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4일 그분의 영광을 보자

예레미야 31:7-14; 시편 147:12-20; 에페소 1:3-14; 요한 1:10-18

 

[참담했던 지난 한해]

 

사회적으로 보자면 지난 한해는 참으로 힘들고 그리고 못된 해였습니다. 남북관계는 완전히 맹탕으로 자존심 대결만 하다 망친 한해였습니다. 남한 사회로만 보더라도 제가 2003년 귀국하여 미군장갑차에 희생된 효순미순 촛불집회에 참석한 이후 매년 일 주일에 한두 번 이상은 거리의 현장을 찾아가서 기도회를 가져왔습니다만, 지난해만큼 처절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를 정리해보면, 첫째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 참사로 애기되고 있는 고등학교 2학년생이 대부분인 304명의 세월호의 죽음입니다. 문제는 죽음 자체를 넘어 1년이 다되어 가도록 아직도 원인규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있다는 것이고 그 주요 원인으로는 이 배의 실소유주가 죽은 유병언씨가 아니라 국정원이라고 하는 것이 다시금 성남시 이재명시장에 의해 제기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참사로 불러서는 안 되고 광주학살과 같이 세월호 학살로 명명해야 합니다. 박근혜씨는 애초 눈물을 흘리며 국민 앞에서 한 약속과는 달리 유가족들이 청와대 앞 길거리에서 수십 일을 농성하며 한번 만나달라고 애원하고 애걸했지만, 끝내 외면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외국 언론에 스캔들로 보도된 박근혜씨와 비밀스런 관계를 갖고 있는 정윤희씨의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정윤희씨와 동생 박지만씨 사이의 국가 권력 암투 사건입니다. 결국 애초 미행을 당했다던 박지만씨도 입을 다물고 그래서 권력에 의해 몸통은 사라지고 깃털만 남는 꼬리 자르기의 전형을 보고 있습니다만, 역사가 가르쳐 준 가르침은 이런 식으로 권력이 진실을 누르면 비리는 많아지고 권력 암투는 유언비어 형태로 국민들 사이에 계속 확장된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는 세계 근대 정치 역사에 있어 매우 드문 일로 국민의 10%의 지지를 받은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이고 그리고 그들을 모두 종북주의자 빨갱이로 몰아간 신맥카티시즘입니다. 그로 인해 정부가 남북화해의 공로자로 내세웠던 재미동포 신은미선생에 의해 진행되던 통일 컨서트가 19세 고등학생의 황산테러사건으로 중단되었던 것이고 그리고 그 장소가 성당이었다는 사실에서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신은미선생은 현재는 정반대로 종북주의자로 몰려 검찰에 조사를 받고 있고 출국정지를 당한 상태입니다. 강제출국을 당할 소지가 크고 그렇게 되면 남한 입국이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세계인들의 웃음거리가 된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아씨에 의한 땅콩 회항 사건입니다.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극소수의 자본가 가족을 제외하고 모든 고용인들은 노동자 중역 할 것 없이 그들은 모두 현대판 노예로서 미생적 존재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입니다. 수년간 계속되는 세계 자살율 1, 출산율 최저 등등의 수치는 제외하고서라도 이런 것들은 우리 남한 사회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형태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들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사회의 진보적 발전을 위해 함께 연대하면서 나아가야 하는데, 서로가 서로를 경쟁 대상자로 보는 개인주의만 성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는 진영 논리가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그래서 저는 2015년 첫 하늘뜻펴기를 시작하면서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는 시로 오늘의 하늘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 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419와 동학의 민중자주혁명 정신에 기초한 남북통일을 말하면서 전쟁을 부추기는 모든 쇠붙이 곧 반자주 분단주의자들을 배격한 시입니다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앞에서 언급한 남한 사회의 모든 부조리와 모순이 분단에 기인하고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통일대박을 속으로는 권력유지만을 생각하는 청와대 껍데기들, 진실을 원하는 슬픔을 당한 사람들의 외침을 억누르는 국정원 껍데기들, 정의와 진실에는 눈감고 오직 피를 나눈 가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복수를 불태우는재벌의 껍데기들, 자유와 해방, 정의와 평화, 사랑과 생명이라는 하느님 나라의 진짜 복음은 외면하고 예수천당 불신지옥만 외치는 종교의 껍데기들, 그리고 우리 개개인의 생각 속에 숨어 있는 욕망에 기초한 성공이라는 껍데기들은 모두 사라지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새해의 첫날]

 

서양에서 선물이라는 단어와 현재라는 단어는 같은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의 시간만큼 좋은 선물은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시인 홍수희님의 {새해의 첫날}이라는 시간의 선물을 드립니다.

 

첫 마음으로 다시 시작합니다.

내리자마자 녹아버리는 진눈깨비처럼

첫날에 했던 다짐들 그 후회의 흔적마저

지금은 돌아보기 슬픈 기억이지만

사랑은 거듭하여 일어서는 것

내가 나를 용서하며 기쁘게 희망하는 것

해마다 맞이하는 1월이 새로운 것은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월을 해오름달이라 부르고 아메리카 인디언들은비바람 영혼들처럼 눈이 흩날리는 달이라 부르지만, 서양의 1월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야누스 신의 달입니다. 야누스 신은 얼굴이 앞과 뒤 두 개가 있습니다. 1월은 지난 한해의 아쉬움을 생각하면서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달임과 동시에 뒤돌아 봐야 소용이 없으니 앞을 바라보자고 스스로를 재촉하는 달이기도 한 양면의 달입니다.

 

지난 한해 돌이켜본다면 기쁜 날 보다는 슬픈 날이 더 많았고 어떤 분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해는 그런 날들을 떨쳐버리고 새롭게 일어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새해 1월이라고 해서 작년 12월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지만, 우리가 자꾸 새해라고 부르는 것은 옛것은 지나보내자고 하는 의도입니다. 자신을 후회하기 보다는 자신을 용서하고 새롭게 출발하자고 하는 결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의 쓰라린 아픔들이 남아 있는 분들에게는 도정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시를 읽어드립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이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원죄(原罪)가 아닌 원복(原福)]

 

바울 선생은 2천년 전 에페소 교인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가 받을 상속을 보증해 주시고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십니다.” 당시는 로마황제를 주님이라고 불렀고, 자신을 황제의 딸과 아들로 인식했습니다. 결국 이는 세상 권력 가치에 매몰된 껍데기 인간입니다. 이런 껍데기 가치에 저항하여 바울 선생은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며 세상 축복을 넘어 하늘 축복의 상속자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매우 당연한 얘기로 들리지만, 이는 당시의 국가 권력을 부정하고 대중이 합의한 사회적 가치에 저항하는 혁명적 선언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이며 바울이 말한 영적 축복인 것입니다.

 

사실 지난 2천년 서구의 기독교는 주객 이원론에 기초하여 하느님과 인간을 대립시키는 교리를 전개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첫 인간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강조하고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라고 하는 심판 교리를 강조하지만, 창세기를 보면 원죄의 심판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형상을 띠고 난 곧 축복의 근원지였습니다. 매튜 폭스라는 생태영성 신학자는 현대의 기독교가 너무 원죄를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이 누려야 할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잃어버렸음을 지적하면서 이제는 원죄(original sin)가 아닌 원복(original blessing)을 강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죄인으로 자주 인식하다보면 우리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가슴만 치면서 계속 제 자리 걸음만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다라는 자기 성찰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본래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축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죄의 굴레를 넘어 해방의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이 신앙의 근본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과 땅은 하나]

 

요한복음에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하는 성서 구절 또한 바로 이러한 축복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느님이셨다는 신인동체론이라는 모호한 신학적 논리를 넘어 이를 신앙고백적 차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성서 구절은 그만큼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요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결코 하늘의 역사와 유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그러기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하는 승리를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가 곧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겠다는 결의를 담고 있는 고백입니다. 자기만의 동굴에서 나와 산 정상에 올라 세상과 역사를 널리 바라보겠다는 성찰의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해방됐는가?]

 

토요일자 경향신문은 새해를 맞아 머리기사로 [광복 70, 우리는 과연 해방됐는가?]란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 민족이 정치 군사적으로 독립을 성취했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일상생활과 의식 속에서도 일제강점기의 부정적 유산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뤘는지는 좀 더 고민해 볼 문제입니다. 현재 상연 중인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극중 인물이 서로 싸우다 말고 태극기에 경례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모습은 그 시대 아버지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보여줌과 동시에 식민시절 내면화된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일제 36년은 우리 사회에 긍정과 부정적 유산을 동시에 남겨주었습니다. 일제 저항의 에너지는 해방 이후 분단과 개발독재시대를 거치면서 419혁명과 876월 민주화투쟁으로 이어졌지만, 반면 식민지 시절의 공포와 잔혹, 강제와 감시를 통해 우리 신체에 새겨진 일제식민권력은 이승만과 박정희 유신독재를 지탱하는 집단기억으로 작용되어 왔고 그래서 지금도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사는 땅과 일상생활, 의식을 재생산하는 살아 있는 권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곧 일제의 치안유지법과 황국신민사상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국가보안법과) 냉전적 자유민주주의로 이어지면서 우리 정치의 다양성과 시민의 사회참여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왔습니다.]

 

제가 2015년을 여는 하늘뜻펴기에서 신문의 기사를 길게 인용한 이유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 출발하지 않는 한 개인의 역사는 언제나 헛발질을 계속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첫 단추가 잘못되면 아무리 비싼 옷도 우스꽝스러운 꼬락서니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대부분의 중산층은 2만불도 채 안되는데, 벌써 4만불을 운운거리는 정부의 꼬임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면 우리 인간의 참다운 가치가 어디에 있으며 그래서 인간 역사는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첫 단추를 끼우는 날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할 궁극의 목표를 다시금 설정하는 날입니다. 신앙의 우선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재확인하고 고백하는 날입니다. 목사의 입으로 말하기에는 매우 역설적인 선언이지만, 독일의 시인 파울 첼란의 시구인 기도하는 그 손을 자르고몇 권의 책이라도 올해는 1월부터 기필코 읽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날입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도록 하려면,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의 세력을 스스로 몰아내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지 사과나무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누워 있는 껍데기들을 위한 사탕발림을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십자가 역설의 가치가 시작하고 부활의 생명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십자가 신앙고백을 한 후에 각자의 십자가를 저 성전 전면에 달겠지만, 이는 단지 새해 첫 주일에 갖는 예배 의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 안에 나를 복종시키겠다는 결단의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회의와 부정과 분단의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고 이를 희망과 사랑과 연대와 용서로 채우는 구원 회복의 시간인 것입니다. 인간의 결함을 바라보고 절망하지 않고 오직 그분의 영광만을 바라보며 힘차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의 시간인 것입니다.

 

[어처구니가 되는 꿈]

 

끝으로 광복과 분단 70년인 올해는 숫자상으로 본다면 50년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희년의 해입니다. 우리가 하나 되고 남북이 하나 되는 그날이야 말로 진정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힘써 이룩해야 할 가장 높은 신앙의 목표임을 재확인하면서 문익환목사님의 꿈을 비는 마음의 한 단락을 읽어드림으로 오늘 새해 첫 주일의 하늘뜻을 마치겠습니다.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굽어보이는 산정에 다 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이 제대로 돌라

산이 산으로, 내가 내고,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 외다.

 

다 함께 역사의 어처구니가 되는 꿈을 꾸면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