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는 밀알 하나가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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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선교의 방향과 과제]

서형식집사

 

지난 2월 둘째 주 제직 수련회 분반 토론에서 제가 속한 3조의 토론 주제는 사회 선교의 방향과 과제였습니다. 그 모임에서 우연히 서기를 맡아 여기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자랑스러운 전통 중의 하나인 사회 선교에 대해 그동안 느끼고 고민해 왔던 것들을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이런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을 해 오신 분들에게 혹 누가 되지 않을까 많이 걱정됩니다. 부족하더라도 하나의 시각과 견해라 여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먼저 선교란 무엇인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펼쳐지게 하는 것입니다. 선교 방식은 마태복음 15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약하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이 빛을 세상 사람들에게 비추어라. 그리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라! 기독교인이라면 내가 살아가는 것이 선교이고 선교가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 선교란 무엇인가?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장벽과 억압 체제를 온몸으로 저항하며 무너뜨리려 한 역사적 예수의 인간 해방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에서 사회 선교는 탐욕스러운 자본과 힘에 의지한 오만한 외세(帝國), 이와 결탁한 부당한 권력들에 착취당하고 신음하고 있는 민초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예수님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하느님 자녀로서의 존엄을 지켜내는 일입니다. 이 정신은 창립 때의 입체적 선교란 개념과 창립 40주년 신앙 고백문, 창립 60주년 교회갱신과 사회선교 실천을 위한 제안문에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우리 사회 최대 이데올로기인 먹고사니즘으로 정당, 시민, 사회 단체가 무기력해지고,기 독교계가 보수화되면서 우리 교회는 외부로부터 과도한 기대와 시선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향린 교회의 사회 선교의 방향과 과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기독인, 특히 향린 교회 교인으로서 정체성을 세우는 일입니다. 신앙과 인문학의 결합, 저는 이걸 인문학적 신앙이라고 이름붙이겠습니다. 사회 시민 단체와 우리와의 차이점은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은 성서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래서 성서에 대한 이해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강단에서 매주 말씀 선포가 있지만 지속적이며 체계적인 성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서 안에서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편저자의 의도와 맥락을 읽어내고, 성서 뒤에서 사회, 역사적인 배경을 알고, 그리고 성서 앞에서 이 땅에 발 딛고 있는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해석해 낼 수 있는 통찰력을 얻을 것입니다. 지금 목회자가 이끄는 많은 성서공부가 진행 중입니다. 조헌정목사님의 수요일 도마복음, 토요일 안병무 선생님의 역사와 해석이 있고 고상균목사님의 수요일 오전 모세 오경, 4월부터 금요일 제1성서 메길로트, 조은화목사님의 마가복음, 김석채전도사님의 주일 마태복음 공부가 있습니다.

 

유태인 학살을 주도했던 대표적 인물인 아이히만은 기독인이었고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재판에서 강변했습니다. 예수살렘 재판을 참관했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사유하지 않고 성찰하지 못한 데서 온다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 인간의 정신, 인류의 문명 등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인문학에 대한 공부가 같이 이루어져서 자칫 맹목이나 맹신으로 흐를 수 있는 신앙을 다잡아 주어야 합니다. 지금 인문학 공부도 여러 군데서 하고 있습니다. 주일 아침 안병부 읽기, 월요일 철공소, 달구지, 유치부 부모님들의 책읽기, 청신신도회, 작년 새교우 모임의 책읽기 등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모임들이 더 많이 생기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금방 살펴보았듯이 수많은 모임과 신도회와 부서가 있습니다. 이 모임들이 생명력 있는 작은 교회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속해 있는 재정부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가상의 시나리오입니다) 예배 후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헌금 계수를 합니다. 이후 재정부 현안인 장기적인 예산편성과 집행의 원칙, 예산 집행 부서의 회계장부 처리 매뉴얼 작성 등을 논의합니다. 끝나고 차 한잔 하면서 일주일 동안의 에피소드 등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눕니다. 생일인 경우 간단한 축하파티를 엽니다. 수련회 계획을 세웁니다. 각자의 역할을 나누고 예배는 자연 속 명상 예배로 할 지 민속 예배로 할 지 고민합니다. 일정기간에 진행하는 성서 공부에 함께 참여합니다. 한국 경제 현황에 대한 공부를 합니다.(재정부인 경우 경제에 대해 좀 더 관심이 있고 전문성이 있다는 전제입니다) -2007년 이후 5년 동안 실질 노동생산성은 9.8% 올랐는데, 실질임금은 오히려 2.3% 감소하였다. 이것은 한 마디로 생산성 증가로 인한 과실을 기업이 혼자 독차지 했다는 것을 말한다. 고환율,저금리로 정책으로 대기업이 엄청난 부를 축적한 반면 실질임금 하락, 주거비용 상승 등으로 서민들의 주머니는 더욱 쪼그라들어 가처분 소득이 줄어든다. 이는 내수 부진으로 어어지고 자영업자들은 결정적 타격을 받는다. 이런 분석 하에 우리 경제를 지킬 가장 강력한 성장 동력은 노력한 만큼 댓가를 받을 수 있는 공정한 분배 시스템을 세우는 것임을 자각한다. 교회 차원 또는 시민 단체와 연대하여 비정규직법 개정, 최저임금 인상 등을 국회 입법 청원, 언론사 투고, 일인 시위등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한다.

 

제가 지금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회 선교가 어느 특정 부서만의 사업이 아니라 각 단위에서 특징적인 내용과 방식을 개발해 내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되어 가는 모임은 주체적이며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그 속에서 개별성을 존중받고 일을 찿아내어 기획하고 서로 협동하여 수행하고 그 결과를 공유하고 기억하는 작은 교회들입니다. 여기서 각자는 소속감을 가지고 제 목소리를 내게 되고 지도력이 길러지는 것입니다. 이런 다양한 작은 교회 경험속에서 갈등과 이해 충돌을 조정하는 정치력이 생기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면서 창의성이 개발됩니다. 이런 작은 교회의 물줄기가 모여 가뭄과 홍수에도 굴하지 않는 영속성을 갖는 큰 강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셋째, 이웃과 연대하는 것입니다. 향린공동체 협의회, 평신도들의 모임인 기독인 연대, 촛불 교회, 예수 살기, 사회선교센터 길목, 평통사 등에 우리 교인 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허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1교인 1단체 가입운동을 벌이는 것을 제안합니다. 또한 현안에 따라 여러 가지 모임들이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작년 사순절 기간 동안 새벽 기도에 여러 단체, 교회 교인, 목사님들이 함께 한 기억이 있습니다. 재작년부터 평화와 통일을 위한 광복절 연합 주일 예배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교회, 단체들을 발굴해 내고 사업들을 구상해 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생명과 환경, 교회 개혁등의 의제는 기장 교단 교회는 물론 타 교단 교회과도 연대가 가능하고 또한 관계 형성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연대에 대해 이은숙님이 쓰신 글 한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잔뿌리들은 서로 단단히 여러 방향으로 얽어가고 얽혀짐으로써 흙이 흩어지지 않게 합니다.이런 관계 때문에 땅이 된 흙들은 물과 영양을 머금어 생명을 지어내는 창조적 공간이 탄생하게 되는 겁니다.다른 뿌리가 자신을 감도록 자신을 열고 내맡기는 용기,다른 뿌리를 확 감아 자신의 삶을 책임 영역안에 밀어 넣는 진취적 포용. 이 열린 용기와 진취적 포용의 일상적 실천이 대량 학살부터 현재의 극단적인 양극화 상황을 막는, 우리가 존엄한 생명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공적 공간을 확보하는 방법입니다.]

 

넷째, 현장성입니다.‘몸의 중심은 아픈 곳이고 세상의 중심은 울부짖는 곳이.’보통 현장 예배의 풍경은 이렇습니다. 칠흙같은 어둠, 길거리 맨땅, 추위 또는 비, 탄식 소리, 무심코 지나치는 행인, 경찰이나 용역들의 싸늘한 시선-어떤 단어가 떠오르세요? 현대판 광야 아닌가요? 현장 예배야말로 광야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느님 앞의 단독자로서 대화하는 것 아닐까요? 용산 참사 후 남일당 예배,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날 포이동 쪽방촌 화재 현장에서의 예배, 강이 파괴되어 가는 공주보 공사 현장에서의 예배, 두물머리 유기농 현장에서의 예배, 군사 훈련장 확장 반대 무건리에서의 예배가 제가 생각나는 주일 현장 예배입니다. 생명과 평화, 정의가 깨지고 신음하는 상징적인 곳이었습니다. 현장에서의 주일 예배는 큰 의미가 있지만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필요하고 제약도 뒤따르는 행사라 자주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상징성 있는 현장에서 주일 예배는 반드시 매년 한번 꼭 드리고 대신 수요 예배를 현장 예배로 드리는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수시로 아까 말씀드린 교회내의 작은 교회들이 각 현장들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2013년 양재동 현대 자동차 본사 앞에서 현대 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복직을 위한 상경 투쟁이 있었습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희년 남신도회 주관으로 현장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법원에서 정규직으로 고용하라는 판단이 있었음에도 회사측은 이를 이행하지 않음으로서 결국 직장에서 쫓겨납니다. 고공 농성 등 할 수 있는 항의를 하다가 마지막 방법으로 본사 앞거리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막다른 골목까지 몰린 것입니다. 본사 정문 앞에는 용역과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이들 노동자들은 한산한 한쪽 거리 구석에 내몰리고 차벽으로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질척질척 비가 오고 있었지만 경찰들은 비를 피할 텐트조차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물이 고여 있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거기서 제가 하늘 뜻 펴기를 하였습니다. 어려운 사람끼리 만들어 내는 하늘나라 이야기였습니다. 그 중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톰 조드 일가는 오클라하마 농촌에서 알거지가 되어 신천지로 알려진 켈리포니아로 이주합니다. 하지만 이곳도 백만 에이커를 가진 한명의 대지주를 위하여 십만 명이 굶주리는 지옥이었습니다. 아들 톰은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저항하다가 살인죄로 쫓기게 되고 극심한 기아로 딸 샤론은 출산하면서 사산하게 됩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비를 피하기 위해 낡은 창고에 들렀다가 거의 굶어 죽어 가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합니다. 두 모녀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딸 샤론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녀가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비스듬히 누워 자기의 한쪽 젖가슴을 드러내 생면부지의 남자 입에 물립니다. 딱 다물어진 그녀의 입술은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조헌정목사

 

[고통은 거룩한 방해]

 

하루에도 밤과 낮의 구별이 있고 일 년의 시간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있듯이 우리 인생 또한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는 다양한 과정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아니 모두가 삶의 큰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은 삶에서 그럴만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나의 행복을 위해 절대자를 믿고 신뢰하는 것을 넘어서서 칼 융이 말한 대로 내 안에는 수억만 년의 인류의 경험이 집단 무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고, 그리하여 나라고 하는 개인의 삶이 나의 죽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집단 무의식 속에 덧붙여진다고 하는 영원성의 자각이라고 말한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는 말은 그냥 위로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인류의 풍성한 생명을 위한 창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하느님이 주시는거룩한 방해라고 말하는 고백하는 사람도 있고, ‘신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하여 넘어뜨린다는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 두 번째 말은 장영희교수가 한 말인데, 장영희교수는 1952년생으로 200957세의 나이로 사망한 서강대학의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였습니다. 그는 생후 1년 만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소아마비에 걸렸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차별에 맞서 싸우고, 8년동안 지속된 암과의 싸움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 겪었던 장애인의 차별을 다음과 같이 기억합니다. “중학교까지는 학교가 가까워서 엄마가 데려다 줬어요. 그때 오빠가 대학생이어서 간혹 저를 데려다 주고는 했지요.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택시를 타야 되는 거리가 되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택시 운전수들이 아주 불친절했거든요. 기본요금 나온다고 구박하고, 골목으로 들어간다고 구박하고, 그래서 토요일 같은 때에는 택시를 못 잡아서 다섯 시간동안 길거리에 서 있어야 한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그게 제일 힘들었죠.” 적어도 비장애인들은 이런 설움을 겪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는 책에서 행복의 3가지 조건을 사랑하는 사람들’ ‘내일을 위한 희망그리고 나의 능력과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로 말하면서 소금 3%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에 나쁜 생각이 있어도 3%의 좋은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생각, 3%의 좋은 생각을 품는 것 자체가 기적이며 기적은 결코 쉬이 다가오는 것은 아니지만, 터벅터벅 쉼 없이 매일 매 순간을 최선을 다해 걸어가노라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고 그때 사람은 나비나 새가 되어 하늘을 자유롭게 날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불우한 삶이었지만 내면에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살다간 장영희교수의 신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하여 넘어뜨린다는 말,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이 말만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두 살짜리 자녀가 놀이터에서 놀다 넘어져서 웁니다. 대부분은 어머니들이 달려가서 일으켜 주지만, 생각이 깊은 어머니는 혼자 일어서도록 하기 위해 못 본체 합니다. 우리가 믿는 신은 못 본체 할 뿐더러 일부러 넘어뜨리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쁨이든 고통이든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개인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피아노 연주가이자 작곡가인 슈만의 일생을 그린 미셀 슈나이더는 <슈만, 내면의 풍경>이란 책에서 고통은 초대받지 않았지만,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가면이라는 말을 합니다. 누구나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지만, 굳이 찾아와 열어달라고 계속 문을 두드리는 존재가 고통이라는 말은 이해가 쉬운데, ‘가면이다라는 말은 쉬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고통은 분명히 현실인데, 이를 가면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면은 이를 벗기면 그 뒤에 실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고통 너머를 보자는 말이라고 이해합니다. 곧 나 자신을 객관화 대상화하라는 말입니다.

고통을 인생의 과정에 심화시킨 두 단어가 있는데, 고난과 수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을 표현할 때는 수난이란 말을 씁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수난은 인생의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능동의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자학성의 이상 심리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고통을 즐겨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 개인의 삶을 인류 생명체라는 폭넓은 차원으로 객관화시킬 수 있다면 고통에게 문을 열어주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잠을 자지 못하도록 괴롭히는 노크 소리를 멈추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문을 열어주고 그리고 그 가면을 벗겨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지혜자의 삶일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낮아짐의 상징]

 

2성서에서 현대인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히브리서와 요한묵시록입니다. 생활의 용어가 아닌 종교적 언어로 씌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 방식에 익숙해 있는 유대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명하는 책입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는 복종을 통해 완전한 구원을 이루셨고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이 되었고 이 대제사장은 창세기 아브라함을 축복한 왕이자 사제인 신비의 인물 멜기세덱의 뒤를 이었다고 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성서에 나타난 구절만으로는 알 수가 없는 인물이지만, 히브리어로 정의의 왕을 뜻한다는 말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곧 몰몬교에서는 이 멜기세덱을 자신들의 교리 속에 한 중요한 인물로 신학화를 하여 놓았고, 우리나라에도 멜기세덱을 재림예수로 믿는 멜기세덱교라는 이단종파가 있기도 합니다. 이 히브리서 구절에서 멜기세덱은 손가락에 불과한 표현이고 정작 손가락이 지시하고 있는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을 잇는 대사제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대사제는 지위에 있어 높음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통한 복종이라고 하는 낮아짐에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본질상 같은 분이셨지만, 그러나 썩어가는 인간이 되셨다고 하는 요한복음의 sarx ‘사상, 그리고 빌립보서의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자리에로 내려 오셨다고 하는 케노시스 비움의 사상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 말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사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라는 희생에 기초한 타인 구원의 사상 또한 같은 말씀입니다.

 

[가슴에 새기는 법이란?]

 

오늘 예레미야의 말씀은 매우 짧은 구절입니다만, 신학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의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입니다. 모세로부터 시작한 하느님의 구원은 십계명에 기초한 율법과 계명에 있었습니다. 돌에 새겨진 십계명은 결코 지울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성소 법궤 안에는 보이지 않는 야훼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 돌 판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곧 십계명에 기초한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는 일에 인간의 구원은 조건 지워져 있었고, 이 계명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로 종결되어 지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삶의 중심이자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집 성전이 바빌론제국의 침략으로 무너졌습니다. 단순히 건물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믿어왔던 모든 것의 기초가 무너졌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생각하는 힘에 있습니다. 이 생각하는 힘은 그가 믿는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관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것과 같이 비탄과 절망, 죽음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백성을 향해 야훼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 가슴에 새겨줄 새 법을 맺겠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초인 성전이 사라졌으니 율법을 대신할 새로운 법이 나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로되, 그런데 이 법은 문자가 아닌 가슴 곧 사람의 마음에 새긴 법이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양심인가요? 인간의 오성 곧 도덕적 판단인가요? 아니면 죄의식인가요?

 

가슴 혹은 마음은 사람 누구에게나 다 있지만, 이는 집단적 표현은 아닙니다. 마음은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은 물론 같은 사람이라도 오늘 마음 다르고 내일 마음 다릅니다. 신앙은 개인에게서 출발하지만, 공동체 곧 하나됨을 지향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근거를 개인의 마음에다 두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논리가 아닌가요? 종교가 윤리로 귀결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리 없이 종교가 성립할 수도 없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이 저마다 자기 가슴 곧 자기 기준에 따라 다 옳다고 말한다면 혼란과 다툼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오늘날 가톨릭에 비해 개신교가 난립하게 되고 이단들이 성행하여 신도들의 마음을 미혹하게 된 이유는 구원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수 진보의 차이는 물론, 교단마다 차이가 있고, 교단 안에서도 교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심지어 최근 대전의 어떤 대형교회는 사모가 이단교회에 빠져 남편인 담임목사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서는 매우 곤혹스런 일도 생겼습니다. 개신교는 가톨릭의 교황 중심의 수직적인 사제 직제에 대해 비판하지만, 저마다 각기 다른 진리를 외치고 있고 저마다 성서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고 있어 교회가 화해와 일치가 아닌 혼란과 갈등의 근원지가 되어가고 있고 이로 인해 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고 그 결과 교세가 급격히 기울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야훼 하느님은 가슴에 새기는 새로운 법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율법은 강제적입니다. 강제하면 사람은 누구나 반발이 생깁니다. 법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지 이를 처음부터 들이대면 자발성이 결여되기에 오래가지 못합니다. 신앙의 노예화를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이는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하느님께서 이 이치를 깨달은 것입니다. 하아와 아담에게 선택의 자유권을 주어서 실패를 경험한 하느님께서 이번에는 자유 선택권 대신에 지켜 행할 일과 행하지 않을 일을 구분하도록 율법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이 복잡해짐에 따라 그에 대한 해석 곧 계명들이 복잡해지더니 결국은 법이 인간 위에 올라서는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을 억누르는 불법과 차별이 성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예레미야를 통해 또 다시 자유 선택권을 주겠다고 마음먹은 것인데, 저는 이점에서 하느님의 곤혹을 느낍니다. 자녀에게 얼마만큼의 자유를 허락할 것인가? 부모로서 판단이 쉽지 아니합니다. ‘너 이만큼 컸으니 이제는 혼자서 판단하고 그 책임은 네가 져라말은 이렇게 하지만, 자유와 책임의 문제는 그리 간단히 해결되지도 않고, 다 컸다고 부모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자유와 책임의 경계, 신앙적으로 말하면 은혜가 넘치는 곳에 죄 또한 넘치게 되는 모순은 개인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에서도 쉽게 풀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한 가슴에 새겼다고 하는 개인의 판단과 자유에 기초한 새 법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풀어가기 위해 아까 언급했던 히브리서의 대사제라는 말과 요한복음의 밀알 하나라는 화두를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이 단어는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의 복종을 통한 화해자로서의 역할과 이로 인한 타자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세상을 향한 선교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리고 선교의 주체 또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은 선교의 원칙을 다른 세상의 가르침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삶이란 한마디로 우리 각자가 밀알 하나가 되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낮아짐과 희생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함으로 하느님께 영광이 되었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희생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오늘 서형식집사께서 말한 대로 우리 교회가 감당하고 있는 선교의 영역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러나 원칙은 하나입니다. 그건 밀알 하나가 되어 죽어가는 일입니다. 나는 죽어가지만, 그러나 나를 통해 수많은 열매가 맺어지는 곧 내가 산다는 역설적 진리의 길입니다. 이것이 곧 신앙의 신비이자 비약이며 슈나이더가 말한 고통의 가면(假面) 뒤에 숨어 있는 진면(眞面)입니다.

 

오늘의 하늘뜻을 매듭짓습니다. ‘밀알 하나 됨이라는 말씀을 우리 각자의 가슴에 새김으로 초대하지는 않았지만, 내 인생의 문을 두드리는 고통을 자기 십자가로 승화시켜 예수의 뒤를 따르는 이 시대의 살아있는 선교의 증표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