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귀를 넘어 몸으로"

시편 111:1-2,7-10; 신명 18:15-20; 고전 8:1-13; 마르 1:21-28

     

조 은 화 목사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담뱃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우편요금은 이제 곧 90원이 인상될 예정이고 곧 있으면 소주값까지 오르게 될 조짐이 보입니다. 점점 서민들의 목을 조르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한 충격은 바로 자녀 없이 혼자 사는 사람들을 겨냥한 소위 싱글세 폭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녀 없이 맞벌이를 하는 부부에게도 해당 될 처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분개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시대에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제 마시는 공기까지 세금물려 뜯어갈 기세다!” 라는 어떤 글을 보며 지금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정말 너무나 이상하게 되어가는구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라의 돈이 없다며 서민들을 겨냥한 증세는 해놓고서 정작 부자증세는 없습니다. 부자들의 세금은 어떻게든 감면해 주어 편하게 돈을 많이 벌도록 해주는 비합리적이 혜택은 어떤 생각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요즘 또 하나의 이슈로 등극하고 있는 것은 이명박씨의 자서전 대통령의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어느날 해성처럼 나타나 참 말이 많습니다. 한국수자원공사의 부채 누적과 22조원의 예산 투자로 녹조라떼 등 생태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정작 본인은 4대강사업으로 금융위기를 극복했다고 합니다. 자원외교에 대한 반성보다는 자화자찬 혹은 책임회피로 가득한 이 책은 벌써부터 말이 많습니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 중에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 100% 공약실천이라는 제목에 만화비평을 보게되었습니다. 카톡을 이용한 박근혜씨와 비서들의 이야기입니다. 자기네 컨셉이 증세 없는 복지 인데 이거 어떻게 할까라는 고민을 내놓습니다. 그러던 중 묘안을 찾습니다. 바로 이 글에 점하나만 찍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마침표? ? 그 점을 증세 없는 복지.”가 아닌, “증세. 없는 복지이라고 한다면 정책을 100% 잘 이행했다는 것이지요. 증세는 가득하고 복지는 없는, 현 정부의 책임성 없는 정책을 비꼬아 만든 만화비평이었습니다.

 

서민들의 아픔을 외면한 체 무엇에 초점을 두고 있는가? 부자에게는 좋은 나라 서민에게는 힘든 나라를 몸으로 느껴질 만큼 이제 우리 삶과 너무도 밀접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석기 의원의 재판과정이나 통진당 해체에 관련해서도 이제 정부는 갈 때까지 간 것인가 하는 안타까움과 분노가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넋을 놓고 이것을 지켜만 봐야 하는가?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 고민을 우리는 오늘의 주어진 본문을 통해 방안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권력이 행하는 폭력]

 

1성서 본문인 신명기는 그 옛 시대에도 역시 강한 자의 세상이었음을 알립니다. 유다왕국이 망하기 직전의 상황에서 왕권과 예언자들의 세력이 모든 것을 재패하고 맘대로 향유하던 때로 민중들을 향한 소위 갑질이 기승을 부리던 때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신명기는 예언자들이 조심하고 권력을 남발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법이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약자들을 위한 법을 키워내야 함에도 신명기는 당시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유다의 멸망을 낳게 된 상황에서 신명기는 지금의 권력의 남용을 멈추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특별히 예언자직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상기하도록 합니다. 예언을 말할 때 ‘~하지 말 것에 대한 규제의 내용입니다.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 제대로 듣고 말할 것을 강조합니다. 예언자들이 강대국의 이데올로기가 가득한 주술과 그들의 지배이념을 부러워하며 끌려갈 것이 아니라 이럴 때일수록 더욱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해방하시는 주님의 본뜻에 귀 기울여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참과 거짓은 현실의 역사 안에서 조명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안에서의 폭력]

 

2성서의 고린토전서 13장은 당시 문화에서 어쩔 수 없이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당시의 문화에서는 고린토에 있는 대부분의 고기는 이방제사에 올려 진 것들이 시중에 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 그 음식을 나누는 일들 속에서 이웃과 만나고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처신했는가 하면 소위 그리스도의 지식을 안다는 사람들은 남의 집에 제사에 올려 진 제물을 먹는 문제가 전혀 걱정스럽지 않았습니다. 왜냐햐면 하느님 외에는 다른 신은 없다는 것, 그러니 다른 우상 앞에 놓여 진 그 음식이 정말 이방신이 임재해 있어 먹으면 두려움이 가득한 신앙을 넘어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들은 다 괜찮다는 생각으로 먹지만 어떤 교우들은 아직 우상의 사당에 앉아 제물을 먹고 있는 것을 마음 편히 받아들이기에 불안하고 힘든 사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만약 우상사당에 앉아 제물을 먹고 있는 것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 본다면 그는 양심에 꺼리면서도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서 힘겨워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이 약한 사람은 지식이 있다는 그들의 행동으로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8장 초반에 우리는 다 지식이 있다. 그러나 사람을 향상시켜주는 것은 사랑이다라고 합니다. 자신은 이미 다 알고 있어 깨달음이 있어 어떤 행위를 해도 괜찮지만 다른 이들을 감싸 안고 그들이 나의 앞서가는 행동에 상처받지 않도록 협의하며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멈춤이 아니라 그 지식을 확장시켜 소통과 얼싸안음으로 가야함을 고린토전서는 보여줍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아주 출중하게 있다 할지라도 공동체 안에서 현실 안에서 연결되어 사람들과 풀어가지 않으면 안됨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권력의 규제를 통해 절제함을 알고, 그 앎을 통해 공동체에서의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면 만족할만한가? 오늘의 마르코복음은 더 깊은  중요한 가르침을 안내해줍니다.

 

[자기 내면의 폭력]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를 해줍니다. 이야기의 시작을 가파르나움, “나훔의 동네”, “위로의 동네라는 지명을 가진 곳으로 시작합니다, 이 장소는 갈릴리 지역인근으로 예수의 첫 번째 활동을 귀신축출로 기록합니다. 귀신축출 이야기 직전에 4명의 어부를 불러 제자로 부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 이후 곧바로 회당의 더러운 영의 이야기를 통해 편집상의 이음새를 엿보게 됩니다. 사람의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 첫 번째가 바로 귀신축출임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귀신이 들렸다.”라는 말은 산사람과 귀신으로 나뉘어 보일 오해가 있기에 오늘 본문에서는 귀신들린 사람을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한 사람으로 표기하겠습니다. 물론 본문에 나온 이 한 사람은 말이 한사람이지 사실 전체를 대표합니다.

 

[새로운 가르침 VS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

 

우리는 새로운 가르침과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의 관계를 보기에 앞서 21절의 번역상에 독특성을 발견합니다. 바로 21절이 갖고 있는 실제 번역은 현재형 어법으로 번역하면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갑니다라는 것입니다. 이야기 전체가 과거형으로 서술되었는데 오직 21절만 현재형동사 쓰고 있다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생생하게 그려내려고 하는 마르코복음서의 독특한 신학적 의도라 볼 수 있습니다. 귀신축출 이야기는 마르코입장에서 과거의 사건 기록 같지만 내용상으로는 현재의 우리와도 관계있는 지금의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그럼 우리의 이야기라고 하는 회당안의 벌어진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회당 안의 사람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가운데 첫 번째로 마주친 것은 바로 인간에게는 제 가진 것을 버리지 못하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욕심은 극복하지 않고서는 가진 것을 버릴 수 없고 더러운 영을 내쫓아 회개시키지 않고서는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마르코의 독특한 화법은 다음에도 이어집니다. “가르쳤다.” 무엇을 가르쳤는가? 라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그 가르침의 권능 때문에 사람들이 놀란 것이라고 합니다. 그 가르침이란 무엇이었을까요? 22절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놀랐다때리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로 때려 맞은 만큼의 충격을 받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의 내용에 대한 언급은 없이 갑자기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나타납니다.

 

안실일에 유대교의 회당안에 어떻게 더러운 영이 있었겠는가를 생각할 때 이 설정의 이면에는 유대교의 회당과 안식일의 허구성을 폭로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들로 휩싸인 사람의 등장은 결국 거룩하다고 하는 회당 안에 온 유대인들 모두가 실제는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임을 시사합니다.

 

더러운 영, 오늘날의 언어로 풀자면 한마디로 신자본주의에 물들고 돈이면 다다, 돈이면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식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는 예수에게 이야기합니다. “야 나사렛 예수, 왜 우리 맘대로 살겠다는데 감놔라 배놔라 말이 많아? 그래서 뭐 우리한테 어쩌기라도 하겠다는거야? 그래 잘났어 정말, 당신이 하는 말은 거룩하니 하느님의 말씀이야 그런데 그 거룩하신 말씀에 전혀 관심 없거든 그러니까 제발 좀 내버려두란 말이야.” 더러운 영의 반응은 매우 공격적이고 적대적입니다. 나사렛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야유하며 회당에서 예수의 활동에 강력한 이의를 제의합니다. 이런 상황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꾸짖습니다. “그 입 다물고 당장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그 더러운 영은 경련을 일으키며 난리를 치고 떠납니다.

 

오늘날 하느님의 모든 권력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탐욕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꾸짖음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큰 소리 지르고 경련을 일으키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분명 머릿속에 돈으로 가득한 사람, 권력의 힘으로 꽉 찬 사람, 그 머리에 쥐가 나오고 몸에 쥐가 나고 들을수록 괴로워서 견딜 수 없는 큰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육체의 요구를 따라 그냥 살 것인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사느냐 죽느냐에 문제입니다. 이기심과 탐욕에 따라 살던 나는 더러운 영에 싸여 살던 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고통스럽습니다. 내 소유, 내 몸둥아리, 내 가족만 중시하며 살던 사람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이 방식에서 180도 전환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변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의 정부도 그렇구요. 지금까지 나를 형성해온 모든 욕심된 것들로부터 탈피하고 내 이웃과 새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눈과 귀를 넘어 몸으로 살아가는 길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마르코복음 본문을 통해 참 제자란 회당에서 일어난 사건은 회당사건 바로 앞에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의 일과 관련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는 더러운 영에 취하여 이기심과 탐욕을 좇아 살던 욕심꾸러기들을 더러운 영에서 해방시키고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받아 퍼주며 사랑하는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도록 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사람들임을 보게 됩니다. 한마디로 몸으로 직접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몸으로 살아가기]

 

기독교인이 1/4이라는 놀라운 세상이지만 돈과 권력에 욕망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굶어 죽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세계의 전쟁을 끊임없이 치러냄으로써 강대국들의 무기판매를 돕고 있습니다. 강대국들의 돈과 권력을 기반으로 탄생한 다국적 기업들은 전 세계를 누비며 자본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손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현대의 바알리즘이라 불리는 신자유주의의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파악되고 돈으로 계수됩니다. 이것이 현대의 합리성입니다. 어떤 것이든 심지어 사람의 목숨까지도 돈이란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제 더 이상 노동은 신성한 무엇이 아니며 시 분 초 단위로 정밀하게 측정되는 시간의 계산에 따라 돈으로 평가될 수 있는 양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비정규직이 왜 많아졌습니까? 돈의 효율 때문이 아닌가요? 심지어 교회에서도 자본의 논리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교역자들을 줄이고 부목사를 전임전도사로, 전임전도사가 있던 자리는 파트교역자로 대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 몸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앞에 놓인 삶은 어두운 이 현실에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모든 것들과 투쟁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들과 싸웠던 것처럼 세상과 그리고 내 안의 그릇된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를 계속 압제하며 악한 영에 휩싸인 현 정부가 정신 차리게 해야 할 것이고 우리 내면에서도 꿈틀거리고 있는 탐욕의 눈, 신자유주의에 물든 사고체계를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몸으로 살아가는 투쟁의 길에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말씀을 삶의 기반으로 삼고 그것이 존재의 이유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기 존재를 바꾸고 새롭게 가는 삶을 위해 우리 모두 정진하기를 소망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