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2:14-10; 103:1-13,22; 고후 3:1-6; 2:13-22


예수에게
12제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의가 별로 없는데, 그러나 그 열두 제자가 정확히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12명의 남성 제자 외에 여성제자들도 분명 함께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고, 루가복음에는 이 12제자의 포함 여부는 알 수 없지만, 70명의 제자를 파송하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의 제자가 모두 몇 명이었느냐? 12명은 정확히 누구누구였냐에 대한 답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습니다만, 제자의 질을 논하게 되면 더 큰 문제가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제자는 단순히 그 선생 밑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공부를 했느냐는 햇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생이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 곧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까지 함께 하며 선생님을 보호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남성제자는 모두 도망을 갔고 여성 제자 몇 명만 남아 있었으니 말입니다.


[
예수 제자의 의문들]


열두 제자에 관련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애초 어떤 기준에서 이들을 선택했고
, 이들과의 첫 만남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어부였던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같은 어부였던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장면과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얘기되는 알패오의 아들 세리 레위를 부르신 장면입니다. 이 다섯 제자를 부르시는 얘기는 모두 그들이 예수가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부르시자마자 평생 직업을 그 즉시로 그만 두고 예수를 따랐다는 즉각적인 응답과 과감한 결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직업을 바꾸는 일에 있어서도 가족들과 논의를 하는 것인데, 아예 그만 둠으로 수입이 끊기는 상황 속에서 가족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지도자로서의 자격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베드로는 결혼까지 한 사람이었기에 아내를 버리기로 마음먹지 않는 한 그렇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세리 레위 이야기도 문자 그대로 읽어서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 더욱이 레위는 제자직 자체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마르코복음의 같은 이야기가 마태오와 루가복음에도 나오는데, 루가복음에서는 레위라 부르지만 마태오복음에서는 이 사람을 마태오라고 부르고 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오늘 본문에서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에서 알패오의 아들은 레위가 아닌 야고보입니다. 심지어는 마르코복음마저 2장에서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얘기를 해놓고는 3장에서 12제자의 이름을 열거하면서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말하지를 않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라고 같이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레위라는 이름은 네 복음서 12 제자 명단에 없습니다. 레위가 야고보로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만, 제자 야고보는 세리 출신이 아니기에 이 또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서가 기록된 것이 실제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보다 최소한 4,50년이 흐르다보니 제자들의 이름과 그들에 관련한 얘기들이 서로 뒤섞여 있었다는 것이고 12제자라는 의미도 그 숫자에 있다고 보기보다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상응하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복음서의 얘기들을 얼마만큼 신뢰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데
,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성서를 문자로 읽어서는 안 되고 전체 맥락 속에서 복음서 저자가 예수의 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그 핵심을 잡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로가 고린토교회에 보낸 둘째 편지에서 말한 것도 같은 주장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성서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 해석의 관점은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
제자 선정 기준?]


오늘 복음서 말씀의 핵심은 예수께서 세리를 제자로 삼으셨다는 사실입니다
. 세리는 당시로 말하면 로마의 앞잡이로서 같은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 곧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일제시대 일본 순사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조선사람을 누구나가 싫어하고 경멸하였듯이 당시 유대 백성들도 로마의 하급관리로 일하는 세리들을 경멸하고 미워했습니다. 루가복음에 등장하는 세리장 자캐오의 얘기를 추론해보면 그래서 세리들은 그 증오심을 부의 축척과 출세로 대신하였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저들을 경멸하면 경멸할수록 저들은 악착같이 부자가 되고자 하였고 출세를 위해 더욱 로마에 아부를 하였습니다. 그래 상호간의 증오심과 적대감은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리를 예수께서 제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 취급을 해준 것입니다. 아니 사람 취급을 넘어 하느님 나라의 동역자로 사람을 부르는 지도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는 하나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 세상의 기준에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더욱 예수의 제자 가운데는 혁명당원이었던 시몬도 있었습니다. 혁명당원은 당시 폭력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젤롯당원들을 의미하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테러리스트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테러리스트가 말할 때 저는 단순히 자살폭탄자와 같은 사람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드론이나 전투기 미사일을 통해 무차별 폭격을 하는 정부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12제자 중에는 이렇게 어부, 세리, 혁명당원과 같이 당시의 세상 기준에서는 결코 지도자가 될 수 없었던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는 묻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세리와 죄인]


세리를 불렀습니다
. 그러자 놀랄만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세리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고 그래서 레위가 예수님을 대접하는 자리에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로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도 함께 모였습니다. 여기서 죄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죄를 저지른 범죄 집단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당시 하루하루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대교가 해서는 안 된다고 하던 율법의 조항들을 어길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민중들을 부르던 싸잡아 부르던 지배층의 용어였습니다. 곧 예수와 함께 어울렸던 무리 혹은 군중으로 번역되는 오클로스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죄인은 종교적 용어였고 사회용어로 말하면 불순분자우리말로 하면 종북주의자, 빨갱이가 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어떻게 스승이라는 사람이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때 예수께서는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답변합니다. 당시 이 얘기를 들었던 제자들이나 후대에 이 글을 읽는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병자와 죄인은 함께 식탁에 둘러앉은 저들이 아니라 예수에게 시비를 거는 저 잘난 체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의인과 죄인의 구분 방식]

 

파스칼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다. 의인과 죄인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우선은 자기입니다. 논쟁이 일어나면 자기는 옳고 상대방은 틀립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말은 선악 기준의 자기 주관 내면화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이 자기 주관의 내면화가 권력을 만나게 되면 한 치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자기 절대화가 일어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권력의 중추에 있는 국정원과 청와대는 절대 선입니다. 선악과를 마구 따먹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선과 악의 기준을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잘 알려진 비유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 바리새인은 성전 가운데 서서 두 손을 들고 남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준지 일을 바칩니다.’ 반면 세리는 성전 구석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칭 의인으로 행세하는 바리새인은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 되고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세리는 하느님 앞에서 의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의인과 죄인의 기준이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무엇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까? 자기 성찰입니다. 자기를 알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의인이 되고 자리를 남과 비교하면서 높이는 사람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는 최후의 심판에서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 오른쪽의 양의 무리들이 예수를 향해 말합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으며 언제 주님께서 목말라하셨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언제 옥에 갇혔을 때 우리가 찾아뵈었습니까? 전연 기억이 없습니다.’ 왼쪽의 염소의 무리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언제 주님께서 목말라하셨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언제 옥에 갇혔을 때에 우리가 찾아뵙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누구보다도 선행을 열심히 행한 사람들입니다. 이건 착각이자 오해이며 모함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요, 그에게 행하지 않는 것이 곧 나에게 행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의인으로 인정함을 받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을 전연 기억하지 못합니다
. 왜 기억하지 못할까요? 작은 자들의 아픔이 곧 그들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 자비를 베푼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 악인들은 자신의 선행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절로 일어나서 남을 도운 것이 아니라, 법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남의 눈을 의식하면서 의도적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곧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기억 유무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두 개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선행을 기억하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서 버림받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있듯이 스스로 의인으로 여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한 말이 자신들을 두고 하는 말인지는 전연 생각하지 못한 채 오히려 더 예수에 대한 비판을 날카롭게 세웁니다
. 요한의 제자들도 우리들도 단식을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잔치 집에 참여한 신랑 친구들이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 앞으로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을 할 것이다.’라고 뭔가 깊은 여운을 담긴 말씀을 하시면서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은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다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금 너희들이 주장하는 단식과 같은 종교적 규율들은 낡은 옷이고 낡은 포도주이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새 포도주이며 새 부대이다라는 은유의 말씀인 것입니다.

 

[계율의 근본 목적]


단식의 목적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입니다
. 그 하느님의 뜻이란 이사야서 58장에 기록된 대로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이 지시한대로 일주일에 두 번 밥을 굶는 그 행위 자체만을 하느님의 뜻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들은 의인이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죄인이 되는 구별과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을 계율의 목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식을 통해 생명의 연대성과 육체의 허망함을 인식하고 억울하게 묶인 이를 풀어주는 정치적 행동과 배고픈 이들과 가진 것을 나누는 경제적 평등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로마제국에 상응하는 말이고 이 복음또한 로마 황제가 말하는 저 복음을 대체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로마가 추구하는 창과 칼에 기초한 Pax Romana는 저 복음이었으며 예수께서 외치는 앞선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앞서게 되는 혁명적 평등에 기초한 Pax Christi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당시 로마 황제가 말하는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구호에 반대되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소유형 인간이 되어 로마 제국의 하수인으로 전락되어 가는 우리들을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본래의 창조적 인간성을 회복하는 존재형 인간으로의 변혁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새 포도주와 새 부대였던 것입니다.


[
온도계와 온도조절기의 인간형]

 

흑백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투쟁하다 백인우월주의자의 총탄에 쓰러진 마르틴 루터 킹목사는 인간 유형을 온도계온도조절기로 나누어 말합니다. 온도계의 인간형이란 방안의 온도를 표시해주는 곧 세상적 가치를 그대로 따라가는 모방형 인간을 말하는 것이고, 온도조절기의 인간형은 방안의 온도를 조절하는 곧 사회의 구조를 바꿔나가는 혁명적 인간을 말합니다. 남들이 걸어간다고 하여 그 길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는 사람은 생명은 있으나 이미 자기라는 주체가 사라진 죽은 사람입니다. 반대로 세상 안에 살아가지만, 끊임없이 세상이 나아갈 참 길을 제시하고 그리고 그런 변화를 위해 저항하고 투쟁하고 연대하는 인간이야 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수요일이 함석헌선생님 26주기 기일이었습니다만, 선생께서는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 뜻 깨달으면 얼(),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 영원히 멍에를 메고 맷돌질을 하는 당나귀다.’ 나 자신이 살아 있는 하나의 씨ᄋᆞᆯ임을 깨닫고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나아갈 때 참 얼의 사람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흙에 묻힌 죽은 이와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민족은 동족상잔이라는 끔찍한 전쟁을 겪었으니 전쟁이 없는 세상, 평화통일을 위해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인에게 꼬리 흔들어 던져주는 뼈다귀나 먹는 개나 하구한날 먹고 살 퉁퉁 쪄서 삼겹살구이로 사라지는 돼지나 아니면 무거운 짐을 지고 연자 맷돌 빙글빙글 도는 당나귀와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반도
평화와 미군]

 

저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지 묻고 싶습니다. 하늘의 뜻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인가? 더 이상의 전쟁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며 진정 평화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 10년 전 미군은 용산과 동두천의 미군기지들을 평택으로 옮기겠다고 하면서 평생 농부로 살아온 대추리 대두리 농민들을 내어 쫓아냈습니다. 당시 생각 있는 많은 시민들과 평화운동가들이 이에 저항했습니다. 저희 교회도 그곳에 가서 현장예배도 여러 번 드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정부는 폭력으로 평생을 일구어온 저들의 땅을 빼앗아 군사기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10년이 지나서 하는 말이 용산과 동두천의 기지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말합니다. 미군이 대한민국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입니다. 그런데 대통령과 국방부장관은 미군이 필요하면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분들이 정말 대한민국 관료들인지 아니면 미국 관료들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약속 지키라고 요구하고, 용산과 동두천 기지 그대로 유지하려면 평택 땅 도로 내놓으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게 상식이 아닌가요? 그런데 이렇게 비상식적인 강도짓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우리 국민들 별로 분개하지 않습니다. 힘 있는 놈이 그러겠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그러면서 내 월급봉투 두께만 관심합니다. 돈이 다른 구멍으로 펑펑 빠져나가고 있는데, 본인 것만 열심히 챙긴다고 해서 챙겨지나요? 예수께서 열심히 일하던 제자들을 부르시는 건 생각이 있는 너라도 직업전선에서 벗어나서 백성 깨우는 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부르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 주위에는 수많은 미생들이 있습니다. 하루 15시간 일을 해도 겨우 먹고 삽니다. 게다가 비정규직이라 하루하루가 불안합니다. 십년 이십년 죽어라고 일을 했는데, 어는 날 갑자기 해고를 당해 너무 억울해서 눈보라 몰아치는 150미터 굴뚝 위로 올라가 소리를 쳐도, 도심 한 복판 누울 곳도 없는 위험한 광고판 위로 올라가 현수막을 내리 걸어도, 얼음장같은 아스팔트 바닥을 온 몸으로 기어가도, 광화문 천막에서 200일 넘도록 촛불을 켜도, 힘 있는 자들은 외면합니다. 조용히 주는 대로 먹고 살면 되지 왜 세상을 시끄럽게 하냐고 말합니다. 그런다고 죽은 자식들이 살아 돌아오느냐고 힐난합니다.


[
평화와 경제]

 

지금 남한은 극소수 대기업과 재벌의 나라입니다. 기업유보금이 700조원 이상으로 올해 예산의 두 배에 달하고 가계부채는 국내총생산 대비 86.6%1200조원으로 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과 같습니다. 대기업엔 돈이 넘쳐나고 개인은 빚더미에 눌려 죽을 판인데 일자리의 질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시간당 5580원인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전체의 12%180만명에 달하고,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거의 똑같이 일하는데, 임금은 절반 수준입니다. 이런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거의 절반인 850만명입니다. 청년 노동자의 첫 일자리의 36%가 비정규직입니다. 미생에서 비정규직의 주인공 장그래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현실은 대학을 나와도 비정규직이 상당수입니다.

 

중산층이라고 한다면 한마디로 먹고사는 일에 큰 걱정이 없는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는 가정을 말합니다. 최근 정부가 연말정산 관련하여 증세 꼼수를 부리면서 중산층을 연간 55백만원의 수입이 있는 가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대다수 국민들은 그것 갖고 4인 가족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가 없다. 최소 7,8천만원은 되어야 중산층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국민소득으로만 말하면 정부가 말하는 우리나라 일인당 국민소득이 현재 25천불정도이니까 4인 가족이면 십만불 평균 1억원이 넘는 소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부가 발표하는 국민소득 수치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이 중산층 이상의 삶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결국 이는 숫자 놀이에 불과한 것이고 국민을 상대로 하는 정부의 대 사기극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나머지 돈은 다 어디에 가 있는 것입니까? 그게 바로 대기업과 재벌들이 금고에 넣어두고 있는 여유 돈이고 소위 말해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사들이는 무기 구입비와 37천명이 넘는 미군주둔비용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군들은 지난 수년동안 우리가 주는 방위비 분담금을 남겨서 외국은행에 집어넣어 이자놀이를 하다 평통사에 들켰습니다. 여러분이 친구가 생계가 어렵다고 해서 돈을 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놈이 그 돈 갖고 이자놀이하고 있었다. 여러분 가만있겠어요?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가만있습니다. 착해서 가만있는 것인지 노예근성이 있어서 가만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최근에 밝혀진 일인데요. 미군들의 군수물자 정비는 본래 한국업체가 하도록 약정이 되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미국 군수업체 자회사에 일을 맡겼습니다. 이제는 미국이 우리나라 중소업체의 밥그릇까지 뺏어먹고 있습니다. 그 액수가 700억원입니다. 남한 안보 지켜준다고 말만 그렇게 하고서는 우리가 피땀 흘려 낸 세금으로 이자놀이를 하여 부수입 챙기고 미국기업 돈벌이만 시켜주고 있는데, 이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놓은 꼴입니다. 그러니 우리 백성들 죽도록 일을 해도 복지 혜택이 안 되어 노인들의 자살이 계속 늘어나고 대구의 세 자매가 연달아 자살을 하고 며칠 전에는 26세 장애인 언니를 돌보다 지친 23세의 꽃다운 여성이 동반 자살을 하는 것 아닌가요?

 

[복지와 무기구입의 상관관계]

 

F 35 차세대 전투기 필요한 건 인정하겠는데, 그러면 그 전투기는 2020년에나 가야 제품을 인도받는다고 하는데, 왜 지금부터 예산을 세우고 돈을 주는 것입니까? 2020년 가면 2년 전 우리가 계약한 값의 절반으로 떨어진다는데, 그러면 그때 가서 싼 값에 구입하면 되지 왜 몇 년 전부터 물건도 보지 않고 계약하고 돈을 건네는 것입니까? 제 나라 노동자도 먹여 살리지 못하는 주제에 미국 노동자들 먹여 살릴 이유는 뭡니까? 이건 완전히 미국의 앞잡이 종미주의자들의 소행입니다.


공중급유기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 기왕 필요해서 사려면 돈 조금 더 주더라도 새 걸 사야지 왜 중고를 삽니까? 값 싸다고 중고차 잘못 사면 수리비로 새 차보다 돈 더 드는 것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것 아닙니까? 대한민국이 미국산 중고 무기 처리장 쓰레기터입니까? THAAD라는 신미사일체제 남한 안보에 필요하니 들여놓겠다고 하면서 뒤로 사라고 은근히 강요했습니다. 예산 없다고 하니까 이제는 안 들여놔도 괜찮겠다고 말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리치고 저리치고 남한은 완전히 미국의 봉입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 이런 것 생각하면 존심이 상해서 잠이 오지 않습니다. 지금 박근혜정부는 뭐에 꽉 물려 있습니다. 미국이 뭔가를 손에 쥐고 말 안 들으면 이거 폭로할 거야 하면서 이 정부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있습니다. 그게 뭔지는 생각이 있는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도 여기에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종예,’ ‘종하교회]

 

최근 법원이 국가보안법 철폐를 말하고 미군철수를 말하면 종북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향린교회는 홍근수목사님께서 국가보안법으로 옥살이를 시작한 이후 적어도 20년 이상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는 펼침막을 걸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종북교회입니까? 향린교회는 북의 지령을 받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화해의 사명과 남과 북이 하나되라고 하는 야훼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종예수’ ‘종하느님종예’ ‘종하교회입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적대시하며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죽는 길이기에 과거야 어찌되었던 이제는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하나되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법은 없애야 한다
. ‘넌 나의 적이야하고 만나 대화를 하면 거기에 무슨 진실이 담겨 있겠습니까? 남북대화 국가보안법 철폐하기 전에는 다 거짓입니다. 그러니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법은 먼저 없애고 만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은 본래 일제가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잡아가두기 위한 사회안전법으로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국가보안법은 일제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듯이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합니다. 유엔의 한 회원국으로 모든 나라가 북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만, 유독 형제나라인 남한만이 북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두 정부의 우두머리가 만나면 정상회담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국가가 아닌데 정상회담이 됩니까? 단체장회담이지.

 

진리의 관점에서 나는 무조건 옳고 너는 무조건 틀렸다는 절대 진리가 잘못되었듯이 통일의 관점에서 한쪽만을 절대시하는 종북혹은 종남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로 친구가 되자고 하는 의미에서 친북’ ‘친남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적으로 살았던 둘이 하나가 되려면 먼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정상들이 만난다고 통일이 되는 것이 아니고, 먼저 남에서는 북과 친해지는 친북인사가 많아져야 하고, 북에서는 남과 친해지는 친남인사가 많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북이 국가보안법 철폐를 말하고 미군철수를 말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종북이다 이렇게 주장한다면 진리나 진실의 기준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북에 있게 됩니다. 북이 무엇을 말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길이 달라진다면 이것이야 말로 진짜 종북입니다. 우리가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통일의 저해가 되는 법일 뿐더러 생사람을 간첩으로 잡아 수십년씩 옥살이를 하도록 만들고, 권력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일에 악용되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외치는 국민들의 입과 양심에 자갈를 물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공안정국과 신앙]


두 달 전 김포 애기봉 근처에서 평화교회를 담임하는 이적목사께서
애기봉등탑반대운동풍선삐라살포반대운동에 앞장을 섰다가 지금 국가보안법으로 집과 교회가 압수수색을 당했습니다. 수십 명의 형사들이 철문을 부수고 들어와 설교 컴퓨터를 압수하고 심지어는 무슨 비밀쪽지가 있을 수 있다하여 성전 한복판에 달려 있는 나무 십자가를 떼어서 분해까지 하였습니다. 십자가가 위험하다는 것을 그래도 알기는 안 모양입니다. 그래서 지금 공안검찰의 부당한 출두 명령을 거부하고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시작한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이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악용한 도를 넘어도 한참을 넘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1975년 박정희유신독재가 온 국민의 양심을 옥죄이던 시절 김재준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불의와 부패에 대한 항거는 하느님에 대한 순종입니다. 바르게 말하는 것 자체가 교회의 본직에 속한 책임입니다. ‘말한다고 악인이 회개할 것 같으냐? 그럴 바에는 침묵이 지혜가 아니겠느냐?’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하는 것은 내 책임이고, 듣고 안 듣는 것은 저쪽 책임입니다. 말할 것을 말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말하지 아니한 책임과 아울러 상대방이 회개하지 아니한 책임까지 내가 지게 됩니다. 침묵이 하느님 앞에서 나를 변호할 줄 아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 경우에 침묵은 이 아니라 입니다. 뻔히 알면서 악에 동조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새 성명서들이 많이 발표됩니다. 그것이 무슨 효과가 있느냐고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의 증언이므로 안하면 그만큼 나의 악이 되기 때문에 불가피한 표명입니다. 이것이 진지할수록 운동으로 전개되고 역사의 본류에 동참하여 고난을 같이 나눈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바울의 소위 고난에의 친교라는 것이 그것이며, 거기에서 십자가와 함께 영원한 하늘 영광이 약속되는 종말학적인 승리가 확인되는 것입니다.(<항거의 신학> 19751월 김재준전집 11169)

 

새 포도주란 하느님 나라의 열망 속에서 살아가는 변혁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고 새 부대란 이러한 인간형들이 함께 모여 꿈을 꾸고 사회를 변혁해 나가는 신앙 공동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향기로운 이웃을 통해 고백합니다. ‘영이신 하느님, 변혁의 영이신 하느님. 우리는 주님의 몸인 교회가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정의와 평등과 평화가 이뤄짐을 믿습니다.’ 올 한해 우리 모두 이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일상의 삶에서 그리고 거리의 행동을 통해서 자신을 완성해 나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