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현존

9:8-17; 25;1-10; 벧전 3:18-22; 1:9-15

 

[평신도 하늘뜻펴기]

 

이정임집사

 

평신도 설교가 제게 주어졌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예수님의 기도가 생각되며 '나는 누구를 미혹하지 않았으며 죄인에게 죄를 용서한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단지 4개의 조 중 1조 조장을 했을 뿐인데^^ 주님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말고 향린교인의 뜻대로요' 작년에 이어 또 이 자리에 서는 저처럼 주제 파악 못하는 인간을 저희 고향 말로는 모지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정리를 다한 후에 보니 어째 모두가 지적질이었고 감히 제가 할 말은 아닌듯하여 함께 참석한 장로님께 부탁할까도 했지만, 그래 욕을 먹어도 내가 먹자 하는 무식한 용기를 냈습니다. 부족함이 많을 것을 압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공동체성의 회복이라는 주제로 1조 조원들과 함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나누었던 내용을 오늘 저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공동체란 무엇입니까? 같은 가치와 이념으로 모인 집단입니다. 그러면 회복은 무엇입니까?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거나 본디 모습을 되찾음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바람직한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의 공통분모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가르침 외에도 5천명을 먹이시고 고기 잡아 구워 드시고 잔칫집에 다니시며 식탁의 교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몇 안 되는 우리 안에서 서로에게 가까이 가려는 마음 즉 보다 친절한 상태, 사랑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갈라디아서 522절에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친절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말하며 25절에는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행한다는 말씀에 방점을 찍고 싶습니다. 먼저 고개 숙여 인사한다고 내가 낮아지는 것도 아니고 고개를 들고 있다고 해서 내가 높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과 도덕에 대해 말로 하는 것은 탁상공론입니다. 이 둘의 근본은 행동입니다. 그리함으로 1조 조원들은 모두 친절한 2015년이 되기로 했습니다.

 

공동체 안에는 무지개처럼 나와 너가 존재하면서 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번째 반성이 나왔습니다. 소통의 부재입니다. 교회 조직이 너무 방만하여 제도적으로 소통이 어려운 게 아닌가 했습니다. SNS의 발달로 online, offline, 소모임이 활성화되면서 끼리끼리의 장점도 많으나 전체적인 소통이 어려워졌다는 지적입니다. 각각의 역할만을 중시하다보니 타부서에 대한 관심과 인정이 소홀해졌으며 당회, 목회운영위원회, 터전위원회 등은 모두 소통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잘 되고 있는가? 각 신도회에서 파견한 위원들은 역할과 책임에 있어서 정확한 의견을 내며 각 기관의 조화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공동체는 즐겁고 활기차며 단결력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확실한 구심점이 없어졌으며 공동체의 단점인 폐쇄성이 드러나지 않았나합니다. 이 시점에서 모든 조직을 다시 정립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욕심이 과하지 않았나 회개합니다. 기장 총회가 정한 올해의 표어는 하나님과 세상 앞에 참회하는 교회입니다. 내가 아는 것만이 선이요 옳음이라고 주관적 밧줄에 묶여있지는 않습니까? 몇 십년동안 내 속에서 굳어져버린 습관을 혹 진리라고 믿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신앙에 깊이도 있어야하지만 저는 넓이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광주 518의 기억]

 

망월동 5.18 묘역에 가서 비문들을 유심히 보면 십자가가 새겨진 돌비가 참 많습니다. 그 가운데 유동운이라는 이름, 당시 한국신학대학 2학년 학생이었는데 광주 성결교회 유연창목사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중 광주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와 시위에 참석합니다. 목사님께서 아들을 불러다 집에 있으라고 엄명을 내렸지만 유동운 군은 "아버지, 아버지는 설교하실 때 하느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담대하게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서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생명과 정의와 진실이 유린당하는 현장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 젊은 목숨을 바쳤습니다.

 

내가 바로 전 해 겨울까지 크리스마스 씰을 사서 위문편지를 써주었던 우리나라 국군들이탱크를 몰고 총과 대검으로 시민들을 학살하고, 어느 날 갑자기 대형 여객선이 기울어져 침몰하는, 그래도 어찌 해볼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국가 폭력 앞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사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한참동안 죄인처럼 살았던 5월의 어머니들, 오죽 답답하고 치밀어 오르면 거기가 어디라고, 팽목항까지 그 길이 어디라고 찬바람 속에 걸을 수밖에 없는 세월호의 어머니들, 이들은 떡국도 먹여야 하고 세뱃돈도 주어야 하는데 내 자식 없는 명절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마가복음 1229절에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랑과 선한 양심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혹 서로에게 무례히 행치 않았는지 나를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디지털과 스피드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가 젊은이에게 유리한 면은 있으나 나이든 사람의 경험도 우리가 수용해야할 중용한 자산입니다. 소통이 안 되는 것은 단지 우리 교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현 사회구조 안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어요. 의견이 다른 경우는 늘 있어왔습니다.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것은 서로 간의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앞에 걸린 국가 보안법 철폐, 평화협정 체결, 박근혜 사퇴를 보고 들어온 이 공간에서 같은 말씀을 듣고 배우는데 달라야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투사의 안목으로 성도를 대하거나 시대의 아픔과 문제점에 시달려 비판의 칼날을 우리 내부에 대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1조의 세 번째 해결 방안으로는 나와 너의 다름을 인정하되 서로에게 무례히 행치 않으면서 신뢰회복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새로 오는 봄 우리를 새롭게 하실 기도문을 읽겠습니다.

 

주님

몇 십 년 얼어붙은 내 마음속 교만의 강이

당신 사랑으로 풀리게 해 주소서

이웃을 용서 못해 꽁꽁 얼어붙은 마음 바닥이

아픈 소리 내며 녹아지게 하소서

바람이 불어도 날아오를 생각 못했던 내 꿈과

소망의 날갯죽지에 빛나는 새 힘을 일으키소서

자연의 봄이 와도 피어날 줄 모르던 마음의 봄은 피우기 위해

지금은 내가 나 자신과 싸우는

어둠의 시간을 허락하소서.

마음 놓고 당신 앞에 울게 하여주소서.

 

목사님께서는 침묵기도로 마무리하시는데 저는 수술을 위해 오늘 병원에 입원하신 송금심 장로님을 위한 중보기도를 부탁드리며, 우리 조의 가장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으로 오늘 저의 하늘뜻 펴기를 마감합니다. 한 길 따라 예수를 믿어 행복합니다. 향린 교인이여서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조헌정목사

 

[노아 홍수에 관련한 성서 밖 이야기]

 

35년 전 LA타임지에 실렸던 특별기고의 글입니다. 그건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경에 기록된 사해문서가 1947년경 양치기 목동에 의해 쿰란동굴의 항아리 속에서 우연히 발견된바 있었는데, 거기에는 제1성서의 대부분을 포함한 당대의 중요한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직 조각들을 맞추는 중이라면서 40년간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일부 문서가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나온 기사였습니다. 그때 기사 중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창세기 7장 노아의 기사 옆 여백에 오래된 중국 활자체로 배 선()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배를 뜻하는 한자어는 배 주()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여덟 팔()자 그리고 그 밑에 입 구()자를 굳이 새겨놓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방주에 타고 있던 노아의 가족은 모두 8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신문기사는 이천년 전에 이미 중동과 중국과의 교류가 있었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저는 이에 관련한 성서학자의 글을 접한 적이 없어 아직도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다만 노아 방주와 중국어라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중국에서 기독교선교를 하는 사람들이 이 부분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창세기와 한자 사이에 더 깊은 연관성이 있는 글자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금할 금()자가 나무 목() 두 개 밑에 볼 시()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두 나무란 다름 아닌 에덴동산 중앙에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를 말하는 것이고 볼 시자 또한 따 먹지 말라고 하는 에덴동산의 금지 명령에 기인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마귀의 마()자 또한 덮개 밑에 두 개의 나무 목()자가 있고, 그리고 그 밑에 귀신 귀()자가 있습니다. 곧 뱀으로 이야기되는 유혹의 마귀가 두 나무 밑에 숨어 있다 유혹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외에도 몇 개가 더 있습니다. 실증 증거들이 너무 뚜렷하여 우연이라고 함부로 단정하기는 힘듭니다. 아마도 이 부분은 유대인들로서는 거림직한 부분이라 별로 진전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추측합니다.

 

교회를 죄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구원의 방주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흔하고 어떤 교회는 아예 방주 모양의 교회 건물을 세우기도 합니다. 외국의 어떤 교회에서는 노아 복음이라는 책자까지 펴내 방주의 3층을 삼위일체교리 그리고 육체 정신 영혼의 3단계 구원의 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부 근본주의 신앙인들은 이 노아의 방주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하기도 하고 배 조각을 발견했다고 주장도 합니다만,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홍수로 인한 인류 심판의 얘기는 모든 민족의 설화 이야기 속에 등장을 합니다. 당시의 제국 애굽, 바벨론, 아시리아의 신화뿐만이 아니라 중국, 인도의 신화에도 등장합니다. 지금도 뉴스에 간간이 등장하듯이 고대에는 홍수로 강이 범람하여 큰 도시들이 침수되는 일은 매우 잦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과학자들이 경고하듯이 지구온난화로 인해 해수면이 계속 오르고 있어 노아 홍수 이야기는 과거의 얘기이자 미래 경고의 얘기입니다.

 

[노아 홍수 심판과 오늘]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예수의 광야 40일 단식기도와 함께 오늘 사순절 첫 번째 주일 말씀입니다. 이 두 본문은 모두 단지 40일이라는 기간이 같습니다. 성서에서 40은 단지 시간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뜻하는 신앙의 숫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노아홍수의 결론으로 더 이상 홍수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구원 약속의 말씀만 나와 있습니다만, 노아 이야기는 본래 홍수 심판의 이야기입니다. 노아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야훼께서는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 왜 사람을 만드셨는가 싶으시어 마음이 아프셨다. 내가 지어낸 사람이지만, 땅위에서 쓸어버리리라.”(65절 이하)

 

그러면서 인간의 타락에 대해 창세기 6장은 매우 이상한 논리를 전개합니다. 그건 하느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난 네피림이라는 거인족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거대하다는 말은 힘이 세다는 말이고 힘이 세다는 말은 노동력과 군사력에 직결됩니다. 거대한 노동력은 토건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저는 이 네피림이라는 거인 족속은 당시의 거대한 제국들을 상징하는 단어로 이해합니다. 곧 홍수 심판의 이야기는 약한 족속들을 침략하여 빼앗고 죽이고 강간하고 노예로 삼는 제국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서는 인간 수명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말하는데, 그건 노아 이전과 이후의 인간의 수명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얘기입니다. 노아 이전까지는 보통 8,9백년을 살았습니다. 아담은 930년을 살았고 성서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고 하는 므두셀라는 969년을 살았고 노아 또한 950년을 삽니다. 그런데 거인족의 등장과 함께 땅 위에 사람들이 불어나면서 야훼께서는 사람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하였다고 말합니다.

 

거인족과 사람들이 불어났다는 것은 도시화를 말합니다. 도시 문명은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제공합니다. 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고 냄새나는 대변 또한 집안에서 해결을 합니다. 밤에도 대낮같이 밝게 만듭니다. 그러나 동시에 도시문명은 오염을 증가시킴으로 인간의 생명을 단축하고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만들어갑니다. 그럼으로 이웃은 협동의 상대가 아닌 경쟁의 상대가 되면서 스트레스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인류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에볼라를 비롯한 치명적인 질병이 생겨납니다.

 

[광야와 도시의 근본 차이]

 

성서에서 광야는 도시 문명과는 정반대 개념입니다. 단지 고층빌딩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닌 인간됨의 근본 차이를 말합니다. 도시는 개인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해 줍니다. 명함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지위가 있습니다. 부장 이사 교수 의사 목사 등등은 직업을 넘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 목사 또한 교인 수에 따라 존재 가치가 달라집니다. 도시인들은 차종과 배기량의 크기, 아파트 동네 이름과 평수, 그리고 핸드백 브랜드에 따라 사람의 존재 가치를 평가받습니다.

 

반면 광야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줄 수 있는 하나도 없습니다. 설사 백억 원을 현금으로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장관 아니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광야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작은 풀포기와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만이 유일한 친구이면 남아 있는 것이라곤 홀로됨이라는 자기 존재 인식밖에 없습니다. 광야에서는 자기 안에 숨어 있던 두려움에 맞서야 하고 자기 죽음과도 맞서야 합니다. 피할 길은 없습니다. ‘홀로는 사회적 개념으로서의 개인이나 감정 차원에서의 고독과는 다른 말입니다. 광야에서의 홀로는 신 앞에 선 단독자를 말합니다.

 

이 신은 광야에서 모세에게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노예를 자기 백성으로 여기는 긍휼의 해방자로서, 아브라함에게는 미래의 축복을 위해 미지의 장소로 떠나라는 그리고 노년에 얻은 자신의 전부인 이삭을 바치라는 비정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광야에 홀로 선 도망자 야곱에게는 하늘 사닥다리의 보호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탈진할 대로 탈진한 엘리야에게는 희미한 위로의 소리로 세례 요한에게는 회개하라는 외침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는 예수께서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는 장소로 설명이 됩니다.

 

예수의 40일 광야단식과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은 마태오 마가 루가 세 개의 공관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읽은 마르코복음에서는 사탄에게 시험받았다는 얘기만 나오지 어떤 시험을 받으셨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것이 세 가지 시험으로 나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배부름의 유혹,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 하라는 칭찬의 유혹, 그리고 내 앞에 절하면 세상의 보이는 모든 것을 주겠다는 소유와 권력의 유혹입니다.

 

그런데 사실 마르코복음이 마태 누가복음과 다른 것은 그 시작부터입니다. 마태오와 루가는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로 나아갔다고 그래서 예수의 자유의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강제성은 없습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뒤에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세례를 받자마자 하느님이 말씀이 그에게 임한 영성이 최고조로 오른 순간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광야로 내어몰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내어몰았다는 희랍어는 ekballo인데, 본문에 이어지는 34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내어 쫓아내셨다.’ 여기서 예수께서 많은 마귀를 내어 쫓아내셨다는 동사와 같은 동사입니다.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는 이 말은 예수께서 광야로 가기 싫은 것을 억지로 내쫓았다는 말이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예수모독 죄로 비난받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오히려 이 구절에서 예수에게서 호감과 연대감을 갖습니다. ‘아 예수도 그랬구나!’ 그렇다면 우리야 더욱 말할 게 없지 않겠습니까? 세례는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했다는 종교적 의식입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40일간의 광야생활 그것도 먹지 않고 자기와 싸우는 처절한 고뇌에 찬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참 인간으로 하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므드바르’]

 

그러면서 마르코복음서는 예수가 쫓겨 가다시피 간 광야는 허허벌판이 아니라 거기에는 들짐승들과 천사가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천사는 영성이 깊어짐을 상징한다면 들짐승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이는 길들여지지 않는 거친 야성(野性)을 상징합니다. 세상적 가치에 대한 저항과 부조리를 바꾸는 개혁은 야성에서 나옵니다. 흔히 자연은 순수와 조화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성서가 말하는 야성은 자연이 아닌 하늘에 근거한 야성입니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므드바르인데, ‘는 장소를 뜻하는 접두사이고 드바르는 작은 공간을 뜻하는데, 예루살렘 성전의 깊은 공간, 지성소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곧 광야는 지성소로 번역이 될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는 히브리어로 뻬 미드바르’(‘광야에서’)입니다.

 

그리고 드바르와 같은 어근을 갖고 있는 단어가 다바르입니다. 히브리어 다바르는 문맥에 따라 도 되고 물건이나 사건도 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을 때의 그 말씀이 다바르입니다. 다바르는 무에서 존재를 창조해내는 하느님의 권세, 힘입니다. 따라서 이를 그냥 말씀이라고 번역해서는 곤란하고 말씀권세혹은 말씀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은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며 광야로 나아가는 절기입니다. 자기 절제와 금욕을 통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하느님 앞에 홀로 단독자로 서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본래됨 곧 생 땍쥐베리가 어린왕자를 통해 고발하는 길들여짐이라는 도시문명에 저항하는 야성을 키우는 시간입니다. 거기에서 기도와 말씀을 통해 다바르의 창조사건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욕망 절제를 통해 자기 성찰을 하는 시간입니다. 하루 한 끼 단식 혹은 일주일 하루 단식 그러면서 하느님의 뜻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기도와 성서 읽기를 하는 시간입니다.

 

이를 위해 목회자들이 인도하는 여러 성서배움마당이 시작하고 올해에는 새롭게 인문학 강좌도 시작합니다. 그리고 거대한 건설자본에 의해 쫓겨나는 두 분의 세입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사순절거리기도회도 갖습니다. 물론 우리의 삶은 이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먹고살기에도 삶은 퍽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네 발로 땅을 기는 동물이 아닌 두 발로 딛고 서서 머리를 하늘로 향하는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먹는 것이 많아지고 사는 공간이 넓어진다고 해서 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질적으로 전연 다른 차원이 필요합니다. 이를 우리는 영성이라고 부르고 성서는 이를 광야에서 찾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공동체는 개인의 집합이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이 신 앞에서의 홀로됨을 통해 자기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자기를 부정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광야는 자기 부정]

 

톨스토이는 말합니다. “동물적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온갖 육욕의 만족이 행복인 것처럼, 자신의 영성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기 부정은 바로 행복이다. 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그가 겪는 모든 고뇌가 그를 자신이 원하는 완성을 향한 목표지점으로 다가가게 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 사람에게는 고뇌도 그 쓴맛을 잃고 달콤한 행복이 된다.”

 

우리가 몸으로는 도시에 살면서 정신으로는 광야의 현존을 찾는 것은 인간됨의 근본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무인도에 혼자 살고 있지 않는 한 삶의 번뇌와 고통은 피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고통에 처했을 때, 이를 바르게 극복함으로 자기의 삶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번뇌와 고통을 운이 없어 일어난 우연한 일로 여기고 순간적인 자기 기만을 통해 이를 피하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가면과 허위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보험은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까운 낭비로 보입니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 비로소 보험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 또한 언제 다가올지 모를 고통을 위한 영적 보험입니다. 잘나갈 때 신앙은 거치장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잘나가다 보면 교만하여 나락으로 떨어지는 법입니다. 잘나가던 사람들은 자기 죽음 앞에서 발버둥만 쳐대는 비겁과 어리석음만을 보여줄 따름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서 똑똑하기를 갈망하지만, 세상 똑똑이의 말로는 항상 그러한 것입니다.

 

부산 복음병원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하여 온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장기려박사 집에 머물던 제자 한 명이 어느 해 설날 초하룻날 세배를 드렸습니다. 세배를 받은 선생께서는 이렇게 덕담을 해주었습니다. “금년에는 나처럼 살아보게.” 존경하는 스승이었지만, 제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선생님처럼 살면 바보 되게요?” 장기려선생께서는 껄껄 웃으시면서 제자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습니다. “그렇지. 바보 소리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나?”

 

사순절은 우리 모두가 광야로 나아가는 날이요 세상 똑똑하기를 포기하고 골고다를 향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세상 바보가 되기를 작정한 날입니다. 이어지는 성찬예식을 통해 광야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 듣기를 바라면서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