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26 향린강단교류주일

수수꽃다리 사랑

(요한일서 3:16-24; 요한복음 10:11-18; 사도행전 4:5-12; 시편 23)

  이병일 목사

 

몇 년 전에 버려진 화분을 주워서 잘 가꾸었더니 작년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긴기아난인데, 향기가 진하고 좋습니다. 4월 내내 피어 있습니다. 혼자 즐기기 아쉬워서 교회에 가져갔습니다. 특히 주일예배 시간인 낮 12시 전후에 더 진하게 향기를 내뿜습니다. 어떤 교우는 누가 향수를 뿌리고 온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향기가 예배실을 가득 채웠습니다. 집 옥상에 야래향이 있는데 1년에 두 번 정도 꽃을 피웁니다. 이것은 이름 그대로 밤에 달콤한 향기를 풍깁니다. 요즘 강남향린교회 주변에는 라일락 향기가 진동을 합니다. 교회 뒤편의 아파트에 심겨진 오래된 라일락 나무 두 그루의 가지가 교회 뒤뜰로 넘어와서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라일락 향기는 밤낮없이 향기를 뿜어냅니다. 긴기아난이든지 야래향이든지 라일락이든지 꽃들은 그 향기도 다르고 향기를 뿜는 시간도 다릅니다. 자기에게 알맞은 때에 저마다의 향기로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것도 그렇겠죠.

 

모든 종교에서 어떤 식으로든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연인간의 사랑이나 친구간의 우정을 훌쩍 뛰어 넘습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도 사랑을 강조합니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끼리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합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13:34-35)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4:12-13) “우리가 명령받은 대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요한일서 3:23)

그런데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살짝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이라는 행위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가치인데, 왜 새로운 계명이라고 했을까?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랑을 말하면서 그 앞에 서로라고 합니다. “서로라고 하는 것은 끼리끼리라는 뜻입니다. 이웃이나 혹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굉장히 새로운 것이며, 예수님의 제자됨의 증거라고 합니다. 마태나 누가는 오히려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세리나 이방인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성서에는 예수님의 행적을 그린 복음서가 네 개인 이유와 의미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복음서들은 각자의 공동체들이 자기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적절한 말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정황에 맞게 적용하면서 읽을 수 있고,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왜 요한복음에서는 서로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강조할까요? 요한복음 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랑의 계명이 신자들의 공동체 내에서만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요한은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없고, 형제를 향한 사랑이 신약 성경의 다른 책들에서 요청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라는 조짐은 전혀 없습니다. “서로에서 조금 더 확장 된다고 하여도 친구입니다.(요한복음 15:12-13,17)

이렇게 공동체 내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때문에 어떤 이들은 요한계열의 글이 윤리적 결함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공동체 내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권고를, 누가에서 정의된 것 같이 이웃을, 또는 마태에서와 같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좀 더 보편적인 소명으로부터 종파적인 후퇴를 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신자들은 세상을 향해 아무런 의무도 없고 오직 자신처럼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모종의 의무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J. L. Houlden)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두 가지 물음에 대한 해명이나 올바른 이해를 위한 노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요한 공동체의 삶의 자리와 역사적 정황을 함께 고려하면서, 그 속에서 서로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그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들도 서로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 행동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겸손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수난 이야기 직전에 위치한 이 세족의 장면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형상화하고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을 사랑과 종 됨의 행위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고별 기도와 강연에서 사랑의 계명과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 사이의 연계가 분명해집니다.

이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공동체 내부 사랑에 대한 강조가 종종 교회 내에서의 감상적인 자기만족의 우월감처럼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오해는 요한 공동체의 지나칠 정도로 반문화적인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데서 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 내적인 갈등과 투쟁이 심각할 때에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사소하게 취급하여 무시할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믿음 공동체 내의 사랑 사이에 존재하는 끊을 수 없는 관계는 거듭해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 공동체에서 출교라고 하는 상황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찾으려 애쓰게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세 번에 걸쳐 언급되는 이 추방은(9:22; 12:42; 16:2)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상처를 남겼고 공동체의 전승에 그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 ‘아포쉬나고고스’(aposynagogos; 출교, 회당에서 쫓겨난)라고 선언되는 충격적 경험 이후 요한 공동체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추방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동안 그들에게 삶의 구조와 정체감을 주었던 많은 것들로부터 잘려져 나가는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추방은 사회적인 배척을 의미하고 그로 말미암은 가족, 친구들과의 관계의 상실뿐만 아니라, 경제 관계의 박탈과 종교적 혼란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공동체 정체감의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읽힐 때, 그것이 권하는 공동체 내의 상호간의 사랑은 상대적으로 덜 배타주의로 들리며, 오히려 압제를 당하는 소수 공동체 내의 일치와 단결을 위한 긴급한 호소처럼 들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내의 사랑에 대한 독특한 요한 공동체의 호소는 외우내환에 싸인 교회 내에서의 단합을 부르짖는 통렬한 외침이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동체 내의 서로 사랑은 자기 가족만을 사랑하거나, 자기네 교인들만을 사랑하는 확대된 이기주의와는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공동체 내의 서로 사랑은 이웃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넓은 품을 만들기 위한 단초가 됩니다. 그것은 가족에서 진정한 사랑을 배우고 경험할 때에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공동체 내의 서로 사랑과 그 사랑을 새로운 계명이라고 하는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공동체의 출교와 퇴출의 위기 상황에서 공동체의 정체성을 찾고 결속을 다지기 위한 방편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자체에 대한 설명을 하기보다는 행동으로 먼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본을 보인 행동에서 공동체 내에서 사랑하는 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긴 후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요한복음 13:12-17)

분명히 예수님은 선생님이자 주님이고, 그 제자들은 종이라고 합니다. 그냥 쉽게 읽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여기에 결정적인 단서가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주인과 중의 관계와 유대교의 분파나 어떤 학파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그 관계는 지엄한 권위와 그 권위에 대한 철저한 복종으로 형성되었고 유지되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종은 하나의 도구로 취급되었습니다. “땅을 경작하는 도구들에 대하여 ...... 어떤 사람들은 세 가지 도구로 나누는데, 똑똑히 말하는 것, 똑똑히 말하지 못하는 것, 전혀 말하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 똑똑히 말하는 것은 노예들이며, 똑똑히 말하지 못하는 것은 가축들이며, 전혀 말하지 못하는 것은 농기구들이다.

또한 유대교의 여러 분파에서도 선생과 제자의 관계는 엄격하였습니다. 서기관(율법학자) : 서기관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선배 서기관 밑에서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도제의 생활을 하면서 율법을 외우고 율법의 해석을 배웠습니다. / 에세네파 : 공동체에 입단하고 싶은 사람은 먼저 1년간의 시험 기간을 거쳐야 했고, 2년 후에야 완전한 멤버가 되어 공동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공동생활에 있어서 규정은 엄격했습니다. 특히 상급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했고, 중요한 계명을 어긴 자는 공동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 쿰란공동체 : 공동체에 입단하기 위하여 2년의 시험 기간을 거친 다음, 상위급 수도사들이 입단 여부를 결정하였습니다. 상급자에게 복종하지 않거나 공동체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엄한 벌을 받았습니다. 추방당한 자는 공동체의 공동 식사에 참여할 수도 없었지만 바깥 세계로부터 음식물을 얻는 일도 그에게 금지되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길은 공동체가 그를 다시 부를 때까지 광야에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거나 아니면 아무 소유도 없이 아주 속세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급자나 스승으로서의 권위보다는 서로 사랑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보다는 서로 섬기며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찾으려는 새로운 계명인 것입니다. 자리나 위치에 의한 권위로 결속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과 사랑에 의한 공동체 구성원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의 계명이 새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의 절정은 자기를 희생하는 데에 있습니다. 선한 목자로서 예수님이 양떼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사랑의 지극한 표현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복음 10:11) 베드로는 이렇게 희생하신 예수님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이 예수는 집 짓는 사람들 곧 여러분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사도행전 4:11) 그러한 희생과 사랑은 공동체에서도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요한일서 3:16) 특히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공동체의 외부적인 상황이 평온하지 못하고 열악할 때에, 공동체의 내부적인 현실이 갈등을 유발할 수 있을 때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세월호 학살의 정확한 진상조사와 성역 없는 책임자 수사와 처벌을 요구하는 국민들을 압박하고 연행하는 일에는 번개처럼 신속하지만, 정작 생명의 위협을 받는 국민들을 구조하는 데에는 한 없이 무능했던 정부와 경찰, 그리고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박근혜의 모습은 하느님의 양떼를 죽이고 흩어버리는 강도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단순한 삯군이라기보다는 도둑과 강도입니다. 그들은 국민들의 것을 빼앗고 훔치는 도둑이요, 국민들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강도입니다.

박근혜는 콜롬비아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마르케스의 말을 스페인어로 인용했다고 합니다. “가슴을 가진 사람에게 망각은 어렵다.”(Olvidar es dificil para el que tiene corazon.) 콜롬비아가 한국전쟁 때에 파병한 데 대해 잊지 않고 감사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박근혜가 인용한 말의 원문은 이것입니다. “기억 장소를 가진 사람들에게 기억은 쉽다. 가슴을 가진 사람에게 망각은 어렵다.”(Recordar es facility para el que tiene memoria. Olvidar es dificil para el que tiene corazon.) 마르케스는 반독재, 사회주의 저널리스트이고, 소설가로서 198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작년 세월호 참사 다음날인 417일에 향년 87세로 타계하였습니다. 마르케스의 글을 독재자의 딸이면서 독재자가 세월호 의생자 유가족들을 버리고 도망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어불성설입니다. 박근혜에게 마르케스의 명언 하나를 말해주고 싶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당신이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이다.”(What matters in life is not what happens to you but what you remember and how you remember it.)

 

오늘 우리 삶은 주인과 종, 선생과 제자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 형과 동생, 선배와 후배, 선임과 후임, 상사와 후임자 등의 관계망으로 얽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선생과 주인이라는 위치가 권위적이었다면,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는 오늘날에 관계들의 소통을 방해하는 것은 개인의 자존감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개인주의입니다.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애쓰는 모습이 불통의 원인이 됩니다. 관계들에서 분명히 각자의 위치에 따라서 해야 할 일과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특히 가족과 교회 공동체에서 어떻게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권위를 행사하는 방법에서 서로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말뿐이 아니라 먼저 섬김과 사랑의 행동이 우선인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어려운 공동체일수록 구성원들 간의 서로 사랑은 공동체의 결속력과 새로운 힘을 모으기 위한 방편입니다.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공동체에서 필요한 것은 서로 사랑입니다. 그것은 자기들 끼리만의 확대된 이기주의가 아니라, 더 넓은 세상을 향해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사랑의 쓴맛도 서로 나눌 수 있고,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눌 수 있는 끈끈한 공동체가 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며 하나가 될 때에 어떠한 풍랑이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라일락은 수수이삭의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이름이 수수꽃다리입니다. 말 그대로 꽃이 수수처럼 떨기를 이루면서 뭉쳐 핀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리는 순우리말로 여자의 머리숱이 많아 보이게 하기 위해 덧 넣는 땋은 머리입니다. 수수꽃다리는 작은 꽃 하나하나가 모여 큰 떨기를 구성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작은 낟알 하나하나가 모여 큰 이삭을 구성하는 수수와 비슷합니다. 작지만 한데 모여서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어서 보기에도 아픔답고, 공기 중에 흩어져 흔적도 없을 것 같은 향기도 모여 있음으로 진하게 풍길 수 있습니다. 바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개개인으로서는 부족하고 별 볼일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큰 영향력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여 교회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으로 인하여 이웃에게 더 진한 향기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과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바로 서로 사랑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서로 더 많이 섬기고 더 많이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확실한 제자가 되고 진정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기를 빕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하여 쓴맛도 감당하면서 서로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제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일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신 섬김과 사랑의 길을 따르는 일은 온 누리를 사랑으로 채우기 위한 행동의 시작입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하자 /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 김남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