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를 따라 오라 부르신다면?

요나 3:1-5,10; 62:5-12; 고전 7:29-31; 1:14-20

 

[이승만목사의 부고 소식]


지난 수요일 아침 바른교회아카데미에서 올해 책으로 출간될 세계와 한국개신교의 신학자 실천가 18명 중 한분이신 문익환목사님의 글을 부탁받고 며칠간을 끙끙대다 글을 마감하고 이를 담당자에게 보내기 위해 이멜을 여는 순간 저는 거기서 이승만목사님의 부고를 알리는 메일을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오래 전에 오셔서 하늘뜻을 펼치신 분이셨는데, 미국에서 83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신학적으로는 안병무교수님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면 목회에 있어서는 이승만목사님의 저의 스승이셨습니다. 이승만목사님은 평양 출생으로 평양 성화신학교를 다니던 중 625가 일어나 아버님 이태근목사님이 공산당에 의해 순교를 당하셨는데, 이때 목숨의 위협을 느껴 어머님과 여동생 넷을 두고 남동생과 함께 남하를 하십니다. 아버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해병대에 입대하여 5년간을 복무하고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나 그 이후 60년을 미국에서 사셨습니다.

 

그리하여 미국교회협의회 동양인 최초의 회장, 미국장로교 동양인 최초의 총회장을 지내시고 유니온장로교신학대학에서 선교학교수로 일하셨습니다. 60년대 루이빌대학의 교목으로 계실 때는 마틴 루터 킹목사와 함께 흑인민권운동에 나섰고, 70년대에는 박정희유신독재에 맞서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앞장서서 일하셨고, 80년대 이후 돌아가시기까지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온 몸을 바쳐 일하셨습니다. 남한에 문익환목사님이 계셨다면 해외에는 이승만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평양 봉수교회를 세우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고, 얼마동안은 중앙정보부가 블랙리스트에 올려 고국에 들어오지도 못하셨고, 빨갱이라고 종북이라고 하는 수많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화해의 사도로서 일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1981년 제가 뉴욕에 정착하면서 목요기도회에서 처음 만났고,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핵심단체였던 북미주기독학자회에서 목사님을 도와 일을 했습니다. 당시 이 단체를 주도하시 던 분들이 대부분 이목사님 또래였습니다. 저하고는 20년 이상 차이가 났었습니다. 그럼에도 40대 중반이었던 저를 부회장으로 뽑아주셔서 중요한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승만목사님은 목사 안수식의 설교자로, 첫 담임목회 임직 설교자로, 미국회중과의 통합예배 설교자로, 미국교회를 떠나 향린교회로 올 때에는 이임예배 설교자로, 유니온장로교신학대학에서의 목회학박사 논문 주임교수로 이외 수많은 보이지 않는 현장에서 향린교회로 오기 전까지 저는 존경의 마음을 품고 목사님과 함께 일해 왔습니다.

 

얼마 전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긴 하였지만, 돌아가시기 전 미국 방문 길에 한번은 뵐 수 있으리라 여기고 있었는데, 정말 우연찮게도 문익환목사님 관련한 글을 마치자 말자 저는 이승만목사님 부고 소식을 듣고 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114일은 이승만목사님 부고일이었고 지난 일요일인 18일은 문익환목사님 21주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지난 주 대구 새민족교회에서 하늘뜻을 마치면서 저는 문익환목사님의 꿈을 비는 마음이라는 통일 시를 읽어드렸습니다.

   

[한 이산가족의 숨은 이야기]


이승만목사께서 미국장로교 중동지역 총무로 일하실 때, 리비아에 출장을 가셨다가 어머님 생각이 나서 북한 대사관을 찾아가셨다고 합니다. 가서 어머님 생사를 알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며칠 기다리라고 하여 다시 찾아갔더니 북에서 원한다면 지금 바로 올수 있도록 초청장을 보내주겠다고 해서 예정에도 없이 1978년 독일을 거쳐 평양을 가셨고, 그때는 극비사항으로 아내에게만 알리고 가셨습니다. 당시 김일성주석의 어머님 강반석권사(그분의 아버님도 목사이셨습니다.)의 외삼촌이시던 강량욱목사께서 이승만목사님의 아버님 이태근목사님을 잘 알고 계셨기에 당시에는 쉽지 않은 평양 방문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떠날 때는 혹 어머님을 뵐 수 있을까 하고 갔지만, 도착해서 보니 어머님은 몇 해 전에 돌아가셨지만, 여동생 네 명을 27년 만에 만나 며칠 동안은 그냥 눈물만 흘렸다고 합니다.

 

하루는 의사인 막내여동생과 단 둘이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합니다. 생후 6개월 되었을 때 집을 떠났으니 기억은 거의 없었지만, 둘은 매우 다정하게 서로 얘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오빠 목사가 뭐하는 사람이야?' 사실 목사의 딸이 목사가 뭔지 모른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슬픈 일이었지만, 가능한 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 사회에서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말씀을 하였겠지요.

 

그런데 이 얘기를 듣던 여동생 하는 말이 '그러면 목사는 나랑 별 차이가 없네.' 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처음 의대를 나와 시골의 한 병원에서 일할 때에 심한 화상을 입은 환자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응급처치를 하고 나서 자기 왼팔의 안쪽 살을 떼서 이식수술을 했노라고 하면서 흉터를 보여주더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런 얘기 잘못하면 북한 찬양 고무죄에 해당하기에 믿을만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만 얘기를 하셨습니다. 물론 지금도 남쪽에서 이런 얘기 하면 북한 고무 찬양죄가 됩니다.

 

처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당시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북에는 가본 적도 없었고, 그때에는 북에 대해 알려진 게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남쪽에서 배운 대로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는 차가운 명령만 있지 어떤 인도적인 사랑이나 헌신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더구나 의사가 아무런 관계도 없는 환자에게 자기 살을 떼서 치료를 해주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고, 자본주의 미국사회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가난한 노동자들을 돕는 좋은 의사들이 있습니다만. 오늘날 쿠바의 의사 수천 명이 제3세계의 열악한 지역에 가서 봉사하고 있는데, 저는 이것이 진정한 사회주의 이념의 실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는 돈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사회주의는 먹고사는 것은 국가가 책임지고 국민들은 좋은 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서아프리카 에볼라 전염지역에 한국인 의사를 한두 명 파견하는 일을 두고 남한 정부에서는 무슨 큰일이나 하는 것처럼 엄청 떠들어댔지만, 사실 이미 그 이전부터 쿠바의 상당수 의사들이 목숨을 내놓고 그곳에 가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이 그러했듯이 공산주의 또한 그 기본 이념은 성서에 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과 저 복음의 차이]


오늘 복음서의 말씀, 마르코복음서의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세례 요한이 헤롯왕을 공개 비난함으로 옥에 갇히게 되자 갈릴리로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십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때가 다 되었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의 나라 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로 간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딘가에 정지된 상태 속에 있고, 우리가 그곳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가는 대신에 우리가 있는 곳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뭔가 심각하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데, 회개는 우리 맨 날 하지 않습니까? ‘아 내가 잘못했구나.’ 그런데 간혹 후회하고 회개하고 혼돈할 때가 있습니다. 후회와 회개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그리고 또 예수께서는 이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마치 예수님 당시에는 이 복음말고 이미 복음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복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과 저 복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복음이란 복된 소리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어 복 받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서를 읽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복이 완전히 다른 것임을 깨닫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느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세상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과 에수께서 말씀하시는 이 복의 모순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예수께서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고 외치신 다음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어부 시몬과 안드레를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부르시자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둔 채 예수를 따라 나섰다.

    

[평신도가 더 휼륭하다]


사실 교우 여러분들이 이 장면을 읽을 때에 제일 켕깁니다. 이거 뭐야 나는 아직도 부모님께 매여 있고, 생업에 매여 있는데... 그리고 이 부분에서 목사들이 대부분 목에 힘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기죽지 마세요. 아니 너도나도 생업 때려 치고 목사가 되면 헌금은 누가 냅니까? 그러니 여러분 전연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저도 직접 경험하지 않아 장담할 수는 없는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교회의 목사와 장로가 동시에 죽어서 천국 문을 들어가게 되었는데, 목사가 먼저 들어갔습니다. 문 앞에 앉아 있던 베드로가 신문을 보다 슬쩍 쳐다보더니 계속 신문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목사가 기분이 상했습니다. 아니 나를 못 알아보나. 별수 없이 그냥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뒤 따라 오던 교회 장로가 들어오니까 이 베드로가 신문을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아이고 그래 아들아 수고했다. 그러면서 어깨를 두들겨주고 포옹에 뽀뽀까지 하더라는 겁니다.’ 목사님이 보다 못해 배알이 뒤틀어져서 따졌다지 않겠습니까? ‘베드로 사도님, 이거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개척교회 목사로서 평생 주님의 몸 된 교회만 섬기다 왔는데, 저는 본체만체 하시고 장로는 저렇게 반기시다니요?’ ‘야 너는 돈 받으면서 교회를 섬겼지만, 저 장로는 돈 내면서 교회를 섬겼지 않느냐?’

 

여러분 목사들한테 기죽을 것 하나도 없습니다. 저야 교회 한 가지 일만 하지만, 여러분은 세상 일도 하고 교회 일도 함께 하지 않습니까? 저야 목사니까 남의 이목을 생각해서 할 수 없이 선한 일을 하지만, 여러분은 자발적으로 선한 일을 하지 않습니까? 목사들이 강단을 독점하고 성서구절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얘기해서 그렇지 실은 평신도들이 목사들보다 더 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와 목사에 관련해서 천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이보다 더한 얘기도 있는데, 목사 위신도 세워야 하니까 오늘은 그만 하겠습니다.

 

여기서 처음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동료들을 버리고 부모님을 떠나 예수를 따른다고 할 때 그 따름의 의미는 지금 나에게 있어 무슨 의미인가? 이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에서 많은 분들이 돈 버는 일 때려 치고 신학교가서 목사하고 선교사합니다. 잘 나가는데, 때려 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실패하다 부름을 받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럽 여러 나라들은 목사가 부족해서 곤경을 당하고 있는데, 우리는 너무 많아서 곤경을 당하고 있습니다. 현재 개신교회는 교인 수와 교회가 점점 줄고 있는 상황에서 신학생 목사지원자들은 줄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이 부분에서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유앙겔리온'(복음)]

복음서 저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일은 가족과 직업을 포기할 만큼의 희생과 헌신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는 예수 믿는 일은 로마의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일이었던 만큼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 복음을 믿으라에서 이 복음에 반대되는 저 복음은 바로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예수께서 광야40일 단식 중에 시험을 받으셨던 세상 권력과 명예와 부를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이라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복음서 저자들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본래 로마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로마 시민들에게 알리던 소식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정치적 언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군사적 승리는 소수의 로마시민들에게만 혜택이 오는 것이고 패한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노예로 전락하는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로마의 소수의 시민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이 군사적 가치에 저항해서 국가와 민족과 이념을 뛰어 넘어 모든 인간이 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복음인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로마의 군사들이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전쟁터에 나가 전쟁을 하듯이 예수의 제자들도 그만한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씀인 것입니다. 요즘 노동자들을 위한 거리 시위에 나섰다가 구속을 당해 재판을 받거나 벌금형을 받는 시민들이 많고 우리 교우들도 몇 분이 계십니다. 정당한 시위를 제재하는 현재의 정치상황 아래서 이런 일은 예수를 따르는 일에 있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하느님의 나라란 세상의 힘 있는 자들이 말하는 세상 가치에 저항해서 약자에 대한 우선적 사랑 이라는 연대를 통해 다가온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들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는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요나의 숨은 의도?]


요나서는 일종의 우화(寓話)입니다. 제가 지금 이 얘기를 어느 보수교단 신학교나 보수교회에서 이 말을 했다면 쫓겨날지도 모를 발언입니다. 우화는 동식물을 인격화함으로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문학 양식입니다.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반발하기에 돌려서 얘기하는 방식으로 일상적인 사고의 틀을 깨는 진리 선포의 한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서를 쓴 저자는 당시 청중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이미 읽고 오셨으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요나라는 유대인 예언자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는데 그건 니느웨라는 도시에 가서 회개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유대인들의 적국인 앗시리아의 수도입니다. 요즘 모술이라는 북이라크의 고대도시입니다. 현재는 이슬람국가의 수중에 넘어가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 나라 백성이라면 모르지만, 그는 원수의 나라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죽어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을 갔습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풍랑 얘기, 큰 고기 뱃속에 갇힌 중간 얘기는 다 생략하겠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집에 가셔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 여차여차해서 요나가 니느웨 도시에 가서 회개하라는 얘기를 했는데, 하루 만에 그만 모든 백성들이 왕으로 부터 모든 신하 심지어는 가축까지 베옷을 입고 단식하면서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요나서가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동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건 이것입니다. ‘야 너희들이 미워하는 원수 저 앗시리아인들도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전폭적으로 회개를 하는데, 너희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실제 행동은 변화가 없으니 도대체 뭐냐 하는 책망이 담겨 있는 말씀인 것이지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북조선 주민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다 회개하는데, 남한 사람들은 교회만 열심히 나가지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를 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앞서 후회와 회개가 어떻게 다르냐 하는 질문을 던졌는데, 후회는 그냥 마음으로 뉘우치는 것이고, 회개는 가던 길을 돌이켜 반대로 가는 실천의 행위를 말하는데, 요나서가 말하는 회개는 단순히 한 개인의 변화가 아닌, 왕으로부터 시작하는 변화 곧 국가권력이 회개함으로 정치사회 구조를 바꾸는 변혁적인 일임을 말하는 말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후회의 차이]


예수께서 외치신 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 또한 한 개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 자체에 대한 변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 조금 나눠주는 단순 복지가 아닌, 더 이상의 가난한 자가 나오지 않도록 그 구조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이 날수 있도록,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가 피어날 수 있도록 가난한 집의 자녀들이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성공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 국정연설에서 미국의 오바마가 가장 중요시 다룬 문제는 경제민주화곧 평등의 문제였습니다. 부자증세를 통해 소득 불평등을 줄이고 중산층을 살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부자증세를 통해 최저임금 인상, 중산층의 세금 인하, 2년제 컴뮤니티 칼리지 무상교육을 실현하자고 말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미국이 자국 백성들의 경제적 정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제3세계의 경제 불평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어 실망을 했습니다만, 그래도 부자증세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박근혜씨 또한 새해 기자회견에서 가장 강조한 것도 경제살리기였습니다. 경제라는 단어를 무려 42번이나 언급했습니다. 아버지가 독재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을 통해 지지층의 영웅이 된 것을 보면서 자신도 아버지를 좇아가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청년 취업자의 20%1년 이하의 계약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이 절망의 시대에 비정규직 고용기간 2년을 1년으로 줄여도 시원찮을 판에 반대로 4년으로 늘리고자 하고 있습니다. 노동시장 유연화의 이름으로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일제의 천황폐하 국가충성이라는 구국관이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서 천황 폐하의 말에 모든 백성들이 절대복종 충성하였듯이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대통령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이고 노동자들 또한 재벌들이 요구하는 노동에만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국민을 동원의 대상으로 보듯이 노동을 동원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 노동의 근본 곧 노동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행복해지며 또 어떻게 하면 노동을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도록 할 것인가 하는 철학의 부재에서 오는 것입니다.

 

요즘 박근혜씨의 지지율이 30%로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증세 없다고 해놓고는 담배세 올리고 연말정산에서 받는 서민들의 혜택을 은근 슬쩍 줄이려다 발각이 난 것입니다. 세수 늘어나면 그게 증세지 뭐가 증세입니까? 누가 기부했나요? 정치 해보니까 증세하지 않고는 자신의 공약 지키기 어렵다 그러니 이해해달라 그렇게 솔직하게 국민의 동의를 구하면 좋은데, 자기가 틀렸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기 싫으니까 자꾸 뻔히 들어나는 거짓말만 하게 되니까 지지층의 이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김기춘 비서실장 청와대문고리 삼인방의 권력이 너무 집중되어 있으니 여야는 물론 모든 국민이 교체하라고 그렇게 말해도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새로운 사람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닫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65년 평생 살면서 언제 혼자서 여행을 한번이라도 가보았겠습니까? 초등학생 어렸을 때부터 경호원의 보호 아래 살았습니다. 그분은 새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전연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고 독립적 사고라는 것을 별로 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가장 발랄한 십대 이십대에 어머님 아버님 두 분 모두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그것도 가장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살해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어느 누구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나 기차를 탈 때, 옆에 누구를 앉혀 본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안병무선생님 표현대로 하자면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닫힌 사람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인간적으로 그분이 당한 아픔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대한민국의 미래와 우리 사회의 약자들의 생존권이 그의 판단에 달려 있기에 하루라도 빨리 자기의 경험이 만들어 놓은 어둠의 동굴에서 나오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호스 메]

 

끝으로 고린도전서 7장의 바울의 말씀을 잠깐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아내가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마치 ....가 아닌 것처럼살라는 구절인데, 이를 그리스어로 호스 메라고 불러 호스 메 신앙으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불가에서 말하는 색즉시공과도 그 뜻이 닿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자족하는 길은 불교나 유교 혹은 힌두교 사상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이 말씀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가장 먼저 나오는 아내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처럼 하라는 건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는 글입니다. 결혼반지도 빼고 다니고 싱글처럼 행세하라는 건 부부싸움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7장 전체는 믿는 자들의 결혼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가능하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결혼 전에는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살지만, 결혼하면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제할 수 없으면 결혼하라고 권고합니다. 당시는 가부장적 사회였으니까 남편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그 집안은 전체가 교회에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남편은 안 믿고 아내가 먼저 교회에 나오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남편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런 경우 만약 어떤 부부가 교회 안에서 너무 다정하게 굴면 혼자 나오는 부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 상처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내가 있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이 있는 사람들도 교회 안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으니 자랑하지 말고, 좋은 물건을 샀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으니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부부가 함께 앉아 있다가 떨어져 앉지는 마세요. 그러면 또 부부싸움 한줄 오해하니까요. 아 이거 하늘뜻펴기 참 힘듭니다. 이렇게 하라고도 못하고 저렇게 하라고도 못하고, 그냥 여러분 편한대로 앉으세요.

 

예수께서 처음 외치신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지금 주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하고 부르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물음을 품에 안고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