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는 하늘이 갈라지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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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틀 깨기]

 

어느 회사 입사 시험 중 다음과 같은 문제가 출제 되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혼자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길에 운전을 하고 가던 중 버스정류장을 지나가고 있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1. 죽어가고 있는 듯이 보이는 한 할머니 2.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의사 3.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 그런데 차에는 단 한명만을 태울 수 있습니다. 누구를 태우겠으며 그 이유를 설명하는 문제였습니다. 우선은 죽어가는 할머니를 태워 한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고, 의사를 태워 은혜를 갚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정말로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백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종적으로 채용된 사람이 써낸 답은 이러합니다. "의사 선생님께 차 키를 드려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가도록 하고 그리고 난 내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겠습니다." 답을 듣고 나면 모두가 기가 막히게 좋은 답이라고 말하지만, 처음에 이 답을 생각해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일상적인 생각의 틀을 깨야 하는데, 그 틀을 깨는 방식이 자기 포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먼저 중심에 놓고 생각합니다. 본능적인 일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포기를 먼저 하고 답을 찾아가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포기가 강요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고 1번과 23번 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자기 포기를 먼저 생각하는 일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포기를 통해 모두가 축복받는 길이 나온다는 이 예는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만이 부활의 축복이 온다는 우리의 믿음과 일치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중심에 두면 이것이 아니면 저것 밖에 없다는 선택의 기로에 닫히고 말지만, 나를 포기하고 공동체를 중심에 놓고 보면 상생의 길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둑을 두다 수가 보이지 않으면 화장실을 다녀오고 나서 자기 자리에서 보지 말고 구경꾼의 자리에서 바둑판을 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습관이나 규범의 변화를 넘어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존재의 변화를 말합니다. 올해는 우리 모두가 자기 자리를 떠나 제3의 길에서 자기 인생의 길이나 향린의 길 그리고 민족의 길을 새롭게 바라보는 존재의 틀을 바꾸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존재 안으로 나의 존재를 밀어 넣음으로 하늘의 축복을 누리는 향린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례는 존재의 지형을 바꾸는 일]

 

오늘은 예수께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셨다는 주현절 두 번째 주일로 세례주일로 지킵니다. 세례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곧 존재의 지형을 바꾸는 일입니다. 이를 오늘 마르코복음서 본문은 하늘이 갈라지면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신사건으로 설명하고 있고, 사도행전은 이미 요한의 물세례를 받은 바 있던 에페소 교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 저들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단순히 사람이 온순해지며 착해지는 행동의 변화를 넘어 세상을 향해 자신의 숨겨진 존재 곧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의를 드러내는 존재의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열두 명이라고 말함으로 이방의 나라 곧 로마제국에 근본적인 변혁을 일으킬 새로운 제자들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제1성서의 본문 창세기의 말씀은 세례 사건을 깊은 어둠에서 빛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우주 변혁 사건에 빗대고 있습니다.

 

곧 세례란 교회의 정회원이 되는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흔히 어둠으로 말해지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빛으로 상징되는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하늘소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닌 하늘에 속한 사람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점에서 가톨릭에서 세례명을 주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을 새로이 갖는 것은 가톨릭 교회만의 것이 아니라 성서적인 전통입니다. 물론 전두환씨에게 베드로라는 박근혜씨에게 율리아나라는 영세명이 있다고 해서 그 존재가 변화된 것은 아니지만, 성서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라는 이름 변화를 통해 존재 변화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들어갈 때, 그들이 건넌 곳은 히브리어로 보면 갈대바다인데, 이를 후대 희랍어성서에서 홍해바다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는 곧 세례라는 구원의 관점에서 히브리 민족의 해방사건을 신학화한 것입니다. 홍해바다의 물을 통과함으로 노예였던 히브리족속이 가나안의 자유인으로 존재 변화가 일어났고, 20년동안 도망자로 떠돌이로 살아야 했던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하느님과의 영적 씨름을 통해 이스라엘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름의 변화는 단순한 호칭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세례주일을 통해 내가 과거 세례를 받거나 혹은 입교식을 받을 때에 희미하게나마 들려졌던 하늘의 음성을 떠올리고 성령의 비둘기가 전해준 하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를 재확인하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게 뭐냐?]

 

하바드 신학대학의 하비콕스 교수는 <신의 혁명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책에서 세례를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에 의한 세례는 우선 우리의 존재가 이 세계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상징이요, 이 세계에 대한 봉사를 위해 우리가 고집해온 세상적 가치에 대해서 죽는다는 상징이다. 세례는 자신의 도덕, 또는 자신의 종교적 신분 따위를 고려하지 않고 이 세계에 개입되기 위해 자유롭게 되는 일이다. 세례는 이 세계를 위해 자유롭게 되는 일이요, 우리의 이웃을 위해 자유롭게 되는 일이다.

 

예수 세례의 역사성에 대해 마르쿠스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즉 예수께서 온 몸의 낙타털과 텁수룩한 수염으로 덮인 광야 출신의 예언자 세례 요한의 더러운 손에 의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행위는 예루살렘 성전의 희생제사와 사제직이라는 간접 종교에 대한 거부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거룩함의 상징으로 말해지는 성전에 등을 돌리고 도시에서 빠져나와 요단강으로 내려가서 반교권적인 어중이떠중이 무리들과 자신을 동일시한 것이다. 이를테면 예수를 따라 세례의 물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그 시대의 브로커 사제 종교에 등을 돌리고 스스로를 민중들, 곧 알코올 중독자들, 무법자들과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한다.(하비 콕스 저. 마경일 역, 현대사상사, 130-132쪽 일부 필자 삭제 및 첨언)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기장 50회 총회를 돌아본 김재준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다아니믹하게 인간 문제에 대결하지 못한 것을 반성한다. '기장이 다른게 뭐냐?'하는 말이 나돌게 됐다는 그 자체가 우리의 활력 결어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과 한국동포들과 함께 수난하는 교회였다면 '다른게 뭐냐?'하는 의문은 결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향린교회가 다른게 뭐냐?’ ‘민족과 함께 그리고 민중들과 함께 수난하는 교회였다면 다른게 뭐냐 하는 질문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이해는 상대의 밑에 서기]

 

오늘 보고되는 공동의회 자료집에도 써놓았습니다만, 지난 해 저는 향린 11년 목회 생활 중 가장 힘든 한해를 보냈고 지금도 그 힘듦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아픔과 상처들이 빨리 치유되길 원하지만,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해한다는 말이 영어로 'understand' ‘밑에 선다는 본래의 뜻에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가죽신을 보름동안 신어보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속담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자기 발에 맞지 않는 가죽신을 신고 광야를 보름동안 다니면 그 발은 온통 물집으로 뒤덮이고 매우 쓰라리고 아프겠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살아온 경험과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혹은 자기가 받은 상처와 아픔에 따라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평가합니다. 저도 아내와 함께 산지 34년이 되었습니다만, 지금도 아니 내가 말한 의미는 그게 아니야.’ ‘아니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아.’ 라는 논쟁들을 지금도 주고받습니다. 무슨 현묘한 철학적 신학적 논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매우 평범한 언어로 말을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는 혹은 정반대된 의미로 이해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경험합니다.

 

교회공동체 구성원들은 부부 관계나 가족들의 만남에 비하면 그 빈도나 밀도는 너무 작습니다. 그러니까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부부 사이에서도 말의 오해가 다반사로 일어난다면 상식적으로 말해 교우들끼리 서로를 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흔히 대화에 있어 말이 차지하는 비율은 30%이고 실은 눈빛과 몸짓으로 더 많이 전달된다고 합니다만,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이 모이는 공동체에서 회의의 방식을 통해 서로의 뜻을 전달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인 것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말씀입니다. 들리는 말 몇 마디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일을 조심하고 더욱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어떤 말을 들었을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열 마디를 하면 듣는 사람은 누구나 열 마디를 다 기억하지 않고, 그중 자기 귀에 들리는 몇 단어를 기억하고 그리고 그 서너 개의 단어들을 자기가 이해하는 틀에 맞춰 이리저리 조합을 해서 변형된 형태로 기억합니다. 따라서 들은 얘기를 제 3자에게 전할 때, 본인은 아무리 들은 그대로 전한다고 노력하더라도 애당초 그게 본래 말한 사람의 의도와 50%라도 일치한다면 그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따라서 말은 조심해서 해야 하고 또 말을 들을 때에는 더욱 조심해서 들어야 하고 또 말을 전하는 일은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고 꼭 해야 한다면 더욱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말을 절반도 제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내가 이해한 바로는...’라고 시작할 때, 지성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흔히 비판적 지성인이란 말을 자주 쓰는데, 여기서 비판은 남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성찰적 비판을 말합니다. 지성이란 자기 비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부 사이도 말 한마디로 상처받고 말 한마디로 용기를 얻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구성원들끼리야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간 다른 시각의 이야기입니다만, 일본의 사색가 야먀오 산세이가 쓴 {애니미즘이라는 희망, 204}을 읽다 말에 대한 근본을 성찰하는 좋은 글을 발견했는데,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

 

당신은 어떤 말을 좋아합니까?

사랑이라는 말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바다라는 말, 산이라는 말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상품이라는 말이나 문명이라는 말 국가라는 말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원자력발전이라는 말이나 핵무기라는 말을 좋아합니까?

나는 지금 영혼의 고향이라는 말과 절실하다는 말이 너무나 좋습니다.

영혼의 고향이라는 말에는 나의 빛이 있습니다.

절실하다는 말에는 나의 눈물이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우리 다 같이

정말 마음으로 좋아하는 말을 찾아

그 말을 소중히 하고

그 말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고

인간사회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당신은 어떤 말을 좋아합니까?

우리가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말을 찾아내고 이를 깊이 묵상하고 그 말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나의 말로 만들어간다면 여러분은 앎을 사랑하는 사람 곧 필로조퍼 철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철학이란 어려운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말을 찾아내고 이를 인간의 삶과 사회에 적용시킴으로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사람입니다.

 

25백년 전 그리스의 탈레스라는 사람은 물을 좋아했습니다. 빗방울을 바라보며 하늘의 음성을 들었고, 흐르는 물소리를 통해 땅의 호흡을 들었습니다. 그는 대기 안에 잠겨 있는 수분과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수분이 동일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우주의 근본은 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는 사랑이 우주의 근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딸 아들이 된다고 하는 일은 사랑의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자기 포기와 자기 헌신을 두 마디로 줄인 말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움의 근본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남이 아니라, 상대방 안에 투영된 못난 자기 모습이라고. 그래서 예수께서도 네 이웃을 네 몸같이곧 이웃 사랑의 시작을 자기 사랑으로부터 시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은 자기의 약점, 자기의 실수,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약한 부분을 자신의 일부로 용납하고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용기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그건 내 탓입니다. 그건 내 잘못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건 아직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이웃 사랑은 아직 물 건너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내가 진정 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내 약점, 내 실수, 내 결점을 진정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목회는 사람 세우기]

 

목회를 무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이를 답하기 위해서는 삶의 정의를 먼저 내리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삶에 대한 정의는 삶의 목적과는 다른 말입니다. 삶의 정의는 다 같지만, 삶의 목적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해하는바 삶의 정의란 자신의 가진 능력과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는 과정입니다. 이는 식물이든 동물이든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기본입니다. 모든 꽃이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듯이 여기에 삶의 실패나 성공이란 잣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름 있는 장미나 국화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돌 틈바구니 사이에 핀 이름 모를 야생화도 깊이 들여다보면 다른 꽃들이 갖지 못한 고유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생명들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고 이들이 함께 어울릴 때 아름다움의 극치가 일어납니다. 교회 목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능력과 역량이 발휘되어 목회라는 상생의 과정을 통해 극대화될 때, 진정한 교회다움이 일어나는 것이고 그래서 교회들의 각기 다른 선교 활동을 통해 우리 사회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질 때 하느님 나라 목회의 완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의()라는 한자어를 보면 동물 양()자 아래에 나를 뜻하는 아()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양은 순함과 어리석은 동물로 인간을 대신하는 상징적 동물로 여겨져서 고대 종교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 제물로 씌어졌습니다. 의라는 단어가 희생을 뜻하는 양자 아래에 나 아자가 있다는 말은 곧 의는 자신을 희생함으로 얻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말에 우분투(Ubuntu)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내가 있는 것은 우리가 있기 때문이요, 우리가 있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곧 전체가 하나요 하나가 전체라는 생명적 관계를 말합니다.

 

지난 주 한 교우와 식사를 나누는 가운데 이런 얘기를 합니다. 가까운 친척 목사님이 자기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요구하는 기도만 드리지 말고 드리는 기도를 해보라. 저도 듣는 기도는 말했는데, 드리는 기도까지는 말하지 못했습니다. 잘못하면 이 드리는 기도가 무슨 십일조 성수주일 등등의 율법적인 것들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 의도하는 드리는 기도라는 얘기는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 요즘 많이 힘드시지요. 맨 날 달라는 사람만 있고, 물건은 제한되어 있는데, 너도나도 달라고 하니 누구에게만 줄 수도 없고, 농부에게는 비 오는 날도 필요한데, 아이스크림 장사는 맨 날 쨍쨍 비치는 햇빛만 달라고 하고, 우산장사는 예고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성 폭우만 보내달라고 하고... 하느님 제가 미약하지만, 하느님의 마음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드리는 기도를 시작하여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시작하고 나니까 주위에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이 많이 보이고, 그래서 하느님을 대신해서 웃음도 전하고 따뜻한 마음도 전하곤 했는데, 그렇게 기도를 시작한지 한 달 만에 아주 좋은 직장이 생겼답니다. 그래 바쁜 일정에 교회를 찾아와서 목회자들에게 맛있는 점심을 사주고 가셨습니다. 그런 말씀은 안했지만, 아마 하느님께서 너 오늘은 내 대신 교회 목사님들 점심 접대해봐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하늘의 갈라짐과 땅의 찢어짐]

 

불가의 한 예화입니다. 스승이 말합니다.

 

저 보리수나무에서 열매 하나를 따 와 보거라.”

여기 따 왔습니다.”

그것을 쪼개라.”

예 쪼겠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씨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쪼개 보아라.”

쪼겠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네가 볼 수 없는 이 미세한 것, 그 미세함을 기본으로 저 큰 나무가 서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이 있음을 믿어라. 그 아주 미세한 존재, 그것을 세상 모든 것들은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곧 진리다.”

 

손에 잡힐 때, 그건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확신이 들 때, 그건 이미 진실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미지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바라보고 건너 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에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복음서 마지막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 달려 고통 가운데 큰 소리를 외쳤을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늘이 갈라졌다는 단어와 휘장이 찢어졌다는 단어는 같은 희랍어 동사입니다.

 

존재의 틀을 깨고 하늘이 지시하는 새로움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에는 찢어짐의 고통이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벌레가 껍질의 작은 구멍을 통해 비집고 나아가는 아픔을 통해 날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냅니다. 큰 구멍을 통해 쉽게 나오는 애벌레는 하늘을 날지 못하고 땅만 기어 다니다 일생을 마칩니다. 올해 을미년 양()의 해 존재의 틀을 바꿈으로 우리 모두 하늘을 나는 축복을 누리기를 기도하면서 다 함께 침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