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기다림

이사 40:1-11; 시편 85:1-2,8-13; 벧후 3:8-15; 마르코 1:1-8

 

이 재 원 교수

향린교회 여러분, 대단히 반갑습니다.

 

무엇보다도 대림절의 둘째 주일 여러분과 함께 예배드리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랜 기간 동안 바깥에서 생활했고 가을과 겨울을 내나라 땅에서 보내는 것은 불행하게도 이십 몇 년만에 처음입니다. 10년은 뉴욕에서 공부하느라, 10년은 시카고에서 가르치느라 저쪽에 있다가 이번에 서울에서 가르치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향린교회와의 인연은 제가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일할 때부터 안병무 선생님과의 인연, 미국 생활동안 만났던 홍근수 목사님과 조헌정 목사님과의 소중한 인연, 그리고 제게 배웠던 학생들의 향린교회와의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향린교회를 이 서울 한가운데에서 볼 수 있는 정말 몇 안되는, 괜찮은 교회, 멋진 교회, 우리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의 말씀과 소명을 제대로 감당하려고 하는 귀한 교회로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저를 이렇게 불러 주셔서 분에 넘치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서니 왠지 두렵고 떨리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성서본문들과 함께 생각들을 하면서 저는 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보았습니다. 예수의 오심을 축하하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대림절기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주의 길을 생각하면서 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생각했던 것 보다 정말 무수히 많은 길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에 관한 성찰 또한 그 깊이와 폭이 다양하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 매일이 길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들 개인의 인생에서 걸어왔던 길, 지금 걸어가고 있는 길들을 생각합니다. 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각 가정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세월과 함께 살아온 길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나라/민족의 길, 이 세상()의 길, 그러면 하늘의 길도 함께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많은 개념들이 이 길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정의의 길, 평화의 길, 죄의 길, 사랑의 길, 역사의 길, 여자의 길, 남자의 길 등등 정말 많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 각자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길을 생각합니까?

 

길은 시간과 공간 개념을 내포하며 관계의 개념과도 이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길 자체가 물리적 공간이자, 이 길을 걷는 우리 인간들에 의해 길은 시간과 연결되며, 역사와 연결되게 된다. 길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가정과 가정을 연결하고,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고, 그리하여 더 나아가 하늘과 땅을 이어줍니다. 우리의 시간과 삶 자체가 길을 생각하지 않고는, 길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길에 둘러싸여, 매일 길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은 우리의 인생은 단순히 길가는 나그네길 인생이나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은 아닙니다.

 

예수의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이미 오신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오셨음에도 오심을 기다린다는 이 역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을 기다린 적이 있습니까? 저는 이 시간 을 기다리는 것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서의 본문은 마가복음서의 서문에 해당합니다. 마가복음서는 유대 땅에서 로마제국에 저항하여 싸운 이른바 유대전쟁이 일어난 그 무렵, 혹은 그 직후, 그러니까 대략 기원 70년경에 씌어졌는데, 팔레스틴 지역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믿던 공동체들을 향해 쓰여 진 복음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국과의 전쟁을 치루고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그 땅도 초토화된 그 혼란과 위기의 상황 한가운데서 마가복음서 저자는 예수의 이야기를 그 공동체를 향해 들려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역설적이기도 하고 또 멋진 선택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그들이 그리스도라 믿는 그 분의 삶, 그 분이 걸었던 길을 복음이라는 이야기로 풀어내었던 것입니다. 마가 공동체는 사실 예수가 이미 세상에 오셨음을 알았고, 십자가에 처형당했음을 알았고, 또 로마제국의 힘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하느님이 일으키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오신 예수를 이야기를 통해 다시 공동체 안에 오시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서라고도 하겠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로 볼 때, 마가 공동체는 예수의 이야기, 예수의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이르는 그의 길, 즉 십자가의 길을 하나의 전체적인 이야기로 함께 들음으로써 예수의 오심을 다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사실상 몇몇 조각낸 성서 본문들을 읽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전체 이야기를 우리가 함께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마가복음 본문, 즉 마가복음의 서문은 오시는 예수의 전체 이야기를 소개하고 그 길을 닦는 서문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 서문 안에서 예수의 길, 복음의 길을 예비하는 또 다른 길들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마가복음의 서문이 예수의 오심에 대해 어떤 식으로 준비하고 있는가 그 특징을 잠시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1절은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복음-마가복음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에게 이 말은 어떤 의미로 다가가고 받아들여졌을까? “복음”(euanglion)은 로마제국 황제의 승리의 소식을 알린다는 의미로 군사적 전투와 관련되어 사용하던 제국의 프로파간더 용어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로마제국의 승리와 평화와 관련된 정치적 선전 용어에 해당했다고 최근의 진보적 성서학자들이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마가복음서의 표제 (title)는 당시 1세기 로마제국의 복음과 예수의 복음을 대립시키는 전복적인 (subversive)/과감한 선언이자 정면적인 도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서의 시작은 이렇게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보내신 기름부음을 받은한 지도자의 도래를 알리는 것을 복음이라고 선포하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서의 좋은 소식은 칼과 창, 기마병, 보병으로 무장한 로마군대들이 성취하는 그런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복음이 표방하는 정치적 문화에 대한 일종의 (담론적) 선전포고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이사야 40:3) 이러한 복음의 선전포고는 이스라엘의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과 연결시켜졌는데, 사실상 이 부분은 출애굽기 23:20과 말라기 3:1a 와 이사야 40:3절을 절묘하게 엮은 히브리성서에 대한 해석(주석)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야훼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킨 출애굽의 길과 야훼가 오시는 길(말라기)이 다시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라는 이사야의 길과 만나, 그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에게로 연결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의 시작은 이스라엘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바로 출애굽으로부터 시작되는 야훼의 구원의 길들과 예언자들이 외친 길들의 연속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길과 길이 만나고 예언자와 예언자의 만남속에서 예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1) 하느님이 요한을 예수님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2) 하느님이 예수를 그의 제자들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너희들의 길을 닦을 것이다. 3) 하느님이 복음서저자를 마가공동체에 먼저 보낸다. 그가 (복음서를 씀으로써) 너희들의 길을 닦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이 예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등장하는 장소는 다름아닌 광야/사막입니다. 광야에서! 고립되고 주변부로 밀려나있는 자리. 예수가 사막에서 시험을 받는 자리이자 무리들을 먹이신 것을 기억한다. 마가복음에서 이 광야는 중심 (center)가 아닌 주변부 (margin)를 상징한다. 말라기에서는 예루살렘 성전과 앞의 구절들이 연결되었는가 하면, 마가복음에서는 야훼 하느님의 갱신의 활동이 센터로서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주변부인 광야/사막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심과 주변이라고 하는 장소/공간의 상징적 대립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에서 하나님의 갱신의 활동을 기대해야 할 주변부 장소는 과연 어디일까 우리는 물어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에 우리는 과연 어디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 유대 지방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라고 5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좀 과장된 표현이긴 해도, 여기에서 마가복음서 기자가 보여주는 그림은 시온을 향한 (의기양양한) 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이와는 정반대로 회개를 위해 사람들이 주변부로 향해 나아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길은 기존 체제의 중심부를 향하는 길이 아니라 배제되고 소외된 주변부를 향하는 길임을 상징합니다)

 

그리하여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요단강에서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마가복음은 (6절에서) 요한이 무엇을 입고 있는가에 관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우리는 여기서 열왕기하 18절은 엘리야를 묘사하기를, “털이 많고 가죽띠를 띠고 있었습니다이것은 털이 많고 가죽띠를 띠고 있었다는 엘리야를 상기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약을 따르지 않았던 이스라엘 왕들과 이방 지배세력들을 향해 거침없는 비판과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던, 저항의 예언자로 이스라엘 민중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엘리야를 곧바로 회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말하기를: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마가복음서에서 신발끈은 제자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예수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이 지녀야 할 꼭 필요한 것으로 나옵니다. 왜냐하면 길을 걸어가야 하니까요. 마가복음 68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주변 촌락으로 파송하면서, 옷도 두벌 갖지 말고 돈주머니도 갖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신발은 꼭 챙겨 가지고 가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가복음서에서 신발은 제자직을 상징하는 메타포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오심은 길의 준비로, 길의 끝이자 시작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혹 궁금해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에 오심, 이른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이 때, 오늘 우리의 성서본문인 마가복음에는 정작 그 아기를 그 어느 누구보다도 설레임으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기대하고 기다렸을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왜 없을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라고 마가복음서는 시작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여기서는 마가복음서의 ”(the Way)에 대한 관심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관심을 훨씬 능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서는 예수의 어머니나 다른 여성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는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예수가 고향 나사렛에 들렀을 때, 그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62-3절에서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여기서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로 불리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기가 쉽지만, 사실상 상당히 이례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아들, 혹은 남자들은 그 아버지의 이름에 연결되어 불리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로 불리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동네 이웃사람들의 목소리를 빌어서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나아가, 마가복음서를 보면 여성들이 당시 가부장 사회속에서 비하되기는 커녕 예수의 하느님 나라의 운동에 함께 참여한, 참 제자의 모습 (diakonia: service)을 감당한 사람들로 제자직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예수의 어머니, 예수를 뱃속에 잉태하고 있던 예수를 기다리던 엄마가 될 마리아에 조금 주목하고자 합니다. 누가복음에 있는 Magnificat 즉 마리아찬가라고 불리는 노래를 노래한 마리아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내 마음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영혼이 내 구주 하느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내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 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주께서 자비를 기억하셔서,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뱃속에 잉태하고 있는 마리아는 과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왜, 그리고 어떤 식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아이를 잉태하고 있는 젊은 여성의 경험에서 마리아의 찬가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여인은 그 기다림을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2성서 학자들에 따를 것 같으면, 마리아의 찬가는 문학적 작품들 가운데서도 상당히 혁명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꼽으며, 여기에는 세 가지 독립된 혁명, 즉 도덕적 혁명 (51), 사회적 혁명 (52), 그리고 경제적 혁명 (53)을 다함께 내포하고 하고 있는 소중한 노래로 간주한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보잘 것 없는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에 마음과 영혼을 다해 주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한다. 바로 이어서 엄청난 혁명적 전환 (reversal)을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전투에서의 승리의 노래 같기도 하다. 아기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해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여인에게서 세상을 구할 메시야를 낳게 해서 일까? 그런 의미에서 여종의 비천함 (tapeinos)를 말하는 걸까? 피츠마이어 (Fitzmyer) 등의 누가 복음 학자들은 여기서 마리아의 비천함을 가리키는 희랍어의 tapeinos를 수치/모멸에 해당하는 humilation을 가리킨다는 점을 주목하면서도 여기서 마리아의 비천한 신분을 뜻하는 것으로 흔히 해석합니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쟈벳의 비천함은 다름 아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의 상태였다. 그러한 비천함을 하느님께서 돌보셔서 세례요한을 낳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리아도 불임이 문제였나?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임신이 문제였다. 그것도 "수상한 임신이 문제였다. 요즈음 말로 하면 출생의 비밀이라고 할까요?...바로 그러한 수상한 잉태를 돌보신 주이기에 마리아는 여성으로서 자신이 겪은 경험에 비추어서 하느님의 돌보시는 자비를 향해 찬가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찬가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행위의 주요 내용으로 복음서들에 자주 등장하는 하느님 나라의 주요 모티프의 하나인 처음된 자나중된 자가 뒤바뀌는 하느님 나라의 역전(reversal)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역전과 경제적 역전의 드라마를 펼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사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 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이어서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 라는 경제 민주주의에 해당하는 역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여성으로서 자신이 겪었던 고난과 역경 한가운데서 하느님이 그녀의 편에 서주셨다는 믿음으로부터 다른 비천한 사람들, 즉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지치고 시들은 자들,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 그래서 더더욱 심신이 갈기갈기 찢겨 하느님밖에는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실제로 자신의 입으로 누가복음의 노래를 직접 불렀는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마리아찬가의 기원을 유대 마카비전쟁 당시에 나온 노래라고 보기도 또는 유대의 경건의 전통에 기인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상당히 초기의 전승 가운데 하나인 마리아 찬가는 정치적으로 힘없고, 사회적으로 천대멸시받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지친 삶속에서 노래했던 영적인 희망의 노래이자 희망하는 영성을 대변한다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그 노래 속에서 마리아는 가난한 자들의 예언자로서 영성과 정의가 만나는 하늘 뜻을 펼칩니다. 그녀는 가난한 자들의 희망, 멸시받았던 여인들의 희망, 로마제국의 식민지하에 예속의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의 희망이자, 놀라운 것은 그 메시아적 희망자체를 자신의 몸속에 잉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다른 모습으로 예수의 길을, 복음의 길을 예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오심을 생각하고 기다릴 때, 마가복음서는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모습을 이스라엘의 역사적 예언자들과 함께, 하느님이 예수를 통해서 하실 일을 준비하심을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시편의 한 시인은 오늘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본다.

주께서 좋은 것을 내려 주시니,

우리의 땅이 산물은 낸다.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께서 가실 길을 닦을 것이다.

 

이 멋있고 올곧고 또 아름다운 시는 읽을 때마다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 때로는 그리움에, 그 기다림에 눈물 흘리게 만듭니다. 최근 이명박근혜 정권 들어서서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께서 가실 길을 닦을 그런 정의를 우리는 불행히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정의는 4대강 아래, 그리고 진실은 진도바다에 침몰한 시대입니다. 오히려,

 

욕심(욕망)과 거짓이 만나고 불의(부정)와 분열이 입을 맞추고 진실이 바다로 가라앉고, 불의가 땅에서 날뛰고 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다시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는, 그 길, 주의 길을 기다리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오신 예수를 다시 기억하고 다시 기다리는 대림(오심)이자 재림(다시 오심)인 것이지요.

 

지금 우리 사회에는 교만하게 온갖 조작질로 국민/민중을 우롱하면서 오랫동안 권좌에 앉아 있으리라 망령된 꿈을 꾸는 자들이 있습니다. 비천한 자들을 사람대접하지 않고 주린 사람들의 빈 호주머니에 남아있는 것까지 털어내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부한 사람들을 더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처럼 담대하게 외쳐야 합니다. 그런 망령된 꿈은 꾸지도 말라고요. 오늘의 또 다른 성서본문인 베드로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 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 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 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을 따라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제 마가복음서로 돌아가서 그 마지막 부분을 잠시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예수의 남자 제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지켰던 여인들이 본 것은 빈무덤이었습니다. 이 빈무덤에서 여인들이 전해들은 예수의 부활의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마가 16:7):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십시오. 그는 그들보다 앞서서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십시오.” 저는 마가복음서의 마지막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선포하고 전승한 이야기들 가운데 압권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마가복음서는 길에서 시작하여 길로 끝나고 있습니다. 아니 그 길로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길, 복음의 길은 로마제국과 유대 종교지배자들이 십자가처형으로 끊고 막을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의 우리들에게 까지 전해졌고 또 열려있는 길인 것입니다. 그 길은 당시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고 하는 지배의 중심부의 길이 아니라, 바로 지배를 당하고 있던 주변부인 갈릴리와 함께 하는 길인 것입니다. 예수의 길은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갈릴리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보다 앞서가는 길이 바로 갈릴리로 향한 길이기에 우리가 예수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길도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속의 갈릴리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92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처음 사람들을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기독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the Way)라고 부른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향린의 여러분, 이번 대림절은 바로 그러한 길, 주의 길, 곧 사랑과 진실의 길, 정의와 평화의 길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기다림과 함께 그 길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마가복음서는 서두로 그 시작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마가복음서에서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그 길을 시작하십니다. 기다림은 감상적으로 마냥 기다리는 수동성이 아닙니다. , 그 기다림은 우리가 예수의 길에 함께 따라 나섬으로써 주의 날을 앞당기는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시인 고은의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습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꽃들~~” 올라가기 위해 무한경쟁으로 서로 싸워 이겨야만 사람취급, 나라취급을 받는 이 시대에, 우리가 함께 내려가고자 할 때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 자주와 통일의 더 많은 꽃들을 함께 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향린 공동체의 여러분! 기다림은 깨어남입니다. 깨어나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기다림 자체가 실천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신발끈을 붙들어 단단히 동여맵시다.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적인 비정상의 한파로 무감각해지고 얼어붙고 있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일깨우고 우리 모두 신발끈을 다시 한 번 꽉 동여매고 주의 길, 그 기다림의 길로 나아가기를 간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대림이요 재림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 길을 늘 함께 가고자 하는 향린 공동체에 속한 모든 주의 제자들을 하느님께서 지금보다 더욱 강하게 붙잡아 주시기를, 함께 길을 걸었던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시고 이름 없는 한 여성에게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던,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저들보다 먼저 앞서서 갈릴리로 가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