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329() 하늘뜻펴기

 

고난이라는 이름의 희망: ‘~하지 않기!

(이사야서 50:4~9, 시편 31:14~16, 필립비 2:6~11, 마르코 14:32~36/15:33~39)

 

김광열/고상균

 

[카이로스의 때를 느끼기]

김광열

 

안녕하세요.

제가 교회에 87년에 등록한 이후로 28년 정도 지났는데, 처음으로 하늘뜻펴기 시간에 이 자리에 서보니 많이 어렵고, 부담스럽네요. 올해 제직수련회 주제는 아시다시피 우리 이대로 괜찮아?”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조는 한국교회의 미래와 향린교회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였습니다. 저는 사실 제가 조장으로 토론의 사회를 본다는 생각은 했지만, 서기는 다른 사람이 할 걸로 예상을 했었습니다. 사회자로서 서기를 먼저 선출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앞에 있던 채운석 집사님께서(평소에는 운석 형이라고 부릅니다) “뭘 뽑습니까, 그냥 나이순으로 하죠. 막내가라고 농담을 하면서 피식 웃더군요. 저는 조원들을 둘러본 순간 당황했습니다. 모두 희남, 장남 연배 분들만 계시더군요. 나중에 두 분이 더 들어오셨는데, 여전히 제가 막내였습니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까지 서게 되었습니다. 채 집사님 감사합니다. 조헌정 목사님, 캐나다 이민 기간 동안 많은 일을 겪으며 발견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차후에 채운석 집사님을 평신도 설교로 모실 수 있을까요?

 

조별토론에서 저희 조는 먼저 한국교회를 진단해 보기로 했는데,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1) 급속한 고령화로 교세가 감소할 것이다.

2) 교회 구성원의 특성이 달라지고 있다. 20, 30십대의 젊은 층과 40 이상의 장년층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젊은 세대가 교회에 대해 가지는 뜨거움이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생각해보면 교회 외에도 다양한 관심을 갖는 젊은 층의 증가는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3) 세상이 달라졌다. 경제 성장기에는 기도하고 교회 다님으로 부자가 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명예퇴직, 청년실업의 증가를 기도로 해결할 수 없다. , 기복신앙을 바탕으로 양적 성장을 하던 시기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4) 대형교회는 얼마동안 살아남겠지만, 소형교회는 붕괴할 것이다.

5) 교회가 사회현안에 대한 관심 없이, 더욱 가볍고 즐거운 주제로만 흘러갈 것이다. 교회는 미래에도 여전히 가난하고 억눌린 자를 보살피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는 것입니다.

 

조별 토론에서 결론을 내지는 않았지만, 사회 변화와 더불어 일부 대형교회를 제외하고 몰락의 길로 가고 있고, 그렇게 얼마간 존속될 교회도 세상과 역사 속에서 아무 존재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향린교회의 역할은 과연 무엇이고, 뭘 준비해야 하는지 토론을 했는데 주요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교회성, 공동체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교인들이 교회 행사에 더욱 열심히 참석해야하고, 참석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2) 새로 들어오는 교인들은 다양한 이슈에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며, 기존 교인들과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즉 성소수자, 통일에 대한 견해차 등 민감한 이슈들을 제기할 수 있는데 이런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

3) 교회가 사회 변혁을 통해 빵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더욱 노력해야 한다.

4)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보수화를 막아야 한다. 기장총회 대표 파견, 서울노회 신도회 행사 등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를 해야 한다.

5) 젊은 층에 다가가기 위해 좀 더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팟캐스트, SNS 등의 발달된 사회 시스템을 활용하여 향린이 갖고 있는 신학강좌 등의 콘텐츠를 더욱 알려야 한다. 또한 교회 내에 청년선교위원회를 구성하여 교회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사회에 있는 청년들과 소통해야 한다.

 

이상이 저희 조에서 토론한 주요 내용인데, 굳이 제가 더하고 뺄 내용이 없다고 봅니다. 다만, 저는 앞서 말씀드린 토론 내용 중에서 고령화와 청년선교라는 부분에 대해 추가로 제 생각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제직수련회에서 제가 깜짝 놀란 것 중 하나는 향린의 급속한 노령화인데, 참여하신 분들의 평균연령이 제 생각으로는 60 정도 되지 않았을까 판단됩니다. 저는 미국에서 99년부터 2년 반쯤 지낸 적인 있는데, 그때 우리교회에서 전도사와 부목사로 일했던 곽건용 목사가 시무하고 계시는 교회에 1정도 다녔습니다. 그 교회는 백인들이 세운 교회당을 빌려 예배를 드렸는데, 사오백명은 예배드릴 수 있을 만큼 크고 잘 지어진, 그리고 참 예쁘게 생긴 교회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백인들은 소수의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남아 있었고, 담임목사의 주 임무중의 하나는 장례식을 주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의 고민은 교인들이 얼마 안가서 모두 없어질 것 같은데, 교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유럽은 더욱 심각하게 교회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20151월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600개의 카톨릭 교회 중에 1000개가 10년 사이에 없어졌다고, 개신교도 4년 동안 700개가 없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도 급속도로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령화 사회를 65세 이상의 노령인구 분포로 구분하는데,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화 사회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2018년에 고령사회가 되고 2026년에 초고령사회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상황일까요? 지난 2015년 공동의회 자료집에 교인들의 연령별 분포가 포함되어 있어서 그걸 기준으로 제가 계산한 결과 65세 이상은 16%로 이미 고령사회로 들어서 있습니다. 이번에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우리 교회도 베이비 붐 세대가 있습니다. 바로 40~55세 연령층인데, 전체 교인의 38%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다른 연령층에 비해 거의 2배가 넘는 숫자입니다. 이 연령층의 노령화와 더불어 15년 정도 후에는 65세인구가 36%될 것으로 예측되며, 그 이후에는 급속도로 노령인구가 증가할 것입니다.

 

이런 고령화 시대에 우리교회에는 두 가지 과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교인의 다수를 점하게 되는 장년층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입니다. 유엔의 보고서에 의하면 앞으로 30년 후인 2045년경에는 인간의 평균수명이 130세 정도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지금 노령화를 구분하는 기준인 65세는 인생의 딱 반을 사는 시기가 되는 것입니다. 80세 평균연령의 현재 나이로 보면 약 40정도에 해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무엇보다 교회공동체가 은퇴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은퇴는 이제 일을 쉬고, 여생을 그럭저럭 보내는 삶이 아니라, 배우자와 자녀, 부모, 직장의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신만을 위해 살기 시작할 수 있는 나이, 기독교인인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창 젊은 나이의 사람들보다는 육체적으로 다소 약할 순 있겠지만, 그래도 굉장히 긴 시간을 나름의 보람 있는 곳에 헌신하고 즐길 수 있는 나이인 것입니다. 그런 헌신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교회가 적극적으로 개발해서, 고연령 교우들이 보람찬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교우들도 더욱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고, 삶의 자세를 보다 젊게 가져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 과제는 젊은 세대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세움입니다. 점점 젊은 사람은 사회적으로 숫자가 줄게 되고, 젊은이들이 소수로 있는 조직은 종국에는 문 닫을 때만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봤던 그런 교회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사멸의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교회 공동체는 젊은 층과 더욱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소중히 여기며 젊은이들의 고민이 우리 공동체의 고민이 되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새청, 청신, 희청 등을 담당하는 목회자의 임무가 아니라 전 교회 차원에서 풀어가야 하는 과제입니다. 이를 위해 당회나 목운위 산하에 교회청년선교위원회를 구성하고 향후 계획을 위한 체계적 논의와 함께 10년 이상의 장기적 노력 등을 통해, 꿋꿋하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젊은 기운이 숨 쉬는 청년예수의 향린이 될 것입니다.

 

사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교회를 하늘에 떠 있는 인공위성에 비유를 한다면, 우리 교회는 이제 조금씩 지구로 가까워지는 변곡점에 들어섰다고 생각됩니다. 변곡점은 백두산 어느 산등성이에서 한 날 한시에 떨어지는 빗물이 산등성이 왼쪽으로 떨어지면 압록강을 이루고 서해로 가지만, 오른쪽으로 떨어지면 두만강을 지나 동해가 되는 그런 지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큰 변화의 시발점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인공위성이 계속 떨어져 끝내 지구로 추락하느냐, 아님 궤도를 올려 계속 정상적으로 지구를 도느냐 하는 것과 같은 갈림길에 교회가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고, 그에 맞추어 우리가 변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건 불안정입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에 수증기가 분출하고 진동으로 낙석이 생기듯이 변화의 가장 큰 징조는 불안정입니다. 우리는 과거 1~2년 동안 교회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소통, 신뢰, 사랑, 지도력 등이 부족한 모습이 한꺼번에 분출되는 듯한 시기를 보냈고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이런 내적인 불안정은, 세상이 변하고 있고, 우리가 그에 맞추어 젊은 향린으로 개혁해 나가야 하는 절박한 시기가 되었다는 징표일 수 있습니다.

 

다시 수련회 주제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 이대로 괜찮아?” 아니오 절대로 괜찮지 않습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교회적으로 더욱 젊어지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젊은 층의 고민과 얘기를 들어야 합니다. 향린의 운동방식이나 관성적인 제도, 문화가 젊은이들이 뚫고 올라오는데 장애가 된다면 과감히 개혁하여 주체가 되고 판을 벌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시대가 바뀌어가고, 교회적으로 그에 대한 영향을 받기 시작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향린은 주변 명동도시정비와 맞물려 개축하거나 이전을 해야 하는 등의 시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의 산물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교회에게 큰 축복을 주셨다고 봅니다. 교회 내 공간이 증가하고, 엘리베이터가 생겨 편리해지는 그런 단순한 건물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개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60년 동안 우리의 선교 방향에 맞는 공간과 꼭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 이 땅의 정서를 담은 향린 고유의 예배가 펼쳐지기에 적합한 예배당이 있는, 그러면서도 건강한 생기가 느껴져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그런 교회를 만들 수 있고, 또 만들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흔히 시간에 대해 말할 때,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물리적인 시간인 크로노스가 있고, 특별한 때, 기회와 결단의 때, 기독교 신앙에 입각해 볼 때 하느님이 개입하시는 순간인 카이로스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의 이 순간은 향린 63년 중의 어느 일 년, 그냥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2015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때, 시대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신 카이로스의 시간일 것입니다. 딸깍 딸깍, 하느님의 시간이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 속에서 향린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보이시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닥친 시대의 흐름을 직시하고, 우리 모두 힘을 모아 교회를 젊게 변화시켜 나가는데 함께 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에 화답했으면 합니다.

 

[고난이라는 이름의 희망]

고상균

 

지난 주 하늘뜻펴기를 하셨던 서형식 집사님의 정의에 따라 인사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인강 고상균입니다.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며 김광열 집사님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린 것이 있습니다.

살살 해 주세요. 너무 잘 하시면 저 같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집니다.’

하지만 그 분께서는 제 생계형 청탁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셨네요. 전통적인 예배학에서 예배 중에 찬사를 받을 대상은 오직 하느님 한 분이라 하였습니다만, 그와 같은 수직적 구조와 함께 예배를 함께 나누고 있는 공동체의 수평적 사귐 역시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 최근 예배학의 흐름에 따라 공동체의 귀한 신앙고백을 나눠주신 김광열 집사님, 그리고 김 집사님과 함께 의미 있는 토론을 해주신 모둠원 모두에게 사랑의 박수를 다같이 전해드렸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앞서 나눈 하늘뜻펴기의 내용에서 우리는 공동체 전체가 관심을 기울이고 극복해야 할 사항들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위기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과제들을 잘 풀어갈 수 있을까요? 장래 우리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목사임과 동시에 1성서를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물론 지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불이행하는 제가 스스로 공부를 운운하는 것에 진심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성서에 대한 궁금함을 가지고 끄적끄적 알아보고 싶은 저는 적어도 학생이라는 말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런 저에게 만약 누군가가 성서를 공부하는 이유를 물어봐 주신다면, 부끄럽지만 성서는 ~척 하지 않아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성서도 큰 종교의 당당한 경전이기 때문에 도처에 근엄하고 싶어 하는 저자들의 의도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해석자들의 평가가 드러나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과 관심을 통해 만나는 성서는 당시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실수 혹은 그들에게 직면했던 위기와 고난을 솔직하게 담아내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저에게 성서는 참 매력적인 글이자, 신앙고백의 원천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신 말씀 중 그 첫 번째 솔직함은 이사야서입니다.

그 중 오늘의 본문은 유다 멸망 후 이어진 포로기라는 국가적 고난의 상황이 여과 없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 중 야훼께서 화자, 즉 말하는 이에게 그 말솜씨를 가르쳐주시는 이유가 고달픈 자를 격려하기 위함(50:4a)’이라고 서술하는 본문은 화자가 폭력에 노출되고, 얼굴엔 침이 뱉어지며, 내뱉는 욕설에도 무방비상태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국을 멸망시킨 제국 바빌로니아, 도무지 항거할 수 없는 그 절대권력 앞에 놓여진 절대 찌질한 존재....... 본문의 화자는 그렇게 영원한 신의 계약위에 지어졌다는 예루살렘의 몰락과 눈앞에서 봐야했던 성전 파괴, 그리고 이어진 학살과 약탈, 이후 기약 없는 타향 노예 살이에 처한 공동체의 상황을 멀쩡한 척하지 않고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숨기지 않을게. 우린 깔끔하게 망했어. 그리고 죽도록 얻어맞았지. 하지만 신음소리도 낼 수 없었어. 우린 망했으니까.......’

도대체 감당 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위기, 그 절망적 고난 앞에서 그들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을까요?

 

나는 도망하지 않는다. 나를 때리는 사람에게 등을 내밀고 수염을 뽑으려는 이에게 턱을 내민다.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차돌처럼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다. (50:5~7)

 

2007년 소천하신 고재식 교수라는 분을 아시나요? 다행히도 저는 그분의 해방신학 세미나를 수강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는 도중 문득 2005년 즈음의 강의 중 열변을 토하시며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라는 구절로 유명한 마태오복음 538 이하의 내용을 설명하시던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강자는 약자가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한다. 반대로 약자가 그 폭력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때 강자는 불안함에 빠지고 만다. 이 구절은 비폭력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폭력을 당당히 받아들여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폭력이 지배수단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라는 저항적 메시지로 읽어내야 한다. 직면한 폭력을 당당히 받아들이는 자세는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치 못하게 한다.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약자가 강자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반격이다. 너를 때리는 이에게 더 때려!’하고 나머지를 들이대는 것, 속옷을 강탈하는 세력에게 겉옷도 먹고 떨어져라 이놈아!’라고 소리치는 것, 강제노역을 시키려는 이에게 더 시켜라. 난 그 정도로 쓰러지지 않는다!라며 싸늘하게 웃어주는 것.......마태오 공동체는 폭력에 대한 최대의 저항을 신앙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쫄지마! 쫄지말라구!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이사야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살펴보면 그렇게 강한 이가 엄청난 폭력을 가하고 있는데도 그는 전혀 쫄고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입니다. 아니 받고 있다기보다는 그렇게 함을 통해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들을 비웃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자로 대표되는 당시의 공동체는 그렇게 자신들에게 가해진 폭력, 그 참혹한 위기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두려워하지 않음의 투쟁을 벌여나갔던 것입니다. 때리며 긴장하는 자들과 맞으며 웃어주는 이들이 벌인 싸움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그와 같은 시간이 50여년 흐른 뒤, 영원할 것 같았던 바빌로니아는 내분으로 붕괴하고, 화자들의 공동체는 고향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직면한 위기에 대한 솔직함은 두 번째 본문인 필립비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2성서에 등장하는 서신서 중 바울로의 대표적 친서로 평가받는 필립비서는 바울로에게 있어 유럽선교의 첫 번째 결실이었던 필립비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1:3~4)

이렇게 공동체를 향한 사랑으로 따끈따끈한 필립비서는 역설적이게도 바울로의 대표적 옥중서신이기도 합니다. 근현대와 같은 구금형이 없었던 고대에 갇혀있다는 것은 요행 잘 풀려날지, 아니면 얻어맞고 추방을 당할지, 혹은 살지 죽을지에 대해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을 만큼 불안한 시간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움츠려 들어버리고 말았을까요? 그의 선교활동은 이대로 막을 내리고 말았을까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갇혀있다는 사실이 온 경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13)

 

필립비 부근 도시에서 구금상태에 놓여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당시의 바울로는 자신의 현실을 서신 곳곳에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데요, 대개의 경우 서신서의 처음에서 자신을 사도라 칭하는 것과 달리 으로 기술하는 바울로는 오늘의 하늘말씀을 통해 예수 역시 종의 신분으로 함께 하셨음을 언급합니다. 아울러 1성서의 예언서에 등장하는 고난 받는 의인개념으로 예수신앙을 해석하고 있는 바울로는 본문의 예수찬가를 통해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고난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요, 하느님과 같은 존재인 예수가 종의 신분으로 낮아짐을 통해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며 로마시민권자인 자신이 제국의 지방 속주에서 구금상태에 놓여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예수가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는 선언을 통해 자신 역시 생명의 위협에 처해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위기 앞에서 오히려 사랑하는 공동체의 앞날을 염려하며 더욱 굳세게 진리를 지켜나갈 것을 강조하는 바울로는 기쁨을 강조합니다. 도무지 기뻐할 것이 없는 상황 속에서 외치는 기쁨....... 그것은 앞서 나누었던 이사야서 속 화자가 절망적 현실을 살아내며 지어보이는 웃음과 닮아있습니다. 그렇게 4장 남짓한 필립비서 전체에서 무려 열다섯 번이나 기쁨을 언급하고 있는 바울로는 서신의 말미에서 더욱 격정적으로 기쁨을 외칩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4:4)

 

신앙인의 기쁨은 이렇듯 안락함 속에서 흘러나오는 미소가 아니라, 위기 상황 가운데 피워올리는 희망의 징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기쁨의 영성 때문이었을까요? 바울로는 이후 수년 간 유럽지역 선교를 지속했고, 그 결과 서방 여러 지역에 예수신앙 공동체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드디어 고난의 끝판 이야기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 속 그는 갈릴리의 한 남성으로 거렁뱅이같은 행색의 제자집단과 함께 가는 곳 마다 하느님나라를 설파했고, 하느님의 정의(正義)와 상반되는 당시 지배세력에 저항했습니다. 이제 그에게 죽음은 피해갈 수 없는 위기였습니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14:36a)

 

이렇게 궁색한 초월자를 다른 종교에서 만나보신 적인 있습니까? 이토록 찌질한 구원자를 다른 경전에서 읽어보신 적인 있으신가요? 있지도 않은 교주의 위대함을 적기에도 부족한 지면에 이렇듯 민망한 이야기를 끄적거린 마르코공동체는 도대체 생각이 있기는 했던 것일까요?

 

주후 70, 예루살렘은 반정부 무장 세력을 진압하기 파견된 로마군단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황제의 추방령에 의해 유대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지역별 유대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급선무였던 랍비들은 효과적인 내부단결을 위해 이단색출을 단행하였고, 나자렛당 즉 예수운동을 이어가던 이들은 척결대상이 되어 공동체에서 축출 당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 내 종교지도자와 로마라는 내외의 세력들로부터 모두 축출 당한 이들은 당장 오늘의 삶을 이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지요. 마르코 공동체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주님 또한 감당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두려워했음 신앙고백하며 강한 종교적 동질성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마르코공동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구체적으로 이들 공동체가 언제까지 존속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에 직면한 주님이 두렵지만 묵묵하게 그 길을 걸어가신 분임을 신앙고백하며, 그들의 길을 걸어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앞에 읽었던 주님의 기도의 말미는 그와 같은 공동체의 행보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14:36b)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마르코 공동체는 예수가 하느님의 자녀인 이유가 무슨 이적이나 존귀한 혈통이 아니라 두려워 이탈하지 않고 다가온 고난의 자리로 나아가 죽었기 때문이라는 마르코특유의 신학을 정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이와 같은 신앙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목도한 로마군 장교의 고백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야 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15:39)

 

마르코 공동체, 그 혹은 그녀들은 직면한 고난을 직면함으로써 오늘 우리에게 자신들의 복음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향린 공동체 여러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각양의 어려움에 직면하고 계신 여러분!

 

성서는 어려움에 대해 그것이 없어질 것이니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교회 잘 다니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서는 다가온 위기를 직시하고 맞이한 후, 떠나보낼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위기는 위기 자체로 어려움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을 때 위기는 우리에게 높다란 담장과 철창이 될 뿐입니다.

오늘 주보에 적힌 하늘뜻펴기의 제목은 지면상 고난이라는 이름의 희망으로만 적었습니다만, 마음속 정식 제목은 거기에 척 하지 않기가 붙어있습니다. 아픔을 아프다 말하지 않으면 그 상처는 아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것은 개인에게도 우리 공동체에게도 그리고 함께하는 사회공동체도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계형 빈곤으로 굶주리는데 난데없이 먹는 이야기, ‘한식의 세계화를 말하고, 수많은 노동자들의 숨통이 조여지고 있는데 멀쩡한 4대강을 살린다하며, 삶의 자리는 우중충한데 나라밖에 나가 화려한 패션쇼 하고, 돌아오지 않은 자녀들을 기다리며 빈소도 차리지 못한 이들은 일 년이 다되도록 외면하면서 남의 나라 총리가 죽었다는 소식에 즉시 전용기에 오르는 식의 별일 없는 척이 지금 이 땅과 온 생명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은 자신에게 드리우는 죽음의 그림자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히 그 죽음의 자리로 걸어가신 주님을 기억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앞서가신 주님을 기억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다가서는 위기를 희망의 가치로 전복시켜나갔으면 합니다. 그렇게 고난이라는 이름의 희망을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힘을 내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마음모아 기도합니다. 잠시 침묵기도 하겠습니다.

 

늘 어설프지만, 마음을 다해 위로합니다.

힘을 내십시오. 평안하십시오.

그리고 진리 안에서 해방의 자유를 만끽하십시오.

 

늘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십시오. 함께하십시오.

그리고 삶 가운데 꼭 한 걸음만큼의 실천을 이루십시오.

 

어느덧 나와 우리, 그리고 세상에 가득했던 어려움들은

더 이상 위기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살아갑시다.

 

이제 서로를 향한 축복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가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