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 조사령과 구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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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

 

여러분 오늘 우리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뭐라고 찬송했습니까? 구세주가 나셨네. 구세주는 풀이하면 세상을 구원하는 주님이라는 뜻인데, 여러분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흔히 구원을 개인적으로 이해를 해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라는 말은 자주 쓰지만,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이라는 의미로는 잘 쓰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아기 예수 탄생을 기뻐하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합니다. 내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이 아니지요. 세상 죄입니다. 저는 성서의 이런 구절들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세상을 구원하면 우리가 세상 안에 거하니까 함께 구원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이 순서를 뒤바꾸게 되면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미래의 시간에 저 높은 하늘 공간에서 펼쳐지는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지금 여기입니다. 루가복음 17장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묻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그러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 혹은 저기가 아닌 우리 가운데 이미 임해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의 시간이 아닙니다. 저 하늘 공간 어딘가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가 죽은 후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옵시며이렇게 가르치셨나요? 아니지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옵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곧 하느님 나라의 현재성과 세계성입니다.

 

[국가권력 저항예수]

 

사실 가장 먼저 쓰인 마르코복음서는 아기 예수의 탄생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삶과 그리고 제자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그의 관심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전연 말이 없습니다. 예수의 시작에 대해 그냥 불쑥 내던진 말이 세례 요한이 국가권력에 의해 옥에 갇히자 갈릴리에 나타나셔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것과는 달리 사람들이 사는 세상 한 가운데 그것도 당시 헤롯 정부가 가장 불온시 여기는 갈릴리에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곧 마르코는 세상의 부당한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예수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코보다 20여년 늦게 복음서를 쓰기 시작한 루가나 마태는 예수의 탄생 얘기로부터 시작합니다. 그건 이미 저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예수의 출신 배경에 대해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루가는 예수의 탄생과 관련하여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무렵에이 네 마디 말을 제대로 이해해야 예수 탄생의 비밀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 무렵이란곧 앞장의 얘기가 진행되던 그 무렵을 두고 하는 말인데, 이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례 요한의 어머니가 함께 만난 이야기입니다. 그냥 만난게 압니다. 한 여인은 이미 나이 많아 아기를 밸 수 없었다고 여겨졌던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고 다른 한 여인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로서 그는 남자를 알기 전이었습니다. 두 여인 모두 신비에 싸인 수태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루가에게 있어 관심은 이성과 과학에 어긋나는 수태 자체가 관심이 아니라, 이 수태가 가진 그 시대의 의미가 무엇이냐였습니다.

 

이 시대의 의미를 마리아 찬가를 통해 말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셔서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신다.’는 것이고 세례 요한의 아버지 제사장 즈가리야 찬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또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다.’ 이 말씀들은 오늘 여기 이 땅에서 펼쳐지는 정치사회 경제 현실에 관한 말씀입니다. ‘앞으로 더 잘 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의 세상 질서가 뒤집혀진다는 말씀입니다. 권세 있는 자들이 자리에서 쫓겨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없다고 멸시당하고 약자로 조롱받던 사람들이 높아질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돈과 힘에 기초한 세상 질서가 무너지고 하늘에 뜻에 의한 정의의 질서가 새롭게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얘기가 시작하는 그 무렵이란곧 새로운 질서의 도래가 임박한 순간 시계추를 따라 평면으로 진행해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닌 수직으로 시공의 차원을 넘어 임하는 카이로서의 시간, 때의 임박함입니다.

 

[세상 권력자를 사용하시는 야훼 하느님]

 

바로 그 무렵에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립니다. 호구 조사령이란 인구의 수를 헤아린다는 말이지만, 그건 군대와 세금 징수를 위한 곧 부강한 나라가 목적입니다만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자식을 군대에 내보내고 수확을 공물로 바쳐야 하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다윗 왕이 호구조사를 함으로 인해 하느님의 심판이 내렸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로마 황제의 호구 조사령이란 야훼 하느님의 통치에 대한 인간 권력의 도전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예수의 부모들은 갈릴리 나자렛에서 살고 있었지만, 황제의 명령에 따라 선조들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고 거기서 예수를 낳게 되는데, 이는 곧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라는 오래된 예언을 성취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루가는 독자로 하여금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 참으로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인가? 아니면 야훼 하느님인가? 결국 겉으로는 로마 황제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지만, 그러나 이루어진 것은 하느님의 역사였다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난제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왜 마리아는 하필이면 가축들의 우리에서 몸을 풀어야 했고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 아기 예수는 말구유에 누어야 하는가? 루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약자를 외면하는 차가운 현실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말구유, 곧 말밥통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세상의 낮은 곳, 가장 누추한 곳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은 상징성은 없는 것인가? 이 단어 안에 마리아와 즈가리야의 찬가에서 들려졌던 권세 있는 자들이 내침을 당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높임을 받게 되는 그런 뒤집힘의 반전은 없는 것인가?

 

대부분 목사님들의 설교는 여관에 머무를 방이 없었다는 구절에 관심합니다. 그래서 성탄절에 자선을 강조합니다. 이것도 좋은 것입니다.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에게 우리 좀 나누자 매우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탄절이 지나고 나면 예전 그대로입니다. 인면수심, 성탄절에는 인간의 얼굴이지만, 또 지나고 나면 약육강식의 동물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권력이란 합법을 가장한 불법]

 

용산 참사 이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지난 4년동안 우리 사회를 가장 뜨겁게 달구었던 사회적 관심은 쌍용차해고자 문제였습니다. 거기에는 단순히 노동자의 정리해고라는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닌, 돈이 되는 일이라면 수십 년간 회사를 위해 몸 바쳐온 노동자 수천 명을 두들겨 패고 내쫓아서 그래서 그중 수십 명쯤 죽음으로 내몰아도 좋다고 하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자본주의의 생명 경시와 그런 반생명을 합법화시키고 있는 재벌에 휘둘리고 있는 법조계와 정부입니다.

 

그 아버지 때도 그러했지만, 박근혜정권 들어 모든 불의한 일들이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하고 있습니다. 대법원이 정당했다고 했으니 해고 법대로 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유신헌법도 합법이었습니다. 3선 개헌도 합법이었습니다. 그 법에 따라 저항하는 모든 사람들, 문익환목사 안병무선생 잡아 가둔 것 모두 합법이었습니다. 법으로 말하면 히틀러가 600만 유대인 학살도 합법이고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폐하고 나라를 점령한 것도 합법입니다. 그것도 그냥 합법이 아닙니다. 이름도 당당한 을사보호조약이었습니다. 예 지금도 권력자들이 가장 즐겨 쓰는 단어는 여전합니다. 사회질서 유지가 목적이고 국민생명 보호가 목적이고, 나라 안보가 목적이고, 자유민주주의의 수호가 목적이랍니다. 그런데 결과는 민생위협이고 국민주권 박탈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사람들]

 

최근 쌍용차 해고자 두 명이 또 다시 70미터 굴뚝에 다시 올랐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르기까지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오전 6시께, 몇몇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런데 전화기를 들자 설움이 북받쳤다. 굴뚝을 감싸고도는 무겁고 차가운 바람이 서러웠다. 울기도 하고 하소연도 했다. 조금 더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생각했다. 공장 굴뚝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두려움에 떨었는지 말하고 싶었다. 동료들이 픽픽 쓰러져 죽어나갈 때 우리는 또 얼마나 무력했는지 말하고 싶었다. 굴뚝에 오르는 순간 백척간두 진일보의 마음으로 올랐다는 얘길 하고 싶었고, 반드시 승리해서 내려가겠다는 말을 우선 하려고 했는데,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도와주십시오.’ 이 한마디였다. 이 말을 이곳에서 한다는 것이 서럽고 비참했다.

 

올해 2월 달 저희 교회 제직수련회 강사로 오셨던 동국대 홍윤기교수는 헌재의 진보다 해산 판결 소식을 듣고 이런 글을 썼습니다.

 

[옛 유신의 그림자]

 

통합진보당은 해산한다는 박한철 소장의 주문이 낭독되자 깜박했던 나의 의식은 돌연 42년 전인 19721017일 아침으로 날아갔다. 햇빛 찬란했던 그날 방송에 낭독되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이른바 ‘10·17 특별조치“19721017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로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제3공화국을 일거에 파괴한 이런 반헌법 조치를 발표한 동기는 딱 한 가지였다. , 국회를 해산하고 그 업무를 대신하는 비상국무회의는 “19721027일까지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만든다는 것뿐이었다. 당시 청년 검사로서 지금 대통령 비서실장인 김기춘의 주도로 작성된 유신헌법은 19791026일 박정희 대통령 피격 때까지 공포통치의 명분을 제공했다. 나는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을 과거 유신통치의 부활로 보지 않으려고 개인적으로 무진 애를 썼다. 체육관에서 투표 흉내만 했던 선친과 달리 그는 합법적·합헌적 선거로 정당하게 당선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국정원, 기무사 등 관권 개입으로 이루어진 댓글 공작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선거 공약을 하나하나 폐기하다가, 측근과 관련된 온갖 추문이 터지는 과정에서 소통을 거부하고 청와대에 들어앉아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그 모습에서 유신전체주의의 옛 그림자가 서서히 덮쳐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19) 아침, “통합진보당을 해산한다는 박한철 소장의 음성에 국회를 해산한다42년 전의 그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포개졌다. 진보당 해산에 찬성한 재판관 8명은 자신들의 판결이 이 국가와 지구사회의 시민들에게, 그리고 미래 대한민국과 인류의 역사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 과연 제대로 생각해 보았을까?

 

2014년 성탄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들의 마음은 어둡기 짝이 없습니다. 성탄의 상징인 희망, 기쁨, 사랑의 실체는 오늘 여기 어디에 존재하는가? 억지 웃음이라는 말이 있듯이 억지로라도 웃어야만 하는 것이고 억지로라도 희망을 품어야 하는 것인가?

 

로마 황제의 명령에 의해 마구간에서 태어나고 말구유에 그 몸을 뉘어야 했던 아기 예수를 향해 하늘은 슬피 울지 않았습니다. 대신 성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때에 갑자기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그 천사와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그리고 목자들을 향해 말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 경배하도록 말합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 밖 들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던 그 시대에 가장 낮은 계층의 목자들이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합니다.

 

[말구유에 담긴 변혁 은총]

 

여기서 말구유는 낮은 곳의 상징을 넘어 새로운 질서를 도래를 예고하는 반전의 상징 언어입니다. 말은 유대지방의 짐승이 아닙니다. 말은 로마군대의 상징입니다. 긴 창을 들고 일렬로 행진하는 로마의 기병대 앞에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습니다. 곧 말은 신의 아들이라 칭송받는 아우구스토 황제 로마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로마권력의 바탕이 되는 말밥통에 아기 예수가 먹이가 되어 누인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말의 먹이가 되어 말의 뱃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그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가 로마의 권력의 핵심으로부터 변혁을 만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가 불의한 국가권력이 세상을 호령하는 이 난국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당당히 걸어가는 이유인 것입니다.

 

디도가 말한 대로 오늘 우리에게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그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우리들 안의 작은 차이를 넘어서서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악의 세력에 맞서는 큰 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성가대의 거룩한 칸타타를 통해서 그리고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누는 거룩한 예식을 통해 우리는 평화와 정의와 생명과 사랑이 끝내 불의와 모략과 칼과 미움을 이기는 승리의 함성을 듣고 일어서십시다.

 

오늘의 갈릴리 사람들, 종북으로 몰리고 빨갱이로 몰리고 약자의 설움을 견디다 못해 이 엄동설한에 거리의 천막에서, 높은 광고탑 위에서, 고공 굴뚝 위에서 그리고 8개월이 넘도록 그 원인조차 알 수 없어 죽은 이들의 영혼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 한많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손을 맞잡는 예수 복음으로 충만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