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기는 믿음/어버이주일

10:44-48; 98; 1 5:1-6; 15:9-17

 

[어머니주일 회복하기]

 

정부가 55일은 어린이날 8일은 어버이날로 제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5월 첫째 주는 어린이주일로 둘째 주일은 어버이주일로 지킵니다. 어린이날은 방정환선생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어버이날은 본래 어머니날로 미국의 영향으로 1956년도에 제정이 되어 오랫동안 지켜왔는데, 무슨 시샘이 있었는지 1973년도에 갑자기 박정희가 어버이날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저는 중학생 3학년 때부터 어머니날이 되면 클럽 친구들과 함께 어머님을 모셔다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친교도 하고 조그마한 선물도 드려 왔었습니다. 그런데 대학교 2학년 때 갑작스레 어머니날이 어버이날로 바뀌면서 이 행사가 중지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들은 이런 모임에 참석하기도 원치 않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어버이날에 아버님은 빼놓고 어머님만 모시고 나가서 식사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버지이긴 하지만, 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바꾼 일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은 사람입니다. 물론 오늘날 아버지들이 직장에 매여 제 역할을 찾지 못한 채 가정에서 소외당하고 있어 아버지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미국 교회처럼 아버지주일을 따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버이날은 어머님과 아버님을 함께 기린다는 점에서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를 함께 붙여놓는 바람에 초점이 흐려져서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두 희석되고 말았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미국에서 어머니날이 생겨난 것은 오래된 일이고 그 연유도 찾아보면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오지만, 어머니날에 카네이션이 등장하게 된 것은 미국의 웨스트 버지니아주 웹스터라는 작은 동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쟈비스라는 부인은 마을 주일학교의 모든 학생들로부터 마치 어머니처럼 존경을 받았는데,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딸 안나는 어머니가 평소에 좋아하던 카네이션을 무덤 주위에 심었는데, 2주기 추모식에 그 꽃을 꺾어 교회에 가져와 온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카네이션이 어머니날과 연계가 된 이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카네이션의 꽃말 또한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하네요.

 

[나의 어머니]

 

아시다시피 저는 지난 한 주간 어머님을 돌보고 있는 셋째 여동생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급하게 로스엔젤레스에 사시는 노모님을 뵙고 왔습니다. 올해 87세이신데, 젊어서부터 허리 통증으로 고생을 하시다 몇 년 전에 수술을 받으셨는데, 그 결과가 별로 좋지 않아 계속 힘듦 가운데 계셨습니다. 2년 전 아버님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노인 아파트에서 혼자 계시면서 그런대로 지팡이에 의존해서 바깥나들이를 하곤 하셨는데, 갑작스럽게 통증과 노쇠로 인해 거동이 힘들게 되신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결혼을 하고 신학공부를 하면서부터 30년 이상을 어머님과는 떨어져 살았습니다. 미국에 있으면서도 저는 동부에 살았고, 부모님은 서부에 계셨기에 1년에 한번 휴가 때나 뵈었었고, 서울로 온 이후로는 더 뜸하게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말에 폭삭 늙으셨다는 말이 있는데, 이번에 뵈었더니 말 그대로 폭삭 늙으셔서 처음에는 매우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하늘나라 가실 것을 마음으로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아버님의 경우는 자녀들이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시어 충격이 컸었는데, 어머님의 경우는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어 오히려 다행입니다. 사실 저는 어버이주일만 맞으면 제가 부모님께 효도를 한 게 별로 없어서 항상 마음이 찜찜했었는데, 올해는 며칠 동안 어머님과 함께 있으면서 밥도 해드리고 먹을 것도 챙겨드리고 왔더니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제가 어머님 식사를 준비해준 경우는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고, 숟갈로 뭔가를 떠서 먹여 드릴 때에는 기분이 묘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결혼을 하시면서 첫 아들을 목사로 드리자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아침저녁으로 가정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마다 제가 할아버지 작은 아버님을 이어 3대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1950년대 초에 그런 결정을 하신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신학대학의 문을 두들기던 6,70년대 시절, 모 여자대학에서 배우자 희망 직업 조사를 했는데 당시 목사의 위치는 경찰 아래였고 이발사 위였으니 그 전 50년대에 첫아들을 목사를 시키겠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눈으로는 전연 타당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름에 대한 확신의 문제로 방황을 했던 적은 있지만, 다른 직업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고, 또 목사로서 한 길을 걸어왔으니 부모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린 것은 맞지만,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해 드린게 없어 불효한 아들입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이웃사촌이라고 사실 저의 어머님보다 매주일 뵙는 나이 드신 권사님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권사님들은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시면 심방이라도 가지만, 저의 어머님의 경우는 잘 뵈어야 1년에 한번이고, 병원에 입원하셨어도 가지를 못했고, 심지어는 전화하는 일조차 밤낮의 시간대가 다르다보니 한주에 한번 드리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저를 위해 아침저녁 기도하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제가 살아온 삶의 전부가 어머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다 같은 심정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어머님을 여의신 분들이라도 이 시간 잠시 생전의 어머님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머님을 생각하는 순간처럼 그 마음이 순수해질 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교우들 가운데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돌보고 계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때때로 힘이 드시겠지만, 전화로만 안부를 물어야 하는 저의 부부를 생각하시면서, 뵙고 싶을 때 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지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안타까운 일은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지만, 홍승권집사님의 어머님께서 3년 전 암수술을 받으셨는데, 재발하셔서 주치의로부터 얼마 사시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머님과 집사님이 힘을 내시도록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머니 동그라미]


어머니에 관한 두 개의 글을 읽어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 글은 작자 미상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첫사랑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절대 아프지 않는 특별한 분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짧은 파마머리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얼굴이 고와지고 몸매가 날씬해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전화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꿈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두 번째의 글은 이대흠님의 어머니 동그라미는 시입니다.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일항가 댕가 하고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강가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남한테 해코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이생을 흙 속에서 산,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주신다.

머리가 땅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

어머니는 한사코

오손도순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힘 그건 어머님만이 갖는 생명의 포용성이자 부조리한 세상을 바르게 펴도록 만드는 사랑과 평화의 마음입니다.

 

오늘 저는 하늘뜻펴기 제목을 요한 사도가 말한 대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신 하늘 어버이의 뜻이자 우리 몸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어버이들의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

 

요즘은 예수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물론 이것도 전연 잘못된 일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세상에서 얻은 부나 권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권력의 자리에 앉았다고 하더라도 김대중 전대통령이나 만델라대통령처럼 자신의 고난을 넘어서서 화해와 용서를 통해 사회 정의와 인류 평화를 위해 일했다면 이는 세상에서 성공함으로 세상을 이기는 경우입니다.

 

최근 화제의 인물이 되어 있는 우루과이의 무희카대통령 또한 그러합니다. 그는 과거 게릴라 요원으로 총을 들고 독재에 대항하여 투쟁을 하다 투옥과 탈옥 그리고 총상으로 죽음의 사선을 수없이 넘었던 사람인데 민주화 이후 정치에 참여하여 결국은 대통령이 되었고, 그가 재임하는 동안 우루과이는 사회 정의와 경제 부문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시절 봉급의 90%를 가난한 자에게 기부하였고, 자신의 집무실을 노숙자의 숙소로 제공하고 자신은 이전의 집에서 출퇴근을 함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살았고, 지금도 은퇴하여 단순한 농사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마치 꿈속에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언제나 이런 세상이 올까? 남북분단이 지속되는 한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권력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권력을 통해 사회적 공의와 생명적 가치를 추구하고 부자들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경우는 세상의 성공을 통해 세상을 이긴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세상 성공 자체에 매몰되어 더 큰 권력과 더 많은 재산을 탐닉하다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반대로 어떤 신앙인들은 예수 안에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세상을 싸워서 이겨야 적대적인 대상 곧 이 세상은 멸망당해야 할 사탄의 세계로 봅니다. 이런 경우는 현실 도피적인 신앙인이 되어 예수천당 불신지옥만을 부르짖는 근본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이 세상은 악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탄이 지배하는 세계는 아닙니다. 이 세상은 분명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곳이고 우리는 이를 위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지금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과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관계는 상치하거나 혹은 대적하는 관계가 아닌 서로 서로가 상대를 인정하면서 함께 변화 상승 발전해가는 음양의 관계 혹은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설교 시간에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니체의 말을 예수의 말을 동일선상에 놓는 일은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저는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라는 영웅을 내세워 영웅이란 최고의 고뇌와 최고의 희망을 향해 동시에 나아가는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세상이 주는 엄청난 고통으로 힘들어 하면서도 동시에 삶의 고통을 긍정했기에 삶의 명랑성을 잃지 않는 강자’(김동규. 멜랑콜리아 문학동네 148)라고 규정했는데, 저는 바로 그러한 영웅이 되는 것과 오늘 요한 사도가 말하는바 예수 안에서의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 사이에 차이를 별로 발견할 수 없습니다.

 

[복종으로서의 저항]

 

오늘 요한서신이 말하는 세상이란 이천년 전 로마 황제가 지배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따라서 요한 사도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고 말했을 때의 그 이김이란 로마제국이 지향하는 힘의 정치 곧 약소국을 침략하여 저들의 재산을 빼앗고 저들을 노예로 만드는 승자 독식의 정복의 가치에 대한 저항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는 원로원에 앉아 정무를 집행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의 승리를 통해 수많은 노획물과 노예들을 이끌고 개선문을 통과하면서 승리의 팡파레를 불었대는 일이 가장 주요한 업무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서가 기록되던 시대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에 복음서 저자들과 바울과 요한은 로마가 승리라고 외치는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야훼 하느님은 그 예수를 부활시켰고, 그리고 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모두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로 만들었음을 역설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이십니다.” 그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란 곧 서로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로마 황제가 신이 되어 가르치는 정복의 가치에 굴복하지 않는 저항의 신앙 곧 십자가를 짊으로서 얻어지는 자유를 말합니다. 이 자유는 어쩌면 만해 한용운이 노래하는 복종과도 그 맥을 같이 합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제목은 복종이지만 실은 자신의 자유를 옥죄이는 정치 세력에 대한 저항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앙인이 십자가란 제목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이란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이란 십자가를 버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안고 갔습니다. 먼 훗날 나는 보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인생이 무겁고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버리고 가는 사람은 인생을 잃고 방황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안고 가는 사람은 인생이 기쁘고 평화로웠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란 곧 자신의 운명이라면 운명, 사회적 책임이라면 사회적 책임 이를 품에 안고 나아가는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이 땅에 심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란 예수를 따라 세상 권력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어 죽음으로 항변하는 민중들과 함께 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만이 세상을 이기는 새로운 창조와 변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지금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세력을 무서워하지 말라, 그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느님이 서 있을 자리가 없고 그럼으로 자유와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말합니다. 인류의 문명은 변방에서 변방으로 부단히 움직여오고 있다고. 현재에는 패배로 보이는 갈릴리에서 새로움은 언제나 동터오고 있다는 사실을.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 작은 향린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의 어깨를 두들겨가며 용기를 북돋아 가면서 예수께서 처음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셨을 때의 그 초심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초심이 어떤 것이었는지 다시 한 번 상기하면서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