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1221() 향린교회 하늘뜻펴기

 

“2014, 한국개신교의 잘못

(사무엘하 7:1~11/16, 로마서 16:25~27, 루가 1:47~55)

 

고상균

 

각자 삶의 자리에서 일주일동안 얼마나 피곤하셨습니까? 게다가 새교우 가입식과 특별연주도 있는 오늘 예배가 무척 길어질 수 있겠네요? 그런 여러분의 염려하는 마음을 위해 오늘은 단 3분 만에 하늘뜻펴기를 마치고 예배를 1150분 이전에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

한 해의 마무리와 새해의 시작이 만나가는 요즘, 지난 시간들을 생각해 보니 올 한해는 유독 좀 전과 같이 얄팍한 사탕발림으로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런 자들에게 돈과 권력까지 쥐어져 있다 보니 그들의 혹세무민은 멀쩡히 살아있는 강들을 되살릴 수 있다 하면서 막대한 국민의 돈을 쏟아 붓곤, 오히려 질식시켜버리기도 하고, 대통령만 되면 국민통합과 쌍용자동차의 노동자 해직 같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겠다고 호언장담 해놓곤 26번째 사망자 발생과 칼바람 속 굴뚝 고공농성이 수일을 이어가도록 방치하고 있으며....... 아니 방치는 아니군요,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려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적극적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관련자 모두를 죽이는 것으로 약속한 문제해결을 이루려는 듯 여겨지기도 하네요. 여론이 불리하다 여겨질 때는 카메라 앞에서 유족 대역까지 세워 하시기만 하면 언제든 만나겠다!’ 조문 쇼를 하더니만, 해가 바뀌어가는 지금까지 진상규명은커녕 형식적인 유가족 면담도 거부하는 현실은 또 어떻습니까?

급기야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란음모라는 말로 포장하고, 인터넷만 검색해도 다 찾을 수 있는 정도의 내용을 북과 내통했다라고 규정하여, 멀쩡한 정당하나를 갑자기 공중 분해시켜 버리고 마는 대한민국의 지금 모습은 그야말로 야만과 저열함그 자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듣기 좋은 말로 군중을 현혹한 후에, 필요하면 언제든 힘으로 무너뜨려버리는 권력의 모습이 안타깝게도 어디 요즘 세상의 일이기만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만나는 본문에서도 그와 같은 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화려한 거짓말, 허무한 결말)

 

네 왕조, 네 나라는 내 앞에서 길이 뻗어 나갈 것이며 네 왕위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사무엘하 28:2~4)

 

한 마디로 유다왕국은 다윗가문을 중심으로 영원히 번영하라!’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오늘의 1성서 본문은 유대인들의 영원한 영웅, 다윗의 집권 초기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신께서 사방대적들을 물리쳐주셔서 바야흐로 전성기를 구가할 일만 남은 이야기 속 다윗은 어찌나 엄마친구아들같은지, 주님의 궤가 천막에 거주하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성전건축을 결심하려합니다. 이때 그와 같은 다윗의 마음을 알아차린 신께서는 예언자 나단을 통해 다음과 같은 신탁을 내립니다.

내가 집 지어 줄 사람이 없어 이러고 있는 줄 알았니? 내 집은 너의 후손에게 부탁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라!’ 신과 인간이 나누고 있는 마음이 참 따뜻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어지는 성서의 증언과 역사자료를 통해 다윗왕가와 유다는 훗날 바빌로니아에 멸망당하여 영원히 무궁할 것이라는 신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은 그토록 자신에게 헌신적인 이에게 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던 것일까요? 신도 이 시대 청와대에 앉아있는 수첩여왕이나, 하늘뜻펴기 처음의 저처럼 감언이설과 호언장담을 남발하는 뻥쟁이였던 것일까요?

우리는 이 마음 따뜻한 거짓말의 진실과 만날 가능성을 전 단락인 6장에서 발견 할 수 있는데요, 하느님을 그토록 사랑한다던 다윗은 이야기 속에서 정작 법궤의 운반과정에서 인명사고가 발생하자, 불길하다며 다른 사람의 집에 석 달 간 방치해 버립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블레셋의 가드출신, 다시 말해 적대국가 태생 이방인으로, 이야기 속에서 그가 처했을 상황을 암시하는 듯, 이름에 종 혹은 노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오베데돔에게 그 모든 책임을 떠넘겨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궤를 외면했던 다윗이 다시 그 법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죽을 줄 알았던 오베데돔과 그의 가족이 복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난 이후입니다. 재앙의 물건이 복덩어리로 변(?)하자 다윗은 얼씨구나 빼앗아오면서 좋아 바지가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이에 대해 체통을 지키라한 마디 한 조강지처 미갈을 싸늘하게 몰아세우는 다윗, 신은 너의 아버지 사울을 버리고 나를 택하셨다!’

시조는 거의 예외 없이 신의 후손이라거나,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묘사되는 각국의 고대 이야기 전개 방식과 달리, ‘우리 조상은 떠돌이라는 신명기 26장의 표현과 같이, 아무리 귀한 존재라도 전례이야기 중 포함된 허물을 그대로 전하고 기술했던 히브리인들의 전통 상, 그들의 절대영웅 다윗의 실책전승이 여과 없이 그들의 역사책에 기술되어 있는 것은 참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더군다나 왕과 군주제를 일종의 필요악으로 인식했던 신명기계 사가들의 입장에서 다윗은 흠이 많지만 참 열심히 했던 군주정도의 평가를 받는 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에 비해 너무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찬가일색의 오늘본문인데요, 7장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앞에서 이야기 나눈 선행6장과 후행 8장이 81절의 그 뒤 다윗은 블레셋을 쳐서 굴복시키고라는 연결구를 통해 잘 이어지는 하나의 역사이야기임을 알 수 있으며, 7장은 가운데 불쑥 들어와 있는 형국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오늘의 본문인 7장은 전래되는 이야기에 대해 유다왕가 중심이데올로기화한 표현이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다윗을 하느님의 마음에 합한 자둔갑시키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백성들은 유다의 왕권이 하늘이 내려준 것으로 믿게 되었을 것이고, 이는 민에 의한 혁명으로 정권이 창출되곤 했던 북 이스라엘에 비해 한 가문의 왕가가 끝까지 유지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이 부여한 권력은 영원하다는 선언은 결국 영원히 지켜지진 않았지만, 끝나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주는 데는 성공했던 것이지요. 사무엘과 열왕기로 이어지는 히브리사서와는 또 다른 역사저작인 역대기는 다윗왕가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더욱 하늘높이 외치는 가운데 한 발 더 나아가 무서운 법궤를 지켜야했던 이방인 노예 오베데돔을 성전 법궤 앞에서 성가를 연주하는 레위 제사장으로 탈바꿈시켜 놓기까지 합니다(대상 1521). 그렇게 백성들을 신의 이름으로 지배했던 왕조중심의 유다는 그들의 백성을 평안히 지켜주었을까요? 히브리 역사서의 마지막인 열왕기하에 등장하는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키야는 바빌로니아 대군의 침공상황에서 끝까지 백성을 지켜야 할 군대 전체를 자신의 탈출로를 확보하는데 이용하다가 끝내 눈이 뽑힌 채 끌려가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신의 보증, 영원한 국왕이 만세도록 안녕을 줄 것이라는 그 약속은 그렇게 결국 화려하고 허무한 거짓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은 왕가와 권력자들의 농간에 당한 채 영원히 오리무중을 헤매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그렇게 스려져 버리고 만 것일까요?

 

(그들의 거짓을 넘어 진리를 실천해 갑시다!)

 

오늘의 두 번째 본문인 로마서는 바울의 친필 서신 중 가장 후대에 쓰여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이에 따라 로마서에는 평생에 걸친 바울의 삶과 신학, 그리고 사상의 정수가 녹아들어있습니다. 숱한 위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가졌던 선교적 소망을 멈춤 없이 수행해갔던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신앙 공동체들에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한 지체입니다.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유다인이 당한 다음 이방인들도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유다인이나 이방인 모두 선한 일을 함께 도모한다면 모두 영광과 명예, 그리고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니까요’ (로마서 28~11절 요약)

 

이처럼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유대교 신앙에서 강조했던 우리끼리 행복은 바울과 초기 예수 공동체에 의해 함께하는 기쁨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더 이상 이방인 오베데돔과 같은 이가 무시무시한 짐을 혼자 떠안아야 하는 일은 줄어들 수 있었겠습니다. 또 억지로 레위가 되어야 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한편 현실적으로 숱하게 만나는 어려움에 대해 외면하지 않았던 바울은 자신의 선교동역공동체 로마교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통치자들의 압제가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그들이 세금을 요구하면 내어 줍시다. 그리고 그들에게 모함당할 행동을 조심합시다. 세월이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절대 잊지 맙시다. 영원할 것 같은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 그날을 준비하며 전신을 무장합시다!’ (로마서13장 요약)

 

이렇게 언제나 신의 이름으로 지배를 정당화했던 권력 잡은 이들에 대해 바울과 초대교회공동체는 소영웅주의나 작은 의협심으로 분을 발하는 것을 자제하며, 차분하게 다음의 희망을 만들어나갈 것을 다짐했던 것입니다. 왕권의 보증수표는 신이 발행한다는 권력의 감언이설에 대해 신앙대중은 그렇게 다음의 반격을 준비해 갔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와 같은 그들의 희망을 진리라 규정하는 바울은 서신의 마지막, 오늘의 두 번째 본문을 통해 마침내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 두셨던 그 심오한 진리를 나타내 보여 주심으로써 여러분의 믿음을 굳세게 해 주십니다. (로마서1625)

 

예수의 가르침을 신앙공동체를 통해 구현하려던 바울은 본인에게, 때로 예수신앙인에 대한 로마추방령으로 대표되는 박해와 위기상황 앞에서 신앙대중의 깨우침을 통해 신앙을 더욱 굳세게 하여 스스로 다음의 희망이 될 것을 간절히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당시 예수공동체가 진리라고 신앙 고백했던 예수의 가르침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신의 약속은 백성들에게서 영원히 실현된다!)

 

오늘의 복음서인 루가복음 본문은 자신을 통해 해방자가 탄생할 것이라는 신탁을 접한 마리아가 부르는 찬가로 구성된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자신을 비천한 신세서술하는 시인은 내용을 통해 몹시 당파적인 하느님, 즉 권세 있는 이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부자를 빈털터리로 만드는 반면, 굶주린 사람은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주시는 신을 노래합니다. 사실 당파적이라면 왕권을 신이 주켜준다는 지배자들의 논리만큼 당파적인 것은 없겠지요. 지금 이 시대 권력과 자본이 국민 혹은 근로자라 할 때, 그에 대해 비판적인 일체의 대상들은 오간데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노래 어디에서도 무슨 왕가가 영원할 것이라거나, 권력을 신이 지켜준다는 등의 내용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결국 오늘의 복음서는 유대교가 믿는, 아니 유대교를 그리 몰고 갔던 종교권력자들의 권력신수(權力神授) 이데올로기를 신의 이름으로 해체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신은 일개 왕가, 특정 권력을 비호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이 선언하신 약속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만큼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실현된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당파적 하느님을 신앙 고백했던 루가공동체는 마침내 유대교 핵심의 왕조중심 이데올로기를 향해 혁명적 외침을 날립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루가복음 155)

 

지금까지 권력이 전용하던 신의 이름을 백성에게, 아울러 힘 가진 이들이 자신들의 연원으로 거들먹거렸을 조상들의 이름을 자신들에게, 끝으로 떵떵거리는 자들이 자신들이 지닌 부귀영화의 수명을 자랑할 때 말했을 영원함이라는 단어를 밥도 굶던 본인들에게 가져오는 이 놀라운 전복과 도발....... 1성서를 구성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화하려했던 이들의 음모는 이처럼 예수를 기억하고,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 의해 폭로되고 해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저항과 변혁의 신앙전통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4, 한국 개신교의 잘못)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오늘은 주님의 오심을 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대림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기다림의 이란 곧 고대하던 대상과의 만남을 의미할 것인데, 우리들 삶의 자리는 아직 그와 같은 만남의 기운을 발견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늘뜻펴기의 서두에서 나누었던 올 한해 한국사회의 슬픔들을 생각할 때 더욱 그리하며, 불행히도 개신교가 그 사건과 사건들에 저항과 변혁의 중심이 되기는커녕 동조를 넘어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점에서 더욱 더 그리 합니다.

함께 생각해 볼까요? 앞서 언급했던 4대강 파괴의 주범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신이 다니던 교회 마당에서 오랫동안 성실히 주차안내 봉사를 했고, 서울시를 들어 하느님께 바치겠다던 개신교 장로입니다. 불통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박근혜 대통령 또한 개신교 우익정치세력들에 의해 든든히 권좌가 지켜지고 있으며, 주일아침 웬만한 대형교회마다 목소리 높여 그녀를 하느님께서 지켜주시고, 만백성이 순종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정권에서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는 쌍차, 정보개발원, 씨엔앰, SK 비정규직 노조 등의 노동자들은 모두 그들의 눈에는 불온세력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올 전반기 대다수 국민을 쓴 웃음 짓게 했던 문창극 국무총리후보는 또 어떻습니까?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니, 일제강점, 남북 분단 등의 아픔도 모두 하느님께서 계획한 것이다라는 희대의 강연이 세상이 알려지자, ‘그건 기독교 신앙고백으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며 사임을 표명하는 자리에서도 억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유사시기 신촌에서 진행되었던 LGBT 축제를 물리력으로 막아섰던 이들 역시 자신들을 신실한 기독교인들이라 칭하면서, 진행되는 내내 통성기도와 모욕적인 저주를 신의 이름으로 소리높이 외쳤습니다.

2014년을 이전과 구분하는 사건인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개신교는 매우 일관된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지난 520일 한기총 임원회의에서 조광작 부회장은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것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려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는 이른바 개신교 목사의 불국사 홍보발언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후, ‘정문준 아들의 미개한 국민발언은 틀린 말이 아니다. 총리에게 달려들어 물을 뿌리는 세월호 유가족을 봐라. 인정사정이 없지 않은가?’라는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의 강연이 도마에 올랐고, 이른바 빤스 목사로 유명한 전광훈의 대통령께서 우시는데 공감하지 않는 백성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죽은 사람 추모는 집구석에서 해야지 왜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란을 벌이냐? 종북 빨갱이들만 좋아 날뛴다는 부흥회 설교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이제 한국 개신교 목사는 먹사를 넘어 인터넷 상에서 쓰레기와 합성된 신조어 먹레기로 불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난 청운동과 지금의 광화문 광장 앞에서 유가족들에게 회개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도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임을 자랑스레 언급하는 개신교인들입니다. 이에 비하면 최근 땅콩목적 비행기납치사건으로 정의할 수 있는 대한항공회항사태의 주범 조현아씨에 대해서도 여론이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 그녀는 충분히 사과를 했다. 계속 문제 삼고 있는 자들은 종북 세력이다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성명서의 주체인 대한민국여성단체연합의 최대 지분 중 하나가 한기총 여성위원회인 것은 별로 눈에 띄지도 않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남의 일이라 하시겠습니까? 이 저급하고 형편없는 행동들은 모두 다른 교회의, 보수적 개신교인들의 행태일 뿐, 우리 향린공동체, 그리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 하시겠습니까? 적어도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원이라 고백하는 세례문답 등 각종의 교회고백에 동의한다면, 그 이들의 잘못은 곧 한 몸 된 우리들의 잘못이며, 우리들이 저항과 변혁의 신앙실천에 충실하지 못했던 잘못이라 감히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2014, 올 해 한국의 개신교가 무수히 저지른 잘못 가운데 우리도 참여했던 것이며, 이에 우리는 자복과 반성의 마음으로 회개하고 이를 뉘우치며, 극복하는 시간으로의 새해를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여전히 여기저기에서는 자칫 정신을 놓고 좆아 가기에 충분한 이야기들이 넘쳐납니다. 그리고 약한 이들에게 가해지는 어려움은 더욱 가중됩니다. 불꽃이 꺼져가는 듯 합니다. 우리 이러한 때에, 이와 같은 세상 한 중간으로 오시는 예수를 기다리며, 그렇게 오실 예수를 마중하러 나아갑시다. 저는 그와 같은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분이 참 좋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 자리를 위해 기도와 염려로 마음모아 주시는 교우 여러분들이 있어 정말 좋습니다. 아울러 이와 같이 귀한 공동체에 새롭게 함께 해주시는, 오늘 가입식에 참여하시는 새교우들 같은 분들이 계셔서 무척 기쁩니다. 이렇게 비록 지금의 삶의 자리는 어렵고 힘들지만, 함께 기뻐하며 서로의 희망이 되어 줍시다. 비천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이, 주린 이에게 따스한 밥 한 그릇이 되어 주시는 이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은 바로 이런 날입니다. 우리 함께 침묵 가운데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고 새로운 실천을 다짐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곧 인간으로 오실 신의 온기를 느끼며,

참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아울러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나와 너, 우리와 이웃, 교회와 교회, 그리고 공동체와 사회와의 연결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식하며, 저와 여러분 모두가

저이들의 잘못에 마음 아파하며

나와 우리의 실천으로 보듬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그렇게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주님을 마중 나갑시다.

아니, 세상에 오신 숱한 현장의 주님들이 외롭지 않도록 함께합시다.

 

공동체의 축복기도 나누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