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첫 목격자, 여성 이야기

133:1-3, 4;32-35, 요일 1:1-7, 20:1-10

 

[강일국집사 하늘뜻]

 

안녕하십니까? 강일국입니다. 저는 희년남신도회 회원이구요, 성가대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향기로운 이웃 합창단 단장입니다. 아시죠? 저는 최근 힘든 시간을 지냈습니다. 지금까지 평신도 하늘뜻 펴기를 하신 분들은 잘 아시지요? 문제의 그 날. 성가대 연습이 끝나고 제직 수련회에 얼굴이라고 비치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꿈에서 조헌정 목사님도 몇 번 뵈었습니다. 힘든 과정이지만 평신도 하늘 뜻 펴기는 우리 교우들을 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제도라고 생각됩니다. 섬돌 향린교회는 매주 평신도들이 10분씩 하늘 뜻 펴기를 한다고 합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에서도 이런 제도를 도입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 드릴 것은 향린 교회 60주년 기념 설문조사 내용과 함께, 우리 교회가 돌아보아야 할 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재작년 설문지를 만들 당시 진지하게 논의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설문지 제작팀에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 교우들의 특징을 잘 드러낼수 있을까, 혹시 잘못된 조사로 향린교회에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설문을 만들었습니다. 설문조사를 보면 개인별 특성, 교회 활동, 신앙 생활, 사회 문제에 대한 시각 등이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 교우들의 특성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 교우들의 출석기간을 보면요. 출석기간이 5년 이하인 교우와 16년 이상인 교우가 많습니다. 6년에서 15년 정도 출석한 교우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허리가 약한 셈입니다.

 

향린교회에 출석하게 된 계기를 보면 스스로 찾아서 오셨다는 분이 48%로 가장 많았습니다. 나머지는 주변의 가족으로 나온 분들이었습니다. 다른 교회에 비하면 본인의 선택으로 교회에 나온 비율이 매우 높은 편인 것같습니다. 우리 교우들의 특성 중 가장 놀라운 것은 학력 수준이 대단히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의 학력 수준을 보면서 거의 기절할 뻔했습니다. 연령이 높을수록 최종 학력이 낮아져야 하는데 우리 교회 분들은 연령이 높으신 분이나 적으신 분이나 학력 수준이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요. 우리 교회는 70대 이상인 교우 중에 대학원을 나온 비율이 30%가 넘습니다. 제가 이 분들이 대학원에 입학할 당시 통계를 확인해 봤는데요. 우리 교회 교우들의 대학원 입학률은 당시 평균 입학률의 360배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70대 이상 되신 어르신 들 중에 대학원졸 학력을 가진 분들이 우리교회에 모두 계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높은 비율입니다. 이렇게 학력이 높으니 세대를 막론하고 자기 논리가 대단히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논쟁이 붙으면 상당히 치열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겠지요. 제가 처음 향린 교회에 나왔을 때 머리가 하얀 어르신이 영어 성경을 읽고 계시더라구요. , 여기는 어르신들도 영어로 성경을 읽는구나. 제가 긴장을 했는데요. 나중에 보니까 거의 대부분 한글 성경을 읽으시더라구요.

 

우리 교회는 다양한 연령층이 고루 분포되어 있습니다. 연령별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시는가 보았는데요. 연령이 높을수록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열심이셨습니다. 기도, 성경읽기, 헌금하는 비율이 모두 연령이 많을수록 높았습니다. 성경읽기나 기도는 어르신들이 모범을 보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헌금과 사회 기부를 하는 비율을 보면, 헌금을 많이 하는 교우들이 사회기부를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교우들이 향린교회에서 느끼는 문제점입니다. 향린교회에서 느끼는 문제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 교우들의 참여부족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34%로 가장 많았구요. 다음으로 20.3%가 세대 간 단절이라는 응답이 많았습니다. 실제 우리 교우들이 향린교회 모임에 활동하는 정도를 보면, 활동을 전혀 안하는 분이 32%구요, 1개 이상은 참여하는 교우가 약 70% 였습니다. 기대치가 높은 편이네요.

향린교회의 사회참여 정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질문했는데요. 적절하다는 응답이 약 50%였는데요. 많거나 너무 많다는 응답은 35%로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연령이 60대 이상이거나 20대 이하인 교우들이 상대적으로 부담을 많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학력이나 학벌로 인한 차별이 있는가 질문했는데요. 차별이 없다는 의견이 54%였지만, 46%의 교우들은 향린교회에도 차별이 있다고 응답하였습니다.

우리 교우들의 학력이 매우 높고, 직업 지위도 매우 높은 편이어서 엘리트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편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학력, 학벌, 직업, 소득과 같은 조건들을 보고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기 위해서는 편견 없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차별을 없애려는 노력을 특별히 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불평등한 차별이 우리 교회에서도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을 위해 노력하지만 노동자가 적응하기 힘든 교회,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하지만 소외된 사람이 다니기 어려운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혹시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의견이 68%, 부정적인 의견이 21%였습니다. 동성애 즉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식은 동성애에 대한 객관적인 논의를 활성화한다면 편견을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제 주변에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많은데요. 동성애 문제만 나오면 사생결단을 하기 때문에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제 수업에 들어오는 대학원생들 중에 목사님을 포함해서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많아서 논쟁을 벌인 경우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객관적인 근거보다는 보수적인 신앙 관점이나 비과학적 편견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지지난 주에도 일부 대학원생들과 설전을 벌였는데요. 아직도 동성애가 에이즈의 주요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이 분은 자료까지 들고 와서 주장을 했는데, 자료를 살펴보니 사실을 왜곡한 내용이었습니다. 열띤 논쟁을 거쳐야 했지만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했을 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그런 논의가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세 번째, 우리 교우들의 사회적 행위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는데요. 고액과외, 체벌, 부동산 투자에 대해서는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는 의견이 3분의 2 정도 되었구요.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의견은 많지 않았습니다. 사주팔자에 대해서는 반반이었어요. 그런데 주식 투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의견이 59%였고, 부정적인 의견은 41% 였습니다. 이것은 좀 의외였습니다. 저는 자본주의의 핵심적이면서도 가장 중대한 문제는 이 사회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라고 생각합니다. 자본가가 일하지 않고도 이윤을 창출하는 것은 노동에 대한 착취 때문입니다. 주식 투자는 노동에 대한 간접적인 착취라고 보고 이것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주식에 투자하는 것이 죄악을 저지른다 의미는 아닙니다. 노동하지 않고 이익을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에서 주식 투자는 분명히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고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이런 모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이것이 기독교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59%의 교우님들이 저를 노려보실까요. 설마 그러진 않으시겠지요.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모순에 대해서 논의가 더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향린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향린 교회 교우들은 칭찬 받고 존경 받을 만한 훌륭한 분들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우리 교회 자랑을 많이 합니다. 불의한 정권에 저항하고 사회 참여를 활발히 하며, 타 종교에 개방적이며, 소수 집단을 보호하는데 앞장서고 있다고 말입니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은 , 이단이구나하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대단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저는 향린교회에 정회원이 된 지 5년 쯤 되었는데요. 교회에 오래 다닐수록 이 사실을 잊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교우들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요. 그냥 무심하게 지나가거나 어떤 교우들이 어떻다는 둥 뒷담화를 하기도 하지요. 그러다가 종종 역시!’하는 생각이 들고, 다시 처음에 가졌던 로망을 기억합니다. 하나의 과정이겠지요. 슈퍼맨으로 보이던 아빠가 보잘 것 없는 한 남자로 보이다가 점점 크면서 새삼 훌륭한 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아들처럼 말입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귀중한 의미를 아는데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교우들이 서로 잘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태도는 역설적이게도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가대에서 발성을 배우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발성을 잘 하려면 자기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밖으로 소리나는 자기 노래소리를 객관적으로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노래 부를 때 몸 안에서 나는 소리도 함께 듣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발성을 잘 하려면 반드시 다른 사람이 들어주어야 한다고 하네요. 유명한 성악가는 대부분 모니터 요원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일부 탑클래스 성악가들이 이전 실력만 못한 것은 자기 실력만 믿고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근본적으로 나 자신이 내는 소리가 밖으로 어떻게 전달되는 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똑똑한 엘리트 일수록 이런 실수를 범할 우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은 어떤가요. 상대도 자기가 어떻게 표현하지 모르면서 이야기하거든요. 나중에 나이가 들면 말도 헛 나오더라구요.

 

문제는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저도 오해할 때가 많은데요. 제가 좋아하는 교우 한분이 갑자기 저를 보고 인사를 하지 않는 거예요. 저는 이전에 제가 그 분에게 뭘 잘못했나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은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고 딴 생각하느라 그러셨더라구요. 조그만 행동에서도 오해의 소지가 있지요.

 

아주 가끔 우리교회에서 일어나는 논쟁에서도 그런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잘못된 정보, 사소한 감정, 사소한 선입견 등으로 일어난 문제가 다른 식으로 합리화되면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상처를 주는 일 말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기본적으로 저항정신이 강하고 비판 능력이 강하기 때문에 이 사회에 필요한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하고 계시지요. 이런 비판은 불의한 정권에 대해서 저항할 때는 큰 힘이 됩니다. 문제는 이런 비판을 우리 안에서 서로에게 한다면 너무나 많은 오해와 상처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우가 어떤 입장에 있는지 같이 지내보고 수다도 떨고, 식사도 같이 하면서 대화할 때 서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비판 능력이 강한 우리 교우님들은 다른 교우를 판단하기에 앞서서 이해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조직의 운영에서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직자들의 독단적 행사를 막기 위해서 민주적인 제도를 가지고 있지요. 목회운영위원회 같은 제도 말입니다. 교회의 활동에 참여를 활발하게 하기 위하여 신도회나 소모임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조직이 경직되거나 조직간의 소통이 없으면 원래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조직을 만들면 민주적 운영이나 소통이 잘 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제도가 기계적으로 그것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의 목적대로 조직을 운영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보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보완해야 할 영역 가운에 또 중요한 것이 영적인 훈련과 교육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적인 수준이 대단히 높고 사회운동을 활발히 하는 반면 개인에 대한 영적 수련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배 시간에 하는 성경읽기나 침묵 기도, 새해마다 하는 영성 단식 등이 있는데요. 우리 몸에 체화되도록 영성 수련에 더 힘써야 합니다. 개인적인 수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더 만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영적 수련을 바탕으로 해서, 이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교육 문제는 향린교회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등록한 지 5년 미만인 교우들과 16년 이상인 교우들이 많은 반면에 6-15년된 교우들의 비율이 적은 편입니다. 이것은 새교우들이 많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교우에 비해 내부에서 교육받고 성장하는 교우들의 비율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어린이, 푸른이를 잘 자라게 도울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지금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지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향린교회의 푸른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푸른이들은 향린교회에서 느끼는 모순점, 즉 낮은 곳으로 임하라는 진보적 이념을 가지면서도 사회적인 지위를 얻어야 한다는 모순을 느끼고 있습니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라. 하지만 너는 일단 성공해야 한다.’ 이런 모순을 느끼는 겁니다.

 

향린 교회의 사회 참여 정도에 대한 설문에서도 20대 이하의 푸른이들은 많다, 또는 너무 많다는 의견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습니다. 사회 참여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푸른이들의 눈에 무책임하게 보일수도 있는 사회 참여 독려는 오히려 이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습니다. 사회적 비판의식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소화하게 한 후에, 사회 참여를 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푸른이들은 아파하고 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참 무책임한 말입니다. 어른들이 아프게 해 놓고 이제와서 합리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향린교회는, 힘들어 하는 푸른이들이 위로, 즉 힐링을 받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푸른이들이 느끼는 모순을 극복할 수 있도록 보다 세심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학교 교육에서 느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교회에서 얻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한 교육과정이나 진로 지도 프로그램을 실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요. 향린교회가 이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그 가치를 다시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옆에 앉아 계신 교우들 보이시지요. 우리 교우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바로 옆에 있는 우리 교우들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는 내가 아무것도 몰랐구나!!!여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앞으로 교우들을 만나실 때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라고 생각하시고 인사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향린 교회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진보 교회의 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영성 훈련과 교육으로 내실을 기하고, 이 사회의 불의를 깨치기 위해 노력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는 작은 교회의 모습을 보인다면 한국 사회, 한국 기독교에 적지 않은 울림을 주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조헌정목사]

 

본래 주어진 오늘의 요한복음 본문은 2019절 이하의 도마가 예수의 몸을 만져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제가 지난주에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주 뺐었던 본문인 1절로 11절까지를 본문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지난 주 말씀드렸듯이 사복음서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다들 동의하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나타나신 장소와 모습들 그리고 이를 본 사람들에 있어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각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복음서가 하나같이 동의하는 사실 하나가 있는데, 그건 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가 여성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남성중심의 사회였습니다. 여성은 사람 숫자를 셀 때에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성이 부활의 첫 목격자로 증언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사실 보고를 넘어 이것이 의도하는 바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죽기까지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남성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갔고, 여성제자들 몇이 남았고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무덤의 돌문을 열수도 없었던 상황에서 새벽부터 예수의 무덤가를 찾아갔던 것일까? 한 주간 내내 이 질문을 갖고 씨름하고 있지만, 아직도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 그건 예수를 사랑하는 정도에 있어 남녀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남녀 제자 모두에게 있어 예수는 지혜의 스승이요 또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앙의 대상은 같았지만, 여성에게 있어 예수가 남성이었기에 더 깊은 애정과 사랑을 품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어머니 마리아가 갖는 모성적 사랑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복음서는 예수 부활 기적 사건에 있어 여성이 없었다면 그 부활은 그냥 땅에 묻힐 수도 있었다는 개연성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성을 부활의 첫 증언자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새롭게 펼쳐지는 이 땅의 역사는 여성이 주도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요?

 

[여성과 남성의 능력의 차이?]

 

요즘은 젊은 부부들 가운데 아들보다 딸을 더 선호하는 비율이 높은 것 같지만, 아직도 곳곳에 성차별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성과 남성의 재능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때, 자주 드는 예가 노벨상 수상자 비율인데, 성별 비율이 얼마나 될까요? 776명중 41명 곧 4.1% 25분지 1입니다. 그렇다면 여성의 재능은 남성의 재능의 25분지 1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요? 여기에 동의하시는 분은 한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요? 오래된 인류 역사에 비추어 본다면 적어도 200만년동안 남성은 사냥을 통해 먹을 것을 조달했고, 여성은 집에 남아 아이를 돌보고 불을 지키고 열매를 채집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리하여 남성은 집 밖의 일에 여성은 집 안의 일을 주로 담당하여 왔습니다. 여기서 바깥 양반 혹은 안사람, 집사람이라는 표현이 생겨났습니다. 아내는 본래 안해집 안에 있는 해라는 뜻입니다만, 지금은 안사람의 의미로 와전이 되었습니다.

 

저의 결혼식 주례사 18번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갈비뼈 하나로 아내 하와가 만들어졌다는 이 얘기 속에서 갈비뼈에 담긴 히브리어 의미는 옆 그리고 평등이라는 숨은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에서 남자는 여자의 머리란 얘기를 하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했고, 심지어는 이는 특별한 경우를 두고 한 말이었지만,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얘기까지 하였던 것이고 보수교회는 이를 문자적으로 그리고 몰역사적으로 해석을 하여 지금까지도 여성들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목사나 여장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성 차별]

 

코란에도 남자가 여자보다 앞서는 이유가 알라께서 남자에게 더 많은 장점을 부여했기 때문이라고 명시를 하여놓았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칠거징악이라는 유교의 규례를 만들어놓고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이념 체제를 만들어왔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같은 회사에서 비슷한 일을 하지만, 여성들의 급료가 남성들의 70%정도입니다. 사실 여권을 주장하는 서구에서도 여성이 투표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 채 백년도 안 됩니다. 지금도 이슬람권 지역에서는 여성들은 얼굴만 내어 놓는 검은 색깔의 차도르를 착용해야 하고 눈만 내어놓는 부르카를 착용해야 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들이 운전대를 잡으면 벌금을 물리고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크레치머는 여성의 천재성은 그 아들들에게 있다고 했고, 심리분석가 아이슬러는 최고의 문학적 가치가 있는 창작 분야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것은 확실하다고 단언했습니다. 지금 이런 발언에 대해 동의하는 분이 여기에 계시는가요? 불과 30년 전인 1980년대 카랴얀이 지휘자로 있던 베를린필하모니 단원들 117명 가운데 116명이 남성이었고, 22살의 클라리넷 연주자 자비네 마이어는 빼어난 실력으로 모든 남성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합격했지만, 남성단원들의 반대로 1년간의 수습기간을 거쳐 대원 비밀투표 3분지 2이상의 찬성을 얻으면 단원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조건으로 들어갔지만, 남성들의 텃세를 견디지 못해 중도에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으로 노벨상을 수여했음을 잘 알고 있지만, 그의 첫 아내인 밀레바 마리치가 이 상대성 이론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똑같은 조건과 환경 아래에서 남성과 여성이 자라난다면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법관 시험에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많이 합격하는 현실을 볼 때, 만약 정말 차별이 없어진다면 팔씨름을 빼놓고 모든 분야에서 여성이 남성을 앞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이건 제가 여성표를 얻으려고 하는 정치적 발언이 아니라, 일반적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이성주도사회에서 감성주도사회로 옮겨가는 현실을 볼 때, 그렇게 될 것입니다. 교회만 보더라도 지금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 있어 여성목회자의 진출은 매우 뚜렷합니다. 모든 신학교에서 여성의 비율이 더 높습니다. 우리나라도 성차별이 없다면 훨씬 많은 여성들이 목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성장로와 향린정관]

 

오늘 예배 후에 장로선출 공동의회가 있고 이번에는 당회에서 정관 184항의 여성장로는 전체 시무장로의 3분지 1 이상이 되도록 한다는 규정이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3명의 장로후보자 중 2명을 여성을 선출하도록 하는 일에 있어 얼마만큼의 강제성을 갖도록 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오늘 논의를 하게 되겠지만, 이것이 능력 있는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 아니냐 하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차별 논쟁에 관련하여 저의 미국에서의 경험을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계의 눈으로 보면 미국은 하나의 제국으로서 우리나라와 같이 힘이 약한 나라들을 지배하여 오고 있고 많은 전쟁을 주도하거나 또는 배후에서 조장하여 오고 있으며, 국내에 있어서도 백인 경찰에 의한 흑인에 대한 총격 살인이 멈추지 않는 인종차별이 엄연한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법으로는 소수자에 대한 보호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일정 비율의 유색인종 소수자를 우선시하는 법규입니다. 그래서 간혹 대학 입학에서 떨어진 백인들이 역차별 소송을 걸기도 합니다만, 소송에서 승리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합격한 백인과 합격한 흑인을 일대 일로 비교하면 분명히 백인의 능력이 더 뛰어납니다만, 미국 흑인 남성 2020세에서 29세까지 대학에 들어가 있는 사람보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더 많은 사회 전체의 잘못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일정부분 개인이 당하는 역차별은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계층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확보하고 획일적인 사회 보다는 다양한 사회가 보다 안전하고 행복한 미래 사회로 나아가는 첩경임을 알고 있기에 그냥 권장사항으로 두면 지켜지지 않기에 이를 차별방지법으로 만들어서 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차별과 개인 경험]

 

제가 미국장로교 워싱톤 수도노회에서 동양인목사로서 최초로 노회장을 지냈습니다. 교회 130개가 넘는 대노회이고 200개가 넘는 노회들을 대표하기에 영어로 명칭을 으뜸이라는 의미에서 Capital 노회라고 부릅니다. 제가 500명이 넘는 노회원들 가운데 뭐가 똑똑해서 노회장이 되었겠습니까? 교회가 컸나요? 목회 경력이 많나요? 영어를 잘하나요? 수염 때문이다라고 하기에는 수염 기른 목사가 너무 많았습니다. 능력 순으로 서열을 매긴다면 저는 맨바닥을 맴도는 목사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노회는 21세기를 들어가면서 소수자를 노회장으로 뽑자고 하는 보이지 않는 신앙의 의견 일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노회장을 하고 싶었던 백인이 있었다면 역차별이었습니다.

 

[자기 비판]

 

향린교회는 약 7만개가 넘는 남한의 교회 중 소수자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복음에 보다 철저하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우리가 주장하는 소리는 분명 전체 남한 교회 안에서 소수자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신가요? 우리의 수가 작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대접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안의 소수자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제직회에 청년들의 참여가 적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더 냉정하게 말하면 청년들이 자기 생각을 쉽게 말할 수 있나요? 청년들은 개혁적인 발언들이 많습니다. 어르신들이 보기에는 버릇이 없을 수도 있고 너무 앞서간다는 얘기를 듣기 쉽상입니다.

 

나이로만 따지면 우리 교회 평균 연령은 43세입니다. 그러나 당회에서 40대는 한명도 없고, 평균 60대에 육박하고 있으며 목회운영위원회에도 25명 중 3명만이 40세 이하입니다. 당회는 개인의 지도력을 우선시하기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지만, 목회운영위원회는 전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구조로 만들어졌기에 40대 이하의 교인들이 볼 때, 이는 분명 차별입니다. 시무장로 숫자 3분지 1 이상은 여성이 되도록 한다는 규정과 여성목회자 1인 이상을 둔다는 규정은 문구상 별 차이가 없지만, 여성목회자 1인 이상은 의무규정으로 지켜왔고, 여성장로 규정은 권장 사항으로 해석하여 왔지만, 만약 남녀비율을 권장 사항으로 해서 정관에 두어야 한다면 반반이 되도록 한다 혹은 지금까지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니 앞으로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도록 한다로 개정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이천년 전 유대사회 그리고 지난 2천년의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분명 여성은 수많은 차별을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여성이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이 불과 백년이 안 됩니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서구 사회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초기부터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신앙의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훼 하느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은 본래 애굽의 노예들이었다는 이야기, 예수께서 갈릴리의 어부들과 세리들과 병자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쳐나가셨다는 이야기,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의 양보다 우리 밖에 있는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노예제도에 의해 사회가 움직여가고 있고, 여성은 한명의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있고,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은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당하는 것이 당연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노예와 주인, 여자와 남자 그리고 이방인과 유대인이 주안에서 하나라고 하는 소수자의 외침을 주류 사회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건 지금의 현상 사회를 뒤집어 없는 혁명적인 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극히 당연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불법들이 오늘의 당연으로 자리 잡기까지 그 과정에 신앙의 선배들이 받아야 했던 수많은 아픔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역사 발전에 피할 수 없는 과정들인 것입니다. 향린교회에도 그런 아픔들이 수없이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남들 다 가니까 할 수 없어서 수동적으로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앞서서 능동적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끌고 갈 것인가의 선택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것이 우리가 선택의 기점에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