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상속자

61:10-62:3, 148, 4:4-7, 2:22-40

 

윤창희교우

 

저는 올해 초부터 향린교회에 출석한 윤창희 교우입니다. 저는 최근 목사님께서 인도하신 역사와 해석을 수강하였다는 이유로 오늘 평신도 공동목회의 필요에 따라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이 시간 역사와 해석을 수강하며 느꼈던 점과 오늘 하늘뜻펴기의 주제인 추모주일의 취지에 따라 삶과 죽음에 관하여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여러분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라는 것은 저의 이야기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아니하고 그저 한 그리스도인의 미숙한 생각으로 이해하여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자 주님이십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한 감격적인 순간에 했었던 저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면서 그동안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내 맘대로 내 뜻대로 살았던 죄인임을 회개하였고, 그런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내 인생의 구원자이자 주님으로 받아들이며, 그 분 뜻대로 살기로 결단한 15년전 저의 구원사건이후부터 지금까지 항상 예수님은 저와 동행하셨습니다. 때로는 연약한 저의 내면을 보시고 위로의 주님이 되어 주셨고, 때로는 내 뜻대로 살고자하는 완악한 저의 태도를 참고 기다려 주시면서도, 주님은 끝까지 저를 버리지 아니하고 늘 교제하기를 원하시며 항상 저의 곁에 계셨습니다. 그런대도 저는 아직도 제가 그분의 마음을 알아드리지 못할 때가 더 많고, 항상 제 마음을 알아달라고 보채는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의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평생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가 저와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예수님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사와 해석이라는 책속에서 알게 된 역사적 예수2000년전 오클로스라 불리는 고달픈 민중의 삶을 구원하신 분이셨고, 그래서 오늘날 이 땅에도 예수님의 민중구원은 절실하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된 우리는 그분의 뜻에 따라 민중들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금년 한 해 동안 향린공동체와 함께하며 느꼈던 교회의 모습도 그러한 삶을 살아내고자 자신들의 물질과 시간과 마음을 다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역사와 해석을 수강하며 안병무박사가 치열하게 고민하셨던 역사적 예수와 더불어 인간 안병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기독교 신앙은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 관계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그분이 신학자로서가 아니라 세상 누구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하였던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평생을 찾으려했던 예수에 대한 연구는 어쩌면 자신이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구원자이자 주님되신 예수님이 자신의 신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인간의 고뇌속에서 성서로부터 발견한 역사적 예수는 저에게는 지금껏 주로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해왔던 신앙적 수준을 넓혀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헌신과 봉사로 표현되는 이웃사랑의 성서적 실천은 곧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함께 서는 일일 것입니다. 오직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토록 마음 아파하시고 살피시는 자들을 기억합니다. 온전히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때문에 이 땅에 고난받는 민중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은 추모주일입니다. 2014년 우리 곁을 떠나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하시는 향린가족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빌어 힘겨운 이별의 과정을 감내하셨던 가족들을 위로합니다.

 

저에게는 몇 년전 48세의 둘째 형님을 암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품속으로 떠나보내 드린 적이 있습니다. 형수님과 아직 어린 조카들 때문에 형님은 지독한 투병생활을 묵묵히 감당하며 살고자하는 의지를 보이셨지만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사는 동안 더 잘할 걸 하는 후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관련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이후 지금까지 저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의지적으로 모두 정지시켰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죽음은 남겨진 자들과의 이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의 삶속에는 참 많은 이별들이 있지만 죽음을 통한 이별은 다시 재회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수많은 이별들보다 각별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후회 없는 아름다운 이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올해 새교우입문과정중에 목사님으로부터 유언장을 작성할 것을 권유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유언장을 작성하지 못했습니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고 죽음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무겁게 받아들이다보니 유언장을 쓰는 일이 제게는 많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나누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보다 어리고 미숙한 제가 어떻게 삶과 죽음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목사님으로부터 권유받았던 유언장을 쓰는 의미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오늘을 사는 나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죽음에 직면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언장을 미리 쓰는 이유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첫째는 오늘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죽음이라는 장벽을 넘어서기 위함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겸손히 인정하는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언장을 쓰는 것은 매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루분의 삶에도 감사하며 살 수 있는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고, 죽음너머에 주님과 영원한 삶을 함께할 수 있다는 소망을 품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죽음이 피조물인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기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고 겸손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일 것입니다.

 

유언장은 말 그대로 남기는 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남겨야 할지 고민입니다. 무엇보다 야훼 하나님을 믿는 믿음밖에 남길 것이 없다는 고백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위해 평생을 살았었다.’ 이런 고백이 죽음 앞에서 저의 고백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 나의 구원사건, 함께한 교회공동체, 성령님과 동행한 수많은 신앙의 체험들이 가족과 교회공동체에 남겨지면 좋겠습니다. 관계의 소중함을 고백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가족들과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망과 후회가 아닌 감사를 고백하는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였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질적인 재산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에 따라 내가 소유한 것들을 남김없이 쓰고 가는 것입니다. 향린교회가 꿈꾸는 가진 것을 모두 버리는 자유인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도 멋진 인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청지기로서 몸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교회 유언장에도 장기기증과 시신기증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남아있는 누군가에겐 간절히 필요할 것입니다. 사는 동안 몸을 잘 관리하여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부족한 자가 여러분 앞에 서는 것이 부끄럽고 떨립니다. 저의 마음을 이해하여주시고 죽음 너머의 영원한 삶을 소망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각자가 자신을 위해, 향린공동체를 위해 중보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헌정목사

 

[지록위마(指鹿爲馬)]

 

설마하니 지록위마(指鹿爲馬)가 교수사회가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록위마는 진시황의 아들인 호해가 황제였던 시절, 전권을 쥐고 흔들던 조고가 다른 신하들이 자기 말을 잘 듣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황제 앞에서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합니다. 처음에는 윗사람을 농락하는 것을 뜻하였으나 지금은 흑백이 뒤바뀌고 사실이 호도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이를 선택한 교수들은 그 이유를 온갖 거짓이 진실인양 우리사회를 강타했다. 세월호 참사, 정윤회의 국정 개입 사건 등을 보면 정부가 사건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사회 어느 구석에서도 말의 진짜 모습은 볼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2위는 잘 쓰이지는 않는 용어인데 삭족적리(削足適履)’였습니다. 이 또한 지록위마와 같은 말로 합리성을 무시하고 억지로 적용한다는 뜻입니다. 헌재의 통진당 해산 판결을 두고 한 말입니다. 3위와 4위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사자성어가 꼽혔습니다. ‘지극한 아픔에 마음이 있는데 시간은 많지 않고 할 일은 많다는 의미의 지통재심(至痛在心)’ 그리고 세상에 이런 참혹한 일은 없다는 뜻의 참불인도(慘不忍睹)’가 뽑혔습니다. 한마디로 국가권력에 의한 비정상의 사회였다는 것입니다.

 

지난해에는 대선 조작 사건을 가리키는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뜻의 도행역시(倒行逆施)가 뽑혔는데, 올해에는 이보다 더 못한 지록위마가 뽑힌 것입니다. 오늘의 남한 사회를 살아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의 목사로서 참담한 마음을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고 말을 가리켜 사슴이라 하는데도 이를 바르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권력이 인간의 양심을 짓누르는 사회라면 그건 짐승들의 집단이니 결코 사랑과 진실에 기초한 인간들의 사회라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국민소득 3천불의 선진국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건 아귀다툼이 지배하는 죽음의 사회입니다.

 

[코미디가 된 한반도]

 

어쩌다가 우리 남한 사회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만, 북쪽 또한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최근 김정일암살을 주제로 한 소니영화사의 인텨뷰라는 코미디 영화 중지를 요구하는 해킹 사건이 일어나자 소니영화사가 영화상영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러자 오바마까지 나서서 이거 북쪽 소행인데, 중단하면 안된다고 영화흥행을 조성하자 북쪽이 우리는 하지 않았으니 공동조사하자고 했지만, 오바마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김정일과 김정은이 이끄는 북쪽 사회를 미국인들의 코미디 안주감으로 전락시켜버렸습니다.

 

미국은 남한과 일본에 군사무기를 계속 팔아먹어야 하기에 올해 국교 정성화를 한 쿠바와는 달리 북의 악마화는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전략에 북이 말려들어서는 안 되는데, 체제가 약하다보니 체제비판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여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 남한이 한 형제자매로써 거드는 얘기를 한마디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를 내심 즐겨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임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어제도 시청 광장에서 북한 땅굴을 운운거리는 개신교의 정신 나간 사람들이 사회를 혼란시키고 있는데도 못 본 체 하면서 갈등 이득을 노리고 있는데, 이는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자신들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민족 전체에 끼치는 큰 손실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북쪽만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한 또한 최근의 조현아의 땅콩회항 사건과 더불어 투표자 10%인 이백만표 이상을 얻은 통합진보당과 소속 국회의원을 억지로 해산 면직시키고 10만 당원 전부를 종북 빨갱이로 몰아가고 있는 신풍 맥카시즘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독신 여성대통령이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혼한 남자와 호텔에 7시간 있었다는 보도가 외국 언론에 등장하더니 급기야는 이 이혼남과 대통령 남동생 사이에 권력 암투가 일어나고 일어나면서 문서 유출이 일어나자 이를 하급관료 한 두사람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과정에서 경찰 한 사람이 자살을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저 어디 쓰레기같은 하류급 나라에서나 일어날법한 일이 그래도 먹 고살만큼 발전했다고 하는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어 외국에 나가 누가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하면 일본이나 중국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을 만큼 정말 창피합니다.

 

3주 전 스웨덴 에큐메니칼 평화회의에 갔을 때에 같은 식탁에 앉은 한 주교를 만났는데, 그분이 김대중대통령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정할 때 5인 선정위원 가운데 한분이셨더군요. 위원들이 뇌물받아먹고 상 주었다는 남한 반대파의 얘기를 언급하면서 어처구니가 없는 얘기라고 허허 웃으시더군요.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상대방 잘되는 걸 견디지 못하는 참 어리석은 백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집안 싸움을 밖으로 가져갑니까? 그게 제 얼굴에 침 뱉는다는 것을 왜 모를까요? 김대중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으면 이게 단지 개인의 명예만 되는 일인가요? 아닙니다. 이는 한민족 전체의 영예입니다. 왜 우리나라에만 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생겼을까요? 이거 일제가 우리를 분열시키기 위해 만든 말이 아닌가요?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 시샘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백성들이 되었는가? 서로가 죽도록 칭찬해도 모자란 인생인데, 그 아까운 시간에 왜 남 헐뜯는 얘기를 하고 다닙니까? 보통은 자기 잘 난 것 드러내느라고 그러는데, 그런다고 자기가 높아지나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좀 더 넓고 크게 보아야 합니다. 남 험담하면 그게 자기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행위라는 것을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인생의 지혜]

 

인터넷에 오하이오주에 사는 90세의 레지나 브렛(Regina Brett)이 쓴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90세를 기념하기 위해, 내가 인생에서 배운 45가지의 교훈을 글로 적었다. 전부를 소개할 수는 없고 일부를 소개하니 들으시면서 한해를 보내면서 자신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1. 인생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인생은 좋은 것입니다. 2. 당신이 모든 논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당신 자신에게 진실하도록 노력하십시오. 3. 울어야 할 일이 있다면 누군가와 함께 우십시오. 4. 신에게 화를 내야 한다면 화를 내십시오. 신은 그것을 받아줄 것입니다. 5. 당신의 현재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과거와 화해하십시오. 6. 당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삶이 실제로 어떠한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7. 모든 것은 눈 깜빡할 사이에 변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은 결코 눈을 깜빡거리지 않습니다. 8. 어떤 고통이든지간에 그것이 실제로 당신을 죽이지 못한다면 오히려 당신을 강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9. 촛불을 켜십시오. 좋은 침대시트를 쓰십시오. 근사한 속옷을 입으십시오. 그런 것들을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두지 마십시오. 오늘이 바로 가장 특별한 날입니다. 10. 괴짜가 되십시오. 빨간 옷을 입기 위해서 나이가 먹을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11. 소위 재앙이라고 하는 일을 당하면 다음 질문을 하십시오. ‘5년 후에도 이 일이 정말로 내게 중요할까?’ 12. 용서하십시오. 미움은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일입니다. 13.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14. 당신 스스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당신 자신 말고 다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15. 기적을 믿으십시오. 16. 신은 그저 신이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거나 혹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17. 성장해가는 노인이 죽어가는 젊은이보다 낫습니다. 18. 결국 마지막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랑했느냐는 것입니다. 19. 질투는 시간낭비입니다. 20. 인생의 가장 좋은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성도추모]

 

오늘은 2014년 마지막 주일로 올해 저희 곁을 떠나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교우들과 가족들을 추모하는 날입니다. 자신을 낳아 기르시고 기도로 후원하여 오신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좋으나 싫으나 평생 살을 맞대고 살아온 남편 혹은 아내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는 아픔이야 우리 어찌 다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오늘 우리가 한 신앙 공동체로서 그 슬픔을 함께 나누고 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향해 한발자국 내딛고자 이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주보에 가족의 동의하에 이름들이 나아 있습니다만, 그중 향린교우였던 세분의 이름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61년 향린 역사에 창립교우로서 향린의 어머니로서 사랑과 헌신의 본을 남기신 변형숙권사님, 잔잔한 미소와 유머가 그립습니다. 그리고 이상근장로님 노년에도 정권의 불의한 일에 대해서는 항상 청년과 같은 분연함을 갖고 계셨지요. 그리고 자주 교회에 나오지는 못하셨지만, 아내되는 안정연권사님을 통해 향린교회를 끝까지 사랑하셨던 윤완수집사님, 이외 교적을 옮기시긴 하셨지만, 여전히 우리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이혜숙권사님과 최재우집사님을 기억합니다. 오늘의 추모시간을 통해 다시 한 번 이분들의 신앙의 본을 기억하고 향린교회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러나 영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분들의 음성을 오늘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다시 듣기를 바랍니다.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그는 구원의 빛나는 옷을 나에게 입혀 주셨고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둘러 주셨다. 신랑처럼 빛나는 관을 씌워 주셨고, 신부처럼 패물을 달아 주셨다.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듯 주 야훼께서는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정의가 서고 찬양이 넘쳐흐르게 하신다.”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하라]

 

예수가 태어나던 그 시절, 로마 식민지 치하에서 억압받고 고통 받던 그 암울한 시절에도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성전에서 살아가던 남녀 두 어르신이 있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시므온이 어떤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지만,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찬양을 하였음을 감안하면 성전 사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안나는 평생을 과부로 살면서 성전에서 단식하며 기도를 해온 예언자로 불립니다. 제이성서에서 여성을 예언자로 부른 매우 특이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이 시간 기억해야 할 말씀은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말한 구절입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에게 아픔이 되겠지만, 그러나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따르미로서의 향린교회가 한해를 보내고 한해를 맞이하면서 어떠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반대하는 세력들의 숨은 생각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지금까지도 우리가 이 일에 힘써 왔지만, 앞으로도 더욱 힘써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십시다. 남한 내의 7만개의 교회 가운데서 세상에 그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유와 해방의 복음을 생명으로 하는 진보교회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불의한 국가권력이 틈을 타지 못하도록 서로 용서하고 서로 격려하고 손 잡아주면서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주님의 십자가의 길에 매진하십시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힘차게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