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 예수냐? 바울이냐?

17:22-24; 92; 고후 5:6-10, 14-17; 4:26-34

 

오늘 남한 사회의 가장 큰 이슈가 되는 메르스와 세월호를 비교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메르스, 그리고 '중심의 저주' -고재열]

 

메르스는 일종의 전염병인데...

신기하게도 대한민국의 중심만 골라서 강타했다.

전염병은 불결한 변두리에서 도는 것인데...

이런 전염병에 가장 안전할 것 같은 곳만 골라서 창궐했다...

 

박근혜를 강타했고

강남을 강타했고

삼성을 강타했고

전문가(의사)를 강타했다.

 

대통령은 바보가 되었고

강남은 위험지역이 되었고

삼성은 전염병의 숙주로 지목되고 있고

전문가들은 제 앞가림도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메르스는 '그들만의 성'에 있는 사람들을 유도탄처럼 강타했다.

이런 것들로부터 가장 안전할 것 같았던 곳...

이런 일이 있어도 알아서 척척척 잘 살아남을 줄 알았던 그곳이...

이제 진앙지가 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큰 병원의 의사가...

한국에서 가장 잘 사는 동네에서...

한국에서 가장 그럴듯한 아파트 건설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메르스를 퍼뜨렸다.

그리고 그 전염병을 막겠다는 학회에서도.

이 얼마나 극적인가...

 

세월호는 주변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안산의 아이들이 진도에서 죽었다.

주변부의 일이었다.

잠시 공감하다가... 그 일이 조용히 마무리되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세월호에 대한 싸늘한 시선이 떠오른다.

너희들의 불행은 그들이 못났기 때문이야, 나만 잘 살면 돼...

그렇게 304명의 원혼을 외면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랬던 대한민국의 중심이 지금 메르스의 제단에 올라와 있다.

 

가난한 애들이 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느냐고, 비아냥 거리던 사람들...

그만 좀 하라고, 그 사람들을 국가가 죽였냐고 훈계하던 사람들...

교통사고일 뿐이라고, 단순히 불운으로 돌리던 사람들...

그들이 사는 집앞에서 메르스가 노크를 한다.

 

사회의 시스템이 붕괴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가난한 자의 손을 붙드는 시스템이 붕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믿는 상식의 붕괴를 뜻한다.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역사의 단순한 진리를 체험하고 있다.

제발 이 '중심의 저주'에서만은 교훈을 얻길 바란다.

 

세월호도 메르스도 애초부터 막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이 남한 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사회 결함, 곧 남북분단에 뿌리를 둔 양극화로 인한 소통의 부재, 이로 인한 부자와 강자 중심만의 정치권력, 돈만 아는 금권사회가 만들어 낸 사회 구조악의 결과인 것입니다. 남한은 인구비례 병상수로 본다면 세계 최고입니다. 동남아는 물론 미국에서도 환자가 찾아오는 최고의 의술과 첨단 의료장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영리 위주의 병원들은 중병에 걸린 소수의 돈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는 있지만, 공공 의료의 질을 떨어트려 이번처럼 전염병이 창궐하면 오히려 온 나라를 공포와 불안에 빠트리는 괴물로 변질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명박정권 이후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공공의료기관들을 축소하거나 폐쇄해온 과정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환경주일을 맞아 말씀드렸듯이 지구 자체가 황폐화되어 가는데 한 나라가 잘산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나라 전체가 감염되어 있는 상황 하에서는 혼자 살아남을 수는 없는 것이고 설사 혼자 살아남았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세월호와 메르스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회 연대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비유의 역설]

 

지난 시간 마가복음 3장에서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가 사탄의 두목인 베엘제불에게 붙잡혀서 미친 일을 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옵니다. 제자들이 말합니다. “당신의 가족들이 당신을 만나기 위해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자 가족들이 왜 왔는지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는 가족들이 직접 들었더라면 매우 실망하고 분노했을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바로 여기에 앉아 나의 얘기를 들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씀을 하시고 나서 바로 이어지는 4장에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4개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는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길바닥과 돌밭과 가시덤불 그리고 옥토라는 4종류의 밭에 뿌려진 씨의 비유로서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밭은 사람들의 마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등불을 가져다가 됫박 아래에 감쳐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은 없다.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라는 말씀인데, 이는 비유라고 말하기 보다는 하나의 진리 선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들입니다. 농부가 땅에 뿌린 씨앗들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싹이 트고 열매를 맺고 그리고 곡식이 맺히면 추수를 하게 된다는 말씀이고 겨자씨의 비유 또한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심어 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게 된다는 평범한 말씀들입니다. 이속에 무슨 어려운 철학적 담론이나 종교의 신비로움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자 마가는 이렇게 이해하기 쉬운 4개의 비유 말씀들마다 매우 이상한 해석을 덧붙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해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들려준다. 그것은 그들이 보고 또 보아도 알아듣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보고 알아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비유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이야기 기법인데, 오히려 예수는 알아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비유를 말하고 더욱이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비유의 목적과 예수의 구원이란 차별 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하는 기본 상식을 깨는 말씀입니다.

 

혹시 이거 마가가 뭔가 잘못 말한 것 아닌가 예수의 얘기를 잘못 옮긴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의문을 미연에 차단하기라도 하듯이 마가는 비유 말씀을 총 정리하는 4장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저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비유로써 말씀을 전하셨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 그런데 우리가 읽어본 바로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어야 할 만큼 어려운 구절은 별로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한 구절은 있습니다. 그건 오늘의 본문 말씀 바로 앞 절에 있는 두 번째 등불의 비유 말씀의 결론 부분입니다.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 너희가 남에게 달아주면 달아 주는 만큼 받을 뿐만 아니라 덤까지 얹어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가진 사람이 더 많이 갖고 갖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이 얘기를 오늘날의 자본주의 방식인 부익부 빈익빈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물질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남에게 달아준다는 뜻이 무슨 뜻인지를 알면 되겠는데, 희랍어로는 ‘metro’라는 동사입니다. 박자를 세는 기계를 메트로놈(metronome)이라고 하는데, 같은 단어입니다. 곧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그 기준만큼 돌려받는다는 말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덤까지 돌려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건 단순한 판단이나 선악의 기준이 아니라, 남에게 행하는 선한 행위를 베푼 경우를 두고 한 말인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그래서 이 구절을 너희는 내 말을 귀담아 듣고 실천하여라. 그렇게 하면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의역을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선을 더 많이 돌려받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별다른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간단한 4개의 비유 말씀을 전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워 예수는 제자들에게 따로 설명을 하셨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이는 겉에 드러난 그 뜻에 머물지 말고 그 안에 숨은 뜻이 있으니 조심해서 읽으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냐? 바울이냐?]

 

얼마 전 95세 노령의 문동환목사님께서 예수냐? 바울이냐?’ 하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셨는데, 이는 신학적으로 매우 도발적인 책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적어도 신학자들 가운데서 바울을 비판한 사람은 많이 있어도 예수와 바울 사이에서 하나만 선택할 것을 강요한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2천년의 교회 역사 안에서 예수와 바울은 언제나 함께 있었고, 역사적 예수에게 있어 수제자는 베드로였지만, 신앙의 주님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있어 수제자는 바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근본 속성이 그러하듯이 교회는 복음서가 말하는 역사적 예수보다는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를 더 우선시해온 것입니다. 오늘도 남한의 6만개가 넘는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는데, 서신서에 나오는 바울의 말이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의 말보다 더 자주 언급되고 있는 이유입니다.

 

세계선교나 교회 성장의 측면에서 우리는 결코 바울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만약 초대교회가 복음서만 갖고 예수를 따랐다면 모두가 순교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1세기 초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말은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말인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로마제국의 통치를 반대함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를 달리 해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한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대속(代贖) 구원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단 한 번도 내가 너희를 위해 대신 죽으니 너희들은 더 이상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 착하게만 살아라.’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속(自贖)구원입니다.

 

[예수 그리고 바울과 제국]

 

곧 바울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저항의 길을 개인화 내면화시켜버렸던 것이고 그로 인해 예수가 악이라고 말했던 지배계층의 구체적인 사회의 구조악 또한 개인의 욕망이라는 심리적 죄로 축소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였기에 로마제국의 통치 하에서 다수의 사람들은 로마제국과의 별다른 충돌 없이 예수를 믿었던 것이고 로마 제국 또한 그것이 제국을 하나로 묶고 저들을 지배하는 일에 도움이 되겠기에 예수교를 국교로 받아들여 이를 통치의 이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로마가 채택한 예수교는 예수 이름으로 된 바울교였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애초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던바 종이 두 주인(=야훼 하느님과 로마황제)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했던 그 모순을 교묘하게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고 그럼으로써 유럽의 기독교제국화가 이루어졌고,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나라에도 기독교가 전파된 것이고 우리도 크리스찬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선교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바울은 분명히 떨쳐버릴 수 없지만,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그런 바울이 있었기에 유럽과 미국의 백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수백만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다스렸고, 아메리카의 수천만 인디안 원주민들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살해할 수 있었고, 저들이 가진 재물을 빼앗아 지금의 유럽과 남미의 수많은 성당의 내부를 휘황찬란하게 장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선교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과 의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했고, 여기서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다름 아닌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만 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은 다른 의미로 말을 했지만, 권력자들이 그를 이용할 수 있는 여지를 너무 많이 남겨놓았던 것입니다.

 

문동환목사님은 신학적으로 예수와 바울을 이렇게 구분합니다. 성서 안에는 하느님에 대한 상반된 두 이해가 있다.(9) 하나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오는 생명을 창조하시고 약자를 깨우치어 새 역사의 주인이 되게 하시는 야훼 하느님이다. 다른 하나는 다윗왕조신학인데, 다윗왕조는 야훼를 그들의 뜻을 수행하는 수호신으로 격하시켰으며 그래서 야훼신은 전투의 신, 질투의 신, 만왕의 왕으로 변질되었다. 갈릴리 예수는 전자의 하느님 이해를 이어받았고, 바울은 후자의 하느님 이해를 받아들였다. 물론 바울신학 전공자들은 이런 구분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바울 또한 약한 자를 위한 얘기를 많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약자는 예수가 말하는 사회적 약자가 아닌 교회 안의 약자를 말한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바울이 전한 예수의 모습에는 유사점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을 강조한 부분과 믿음 소망 사랑을 공동체 삶의 원칙으로 삼은 점들입니다. 그러나 말은 비슷하지만, 그 내용은 판이했던 것입니다. 곧 예수는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대안공동체로서 하느님 나라를 말하고 있는 반면에 바울은 로마제국의 통치 안에서 정치와 무관한 사랑공동체로서의 하느님 나라를 말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개개인이 모두 종교적으로 의로워지면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본 반면, 예수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정치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문목사님이 지적한대로 바울은 예수의 새 술을 헌 부대에 넣은 것입니다.(13)

 

[가나안 성도의 출현]

 

그런데 지금까지의 바울 비판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문동환목사님의 바울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설사 바울이 예수의 말씀을 다소 왜곡하였다 하더라도 교회성장을 통해 세계 선교에 혁혁한 공을 남기지 않았느냐고. 맞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그 힘이 약했을 때는 교회성장이 우선시 되었기에 예수의 말씀이 다소 왜곡되더라도 이를 감수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남한 교회는 대통령의 당락을 결정할 만큼 큰 힘을 발휘하고 있을뿐더러 정부의 중요한 직책에 상당수가 크리스찬들입니다. 이제는 교회의 힘이 너무 커졌고, 그리고 그 힘의 남용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위기가 닥치고 있습니다. 지난 10여년동안 세상은 교회가 그래서야 되겠느냐며 걱정하며 비판하다가 그래도 계속 자기 고집을 피우며 자기 길을 고집하자 이제는 세상이 그래 당신네들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관심을 놔버렸고, 동시에 교회 안의 생각 있는 교인들은 새로운 약속의 땅을 찾아 나서는 가나안(안나가’) 성도가 되어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세상이 교회에 등을 지는 것을 넘어서서 예수에게까지 등을 지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동환목사님은 교회를 구할 필요를 느끼셨고, 그 첫 단계로 예수로부터 바울을 구별할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바울의 얼룩들을 긁어냄으로 참 예수의 얼굴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일종의 비상조치인 것입니다. 메르시를 쉬쉬 감추면서 치료를 하다가는 전 국민이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되겠기에, 삼성이든 의학박사든 개인신상이든 뭐든지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비상상황 대처법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성장과 선교에 있어서는 예수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바울이지만, 계속 이 상태로 같이 가다가는 예수마저 침몰하겠기에 이제는 바울은 떼어내고 역사적 예수로부터 근본에서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동환목사님의 주장은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수십년간 진행되어온 소위 말하는 예수세미나라고 하는 역사적 예수를 찾아내려는 여러 신학자들의 노력의 결과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지난 백여 년간 서구 신학계는 슈바이처를 시작으로 불트만 그리고 안병무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의 신앙적 고백으로 얼룩진 복음서에서 역사적 예수를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했지만, 예수 세미나 학자들은 신학 외의 여러 학문의 결과들을 통해 갈릴리의 예수가 추구했던 하느님 나라 운동이 갖는 반 로마제국으로서의 정치적인 대안 운동의 성격을 분명하게 밝혀내고 있습니다. 지금 남한교회는 학문적으로는 여기에 너무나 뒤쳐져 있고 암흑시대(the Dark Age)라고 일컫는 중세시대의 교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네 번째 비유 말씀은 흔히 겨자씨 비유로 알려져 있는데, 흔히 이 비유는 가장 작은 씨앗이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깃드는 곧 선교나 교회 성장의 측면에서 자주 해석되어져 왔습니다. 목사들은 교회 성장에 적절한 말씀으로 매우 이해하여 사용하여 왔습니다. 이는 바울적인 해석입니다. 마태와 루가 또한 이 관점을 어느 정도 지지하여 겨자씨가 자라 큰 푸성귀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큰 나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저자 마가는 청중들이 그렇게 잘못 이해할까 염려하여 예수는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하고 제자들에게는 그 숨은 설명을 따로 일일이 말하였다덧붙였는데, 우리는 그 숨은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본래 예수의 의도이기 저자의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의 감시 눈길 때문에 내놓고 설명을 하지 못하니 이를 잘 헤아려 이해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겨자와 농부]

 

우선 우리는 이 비유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1세기 팔레스타인에 사는 농부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농부라면 겨자씨가 자라나서 어떤 푸성귀보다 더 크게 자란다고 하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겨자는 식용작물이 아닙니다. 독특한 맛을 내는 일종의 조미료로 소량만 있으면 됩니다. 겨자 농사지어서 돈 벌었다는 소리 들어보신 적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겨자씨가 크게 자라났다는 말은 불필요한 잡초가 무성해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게 황야에 자란다면 잡초가 아니지만 밭에서 자란다면 이는 잡초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씨앗이 가장 작다는 말은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크게 창대하리라는 욥기의 말씀과 같이 매우 작은 것이라도 하느님이 함께 하시면 굉장히 커진다는 자본주의 성장과 개발의 논리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이는 농부가 씨를 뿌릴 때에 너무 작아서 다른 씨앗과 구별해낼 수가 없어 겨자씨도 함께 밭에 뿌려졌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농부는 작물의 성장을 방해하는 잡초이기에 뿌리 채 뽑아야 합니다. 그런데 농부는 이를 그대로 둡니다. 그랬더니 크게 자라 새들이 와서 깃듭니다. 이게 비유의 전부 다입니다. 마가는 이것이 예수가 전한 하느님 나라의 비유라고 말하고 진짜 해석은 제자들에게만 따로 전해주었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그 비밀은 무엇일까요?

 

이를 바로 이해하는 핵심은 예수가 이룩하고자 하였던 하느님의 나라는 로마제국을 대치하는 대안으로서의 갈릴리의 오흘로스라는 낮은 계급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야훼신앙공동체였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예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와 로마제국, 야훼와 황제라는 등치상대개념에서 접근을 해야 합니다. 이 이해를 따르면 겨자씨로 인한 큰 푸성귀는 로마제국이 원치 않는 일종의 부정이자 저항입니다. 로마제국은 겨자씨와 같이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 잡초같은 인간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사회는 생산성이 없는 사람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노숙자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잡초와 같은 인간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어떤 농부가 이 잡초를 그대로 둡니다. 왜 그대로 놔두는 것일까요? 왜 이 농부의 행위가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 연계되는 것일까요?

 

[겨자씨에 담긴 정치적 저항]

 

당신의 농부들은 아무리 수확을 많이 해도 예루살렘에 사는 땅주인이 가져가는 마름세, 로마정부가 걷어가는 농지세, 예루살렘 성전이 거둬가는 성전세 등등을 제외하고 나면 남는게 별로 없습니다. 추수의 약 3,40%정도만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매해 죽어라고 일하지만, 늘어나는 것 빚입니다. 빚더미에 앉은 이 농부가 빚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저녁 몇 개의 보따리를 들고 무작정 집을 떠나 떠돌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5천명 4천명을 먹이시는 급식기적 이야기의 사회적 배경입니다. 그런데 빚더미에 앉아 있는 어떤 농부는 달리 생각합니다. 도망을 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떻게든 이 잘못된 세상 구조를 바꿔내기를 원합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농사를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곡괭이를 들고 반로마 게릴라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도 못합니다. 그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겨자의 무성한 잡초를 방조하고 이를 못 본 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수확을 줄이는 일종의 사보타지요 자항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거기에 공중의 새들이 머뭅니다. 공중의 새란 가장 값어치가 없는 사람들, 곧 사회적 소수자들을 말합니다. 중심부의 사회 곧 로마당국이 원하지 않는 잡초였지만, 거기에 주변부의 사회적 약자들이 와서 머물고 쉬는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주위에도 곳곳에서 정부당국에서 위험시 여기는 겨자 푸성귀들이 많이 있습니다. 광화문의 세월호 광장이 그러합니다. 희생자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56)씨와 딸 아름(26)씨는 지난 223일 진도 팽목항에서 시작해 500가 넘는 길을 31배로 기어와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는 가운데 어제 광화문에 112일만에 도착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을 했고, 그 동참으로 인해 부녀는 그 어려운 길을 마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옆에는 615 15돌 남북공동행사를 촉구하는 통일부 앞의 거리시위가 있었고, 어제는 평통사와 향린교회가 효순미선 13주년 추모일을 맞아 미대사관 길 건너에 영정사진과 추모화환을 놓았습니다. 그 주위에는 전경들이 겹겹이 둘러쌓았습니다. 이는 분명 친미 정부당국에서 보면 제거되어야 할 잡초이자 사회를 어지럽히는 부정입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이 사회의 약자들과 소수자들은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 새롭게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 역사의 주체자로 나서게 됩니다.

 

겨자씨를 통한 농부의 저항 그리고 그 저항에 함께 하는 민중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역사 진행임을 알라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저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알려준 비밀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회 구조의 변혁 그것이 우리에게는 어려운 과정이지만, 밭에 뿌려진 씨앗이 절로 자라듯이 야훼 하느님께는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