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나리이다

64:1-9; 80:1-7; 17-18; 고전 1:3-9; 13:24-37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오늘은 대림절 첫 주일 아기예수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주일이자, 신앙의 새해를 여는 첫 주일입니다. 우리가 아기 예수를 기다린다는 말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사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교회의 절기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지, 오늘을 창조절 12번째 주일이라고 부르든 대림절 첫 주일하라고 부르든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왜 달리 불러야 하는 것인지 사실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오늘을 1130일이라고 부르든, 121일이라고 부르든 별다른 차이가 없듯이 이것 또한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닌지. 도대체 나는 오늘 왜 아기 예수를 기다려야 하면 그것이 오늘 나에게 있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4주 후에 아기 예수가 탄생하는 성탄절이 왔다한들 나의 삶에 무슨 변화가 생기는 것일까요?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고 교회와 세상이 온통 떠들어대니까 내가 거기에 함께 하지 않으면 소외될 것 같으니까 그냥 함께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가 탄생할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요? 만삭의 마리아가 해산할 방을 구하지 못해 마구간에서 출산을 해야 했다는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그 사회가 얼마나 자기 욕망에 싸여 있는 이기적인 사회인가를 말해주고 있고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스와 시리아 총독 퀴리노라는 이름이 그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기 예수의 탄생은 그만한 정치적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서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합니다. 동방의 박사라고 하는 당시 천체의 움직임을 통해 세상 역사를 읽어내는 지혜자를 예수 탄생의 최초의 알림이로 등장시킨 것도 그러하고 그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하기 위해서 왔다는 얘기를 듣고 왕 헤로데는 당황하고 예루살렘 성내가 온통 술렁거렸다는 구절 또한 아기 예수의 탄생은 단순한 종교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역사를 뒤흔드는 정치적 사건임을 밝히고 있고, 아기 예수를 없애기 위한 헤로데 왕의 명령에 따라 베들레헴 두 살 미만의 남아들이 모조리 살해되었다는 기사는 그의 탄생은 애초부터 당시의 국가권력과 대척되는 또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언급하는 정치권력이란 지금의 국회와 청와대, 국정원과 법원으로 상징되는 군대와 경찰력에 기초한 정치권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 정의와 평화라는 보다 높은 차원의 곧 인간의 선한 지성과 양심 그리고 영원성이라고 하는 하늘의 힘에 기초한 정치권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시대에 살았던 유대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메시야를 기다린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기다렸다 하더라도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저들이 기대한 메시야상은 달랐습니다. 세상 성공과 물질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에게 메시야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기득권자들에게 있어 메시야는 오지 말아야 할 대상이었고, 설사 온다 하더라도 그 메시야는 죽음 이후의 천상의 세계만을 지배하는 사람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이 이렇게 불의한 자들에 의해서 움직여가서는 안 된다는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과 하늘의 별 이외에는 달리 기댈 것이 전혀 없었던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자 메시야를 열망하여왔던 것입니다.

 

물론 이 메시야는 오늘의 마르코복음서가 말하듯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지개벽의 모습으로 오기도 하겠지만, 바울이 말한 대로 하느님의 은총을 사모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계속 맺어가는 관계를 통해서도 올수 있습니다.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는 가운데 길목에서 보낸 명상의 글을 읽는 중에 가슴 한편이 짜안해졌습니다.

 

[친구의 축의금]이란 글입니다.

 

나의 결혼식장에 절친한 친구가 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는데 아기를 등에 업은 친구의 아내가 대신 참석하여 눈물을 글썽이면서 축의금 만 삼천원과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다. "친구야! 나대신 아내가 간다. 가난한 내 아내의 눈동자에 내 모습도 함께 담아 보낸다. 하루를 벌어야지 하루를 먹고사는 리어카 사과 장사가 이 좋은날 너와 함께할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사과를 팔지 않으면 아기가 오늘밤 분유를 굶어야한다. 어제는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사과를 팔았다. 온종일 추위와 싸운 돈이 만삼천원이다. 친구야! 하지만 슬프지 않다. 나 지금 눈물을 글썽이며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마음만은 너무 기쁘다. 개밥 그릇에 떠있는 별이 돈보다 더 아름다운거라고 울먹이던 너의 얼굴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내 손에 사과 한 봉지를 들려 보낸다. 지난밤 노란 백열등 아래서 제일로 예쁜 놈들만 골라내었다. 신혼여행가서 먹어라. 친구야! 이 좋은날 너와 함께 할 수 없음을 마음 아파해다오.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 - 너의 친구가....."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사과 하나를 꺼냈다. 씻지도 않은 사과를 나는 우적 우적 먹어댔다. 왜 자꾸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다 떨어진 신발을 신은 친구 아내가 마음 아파 할텐데..... 멀리서도 나를 보고 있을 친구가 가슴 아파 할까봐 나는 이를 사려 물었다. 하지만 참아도 참아도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어깨를 출렁이며 울어버렸다. 사람들이 오가는 예식장 로비 한가운데 서서....

 

[사람다움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뭐가 필요한지에 대해 질문을 한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지금 이 신랑이 결혼식장에서 거의 통곡하다시피 울면서 한입 깨어 문 사과에 담긴 사람의 관계성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아닐까요?

 

흔히들 말하기를 삶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타율’ ‘자율’ ‘신율로 말했습니다. 타율적 인간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성공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유행에 민감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평균 이상의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있기에 거기에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악착같이 달려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순간 그제서야 삶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었는데 라며 후회와 참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자율적 인간은 세상의 가치기준이 아닌 자신이 세운 삶의 원칙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바라보는 삶이란 이 세상에 거하는 동안의 8,90년에 그칩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선하게 살려 애쓰고 적절히 자선도 베풀면서 살아가지만, 정의나 평화 그리고 지구적 생명같은 높은 가치에는 크게 관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에는 충실하지만, 사회적 의까지는 나아가지 않습니다. 신율적 인간은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본 높은 가치를 삶에 적용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 종교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삶 너머의 수천 년 인간의 과거 역사를 성찰하고 거기서 얻어진 지혜와 진리를 실천하되 수천 년 후에 살아갈 후손들을 상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서 고생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이 시공을 넘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에 타인이 당하는 고난과 아픔이 자신의 고난과 아픔으로 다가오는 사람입니다.

 

[경제인종주의의 남한]

 

지난 주 목요일 저녁 이 자리에는 지난 6년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목요일 저녁 아픔의 현장을 찾아다니는 촛불기도회 후원의 밤이 열렸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그간의 우리 사회의 아픔의 상징이었던 용산참사, 쌍용차, 기륭전자, 세월호학살 유가족, 두리방철거, 진보당국가내란조작사건 희생자 가족 여러분들이 함께 하여 서로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새 역사 창조를 위해 손잡고 나아가자고 노래하던 가슴 뭉쿨한 자리였습니다. 건강상, 여건상 여러분들이 여기에 일일이 다 함께 하지 못하지만, 향린교회가 이 운동에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항상 기도로 후원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는 예수의 말씀과 같이 지갑과 함께 하는 후원 기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박노자교수는 얼마 전 압구정동 한 부촌 아파트에서 음식물 던지기 등 주민으로부터 동물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잔신부름과 언어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결국 분신자살한 이만수열사를 언급하면서 같은 처지에 있는 전국 25만명의 경비노동자들이 당해야 하는 차별은 1960년대 미국에서 흑인들이 당해야 했던 일상적인 모욕과 하나 다를 바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들이 경제면에서는 2010년대를 살아가지만, 사람다움에서는 50년 전의 뒤떨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남한을 미국을 능가하는 모범적 신자유주의 국가로 규정하면서 남한사회는 현재 가난한 사람들을 별다른 인종으로 구별하여 차별하는 경제인종주의 국가로서 그 차별의 강도는 현재 도시 곳곳에서 폭동과 인권시위가 일어나고 있는 미국의 혈색인종주의를 능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남한 사회 또한 경찰력을 도시 곳곳에 상주하는 독재 권력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시민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로 읽혀집니다.

 

박노자교수는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비정규직의 66%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고객의 폭언에 시달리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며 이를 중산층의 대중적 기분풀이로 말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장난삼아 던진 돌이 개구리들에게는 치명상이 되듯이 중산층의 사람들 누군가가 기분풀이 삼아 무심코 던진 말들이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죽음으로 내몰리는 치명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고 요즘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연속극 미생은 이러한 부조리한 사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과 우리보다 낫다고 여겨지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을 한번 비교해보는 것도 우리가 어떻게 오늘의 부조리를 타개하고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산층과 남한 교회]

 

얼마 전 한 언론사가 조사한 <우리나라의 중산층 기준>입니다. 월 소득 500만원 이상, 아파트 30평 이상, 2,000 CC 이상의 중형차와 저축예금 1억원 이상 보유와 해외여행 1년에 한차례 이상이었습니다. 반면 옥스퍼드대학이 제시한 <영국의 중산층 기준>은 페어플레이를 할 것.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약자를 돕고 강자에 대응할 것. 불의, 불평등,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뭐가 달라도 확 다릅니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도 이와 비슷합니다. 페어플레이를 하고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돕고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고 탁자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하나 놓여있을 것.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은 퐁피두 대통령이 삶의 질이라는 글에서 제시한바 있는데, 역시 문화의 나라답게 영국이나 미국보다는 한 차원 높은 삶의 차원을 말합니다.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하며 남들과는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하고 공분’(사회적 분노)에 의연히 참여할 것과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입니다.

 

이상의 다른 기준들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는 일은 제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니 더 이상의 언급은 자제하겠습니다만, 다만 목사로서 하나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급성장했다는 기독교의 나라, 세계 최대 50대 교회 중 절반 이상이 있는 나라이니 이렇게 저급한 삶의 기준과 교회는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너희는 맘몬의 신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예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기준이니 대부분의 남한 교회는 사이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이런 수준 낮음과 남북의 분단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더 나아가 아기 예수를 기다린다는 말은 이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도 함께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항상 깨어 있으라]

 

대림절 첫 주일을 맞아 우리에게 주신 오늘의 성서말씀들은 민족 혹은 교회라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선포된 말씀들입니다. 이사야서는 자신들의 성읍들이 제국들의 침략에 의해 모조리 파괴된 후 그 처절한 아픔 가운데서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야훼 하느님께 자신들의 죄를 기억하지 마시고 대신 하느님의 백성들임을 기억하고 굽어 살펴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 또한 야훼 하느님을 향해 햇빛처럼 나타나달라고, 얼굴을 보여 달라고 그래서 넘어진 하느님의 백성들을 일으켜 세워달라고 계속 간구합니다. 환난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내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보낸 편지 서두에서 그리스도인들이란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에 깊은 확신을 갖고 모든 은총의 선물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받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는.’ 사람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말씀은 그날은 심판의 날로 천지가 진동하는 날임을 말합니다. 물론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표현들은 2천년전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고 지구는 네모 편편하여 저 멀리 바다 끝까지 가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하는 옛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한 말이기에 지금의 우리에게 말한다면 그 표현방식은 완연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포연소리를 들으며 자살폭탄자들과 미국의 드론비행기가 언제 어디서 불쑥 다가와 그 검은 연기를 내품을지 알 수 없는 시리아와 이락크 북부의 백성들, 아프리카의 수단 사람들, 장벽에 둘러싸여 자신의 동네를 벗어날 수 없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여차하면 군사적 충돌로 나아갈 수 있기에 애기봉 등탑 재건설을 반대하는 민통선의 주민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기가 언제일지 알 수 없으니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아기 예수가 오신다는 말은 땅의 거짓과 불의를 쳐부수기 위한 하느님을 대신하는 이가 오신다는 말이고, 아기 예수를 기다린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세상의 힘에 눌려 있었던 생명들이 다시금 살아나리라는 강한 희망을 회복한다는 말입니다. 대림절이란 세상을 넘어 오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날입니다. 귀한 분이 오면 집안을 깨끗이 하고 버릴 것은 버리듯이, 우리 마음과 영혼을 깨끗이 하고 욕망은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대문을 열어 놓고 귀한 손님이 보이면 버선발로 마당을 가로질러 문 밖으로 뛰어나가듯이 주님을 향해 손 활짝 벌리고 달려 나아가는 날입니다. 이 기다림은 째깍째깍 하는 시침과 분침을 바라보는 기다림이 아니라, 칠흑같이 어둔 밤에 새벽을 당기는 현존의 기다림입니다. 이제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예식을 통해 이러한 메시야의 현존 곧 십자가의 사랑과 채찍의 정의로움을 함께 회복하는 거룩한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해인 수녀의 [가난한 새의 기도]로 하늘뜻을 매듭짓겠습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필요한 만큼만 둥지를 틀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새처럼

당신의 하늘을 날게 해주십시오

 

가진 것 없어도

맑고 밝은 웃음으로

기쁨의 깃을 치며

오늘을 살게 해주십시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먼 길을 떠나는 철새의 당당함으로

텅 빈 하늘을 나는

고독과 자유를 맛보게 해주십시오

 

오직 사랑 하나로

눈물 속에도 기쁨이 넘쳐날

서원의 삶에

햇살로 넘쳐오는 축복

 

나의 선택은

가난을 위한 가난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가난이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도

넉넉할 수 있음이니

 

내 삶의 하늘에 떠다니는

흰 구름의 평화여

날마다 새가 되어

새로이 떠나려는 내게

더 이상

무게가 주는 슬픔은 없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