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승천과 예수의 변화(변모 주일)

열하 2:1-12; 50:1-6; 고후 4:3-6; 9:2-9

 

[제직수련회와 평신도 하늘뜻펴기]

 

지난 주 오후에 제직수련회가 있었습니다. 먼저 함용호집사님의 인도아래 마음과 몸을 푸는 친교시간을 가졌고, 이어 한신대 조태영교수님을 통해 아리랑에 담긴 민족의 기원과 한의 정서 그리고 요즘 인문학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목민심서의 저자 다산 정약용이 20대에 본래 품었던 가톨릭의 상제신앙과 유교의 태극사상의 합일을 통한 남북통일의 과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어서 4개 분과로 나누어서 주제별 토론을 가졌고 이어 종합보고의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은 참석자가 약 60여명정도로 평소 교회 출석의 4분지 1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평신도 하늘뜻펴기를 통해 온 교우들과 함께 나누겠다고 말씀을 드린바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사라질 염려도 있어서 오늘부터 수련회 전체 사회를 맡으셨던 백종수집사부터 시작하여 조장이셨던 이정임 조성주 김광열 서형식집사 순서로 진행을 하겠고 마지막 순서로는 지난 해 향린교우신앙설문조사를 담당하셨던 강일국집사께서 종합시간에 발표하셨던 내용을 중심으로 하늘뜻펴기를 펼칠 예정입니다.

 

[백종수집사의 하늘뜻펴기]

 

저는 2009년부터 향린 교회에 출석한 이제 만 5년이 지난 백종수라고 합니다. 현재 교회의 직분은 제직회 서기, 청남대표목운위원, 문향회장을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만, 이 이야기를 먼저 드림은 자랑을 하고자 함이 아니고 아직도 제가 모르는 교인 분이 많아서 열심히 하지 않은 제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렇게 강단에 서서 하늘뜻 펴기를 한다는 사실에 하늘 뜻이 아직 제대로 뭔지도 모르면서 펼친다는 게 두렵고 새신자 등록을 마치고 십자가 달기를 하면서부터 성경공부를 마칠 때마다 평신도 하늘뜻펴기를 하라는 요청을 이리피하고 저리 피해 5년을 넘겼는데 이제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담스럽고 감사한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여러 교우여러분과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교회가 세상의 전부이신 올해로 86세를 맞이한 우리 어머니가 보시면 아들이 일요일 대예배 시간에 설교를 한다는 사실을 아시면 얼마니 좋아 하실지 하는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인가요? 교회는 또한 무엇인가요? 신앙의 결단은 해 보셨나요? 모두들 알고 계신데 이 물음을 하는 이유는 제 자신의 믿음과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입니다. 저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나의 신앙 배경]

 

이러한 이야기가 어설픈 간증이 아니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저는 흔히 말하는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저의 증조부는 전남 승주에서 사시다가 동학농민혁명 때 참전하여 우금치전투까지 참전하였으나 알다시피 동학군의 패배로 인해 고향에 다시 가지 아니하고 내려오다 익산 황등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였습니다. 객지에서 적응한다는 게 어려웠지만 나름 장사도 잘 되었고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장터에서 전도하는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1900년에 익산군 황등면 동련리에 동련교회라는 교회와 계동학교를 세웁니다.

 

자녀는 8남매를 두셨는데 그중 큰 아들이 우리 할아버지입니다. 교회를 세우신 증조부의 생각은 큰아들이 목회자가 되기를 바라셨으나 저의 조부께서는 사회주의 운동을 한다고 열심히 돌아다니셨습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로는 부안 백산의 지운 김철수선생과의 교분을 쌓으며 열심히 하셨으나 그러한 일들이 증조부가 보시기에는 탐탁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분가를 당하게 됩니다. 그것도 무일푼으로. 그러다보니 할아버지의 큰아들 이었던 우리 아버지는 이때부터 고생 시작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운동을 열심히 하는 만큼 할머니와 고모를 돌봐야하는 경제 주체가 아버지의 몫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멀어짐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멀어짐으로 표현 할 때 100% 동감하는 바입니다. 부자간의 관계가 멀어지면 정말 힘들다는 것이죠.

 

증조부 이후로 모든 친척, 형제들이 교회를 다니다 보니 집안 식구가 모이면 공통적인 주제가 교회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곧 있으면 명절인데 우리 집안은 명절에 모여 고스톱을 하거나 노래방을 가거나 집안 식구끼리 술을 한잔 하는 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4대가 내려오도록 집안 친척 그 많은 사람 중에 술을 마시는 사람은 저밖에 없는 집안입니다. 너무 재미없지요. 고모들이랑 집안 어른들이 모여 어느 교회가 이번에 건축했다더라, 어느 교회 목사님이 설교를 잘 하더라, 어느 목사 사모가 전국 여신도 회장을 맡아서 여신도회를 쥐고 흔든다더라. 어느 교회에서 목사를 청빙하는데 어떤 장로가 찬성하고 어떤 장로가 반대하더라 등 등.

 

이러한 가운데 나에게 신앙이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서 수요예배(당시 삼일예배) 오일기도회(구역예배)를 어려서부터 따라 다녔고 수많은 부흥회 지금도 기억하는 최복규, 이호문목사님이 기억나는데를 다니면서 주로 많이 듣던 설교중 하나인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설교에 왜 우리 부모는 교회를 다녔나 안 다녔다면 나도 불량배 하다가 회개해서 먼저 된 자가 될 수 있었는데라는 이런 유치한 생각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빌리그래험목사의 부흥회는 평양 대 부흥회는 보지 못했지만 거의 같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가마니를 깔고 앉아 영어로 설교하고 옆에서 통역하고 하는 설교를 듣고 있는데, 잘 들리지도 않는 뒷줄에 있던 나는 남들이 일어나기에 나도 일어났는데 알고 보니 나중에 목사가 되겠다고 각오한 사람이 일어나는 순서였습니다. 성령의 은사인지 통역을 하는 김장환목사의 번역 잘못인지는 모르나 많은 사람이 일어났고 나 또한 얼떨결에 일어났다가 슬그머니 앉기는 했는데 아 하나님께 약속하는 자리에 일어나 목사가 되겠다고 약속했는데 목사가 될 자신은 없고 하나님께 약속한 걸 어기면 하나님께 벌 받을 텐데하며 며칠간 마음을 얼마나 졸였는지 모릅니다.

 

저에게 이 때의 교회는 교육과 놀이를 모두 충족시켜주며 세상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청년기에는 한때 유행처럼 번진 방언의 성령체험을 하겠다고 남들 따라서 기도원을 따라가 방언을 받기 위해 기도도 해보았지만 마음 강퍅한 저에게 방언의 은사는 오지 않았습니다. 모태 신앙이라는게 일요일 되면 교회가야 하고 음식 먹기 전에는 기도해야 하는 습관처럼 생활의 관성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자연스러움으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베드로의 결단이나 다메석 도상에서 회심한 사도 바울 같은 신앙체험이 없는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의 역할이 줄어들고 심지어는 어느 순간 급격하게 보수화가 되어 가면서 기독이 아닌 개독의 소리를 들어야 하였고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지경에 이르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신앙적 결단]

 

이러한 시기에 저로 하여금 결단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MB정권 시절 수입소고기의 문제가 이슈가 되던 때, 다니던 집 앞의 대형교회 (참고로 고신입니다) 일요일 대예배 설교시간에 수입소고기를 반대하는 빨갱이의 책동에 우리 교인은 넘어 가거나 동의하지 말아야 한다.” 는 목사님 이야기에 대다수의 교인이 아멘으로 응답하는 사실에 아 이건 아니어도 정말 아니다는 생각에 최소한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예배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교회의 종말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고려가 망하기 전에 불교가 부패하고 조선이 망하기 전에 유교가 먼저 부패하듯이 대한민국이 망하려고 기독교가 이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에 정말 모든 교회가 다 이런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교회라는 이름하에 주변에 널려 있는 이런 집단 이기주의적이며 권력지향적인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얍복강 축복 대성회라는 이름으로 특별 새벽기도회에 복을 빌러 나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새벽예배를 3부로 나누어 하는 이런 교회들이 이렇게 많고 천만 성도라 이야기하는 이 나라에서 가난한 작가가 굶어 죽는 일이 생기는지. 이러함에도 신앙을 갖고 교회를 계속 다녀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었습니다. 누군가 그러더라구요. 그럼에도 교회를 끊지 못하는 이유는 기존에 교우관계에서 축의금 뿌린 것 회수 할 때까지는 다니려고 교회를 계속 나온다는 슬픈 이야기처럼,

 

그러나 나는 이 기회에 단번에 이제 교회를 끊어야 하겠다. 증조부가 동학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듯이 나는 기독교에서 무교로 되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혹시나 남은 미련이 있으니 집에서 멀지만 그래도 여기는 좀 나으려나? 설마 이 나라에 제대로 된 교회 한두 개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경동교회나 향린교회를 한 번 가보고 결정을 해야 하겠다고 하고서 집사람에게는 큰소리를 쳤습니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설교를 듣게 해주마! 아님 말고. 속으로는 정말 아니면 교회 다니지 말자 이러면서. 이렇게 해서 출석하게 된 교회가 향린교회입니다. 이것이 부끄럽게도 나의 신앙생활 중 교회를 옮기는 결단을 하게 된 일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제가 살면서 참 잘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아 향린교회에 출석하고서 너무 좋았습니다. 정말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이러한 옳은 교회도 있구나 하고 너무 기뻤습니다. 일반 사회생활을 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 주변에 많아지기 시작 하였고 심지에 동창회에도 잘 나가지 않는 이유는 서로의 생각이 많이 달라 정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펐으나 향린에 오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아직 많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 좋았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가요.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는 그 믿음이라는 말의 다른 동사형은 아마도 따르다이겠지요.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따르라고 하지 않았나요. 이러한 따름을 실천하는 사람이 이렇게 향린에 있는 것을 보고서 엘리야 이야기에 나오는 하나님이 숨겨둔 7000명이 대한민국에는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나면서 정말 좋은 교회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여기 계신 교우여러분! 저처럼 느끼시리라 생각합니다.

 

향린이 가진 좋은 콘텐츠가 여러 가지 많이 있지만 내가 느끼는 향린의 가장 큰 장점은 역동적인 민주성이라 생각합니다. 나 자신도 우리 세대가 그러했듯 민주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아 본적이 없고 상명하복에 익숙한 조직문화에 익숙하다보니 토론 문화에 익숙치 못하고 그러다 보니 탈권위적인 교회의 분위기에는 적잖이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민주와 진보의 부정적인 측면은 말 많고 시끄러움이겠지요.

 

이제 제가 향린에 잘 정착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제 5년 정도 시간이 지나 조금씩 알게 되면서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도 보이기 시작 했습니다. 언제인가 수련회 주제가 세대간의 소통을 주제로 하더니 작년과 올해 제직수련회에서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연속해서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번 제직 수련회에서는 준비위원을 하다 보니 주제가 더욱 다가왔습니다.

 

소통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갑자기 우리 대화를 하자고 해서 소통이 될까요. 소통전문가를 불러서 세미나를 하면 될까요, 아니면 토론을 통해서 가능할까요?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며 그 소통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동일한 상태가 아니면 서로의 다름이 있는데 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서 일까요? 서로의 깊은 친교와 이해가 없이 소통이 가능할까요. 이런 상태에서의 대화는 서로의 차이만 더 확인 하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향린의 소모임 문향의 활동을 하는데 문향은 최소한 일 년에 한번 우리 자매교회인 들녘교회에 가서 연극 공연을 합니다. 모두들 삶의 터전에서 바쁘고 힘들지만 두 달 정도 연습을 하여 공연을 하게 되는데 이 준비과정이 서로를 무척 가깝고 친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극중 역할에 충실하게 대사를 서로 주고받는 과정에서 생기는 가까워짐도 있고 연습시간에 늦는 사람을 기다리며 서로가 많은 이야기도하고,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협업을 통한 친밀함은 굳이 소통하려 하지 않아도 소통이 잘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소통이라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소모임에서 가능한 이러한 일이 교회라는 공동체내에서도 당연히 있어야 하겠지요. 일을 하는 과정에 오해도 있을 수 있고 어수선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교회를 떠나는 교우를 볼 때 너무도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린이 갖는 60년 저력의 향린 선배 교우 분들이 쌓아온 균형을 찾아가는 힘은 크다고 봅니다. 교회란 지친 영혼이 위로도 받아야하고 진보적인 가치도 추구해야하고 교회의 전통도 지켜야 하고 새로운 변화도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시끄럽고 어수선한 것 같지만 그래도 주의 뜻을 따르려 하는 노력을 꾸준히 하는 향린. 이것이 내가 향린교회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개인적으로 가끔은 나 또한 교회에 와서 조용히 위로도 받고 영혼의 안식을 갖고 싶은데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갖자는 이야기에 가끔은 어떤 면에서 나도 약자이니 위로 좀 안 해주나 하고 생각도 합니다.

 

위로와 돌봄은 교회가 갖는 기능 중에 하나라고 생각 하니까요. 물론 향린이 갖는 시대성과 사회성은 말할 필요 없이 최고의 가치이고 너무도 잘하고 있는 실천 사항으로 이 앞에만 서면 내 자신이 작아질 뿐입니다. 이 정도의 교회라면 아직도 이 나라에 한국 교회가 희망이 있는 것이겠지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저희 어머님에게 저는 서운한 것이 많습니다. 같은 아들인데도 셋째 아들인 저에 대한 관심은 큰형에 비하면 존재감이 제로입니다. 그 추운 날에도 새벽기도회를 가셔서 2시간 기도를 하시면 그 두 시간 거의 큰형에 대한 기도만하고 저에 대한 기도는 아쉽게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큰아들은 목회하는 아들이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렇게 말합니다. 어머니가 기도하며 챙기기 않아도 목사님은 하나님이 직접 챙겨주니까 어머니는 나를 위한 기도를 많이 해 달라고. 이러한 사실은 서운하기는 해도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결단을 하는 신앙도 아니었고 관성으로 교회를 다녔지만 나에게 교회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소중한 곳이며 한국 기독교의 수많은 교회가 문제가 있지만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돔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이야기처럼 향린같은 교회가 존재하는 한, 내가 사랑할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고향 교회 창립예배시 불리는 찬송 208장의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라는 찬송을 부를 때의 가슴 벅참을 여러 교우님들도 느끼시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조헌정목사의 하늘뜻펴기]

 

오늘의 본문 제1성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이고 제2성서는 예수의 변화산상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서로 공통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입니까?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을 하였고 예수께서도 산위에서 자신의 모습이 하얀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늘공중에 떠 있었다는 둘 다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신비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절대의 신을 찾아가는 물음의 영역임과 동시에 신을 경험하는 초월적 영역이 있기에 당연히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비에 너무 매이면 신앙의 비역사화가 일어나게 되어 이단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집니다.

 

어제 점심 때 손님이 오셔서 식당을 갔는데, 옆 좌석에 3살짜리 여아를 데리고 온 부모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 손에 알사탕이 들려 있었습니다. 아이는 사탕을 먹으려 하고 부모님은 밥을 먹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협상을 하더니 일단 한번 사탕을 빨고 나서 밥을 먹기로 해서 사탕을 입에 넣었는데, 내놓으려고 하지 않으니까 약속을 지키라고 윽박을 질러서 사탕을 내어 놓고 밥 한술을 먹었는데, 곧 바로 사탕을 입에 넣고 나서는 부모가 뭐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버티는 겁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인상을 써보았자, 아이는 장소가 집이 아니라 공공장소이기에 부모의 약점을 이미 알고 있어 빼앗기만 하면 큰 소리로 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쩌지 못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속으로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사탕이 밥보다는 맛이 있습니다. 사탕만 먹으면 아이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부모님은 다 알고 있지만, 아이는 당장 사탕이 좋은 겁니다.

 

저는 종교에서의 신비 영역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밥을 먹도록 하는 일종의 유인책입니다. 그런데 일단 사람이 거기에 매이면 밥을 안 먹는 겁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면 깨닫게 되지만, 그 당장에는 사탕이 좋은 것입니다. 아까 백종수집사께서 방언은사가 없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거 없어도 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은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신비 은사를 주시지 않습니다. 없으면 신앙을 떠날 사람에게 간혹 주시는데, 이 또한 한번 맛을 보면 거기에 매여 어린아이 신앙으로 머물기 때문에 하느님은 매우 고민하십니다.

 

시인 김사인은 [예언서 1]에서 이렇게 고발합니다.

 

방언 기도를 올리는 자들아

잘린 혀 말 못하는 한으로

이 강가에서 나는 너희를 위해 울었다

이교도에게 몸을 팔아

너희들 값진 패물과 향유로 치장하고

낯선 우상 앞에 엎드릴 때

배다른 네 형제들은 눈 덮인 벌판에 버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신전에서 두 무릎 꿇고

너희들 하늘과 땅에 가득한 은혜를 입 모아 찬양할 때

너희 살진 포도밭 앞에 네 형제들은

허기진 몸으로 쓰러져 있었다

 

이제 들어도 듣지 못하는 너희들을 위하여

보아도 볼 수 없는 너희들을 위하여

눈물에 적셔 칼을 간다

너희에게 주는 마지막 사랑으로

차마 저버릴 수 없는 너희 혼을 위하여

 

방언기도를 찾는 신앙인들이 신비주의에 빠져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눈물에 적셔 칼을 간다는 섬뜩한 표현을 쓰고 있긴 하지만, 신앙의 본분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 변모와 사순절]

 

그렇다면 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런 신비에 가득 찬 말씀을 주시는 것일까요? 오늘이 변화산주일 혹은 예수변모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왜 오늘 이 본문 말씀이 선택이 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곧 주현절 마지막 주일에 이 성서본문을 읽어왔습니다. 물론 저는 다른 성서 본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만, 다른 본문은 3년 전에 다루었기에 오늘은 산상변모주일 본문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면 아시겠지만, 몇주전부터 지난주까지 마르코복음 11절부터 223절까지 읽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9장 생애 마지막 부분으로 건너 띠었습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음 주부터 예수 고난에 참여하는 사순절이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둔 40일을 말하는 기간으로 예수님의 광야 40일 기도 그리고 히브리 백성들의 40년 광야생활을 상징합니다. 실은 엘리야도 갈멜산 승리 이후 죽음을 넘나드는 40일 광야생활을 하였습니다.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는 교우들에게 그 고난 이후에 찾아오는 영광을 기억하게 함으로 참고 견디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말하면 너 밥 다 먹고 나면 이 사탕을 줄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진정 이기게 되면 사탕은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멘토들]

 

그런데 오늘 두 본문 말씀이 제게 있어 보다 중요한 것은 엘리사의 승천과 더불어 그의 제자 엘리사에게 스승의 영적 능력 곧 오늘날로 말하면 지도력(리더쉽)이 인계되었다는 사실이고 예수의 변모 기사 또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더불어 지도력이 세 제자들에게 인계되고 있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신비적인 얘기가 신비만으로 끝난다면 그건 그냥 종교적인 착시 현상으로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비의 목적이 단지 신비를 보여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적 사건을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 성서 기사의 목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교회 목회나 기업에 크게 유행했던 단어가 멘토라는 말이었습니다. 스승 혹은 조언자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 말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 연합국 중에 소속돼있던 '이타카' 국가의 왕인 오디세우스가 전쟁에 나가면서 자신의 어린 아들을 친구에게 맡겼습니다. 왕의 아들을 맡은 친구 '멘토'는 왕의 아들을 친아들처럼 정성을 다해 훈육하면서 키웠습니다. 때론 엄한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때론 조언자도 되고 때로 자상한 선생도 되어서 아들을 훌륭하게 키웁니다. 10년 후 전쟁에서 돌아온 오디세우스 왕은 자신의 아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킨 친구에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역시 자네다워! 역시 '멘토(Mentor)다워!' 라고 크게 칭찬해 주었는데, 그 이후로 백성들 사이에서 훌륭하게 제자를 교육시킨 사람을 가리켜 '멘토'라고 불러주는 호칭이 유래되었습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어떤 사람도 그냥 태어난 위인은 없습니다. 그 배후에는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멘토가 있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그랬고, 엘리와 사무엘이 그랬고, 엘리야와 엘리사가 그랬고, 바울과 디모데가 그랬고, 예수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멘토 부재의 교육과 사회의 일탈]

 

요즘 교육의 위기를 말합니다. 학생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습니다. 집에서는 부모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사라졌고, 학교 또한 선생과 제자 사이에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교육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이 학원 저 학원을 전전합니다. 멘토가 없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카톡을 비롯한 전자문화가 자리를 잡았습니다만, 이는 자기들끼리의 소통은 될지언정 사람다운 교육의 장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일베인터넷에서 배우고 익힌 증오에 휩싸인 열아홉살 고등학생이 성당에서 진행되는 통일컨서트에 불을 붙여 황산을 뿌리는 테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멘토교육 부재의 비극이 열아홉살 고등학생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현직 부장판사에게도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고 우리 사회는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이영한부장판사는 지난 6년 동안 익명으로 만개의 댓글을 달면서 엄청난 언어폭력을 휘둘렀습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투신의 제왕’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도끼로 ×××을 쪼개버려야 한다는 식의 막말 표현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근대화는 대일본제국의 조선반도 식민화 덕분이라는 친일 발언, ‘박통 전통 때의 물고문 전기고문이 더 좋았다는고문지지 발언, 518광주항쟁의 의미를 깍아내리는 반전라도 발언, 여성비하 발언, 심지어는 서울시간첩조작사건 판결을 두고서는 빨갱이 한놈 잡는데 위조 좀 문제되겠나법관 이전에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상식이하의 발언을 해대는 사람이 남한의 최고학부를 나오고 우리 국민들의 도덕과 윤리를 판단하는 판사로 20여년 일을 하였을 뿐더러 부장판사까지 오르고 어쩌면 한 십년 있으면 대법관이나 헌법재판소 법관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어안이 벙벙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비상식적인 이념편향적인 친구들이 법관이라고 앉아 있으니 상식 이하의 판결이 나오는구나 하며 그간의 이해되지 않았던 판결들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 대법원에서 지난 정권에서 유신독재시절 민주화투쟁운동 하다 간첩으로 몰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들에게 무죄판결을 내리고 국가가 보상했던 보상금을 지불했는데, 그 돈을 일부 반환하라고 하고 지금은 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보상금 지불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자기네 선배들이 유신독재시절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억울한 내렸으면 나서서 국가가 보상을 하는 것이 원칙이지 또 다시 그 딸이 권력을 잡았다고 이를 도로 내놓도록 하고 보상금을 주지 않겠다는 것은 정말 불한당의 짓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국민의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삐라살포는 표현의 자유라고 옹호하면서 국가보안법철폐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종북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이중 잣대도 이제 이해가 됩니다. 폭력적인 RO조직도 없고 구체적인 내란음모도 없었지만 내란을 일으킬 의도가 머릿속에 있었다는 이유로 통합진보당의 이석기의원 등 통진당원 8명에게 중형 판결을 내리고 헌재는 그 여세를 몰아 정당 해산이라는 세계정치사에 있어 그 유례가 거의 없는 폭력적인 판결을 내리는 것도 이제 이해가 되었습니다. 인간성 자체가 비뚤어진 사람들이니 상식 이하의 판결을 내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다만 그런 비상식적인 사람들이 법복을 입고 나나 여러분들의 도덕과 윤리 그리고 사회적 규범을 판단하는 이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억울하고 비참할 따름입니다.

 

지금 국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이완구국무총리 후보의 이력을 보세요. 2000년 이후 낙마한 6명의 총리후보의 불량스펙을 한꺼번에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땅 투기 의혹 타워팰리스 매입 등 부동산 투기 의혹 본인(보충역)과 차남(면제) 병역 기피 의혹 처남을 통한 경기대 조교수 특혜채용 의혹 박사학위 논문 표절 우송대 '황제 특강' 논란 국보위 활동 전력과 삼청교육대 관여 의혹 억대연봉 차남 건강보험료 탈루 15대 총선 시 경력 허위 기재 언론사 보도 외압 및 인사개입 의혹. 마지막 건은 자기 스스로 자랑삼아 한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언론위원회에서 이완구씨를 고소했겠습니까? 범죄행위로 얼룩진 이런 사람이 지금까지 지도자 행세를 해왔다는 사실에도 놀랍지만, 또 이 사람을 국무총리 후보자로 내세웠다고 하니 그것도 이미 두 차례나 후보 낙마사태가 있었으니 청와대에서 고르고 고른 사람이었을텐데 말입니다. 정말 이 나라가 이렇게까지 막장 사회가 된 것인가 너무 수치스럽고 괴롭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 여론조사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반이 훨씬 넘은 57%나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 나라에 다시 태어나시겠습니까? 어렵게 어렵게 공부하여 대학에 들어와 빚을 내서 스펙을 쌓았지만 비정규직을 전전하다 노후 빈곤과 고독사로 죽는 것이 적어도 상당수의 우리 국민들이 대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1%의 사람들은 불법 탈법 비리를 통해 권력과 부를 움켜쥐고 이를 자자손손 대물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난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관심 없다. 난 그저 내 운명이 주어지는 길을 성실히 살아갈 따름이다라고 말하는 도사같은 분들은 다시금 내어나겠다고 답하시겠지만, 다수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돌아보면 우리 사회에 이영한판사나 이완구씨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원세훈전국정원장에게 대선부정개입을 물어 1심의 집행유예 판결을 뒤집고 3년 실형을 언도하였습니다.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려보아야 합니다만, 우리 사회에 이렇게 올곧은 판사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어떤 변호사께서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김상환 부장판사. 최근 사진을 보고야 알았다. 난 판사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맡았던 사건 중 하나였던 대림차 정리해고 사건에서 1심을 뒤집고 노동자들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던 판사. 결국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돼 노동자들은 복직을 앞두고 있다. 재판할 때 내 말을 경청하면서 결정적 증거 신청을 받아들이고 그 결과로 승소했다. 약자들에게 배려심 있고 강자들에게는 단호한 이분 개인적으로 존경할만했다.”

 

저는 김상한판사께서 이렇게 외부 압력에 굴복하거나 자신의 출세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법정신에 따라서 판결을 내리는 배경에는 분명히 멘토가 있었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바로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정의로움을 세우고 약자와 연대하는 힘은 단순히 책만 읽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대 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힘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앞으로 계속 지금의 모습을 유지해나가려면, 교인과 교인 사이에 이런 멘토관계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신도 하늘뜻펴기와 멘토링]

 

사실 평신도하늘뜻펴기도 일종의 멘토링의 과정입니다. 저와 함께 글을 주고받으면 보완하는 과정 가운데에서 멘토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우리가 몸담아 일하는 모든 신도회나 부서, 당회나 목회운영위원회 등도 이런 멘토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배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통해 보이지 않게 배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 내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신앙의 멘토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서로가 노력할 것을 제안합니다. 나이가 젊은 분들은 가까운 어르신들과의 깊은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도록 노력하고 어르신들 또한 젊은 교우들에게 인사 안한다고 하지만 마시고 한두 사람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가도록 노력해서 신앙의 지혜를 넘겨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역사가 오랜 교회의 장점입니다. 역사가 짧은 교회는 역동성이 있지만, 동시에 지혜가 부족하여 한두사람의 잘못된 지도력이 교회를 아예 잘못된 길로 끌고 갈수가 있습니다. 오래된 교회는 역동성이 떨어집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이를 보완하는 길이 멘토링입니다. 잘못하면 그룹갈등이 일어나기 쉬운 부분을 멘토링의 관계로 변화시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의 변화산 이야기는 둘 다 이런 멘토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것도 다 이러한 멘토링의 과정입니다. 바울의 말씀으로 오늘 하늘뜻펴기를 마칩니다.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하여 주셨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