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도주일

듣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

 삼상 3:1-10; 요한 1:43-51; 시편 139:1-6; 고전 6:12-20

 

이영미 목사

  

세계공과에 따라 세 본문 설교를 하는 일은 설교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내 주관에 따라 그 교회에 대한 선입견에서 본문을 선택하고 주제를 정하지 않아도 될 뿐아니라 본문을 되새기면서 자신도 뜻하지 않았던 관점에서 의미를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듣는 마음의 준비

1성서의 본문으로 시작합니다. 본문은 야훼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처음 부렀던 소명기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에 사무엘은 "." 하고 대답하면서 엘리에게 뛰어가 "부르셨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아무런 전제가 없었다면 너무도 의아했을 사무엘의 반응을 성서저자는 친절하게 1절에서 소년 사무엘은 엘리 밑에서 야훼를 섬기고 있었다. 그 때는 야훼께서 말씀도 자주 들려주시지 않았고 계시를 보여주시는 일도 드물었다.”고 설명해줍니다. 야훼께서 부르시리라고 생각도 못하고 경험도 없었던 소년 사무엘은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엘리 제사장께서 부르는 것이겠거니하고 그에게로 달려간 것입니다.

뉴욕 유니온에서 공부하던 시절 도서관에서 근장을 하는데 한 여자분이 오셔서 뭐라고 말하는데 한마디도 못 알아듣고는 너무도 당황해서 다시 한 번만 말해달라고 요청했더니 이번에는 천천히 말하는데 또 못 알아듣고 난감해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상대가 너무 미안해하면서 영어로 제 한국말이 너무 서툰가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전 그분이 당연히 영어로 얘기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국말을 하는데 한단어도 못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소년 사무엘의 경우도 저의 경우도 우리가 상대의 말을 들을 때 우리가 듣는 것이 우리의 두뇌가 허락하는 코드에 맞춰서 듣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상대에 말에 귀 기울이기에 앞서 나의 전제를 가지고 듣습니다.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것처럼 아는 것만큼 들리는 셈이지요.

두 번째 부르시는 야훼의 소리에도 소년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성서 저자는 다시금 7절에서 사무엘의 우둔한 행동을 변호하면서 야훼께서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나타나신 적이 없으셨고 사무엘은 아직 야훼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고 덧붙입니다.

삼세번이 되어서야 사무엘보다 경험이 더 많은 엘리 제사장이 상황을 파악하고(8), 사무엘에게 "가서 누워 있어라. 그리고 다시 부르는 소리가 나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야훼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일러줍니다(9). 세 번의 시행착오 끝에 사무엘을 비로소 무엇을 들어야할지 알게 되었습니다. "야훼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10)

세 번의 시행착오 끝에 이번에는 앞의 세 경우처럼 그냥 설화자가 야훼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고 진술하지 않고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을,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이름을 두 번 부르셨던 것처럼 야훼께서는 사무엘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해서 부르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10) 이에 사무엘이 대답합니다. “야훼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잘 듣는행위는 무엇을들을 지를 미리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마음을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특별히 그것이 하느님과의 대화라면 우리는 듣는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전통은 열왕기하 3장에서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듣는 마음을 구했다고 말하며, 이를 지혜와 병행시킴으로서 듣는 마음을 지혜의 덕목으로 묘사합니다. “잘 듣는자의 첫 시작은 듣는 마음으로 대화 속에 자신을 던져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는 마음으로 자신을 대하고 상대방에 귀기울일 때 우리 두뇌가 경험하지 못하여 인지하지 못하는 새로운 사실에 대해 우리 자신을 개방하고 그것을 듣고, 인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새로운 것에 우리 자신을 열어놓는 길은 듣는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듣고 싶은 걸 들으려고 하지 마시고 그냥 듣는 자세로 경청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아는 것이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린다” (요한 1:43-51)

그런데 아무런 전제 없이 듣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니 불가능한 일인지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압니다. 우리의 지각은 경험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고 윤택하게 하기 위해 축적해 놓은 온갖 정보를 활용하고 또 그 정보를 적절히 교묘하게 사용해서 이득을 얻는 자들에게 우리 사회는 똑똑하다, 잘 산다는 칭찬으로 우승패를 안겨주고 우리는 그것을 생존의 경험으로 습득하고 재활용하여 습관으로 간직합니다. 좋은 말로 해석학적 관점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2성서의 본문은 이러한 선지식이 가져다주는 유익함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2성서 본문은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속한 지역을 소개합니다. 성서가 불필요할 정도로 단어나 개념을 반복할 때는 뭔가 강조하려는 의미가 있음을 의심하셔도 좋습니다. 갈릴리, 밧쎄이다, 갈릴리 지역에서도 가나 출신의 나타나엘과 나사렛 출신의 예수, 밧쎄이다 출신의 다른 예수의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언급된 이름들 중에서 이미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로마의 행정구역도시명인 밧쎄이다 출신인 반면 나타나엘은 이 구절 말고 요한 21:2에 한 번 더 언급되는데 그곳에서 갈릴리 가나 출신으로 묘사됩니다(21:2). 다른 문화권의 대비를 보여주는 척도는 그들의 이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필립” “앤드류” “피터등은 그리스/로마식 이름인 반면 나타나엘하느님께서 주셨다/주신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 이름입니다. 그럼에도 정작 히브리 이름을 가진 나타나엘은 예수를 따르지 않지만 다른 문화권에 속한 다른 세 명은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한 제자들입니다.

더욱이 그 다음에 나오는 필립보와의 대화는 나타나엘이 유대 문화에 얼마나 깊은 연관을 맺은 사람인가를 잘 드러냅니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찾아가서 "우리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을 만났소. 그분은 요셉의 아들 예수인데 나자렛 사람이오."라고 말합니다(44-45). 율법서와 예언자의 글이란 유대교의 경전을 지칭하는 용어이고, 00의 아들이란 말이 덧붙여진 것은 동일한 인물의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유대 방식입니다. 나타나엘은 처음 소개될 때부터 유대문화와 종교에 충실한 사람임을 저자는 반복해서 독자들에게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경우가 경험의 부재가 우리가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인식의 한계를 규정해주었던 것을 보여준 사례였다면, 이어지는 나타나엘의 대답은 문화적 관습과 종교적 경험이 우리의 인식을 어떻게 한정짓는가를 보여줍니다. 46절에서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란 나사렛과 가까운 성읍인 가나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격언이었다고 추측됩니다. 나자렛은 제 1성서나 그 당시의 유대교 문헌에 나오지 않는 아주 미미한 곳입니다. 나타나엘의 말은 예수 당시 나자렛 동네의 비존재감을 반영한 말인 듯합니다.

2성서는 나자렛을 예수님이 자라신 곳으로 소개하고(2:23), 예수는 나자렛 예수(26:71; 18:37 )라고 불립니다. 이 말은 초기 그리스도교인을 멸시해서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한 예로 사도행적 245절에서 로마 총독에게 바울을 고발하면서 그를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부릅니다. 2성서에서 예수가 나사렛 예수로 불리는 이유는 그분의 고향이기 때문이기보다 나자렛이란 이름 속에 그가 메시야라는 암시가 들어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즉 이사야 111절에서 가지를 뜻하는 히브리어 내쩨르나지르’(나실인=헌신한 자, 13:5; 6)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유대의 문화에 충실한 나타나엘에게 나사렛은 신통한 것이 나올 기대조차 할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동네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타나엘이 유대전통과 종교에 숙달된 자이기 때문에 예수가 메시야임을 알아보는 혜안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음을 엿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를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보증했고, 나아가 나타나엘이 예수를 믿게 된 동기가 예수께서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찾아가기 전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1성서를 연구한 학자들은 무화과 나무 아래있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이 말이 사실을 미리 보고 보통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시는 예수님의 영적 능력을 보여주는 말이라는 정도로 풀이합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있다는 표현이 제 1성서에는 세 번(왕상 5:5; 4:4; 3:10), 2경전인 마카비 114:12, 그리고 제 2성서에서는 오늘의 요한복음 1:48, 50에 두 번 나옵니다. 1성서와 마카비서에서 무화과나무는 모든 본문에서 포도나무와 쌍을 이루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5:5은 솔로몬의 통치로 유다와 이스라엘이 태평성대를 이루고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상황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미가 4:4은 유명한 민족 사이의 분쟁을 하느님께서 판가름해주시고,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군사훈련을 하지 않는다는 구절 뒤에 그 결과로 이루어질 평화의 세상을 묘사하면서 사람마다 제가 가꾼 포도나무 그늘, 무화과나무 아래 편히 앉아 쉬리라고 말합니다. 스가랴 3:10 역시 야훼의 날이 오면 누리게될 기쁨을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잔치를 베푼다는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카비 114:12도 시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 나라에는 하루도 평온하지 않은 날이 없었 그 나라에 평화와 기쁨이 흘렀음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사람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았으며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하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란 표현은 하느님의 뜻이 지켜지고 성취되어 이룩된 참 평화의 세상에서 사람이 누리는 평화와 기쁨을 표현하는 관용구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있었던 것을 보았다는 표현은 그가 하느님의 길을 행하고, 하느님의 의를 실현하는 사람이었음을 인정한 말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율법종교의 관점에서 그는 손색이 하나 없는 이스라엘 유대교인이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를 찾았던 재물 많은 한 유대인 남자와 비교됩니다. 재물 많은 사람이 예수께 찾아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물었을 때(19:16-30; 10:17-31; 18:18-30), 그가 모든 계명을 내가 다 지켰노라고 자신을 드러냈다면, 여기서는 예수께서 그가 하느님의 법도를 다 지킨 사람, “그 안에 거짓이 없었다고 인정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재물많은 부자가 예수를 선한 자라고 알아보았다면, 나타나엘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나타나엘은 율법학자나 성경연구가로 메시야를 기다렸던 종교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메시야를 상징하는 나사렛, 평화와 기쁨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 아래의 있던 나타나엘의 묘사가 나타나엘을 설득하려고 필립보가 예수를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이라고 소개한 점들이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런 그가 예수를 만나, 그의 말씀을 듣고, 자기가 평생 파고 연구했던 메시야를 만나 그 기쁨에 젖게 됩니다. 성실하게 율법을 지키며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율법서와 예언서가 예언한 메시야를 기다려온 자신의 속내를 잘 아는 예수를 만나자 나타나엘은 자신이 평생 공부하고, 찾아헤매던 종교적, 철학적 멘토를 만난 듯 기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랍비여 랍비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외칩니다.

 

진정으로 듣는 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행동하는 자이다

안타깝게도 나타나엘의 태도는 우리의 편견이 우리가 듣는 것을 제한시키듯이 우리가 아는 지식은 우리의 생각의 폭과 깊이를 제한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 즉 메시야임을 깨닫고 자기 눈으로 보는 큰 기쁨을 얻었지만 그것으로 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문화적 관습과 종교적 지식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다면, 그는 메시야를 만나 그가 이루는 하느님 나라 운동의 주역이 될 수 있었을 기회를 놓칩니다. 51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나타나엘이 지식인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또다시 새로움에 자신을 개방하고 한 발짝 나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51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구절은 창세기 야곱이 벧엘에서 돌배게를 배고 자면서 꾸었던 사다리 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야곱은 자신의 생각과 가진 재산들을 포기하지 않았을 때에는 이 열린 하늘과 천사들의 움직임을 깨닫지 못하고, 나중에 얍복강가에서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모두 강 건너로 보내고 홀로 남아 씨름할 때 비로소 하나님과 합일되는 경험을 하고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됩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그리고 신실하게 지켰던 신념과 가르침을 떨치지 못하고 하늘의 열린 놀라운 큰일을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나타나엘은 율법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이 말하는 메시야를 만났고 그 기쁨에 심취해있었지만 정작 그 메시야가 보여주고 바꿔줄 새 세상의 하느님 나라 운동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타나엘이 예수를 따랐다는 본문의 보도도 듣지 못하고, 이후 초대교회 12제자의 명단에서도 그의 이름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듣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소극적으로 지식적인 정보를 듣고, 깨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듣기란 듣는 행위, 즉 듣는 일이 하늘이 보여줄 새 세상에 마음을 여는 것이고 또 그 새 세상을 만들어가는 여정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이 자신의 편견을 깨고 예수 앞으로 나오도록 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가 자기처럼 예수를 따르는 결단을 하기 까지 이끌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대의 눈높이에서 이끄는 대화와 설득하는 배려의 마음 (요한 1:47-48)

1성서가 보여주는 또 다른 메시지는 상대를 배려하는 필립보와 예수의 마음입니다. 가나 사람으로 나사렛 동네 사람에게 가졌던 편견으로 인해 주저하던 나타나엘에게 필립보는 와서, 보라고 권합니다. 필립보의 권면으로 나타나엘은 나사렛 출신의 한 남자에 대한 편견을 뒤엎고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47-48).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때 대화의 방향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언어로 이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배려하는 마음은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이 메시야를 만난 기쁨에 머물고 하늘의 열린 놀라운 큰 일을 보지 못함을 안타까와하면서도 그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던 점입니다. 너무도 분명한 좋은 결과가 보이는데 상대는 그것을 하지 못합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상대에게 강요하고 이를 받아들이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쉽게 정죄하곤 하는데 예수께서는 그가 놓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선언하지만 선택은 그의 몫으로 남깁니다.

정의를 위해 외치고, 불의를 고발하고, 현장에서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투쟁하는 평화를 만드는 자들의 주장과 행동은 옳습니다. 정의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를 바르게 세우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는 행동이 나의 삶이 정의의 삶이라고 믿는다고 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상대를 듣지 못하고 자신의 소리만 높이는 일입니다. 이로써 자기 의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게 되기도 합니다. 진정 배려하는 마음은 상대를 믿어주며 그 선택을 존중해주는 것인데, 이러한 배려의 마음은 실천하기 쉽지 않습니다.

세 번째 본문인 고린도전서 6:12-20하나됨이란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하느님과 합일된 삶을 강조합니다. 오늘의 시편 139:1-6도 나와 하나 되시는 하느님을 역설합니다. 내가 앉아도 서있어도 멀리 있어도 걸어갈 때도 누웠을 때도 내 모든 행실과 생각을 아시는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임마누엘하느님임을 보여줍니다. 이 시편의 고백은 예수께서 하느님이 내 안에 내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고백과 상통하는 고백입니다. 내가 하느님과 가장 가까워질 때 합일을 이룰 때 내가 진정 하느님의 자녀요, 예수를 따르는 자의 삶을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가장 가까워져서 하느님과 합일되는 삶, 예수의 따르미로 사는 삶은 무엇인가?의 힌트는 고린도전서 본문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통해 설명합니다. 자신은 어느 무엇에도, 탐욕과 성적 욕망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2-13). 하느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린 것처럼 우리를 다시 살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상대의 소리를 듣고,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며, 그들이 행동하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도록 인내하며 이끄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살리미스트의 일이며 우리의 탐욕과 욕망을 접고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두고 판단하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바울의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편지가 보여줍니다.

 

주체적인 배려와 생명살림을 실천하는 여신도회

우리 기장은 특별히 오늘을 여신도주일로 지킵니다. 하여 지금 함께 나누는 하늘 뜻의 중심주제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살펴보면서 하늘 뜻나누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이 듣는 마음과 배려하는 마음이 여성적 가치에 딱 맞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생명을 잉태한 경험이 있는 모든 어머니들은 생명에 대한 배려와 돌보는 것이 천성적이라고 여겨지고 나아가 모성이란 이름으로 그렇게 하도록 강요되기도 합니다. 흔히 여성적 가치로 돌봄의 가치를 말합니다. 실제로 여성의 대부분이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살림을 경영합니다. 늘 남을 배려하고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리에 서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여성들은 가족을 돌본다는 명목 하에 가족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그들이 주체로 서고 그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배려하기 보다는 자신이 00게 되어야하는 주관에 따라 가족들을 밀어붙이고 강요 아닌 강요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생명잉태와 생명돌봄의 여성들의 경험이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주는 것은 여성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소중한 측면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가족의 이익이나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배려가 되기 위해서 주의해야할 세 가지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먼저 살리는 일을 하는 여성이 주체자로 바로 서야합니다. 살리미스트로서의 주체적 인식이 없이는 남편이나 자식, 이웃 등 상대의 욕구를 채워주며, 그냥 메꾸기 식의 치다꺼리를 해주는 부엌데기로 전락합니다. 살림을 담당하는 사람이나, 그 대상 모두 건강한 삶을 누리기 힘들게 됩니다. 살리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살림꾼으로서 여성들이 남을 돌보는 일에만 매몰되지 말고 자신을 계발하고 주체적 인식을 세우려는 노력이 바탕이 될 때 진정한 배려가 가능해지고 살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서로 보살피거나 보살핌을 받는 관계로 얽혀 살아갑니다. 그리고 세상은 여성들에게 바라는 덕목 중의 하나가 남을 보살피는 일입니다. 소중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때로 여성의 삶은 이 덕목의 희생물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을 돌보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여성이 자신을 돌보는 일 역시 자식이나 남편, 혹은 노부모를 돌보는 일만큼이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샌드위치 세대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아직 덜 자란 아이들을 보살펴야 하는 동시에 연로한 부모님이나 친척들을 돌봐야하기 때문입니다. 중년이 되어 여성들이 지금까지는 좋은 딸,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어 다른 사람의 사랑과 찬사를 받기를 원했던 생각이 점점 자신의 영혼을 돌보고 싶은 욕구로 바뀌게 됩니다. 이 두 욕구 사이의 균형을 바로 잡지 못한다면 그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의 악화를 초래하거나 심한 우울증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살림은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할 때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억척같은 살림꾼들의 많은 경우 내가 안 하면 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혼한 친구나 여자 형제들을 보아도 집안 살림은 자신이 도맡아하고 남편이나 아이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많은 남성들이 두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부인이 자기보다 먼저 죽는 것이라고 합니다. 실지로 부인이 없으면 밥도 먹지 못하는 불온전한 남편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많은 여성들이 내가 안 하면 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으로 남을 돌보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양 생각하면서 모든 집안일을 다 해왔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여성들이 집안 일을 통해 희생할 것을 강요당해 왔다면 남성들도 집안일은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강요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남성들도 아이들도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지켜나갈 수 있도록 살림에 참여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살리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 역시 살림꾼으로서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살림은 집안이나 가족에만 국한된 일이 아님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지구촌 (global village)" 가족공동체의 한 일원임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생명살림과 돌봄의 노력이 가족이기주의에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생태계가 파괴되고 심한 인권이 유린되는 생명파괴의 자리는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살리미스트가 있어야할 자리임을 우리는 늘 기억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올 한해는 내 주장만 내세우며 독불장군처럼 앞서가기보다 먼저 상대의 소리를 듣고 배려하면서 하늘의 큰 뜻을 깨닫고 이를 함께 실천하는 향기로운 이웃이 되시기를 축원하면서 하늘의 뜻 펴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