉투에 10만원을 넣고 "고맙다. 국밥이라도 한 그릇 하라. 개의치 말라", 장례비로 추정되는 100여만원, 전기·수도요금 고지서와 이에 해당하는 돈도 '빳빳한' 새 돈으로 바꿔서 남겨놓았습니다. 유종의 미라는 말이 있듯이 무릇 사람이란 떠나간 그 마지막 자리의 모습이 중요한데, 이분들의 마지막 자리를 보면 감사를 알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기 위해 살아온 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먼저 간 이분들이 아니라 살아남아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루에도 50명이 자살하는 자살률 1위의 나라인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들은 더 이상의 심각한 뉴스가 되지 않습니다.

 

자살? 저들만의 문제입니까? “너희들은 선한 양들을 모조리 옆구리와 어깨로 밀쳐내고 뿔로 받아 우리 바깥으로 쫓아 흩어버리기까지 하였다.” 여기서 너희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요? 탐욕에 눈에 뒤집힌 부자들과 백성들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자들이지만, 우리는 책임이 없는 것입니까? 부자와 권력자들이 그러한 부정을 저지를 때, 내 코가 석자라고, 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내 일에만 몰두함으로 이를 무관심했던 방조는 죄가 되지 않나요?

 

[마지막 때의 두 그룹]

 

마태복음의 본문 말씀은 마지막 날에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심판을 받을지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고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오른편에 있는 양의 그룹을 향해 한 말입니다. 왼편에 있는 염소 그룹을 향해서는 반대로 말합니다. ‘너희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그룹이 다 똑같은 반응을 보인 사실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그랬다는 말입니까?’ 한쪽 그룹은 저희들이 그런 걸 베풀 때에 그 사람이 주님이라고 생각한 적이 꿈에도 없습니다. 언제 그랬다는 말입니까? 다른 그룹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그랬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그런 상황이었다면 우리가 외면할리가 있겠습니까? 이는 철저히 오해이자 미워하는 자들의 모함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 두 그룹에게 같은 답변을 주십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향린교우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 구절을 읽을 때에 마음이 답답합니다. 이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아들, 천사, 영광스러운 왕좌 모든 민족, 양과 염소 오늘 우리의 삶에 직접 와 닿는 단어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불트만이 말한 신화 이야기다 하고 한쪽으로 밀어버립니다. 성서에서 구원에 관하여 이보다 더 명쾌하게 말한 구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구원의 주로 고백하면서도 예수께서 직접 말씀한 이 성서 구절은 안중에 없고, 예수를 만난 적도 없던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구원받는다는 이 말만 붙들고 늘어집니다. 신학자들도 이 구절 갖고 박사학위 받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믿음 의인 구원 구절을 갖고 박사 학위 받는 사람은 수두룩합니다.

 

지난 주 화요일 18일 저희 교회 중고등부를 담당하고 있는 김형우전도사가 한신대학원 채플시간에 기도를 하였는데, 그때 기도를 마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대신에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기도를 해서 김전도사는 현재 K교수로부터 압력을 받아 자퇴서까지 써놓고 교수와 학생 나아가 남한교회 전체를 향해 신학적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김형우전도사가 학교 홈피 그리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생 김형우입니다. “지금도 고난 받는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기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혼란 혹은 지지한 것으로 전해 받았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지난 18() 채플시간에 참여했던 목사님들이 제 기도에 대해서 충격을 먹고 설교를 제대로 못했다는 이유,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진 원우들에 대한 혼란을 이유로 지금 교역지도 실장님이신 K교수께서는 저에게 징계를 줘야 된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지난 수요일 저녁 K교수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제가 이렇게 기도를 하게 된 의도가 무엇인지?, 민중이 구원을 할 수 있냐는 저의 구원론을 물어보셨고 너의 의견은 사적인 것이니 앞으로 공적인 채플에서는 그렇게 기도하지 말라는 말을 전해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저의 기도문은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오지 못하고 제가 만약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고친다면 학교 홈페이지에 올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허나 저는 절대로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사실 자퇴서를 쓰고 K교수님과 대화 후 신대원장님께 제출하려 했으나 자리에 없으셨고 목요일에 다시 제출하려고 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만류로 지금 현재 시간까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한신대학교는 타 교단과 다르게 교회가 학교에 대한 일들을 관여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한신대학교는 교회가 혹은 힘 있는 목사님들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학교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제 의견은 이러합니다. 첫 번 째, 구약, 신약, 예배학, 윤리학, 조직신학, 선교학, 상담학 교수님들께 듣고 싶습니다. 과연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안 되는지?” 어떤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제가 벌인 이야기니 제가 책임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언제부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되었는지? 발제 혹은 공부하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저의 개인적인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이러한 문제를 학생인 제가 공부해서 교수님들께 말씀드려야 합니까? 물론 다음 주 한 주간 저는 자퇴를 미루고 이 문제에 대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경우 저에게 징계 발언을 합당한 이유 없이 말씀하신 교수님께 사과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교수님들께서는 고난 받는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되는지? 안 되는지? 학문적 근거를 가지고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이 문제를 가지고 토론의 장이 열려야 합니다. 교수님들을 떠나서 다른 원우들이 제 기도를 듣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을까?”라는 고민을 해본 결과 이러한 문제가 토의 정도는 해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 번째, 이번일은 한 신학생의 인권을 무시한 인권침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학생회에서는 분명하게 학생회의 의견을 입장표명하시기 바랍니다. 신학대학원생들이 교수님들의 앵무새입니까? 하라면 하고 말라면 안하면 되는 겁니까? 학생회에서는 당당하게 입장표명을 해주십시오.

 

네 번째, 이 일을 주시하고 관심 갖는 원우들께 호소합니다. 학교가 돌아가는 전반적인 일들에 대해서 관심 가져주십시오, 학교의 주인은 학생입니다. 목사님들이 학교를 변화 시킬 수 없습니다. 학생이 주체가 되어 학교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대로의 한신대학교는 10년 후, 아니 5년 후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수직적인 구조를 철폐하고 모든 것을 대화 혹은 토론의 방식으로 학교를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살펴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신대원 들어오는 입구에 문익환 목사님의 동상이 있습니다. 들어오는 입구부터 문익환 목사님의 동상이 있다는 것은 이 학교의 분명한 상징일 것입니다. 부족하나마 문익환 목사님의 기도를 올리고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문익환 목사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 이야기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뜻은? 염원, 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까지 ... 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기도한다는 것, 즉 주의 기도를 우리들의 기도로 삼는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런데 그 주의 기도가 바로 민중의 기도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1976년 저를 감옥에 집어넣으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기도할 때면 고난 받는 당신의 아들, 딸들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고난 받는 아들, 딸들이 외치는 소리이기 때문에 그 기도 소리를 거절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외치는 노예들의 아우성 소리를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그런 기도였습니다.

 

나는 기독교의 대속(代贖)의 교리 같은 것은 잘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거절하실 수 없는 기도, 그 고난 받는 당신의 아들 딸들의 아우성,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염원, 즉 종교적 염원과 민중적 염원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종교적 염원과 민중적 염원을 따로따로 가지고 있는 한 우리가 내려찍는 도끼질은 마냥 헛 도끼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 둘이 한 초점에 닿아서 내려찍힐 때에만 그 도끼날에 장작은 빠개져 나가는 것입니다. (통일신학동지회 엮음, 통일과 민족교회의 신학, 한울, 13-14)

 

[나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사실 처음 이 얘기를 부목사에게서 들을 때에는 민중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였으면 논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했지만, 전도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80년대 초 유니온신학대학을 다닐 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순절 기간 채플시간에 각자가 종이에 참회의 기도를 쓰고 벽난로의 불 속에 던지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저도 성회수요일에 같은 순서를 갖지만 이는 참회를 통한 용서를 확인하는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동성애자인 한 여성 신학생이 자신이 몸담고 있던 미국성공회의 기도서를 그 불속에 넣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교단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학교 내에서 상당한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여학생이나 지금 김형우전도사님이나 불을 던진 일이 된 것입니다.

 

[중보자의 참된 의미]

 

물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문구는 절대는 아니지만, 특히 공중기도에서는 빠트릴 수 없는 문구입니다. 간혹 일부 교인들 가운데에 실수인지 의도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그냥 아멘으로 끝나는 경우가 어쩌다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과연 이를 요구했느냐는 신학적으로 논란이 되는 얘기입니다. 주기도에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요한복음 16장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는 구절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 가장 늦게 쓰인 책으로 역사성보다는 교리적 측면이 워낙 강하기에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내 이름으로라는 것이 그냥 예수라는 이름 두 글자만 들어가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 예수를 따라가는 합당한 삶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인가가 논쟁이 되는 부분입니다.

 

어떤 보수적인 목사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은 대단한 특권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왕의 친필 사인이 있는 백지 수표 뭉치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왕의 친필 사인이 있는 백지 수표를 가진 사람은 그 수표를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돈은 수표를 발행한 왕이 지불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수표뭉치로 이해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성서 구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니까 교회 재정을 제 마음대로 하고 젊은 여성 교인들에게 자기 어깨를 주물라고 하는 것 아닌가요? 쿼바디스란 영화가 이런 목사들의 부패와 전횡을 고발하고 있다고 하여 저도 볼 참입니다.

 

[민중 주체인가? 민중 잣대인가?]

 

우리가 누군가에게 내 이름대고 부탁해 그러면 들어줄거야했을 때에 그 이름 속에는 그 사람의 인격과 품격에 맞는 부탁을 말하는 것이지, 제 마음대로 아무거나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의 공생애와 십자가 삶에 맞는 일을 두고 하는 일입니다. 예수가 중보자가 되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라갔을 때에 구원의 중보자가 되는 것이지, 기도 말미에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을 함으로 인해 구원의 중보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 의하면 구원을 받고 안 받고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했느냐 안했느냐는 전연 상관이 없고 이 사회의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한명, 곧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된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을 돌보아 주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들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고 이들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통틀어 민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자신과 민중을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민중이 우리를 구할 수 있느냐라고 K교수가 김전도사에게 반문했는데, 오늘의 마태복음 2531절로 46절까지의 말씀에 근거해서 대답한다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민중이 우리를 구원하기도 하고 구원받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는 민중이 우리 구원을 결정하는 주체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민중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곧 구원의 주체는 하느님이지만, 하느님께서 구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구원의 잣대는 민중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에 있어 민중주체와 민중잣대는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애굽제국의 노예계층인 하삐루를 선택하여 구원의 원형인 히브리공동체를 만드셨듯이,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오흘로스라는 로마제국의 주변부의 갈릴리 민중들과 더불어 오늘의 교회공동체의 원형을 만드셨듯이 우리는 이 땅의 가장 낮은 자들과 더불어 정의와 자유 평화와 평등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 곧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일임을 민중의 이름으로 분명하고 확고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