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주일

하느님만 믿고 모험하라

 

민수기 21:4-9; 시편107:1-3,21-22; 에페소서 2:1-10; 요한복음 3:14-21

 

장세은 교우/한세욱 목사



[평신도 하늘뜻 펴기/ 장세은 교우]  

안녕하세요, 향린의 청년, 장세은입니다. 청년 주일을 준비하면서 저희가 함께 얘기를 나누면서 향린의 청년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독특함은 과연 어떤 것이 있나 하고 얘기를 나눴었는데, 사실 특별한 것을 뽑아 내지는 못했어요. 향린의 청년 역시 평범한 이 사회의 청년일 뿐인거죠. 그리고 어쩌면, 그게 특별한 게 아니겠어요? 평범했던 청년 하나하나가 이 자리에 모였을 때, ‘우리가 된다는 것요. 그래서 저는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냥 한 청년으로써요. 우리 청년 한 명 한 명은 다 소중하고, 다 별처럼 빛나는 각자의 삶이 있는데, 그 총총한 별빛들을 다 제가 품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모두의 마음을 전달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여러분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청년의 마음속의 이야기는 전달할 수 있을테니까요.

 

저는 초등학생들과 같이 생활을 하고 있어요. 참 고맙게도, 어떤 아이가 커서 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부모님께 얘기를 했다고 해요. 이건, 제가 학생에게 뛰어가서 두 손 꼭 잡고 감사 인사를 해야 할 일이죠. 아이의 삶에 이상형이라니, 어찌 큰 감격 아니겠어요? 그 얘기를 듣고 제가 학생에게 물어봤어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고. 그랬더니,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즐겁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행복해 보여서 부러웠다고, 나도 어른이 되면 그렇게 살고 싶다고.

 

, 아직 순수한 아이죠? 저는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도 아니고, 매우 부유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이렇게 소소한 삶을 사는 제 모습이 아이에게 그렇게 예뻐 보였나 봅니다. 저에게도 큰 감동이었죠.

 

여기 계신 누구나 그랬겠지만 저에게도 그 아이처럼 어린 시절이 있었답니다, 제가 그 아이처럼 어릴 때에는 스무 살이 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어요. 스무 살은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매우 큰 존재였죠. 근데, 막상 스무 살이 되어보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어른의 반열에 들어선 것 같기는 한데, 하라는 건 많은 데 뭘 해야 할 지 모르겠고. 그래서 아, 학교를 졸업하면 그 때 어른이 되나보다 하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또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기는 했어요. 근데, 생각보다 아직 제가 덜 컸더라고요. 지금도 삼십대 중반에 들어섰는데, 아직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단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근데, 어른이 되고 있는 것 같기는 해요. 언제 그런 생각이 들었냐 하면, 제 자신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할 때에요.

 

얼마 전에 오랫동안 써 왔던 일기장을 봤어요. 그게 다 스무 살이 넘고 쓴 거니까 통념적으론 어른이 되고나서죠. 일기를 보면 오랫동안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뭐가 그렇게 힘든 고민거리가 많았는지 참 여러 가지 고민을 했는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시험공부하기 싫을 때 쓴 것 같기도 하고. 지금 힘들지만 그 것을 견뎌내면 앞으로 더 큰 행복이 올 것이라는 것과 지금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앞으로의 행복이 무슨 소용이냐 이 두 가지에서 늘 고민했던 것 같아요. 결론요? 그 땐 어떤 결론을 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명확히 말할 수 있어요. 저는 지금 저의 행복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봅니다. ‘행복하다라는 느낌 아세요? 제가 사전에서 행복이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봤어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해요. 너무 간단하죠. 그럼 여러분은 행복하세요? 사람들에게 가끔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바로 대답을 못 해요, .. 뭐 요즘 어떤 어떤 건 힘든데, 뭐 좋은 일도 있고... 하면서 한참 얘기하다가, 그래도 행복하냐 그렇지 않냐고 물어보면 난 행복한 거 같애 라고 얘기하죠. 행복이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이 되었을까요. , 그럼 저의 얘기를 해 볼게요. 저는 지난주에 저녁 11시 이전에 집에 들어 간 날이 없습니다. 야근, 할 일이 많더라고요. 외부 모임도 나가야 하고, 가끔 공부도 해야 합니다. 매우 피곤한 일주일이었죠. 근데, 또 생각해보면 그래요, 제 재능을 인정해주는 직장이 있고, 그래서 일을 많이 주기는 하지만, 그 일을 다 잘 처리해나가는 제 자신이 있네요. 아무튼 여기서 착실히 일하다 보면 또 열흘 후에 월급도 받아요, 배우고 싶은 것들이 있고, 저에게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도 계시네요. 제가 목요일 아침에 매우 피곤했던 이유는 수요일 저녁에 교회 분들을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기 때문이죠. , 새 책을 사서 그 책을 재미있게 읽느라 늦게까지 못 자기도 했어요. 업무와 밤늦은 일정에 시달리는 매우 힘든 저는, 사실 이 많은 이유들로 행복한 제 자신이기도 한 거죠. 사실, 저 내일도 저녁 11시에 퇴근하게 될 것 같은데, 뭐가 좋겠어요, 근데, 긍정적으로 생각하다보면, 정말로 마음이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야근하는 제 자신도 매우 행복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요. 행복하게 살기로 마음먹으면 정말 삶이 조금씩 행복해지는 거 같아요. 이게 누구랑 비교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한 거죠. 다른 사람이랑 비교하다 보면 나는 밥 세끼를 다 먹으니 굶는 사람들보다는 행복하지만, 또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화려한 진수성찬을 먹는 사람이 엄청 많으니 그럼 제 행복이 또 사라지잖아요.

 

제가 아까 한 얘기, 지금 힘들지만 그 것을 견뎌내면 앞으로 더 큰 행복이 올 것이라는 희망, 글쎄요, 그냥 지금 제가 힘든 거잖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으면 괜찮은데, 지금 내가 이자리에서 이렇게 힘든데 나중에 밝은 미래가 눈앞에 보일까요? 하지만, 지금 행복하면 앞으로의 나는 행복할거에요. 왜냐면 행복한 내가 계속 이렇게 이어져 나갈 테니까. , 그리고 행복은 순간적인 거라서 저축해 놨다가 나중에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거 아이 키워본 분들은 잘 아실 것 같은데, 우리 아이가 지금 너무 예쁜데, 내가 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지금 더더더 열심히 일하고 나중에 같이 잘 놀아야지 하는 거 아무 의미 없는 거, 소중한 순간들은 그 순간 즐겨야 의미가 있다는 거 아시죠? (사실, 저 잘 몰라요, 근데, 남의 자식이랑 생활하는데도 순간순간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이 모습을 부모님들이 바쁘게 일하느라 못 보는 거 보면서 화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알 것 같기는 해요.)

 

그래서 저는 제가, 그리고 우리 청년들이, 그리고 여기 계시는 모든 향린 가족들이 참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즘 청년으로 살아가는 게 그렇게 힘들다고 합니다. , 사실 저도 사는 게 팍팍할 때 많아요. 어쩌면 부모님 세대들이 보시기에는 이해가 안가는 부분들도 있겠죠. 저만 해도 한 번도 가난해서 밥 굶어본 적 없고, 달리기할 때 돈 없어서 운동화 못 신어본 적 없고, 무난하게 고등교육을 마칠 수 있었으니까요,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희 청년들의 삶에 이만큼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 주신 부모님 세대께 매우 감사드립니다.

 

근데, 이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저희는 물질적 여유를 갖게 되는 대신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리게 된 거죠.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청년들에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실 미래가 보이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보이면 그건 미래가 아니죠. 누구에게나 미래는 한 번도 보인 적은 없었어요. 다만 그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는 용기가 필요했을 뿐. 근데, 지금의 사회는 당당히 걸어가기도 무섭고, 또 우리는 당당히 걸어갈 수 있는 법을 잘 배우지 못했어요.

 

괜찮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배우면 되니까요. 지금 삶이 팍팍한 청년들 모두, 이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걸음을 내딛어 봅시다. 지금 내가 행복해야 앞으로의 나도 행복해 집니다.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지금 나를 희생시키지 맙시다. 우린, 소중한 존재니까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면, 좀 더디 가더라도 내 삶은 언젠가는 행복해질 거예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힘들어도 힘들지 않을 테니까요. 부모님 세대들께 우리 청년 세대를 다독여 달라고, 애써 이해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의 삶도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도, 청년도, 장년도, 노인도 그 누구라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삶이 행복해 질 수 있도록 두고, 어른들도 행복의 삶을 위해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행복한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향린의 어른들께 부탁드립니다. 저희 청년들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해주세요. 향린의 청년들이 향린의 어른들께 바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따뜻한 마음이니까요. 사실, 예배 준비하면서 청년주일 한 번 지나면 청년 방이 생기고 예산이 늘고, 이런 일들이 생겼다고 해요. 저도 하늘 뜻 펴기에 그런 이야기해서 예산을 따내야 할까요? 근데, 아무리 방 생기고, 예산 지원되면 뭐 해요.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 관심, 기도, 이런 게 더 중요한 거 아닐까요? 우리 청년들이 향린 공동체 속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따뜻하게 품어주시고 사랑해주세요. 아직 세상 살아가기 많이 부치는 청년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사랑하고 많이 격려해주세요. 물론 저희도, 많이 사랑하고, 많이 감사드리겠습니다. 향린 공동체 청년들만의 특성요? , 향린의 어른들께 사랑받고 향린의 어른들을 사랑하는 청년들이라는, 우리의 특성이 생겼네요.

 

, 행복해지는 법요? 간단합니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는 거죠. 같이 해볼까요? , 같이 눈을 감아봅시다. 기도하려는 거 아니고요. 눈을 감고,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따라와 주세요. 여러분은 지금 하늘에 별이 눈부시게 많은 시골에 와 계십니다. 지금 시각은 새벽 두 시, 하늘에 별이 보이시나요? , 저기 어렴풋하게 은하수도 보이네요, 서울에서 보기 힘든 건데. 어머, 저기 지금 별똥별 떨어지는 것 보셨어요? , 빨리 소원을 빌어보세요! , 지금 여러분이 별똥별을 보며 빈 소원, 그게 여러분의 마음속에 간절히 바라는 것이네요. , 이 소원, 별똥별의 힘을 빌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인가요? 별똥별만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어요. 행복하기 위한 나의 문제였던 것이죠. 민족통일을 소원으로 비셨다면, 이제 민족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내 자신이 나를 행복의 길로 데려가 줄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통일이 다가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취업을 비신 분 또한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내 자신이 취업의 길로 데려가겠지요, 당장 취업 되지 않더라도 더디 가는 내 자신을 지켜보고 내 자신을 사랑해보세요. 언젠가는 나에게 행복이 올테니까요. 사랑받고 싶다고 비신 분 계세요? 먼저, 사랑해 보세요. 내가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사랑이 오지 않을까요?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우리, 그 소원을 향해 다가서 봅시다. 그러면 우리 삶이 행복해 질 거예요.

 

 

  

 한세욱 목사


[신앙과 삶]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참된 <생명의 길>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고 믿으며 이 길을 걸어갑니다. 생명, 그것은 가장 커다란 가치요, 가장 아름다운 단어일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현실이 낭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생명의 기운을 왕성하게 가진 청년들의 공간인 대학에서, 한 포스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너무 고민하지 마, 잘 안 될거야!”라는 글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 말은 우리에게 익숙한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라는 말을 뒤집은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오늘날의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청년들의 고뇌와 저항정신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생각해보면,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서 고난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의 참된 의미와 그 숭고함은 고난을 극복해가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항상 고난이 있고, 고난을 이기는 것에서 생명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생명의 다른 이름은 어쩌면 고난일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 역시 고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고난의 십자가를 통해 생명의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 세속적인 처방을 내리는 종교적 흥행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향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회개하고, 새로운 삶으로 전환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신앙은 위험합니다. 세상에 길들여진 신앙은 감미롭지만, 이 세상을 변화시킬 신앙은 위험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세상은 도리어 그런 위험한 신앙을 갈구합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퍼져나간 이유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희망이 되시는 이유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위험합니다.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이 올바르기 때문에 위험하고, 세상을 파괴하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때문에 위험하고,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헌신적이기 때문에 위험하고, 가진 자와 강한 자를 비판해서가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자와 함께 해서 위험하고, 낡은 세계와 관념을 타도해서가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현실(인 하느님나라)에 예민하고 충실하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십자가, 그 혁명적 영성]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 말씀은 저 유명한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의 후반부 이야기입니다.

 

3:14-16.<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니고데모와 예수와의 대화가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육으로 난 상태>의 실존에서 <영으로 난 상태>로의 자기초월적 가능성은 그 당시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가 제시하는 신비한 지식’(靈知)에 의해서가 아니라, 육체로 인간에게 오신 로고스의 화신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의 기자는 예수를 믿음으로 라고 표현했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예수에 관한 어떤 기독교적 교리의 수락이 아니라, 그 생명과의 실존적 조우’(遭遇,encounter)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요 3:16<복음의 축소형 구절>이라고 했습니다. 이 단 한구절의 선언을 통하여, 초대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는 세상현실에 대한 모든 형태의 비관적이고 염세주의적 세계관과 몰역사적이거나 탈-역사적 구원관, 그리고 심지어 인간의 육체성이나 물질을 폄훼하는 이교적 사상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근본태도를 그리스도교는 성육신적 영성”(the incarnational spirituality)이라고 부릅니다. 성육신적 영성을 결여하거나 부정하는 기독교는 엄밀하게 말하면 이교적이고 반-기독교적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이처럼 사랑하신 세상성>을 부정하며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무효화 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갈릴리 복음에 의하면, 현실적 인간실존은 본래 창조주가 창조하실 때 부여한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의 본래 바탈>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상태의 존재, -본래적 인간모습 또는 죄의 권세에 메인 존재가 되었다고 실존적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사랑과 정의의 공동체를 이루려는 인간성(co-humanity)>을 잃어버리고 불신앙과, 교만, 탐욕에 붙잡힌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마틴 루터는 인간성 안에 깃들어 있는 이 근원적 병증이 너무나 심각하여, 도덕적 자기반성이나 자기수양의 힘 만으로서는 온전한 치유가 거의 어렵다고 그의 경험을 통해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본래적 바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는 인간자신의 반성, 참회, 수행, 선의 실천노력과 더불어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역사와 약동하는 거룩한 바람이 필요하다고 보며, 그것을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성령의 감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표현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철저한 인간혁명의 표징이 십자가이며, 철저한 인간혁명을 저해하는 이 세상 권세들의 힘을 사랑, 정의 진실의 능력으로 관철하여 승리하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표징인 것입니다.

 

또 다른 본문인 민수기와 에페소서를 보겠습니다. 민수기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출애굽 백성들의 불만과 불평에 대해 불뱀과 구리뱀을 통한 하느님의 벌하심과 구원사건입니다. 그리고 에페소서는 하느님의 선물인 사랑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가 될 수 있다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우리의 성서 본문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거듭나려는 자기 혁명의 노력과 하느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주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성서가 들려주는 십자가의 그 혁명적 영성을 이어가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자세가 필요할까요?

 

 

[지연된 종말론]

 

오순절 사건을 경험한 초대 교회 공동체들은 예수 운동을 경험했던 초창기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감에 따라 종말이 곧 임박하지 않을 것이라고 깨닫기 시작하였고, 종말의 지연은 필연적으로 예수 운동을 하던 공동체들에게 새로운 성찰과 실천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문서화하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문서를 통한 교육을 중요한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연된 종말론은 우리에게도 깊은 성찰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은 한 순간에 불살라지는 운동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과거 엄혹한 시절에는 당면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운동이 되었지만 지금의 우리는 민주화의 실천이라는 것이 단지 형식적 민주화를 이루는 것만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민주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의 제도만이 아니라 민주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나 실천, 삶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억압적인 체제가 저 밖에 어디에선가 나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나의 일상적인 삶을 통하여 구조화되고 체계화된다는 것에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향린의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 전체를 사회와 관련시켜 성찰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일상의 새로운 구성을 꿈꾸는 장구한 변혁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생활신앙운동]

 

하느님 나라 운동은 단지 교회 안에서만 행하는 운동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이루어지는 장구한 혁명/변혁’(레이몬드 윌리암즈)을 꾀하는 운동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현실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치지 않고, 평생을 운동적인 삶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야겠습니다.

 

과거에 기독교 사회운동을 폄하하면서 전문성을 지니지 못한 백화점식 운동, 혹은 나열식 운동이라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현 시기에는 이러한 백화점식 운동을 전문적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전문적인 백화점 운동은 다양한 형태의 대안적 삶을 경험하도록 도와주는 운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학생/청년시절을 통하여 자신이 평생토록 지속시켜나갈 수 있는 운동의 영역을 경험하고 발굴하며, 전문화시켜나가고 이것을 자신의 신앙과 동떨어지지 않도록 기초와 토대를 마련해가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일상과 신앙이 괴리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운동을 생활신앙운동이라고 명명하고자 합니다.

 

본디 신앙이라는 말이 "일련의 믿음과 확신일 뿐 아니라, 믿는 것에 대한 결단력 있는 행동과 지속적인 태도"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신앙은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활신앙이란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일련의 움직임으로 이해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말이나 언어로 표기되지 않는 나의 표현, 나의 태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 등을 통해 우리 삶의 대안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가 의미와 가치의 제조자라는 점에서 단순한 전통의 반복이 아니라 전통의 전복을 통해 전통의 복원을 꾀한다는 점에서 하느님 나라 운동의 그 혁명적 성격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만 믿고 모험하라]

 

역사의 슬픔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생명의 등불을 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교회의 슬픔은 순종하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순종의 대상이 세상의 낡은 질서인 경우에 생겨납니다. 우리 교단의 큰 스승님이신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도피하지도 않고 현실에서 도망하지도 않는 것이 그 본질이다. 오히려 닥쳐오는 역사의 사건들을 정면으로 맞이하여 그것으로 더 높고 참된 새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 본질인 것 같다. 그러자면 삶이 평탄하지 못할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만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참을 뿐 아니라 이긴다. 이길 뿐 아니라 그 자체를 변질시켜 더 높은 것으로 창조한다. 보라, 치욕의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로 되지 않는가? 참패의 무덤이 승리의 생명으로 부활하지 않았는가?” -장공 김재준 어록집 하나님만 믿고 모험하라, 김희헌 편저 -

 

장공은 진정한 믿음이란 종교적 관념에 속지 않고,”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모험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의가 이익에 팔아넘겨지고, 진실이 효율에 내팽개쳐지고, 신념이 실용에 꺾여나가는등 사람들의 희망이 패배하면서, 어둠이 크게 느껴지는 이 시기에 교회가 다시 희망이 될 수 있을까요? 생명의 등불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더욱 절실한 시대입니다. 생명과 평화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맘에 모신 사람일수록 이 세상은 더 어둡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의 희망은 오직 하느님만 믿고 생명과 평화의 모험을 사람에게 달려있다고 할 것입니다.

 

낡고 죽은 가치들을 회복시킬 움직임은 새로운 시대의 주역들이 등장할 때 현실화됩니다. 깨어있는 신앙인들이 생명과 평화를 일구기 위해 일하는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가 지닌 빛을 더욱 소망하게 합니다. 어둠이 빛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믿음을 안고 모험을 하는 신앙인만이, 이 세계에 생명과 평화의 주()로 화육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 여정 가운데에서 우리는 혼자, 그리고 또 함께 여행을 하게 될 것입니다. 늘 혼자 하고 있다는 소외감이 항상 따라다닐지 모릅니다. 나 혼자라는 외로움도, 함께 해야 한다는 강박감도 넘어서, 위협과 유혹으로 다가오는 것들에 솔직해지고, 그 긴장을 오래참고, 이를 풀어가는 집요한 과정 속에서 성숙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청년주일을 맞아 주 앞에서 간구하는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생명과 평화가 임하기를 빕니다. 또한 새로운 믿음으로 일어선 여러분의 신실한 발걸음에 의해서 어둠을 이기는 생명과 평화의 복음이 회복되고 널리 전해지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