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531() 하늘뜻펴기

 

정의, 그 역설의 미학

(사무엘상 3:11~21, 시편 139:1~4, 고린토후서 4:5~12, 마르코 2:23~28)

 

고상균

 

날씨가 갑자기 더워졌습니다. 아직 유월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한 낮의 온도가 벌써 30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병상에 계신 신앙의 선배님들을 포함하여, 이 시간 이 곳 예배실과 향우실, 사무실과 식당, 교육부의 각 부서와 인터넷을 통해 함께하고 계신 여러 교우 여러분들께서 몸과 마음의 건강 잘 지키실 수 있으시길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빛나는 사무엘의 이면에서 엘리의 진실을 발견하기]

엘리는 이미 눈이 어두워 앞을 잘 보지 못했다. 하루는 그가 자기의 자리에 누워있고~”이처럼 시작구에서 이미 엘리와 그의 가문의 미래가 어둡다는 느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 본문전체에서 우리는 무척 친숙한 이름을 만나게 됩니다. 사무엘.......교회를 조금만 다녀본 이라면 대개 들어보았음직한 성서의 간판스타 중 한 사람인 그는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통해 라마다임에서 태어난 인물이자, 성서가 전하는 마지막 사사이고, 그의 손에 사울과 다윗과 같은 성서의 또 다른 스타급 인물들이 왕으로 세워졌다가 그 중 한명은 폐위되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엄청난 비중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물이 형성되어가는 길이 조용할 수는 없겠지요? 당시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실로의 제사장 엘리 가문은 부도덕한 두 아들의 실책과 이를 방관한 아버지 엘리의 잘못으로 인해 끝내 블레셋과의 전투 패배와 함께 멸절하게 되면서, 뒤를 이은 사무엘이 국가 공동체의 지도자로 등극하게 된다고 성서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하고 있는 본문은 이후 그리될 것이라는 신탁을 사무엘이 단독으로 접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에 뭐 문제될 것이 있나요? 성서에서 어차피 사무엘은 한나로 대표되는 신앙의 가문이고, 그 선한 집에서 서원한 인물이 패악한 가문을 대신해 선한 지도자로 나선다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들의 성서 나눔이 이 정도에 머물고 만다면, 그건 우리 모두가 본문을 구성한 이들의 트릭에 제대로 말려들고 만 것입니다. 수준 높은 향린의 신앙가족 여러분들은 이 트릭을 넘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아니, 우리에게 익숙한 성전은 예루살렘인데 왜 엘리 제사장은 실로에 있지? 실로가 뭔데? 그리고 실로가 그렇게 중요한 곳이라면 그곳 태생이 아니라 라마다임에 연원을 둔 사무엘은 왜 갑자기 중심인물이 되어갔을까?’ 왜 그랬을까요?

그건 그 당시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기보다는 어느 시점의 어떤 이들이 과거로부터 전해지던 이야기를 자신들의 필요와 해석에 의해 재구성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2011년 공전의 흥행기록을 남겼던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임금으로 열연했던 한석규가 세종을 실감나게 연기했을 뿐, 드라마 속 그의 말투, 행동이 즉! 500년 전 세종은 아닌 것과 같다하겠습니다. 다시 말 해 2011년의 드라마가 500년 전 세종을 궁녀 한 사람의 생존을 위해 전전긍긍하고, 신하와 친구처럼 대화하는 왕으로 해석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입장에서 오늘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볼 때, 엘리와 그의 아들들은 패역했던 것이 아니라 패역하여 스러져야 할 존재로 묘사된 것이고, 사무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엄친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에 쏙 든 인물이었던 것으로 묘사되었던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럼 어떤 이들이 어떤 때에 그와 같은 해석을 통해 전해진 이야기를 재구성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는 엘리와 사무엘 각각의 근거지인 실로와 라마다임에 있습니다. 먼저 실로에 대해 살펴보자면 본문에서 법궤가 위치한 곳으로 알 수 있듯 베텔 등과 함께 북왕국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옛날 이 땅에 존재했다는 소도와 비슷하다하겠는데요, 비록 성서에서는 사무엘 등극 이후 주요 지명에서 사라집니다만, 여로보암에게 저주를 내렸던 아히야 예언자의 고향으로, 또 예레미야서에서 법궤와 함께 인용되는 성서 곳곳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점 등으로 볼 때, 북왕국 멸망 전까지 일정하게 종교적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한편 실로와 같이 북왕국 영토 안에 속해 있는 라마다임은 실로보다 훨씬 남쪽변방, 그러니까 남 유다 예루살렘과 매우 근접한 곳에 위치했던 도시로, 우리에게는 라마라는 말로 더 친숙한 곳입니다. 북왕국의 중심 도시와 예루살렘에 가까운 변방마을....... 역사적으로 북왕국이 쇄락의 길에 들어섰을 때, 당시의 패권국가 앗시리아의 압박은 북쪽으로부터 더욱 거세졌고, 에돔 등 과거 조공을 바쳤던 위성 국가들은 상황이 바뀌어 북왕국의 동쪽 변방을 유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에브라임 등 북왕국 남쪽 변방의 거주민들과 중앙정계에 대한 비판적인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남쪽, 즉 유다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시기 예루살렘은 급격하게 인구팽창이 이루어집니다. 이후, 주전 721앗시리아에 의해 끝내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되고 난 후, 산산이 흩어져버린 북왕국의 역사적 유산과 문화는 멸망직전 남유다로 피신했던 북왕국의 남부 거민들에게만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들에게 남겨졌던 북왕국의 것들은 어찌되었을까요? 오갈 곳 없는 이들을 정착시켜주는 대가로 유다는 상대적으로 선진문물이었던 북의 문화를 흡수하기 시작했고, 이는 남쪽의 왕조중심사관과 결합하게 되면서, 점차 혈통에 의한 왕조계승의 정당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오늘 함께 모신 본문을 통해 북왕국의 실로가 실각하고, 북왕국 최남단 라마 태생의 성인 사무엘에게 정권이 이양되었다는, 그리고 그 사무엘이 남유다 왕을 세운다고 기술한 저자의 수려한 구성, 그 정교한 트릭의 이면에는 절대패권국가 앗시리아 대군의 침공을 사마리아, 단 한 개의 성만으로 무려 3년을 항전했던 북왕국의 처절한 역사와 국가멸망의 아비규환 속에서 자신들의 문화마저 다른 나라의 왕조사관에 빼앗기고는 끝내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린 북측 유민들의 피눈물나는 진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문은 지금의 우리에게 눈앞에 펼쳐진 사실 너머에 진실이 숨겨져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과연 역사적으로 엘리들사무엘들중 중 누가 더 정의로운 사람이었을까요? 불의한 세력, 혹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바꿀 만큼 힘을 가진 소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이처럼 정의는 전복적이고 역설적인 눈을 통해서만 읽혀질 수 있는 것인가 봅니다. 이건희 와병 1주년을 맞이하여 저녁 뉴스에서 세 꼭지 네 꼭지를 연달아 발병에서부터 지금까지를 브리핑 한 후, 그의 자녀들에게 권력이 안정적으로 승계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보면서 진실은 그 화려한 돈의 왕가가 잘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한팽창을 위해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조가입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혹한 노동현장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고, 그들의 금권에 정의가 있지 않고, 이토록 약한 이들이 살만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의라는 것을 선남선녀가 낭랑하게 읽어 내리는 뉴스멘트를 역설적으로 해석했을 때에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어둠에서 빛을 보는 역설의 미학]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고후 4:6)

 

이처럼 묶여진 서신 전편에서 빛, 밝음, 영광, 희망 등 밝은 기운 가득한 단어가 한가득 등장하고 있는 고린토후서는 그와 같은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에페소 등 아시아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진행 중이던 바울로가 공동체의 위기 상황에 대해 다급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작성한 글들의 모음입니다.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고후4:17)

 

금방 영광이 온다고는 하지만 현실은 분명 고난의 상황임을 드러내고 있는 본문은 당대 그리스 지역 최대의 무역도시 고린토의 교회공동체가 겪고 있었던 어려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를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 볼 때, 그리스의 최남단에 위치한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시작점에 위치하면서 동으로는 에게 해, 서로는 이오니아 해를 연결했던 고린토는 그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소수의 시민들은 수십만의 노예노동을 통해 매우 사치스럽고 무절제한 삶을 구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시작된 고린토 공동체는 최초 전해졌던 예수정신에서 벗어나 대다수 구성원들이 고린토 시의 일반 시민들과 같은 생활행태를 보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공동체 안에서 가지지 못한 이들이 그것으로 인해 차별당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침내 바울로 선교의 최종 상태, 복음을 당대 지중해 일대의 문화 속에서 땅 끝이라 인식되었던 스페인 선교의 중요 거점 하나인 고린토 공동체가 분열과 해체의 위기에 직면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낮은 이로 태어나, 작은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사신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검소한 삶을 살자고 외치는 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찌질한 소수가 되어갔고, 다수에 의해 공동체에서 파문당하는 일도 발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의미 있는 것을 주장한 것이 죄가 되어, 혹은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소수라는 이유로 같은 구성원들로부터 비난받고, 매도당해야 했던 이들.......바로 이들에게 바울로는 복음의 역설적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당신들은 참 못생긴 질그릇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보화가 담겨 있답니다. 우리를 비난하고 내쫓는 이들에 비해 우리가 가난하고 적은 무리이지만, 이와 같은 시련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크신 능력, 즉 보잘 것 없는 것에 귀한 것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을 냅시다. (고후4:7 정리)

 

그의 편지 속에서 바울로는 직면한 어려움을 고난이 아니라 말하지 않습니다. 닥쳐온 위기가 어둠이 아니라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고난과 어둠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가운데 그것들 속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희망과 빛을 발견할 것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린토후서는 직면한 어둠속에서 빛을 읽어내는 역설의 미학을 통해 전복적인 희망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려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후 4:8~9)

 

[정의, 그 역설의 미학]

 

역설을 통해 진리를 조명하는 성서의 가르침은 오늘의 본문 중 마르코복음에서 더욱 극대화됩니다. 안식일, 야훼를 신앙 고백하는 이들은 기본적인 식사를 준비하는 일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그 지엄한 날, 어째서인지 이야기 속 예수는 태연하게 밀밭사이를 지나갑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한 소리들을 법한 상황에서 그의 제자들은 한술 더 떠 아예 밀 이삭을 잘라내는 노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지엄한 분들의 불호령은 피해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왜 저 사람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까? (마르코 2:24)

 

번역의 원칙상 주님에 대해 존칭으로 표기되어 그 느낌이 잘 살지 않는데, 거렁뱅이와 거지 왕초 같은 이에게 이처럼 정중하게 말하지는 않았을 터, 이야기의 느낌을 살려 다시 말하자면, 이 상황은 아마도 바리사이들은 ! 이 자식들아! 지금 네 놈들이 안식일에 해선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느냐?’ 뭐 이런 식으로 한 바탕 난리를 치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혹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 안식일에 움직이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바리사이들이 왜 이야기 속에서는 밀밭 즉 성과 마을 벗어난 들판, 즉 민중들의 노동 현장에 와 있는 것일까요? 그들의 말대로라면 현장에 와있는 자신들 역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바로 이런 내용을 통해 우리는 본문이 적힌 그대로의 진실이 아니라 지배자의 위선을 이야기 속에서 폭로할 목적으로 구성된 민중들의 민담임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즉 현실에서는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지엄한 것들을 조롱하기 위해 민중들이 이야기 속에서 밀밭으로 끌고 나온 것이지요. 이는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조선시대 커다란 팔자걸음을 하며 나타난 양반이 종국에는 광대와 하인 등 민중 주인공들에게 조롱당하고 마는 장날의 탈춤이나, 돈의 상층부에 살고 있는 이들의 수려함 이면의 위선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쓴 웃음을 짓게 하는 최근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같다고 하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서가 이와 같은 민담이라면 이제 그 지엄한 존재들이 망신당할 일만 남았군요. 국가를 새롭게 건설하겠다던 당대 유대교 상층부 인사들이 모두 떠받들어 모시던 다윗 전설을 들어 설명하는 이야기 속 예수는 너희들이 그토록 존중해 마지않는 다윗도 사제들 밖에 먹을 수 없도록 율법화 된 제단 위 빵을 먹지 않았던가?’ 라는 말로 거드름을 떨던 바리사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별칭으로 상징되듯 유대인의 종교와 문화 속에서 신성시되는 존재 다윗의 율법파괴는 그를 신봉하던 바리사이 등 종교 및 사회 지도자들의 규례가 얼마나 자가당착인지를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바리사이의 혼을 쏙 빼놓은 이야기 속 예수는 마침내 민담의 클라이막스, 즉 역설을 통해 드러나는 정의를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자녀라면 누구나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르코 2:27~28)

 

사랑하는 향린 공동체 여러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각양의 느낌과 모습으로 함께 예배에 참여하고 계신 모든 여러분! 오늘은 주님의 승천 후, 성령과 함께 한 제자들이 각양의 언어로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러 나섰던 이야기를 기념하는 성령강림의 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다수 개신교회에서는 이 성령강림이야기를 그 구성된 글의 표면을 따라 신적인 기적사건으로, 혹은 기독교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 이면에서 스승 예수의 죽음 이후 두려운 마음에 숨어들었던 이들이 마침내 다락방을 박차고 나가 주님의 도를 전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그렇게 드리워진 암운을 직시하는 가운데 그 고난의 한중간으로 달려 나간 신앙선배들의 실천, 어둠 속에서 빛을 바라보았던 역설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대가 어둡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과 삶도 참 그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남겨진 이야기의 이면에서 참 소중한 삶을 살아갔던 이들을 기억하며 직면한 각양의 어려움을 정의의 희망으로 전복시켜나갔으면 합니다. 힘을 냅시다! 그리고 역설적 신앙 가운데 어두운 현상 이면의 희망을 경험하는 우리들이 작은 망을 간절히 소망하는 이들의 곁에서 한 그릇의 밥, 시원한 물 한잔 되었으면 합니다. 잠시 침묵기도 하겠습니다.

 

 

 

 

 

 

 

 

 

 

늘 어설프지만, 마음을 다해 위로합니다.

힘을 내십시오. 평안하십시오.

그리고 진리 안에서 해방의 자유를 만끽하십시오.

 

늘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십시오. 함께하십시오.

그리고 삶 가운데 꼭 한 걸음만큼의 실천을 이루십시오.

 

이를 통해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희망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살아갑시다.

 

이제 서로를 향한 축복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가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