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리다 쿰!”

전도 1:13-15/2:23-24; 시편 30:1-4; 고후 8:7-15/10-15; 마르 5:21-43(42)

 

 

조 은 화 목사

[사자와 낙타의 대화]

 

아기 사자가 아빠사자를 부릅니다. 아빠! 사자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동물이지?

아빠가 대답합니다. “..., 이젠 낙타란다...”

어린 낙타가 엄마낙타에게 질문합니다. “낙타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동물이지?”

엄마 낙타가 대답합니다. “아니..낙타가 이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동물이란다. 아무도 접근을 안해.”

 

외롭고 힘든 것은 낙타뿐이 아닙니다. 요즘 아침마다 통인시장을 걸어 나오면서 듣는 이야기는 요즘 장사 안되지요? 저도 안되서 큰일났어요.” 시장과 명동 일대의 한산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외국인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한국인도 점차 찾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어려움이 느껴지는 아침을 맞습니다. 메르스사태로 경제가 많이 어렵구나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4대강 사업이후 낙동강과 금강에 큰빗이끼벌레가 출현해 악취를 내며 빠른 속도로 번식하고 있습니다. 22조원의 대가가 결국 이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625일 박근혜 대통령이 보인 국회개정안에 대한 태도는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모 방송에서는 박근혜대통령의 공감능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스스로를 여론에서 자가 격리 시켰다. 타인의 아픔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동정이다.(sympathy) 타인의 아픔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 공감(empathy)이다. 그런데 박근혜대통령은 타인의 아픔을 마음 보다는 머리로 이해하려는 것 같다.”

 

서민들이 계속 어려워지는 이 세대, 정부는 나몰랑 외면하기로 어려운 현실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 큰 좌절을 주고 있습니다. 악한 이 세대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겠습니다.

 

[헛됨에 대하여]

 

하늘 아래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니 모든 일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 ”(전도서 1:14) 전도서는 유대민중들의 축제절기에서 낭독되는 글로 집을 떠나 장막 혹은 움집에서 거주하며 성서의 광야이야기를 기억하는 절기인 장막(초막)절에 낭독되엇던 것으로 소유에 대한 헛됨을 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전도서의 저자인 코헬렛은 상당한 재력과 권력을 가졌거나, 과거에 향유했던 경험이 있는 중장년 남성으로 제사장 보다는 정치권력에 더욱 근접했거나 제사장 세력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 지배시기 이후 확고한 권력을 누렸던 제사장 세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부유한 지배계급의 한계를 보았고 다 누려보았더니 헛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그가 보는 세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스스로가 상류충으로서 있는 자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아픔당하는 없는 이들의 자리가 보였다는 것입니다. 즉 부한 이들로부터 오는 부조리가 만연한 현실의 괴리를 보았습니다. 이것을 허무라고 외쳤던 그 현실 속에서 페르시아를 거쳐 헬라화의 영향으로 유대 사회의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가 깨지면서 사회는 불안과 불균형에 휩싸이고 겉으로는 부유한 사회처럼 보였으나 양극화 현상으로 부유한 사람에게는 더 많은 부와 번영을 가져다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더 심각한 빈곤을 안겨다 준 세상에 대해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도서의 저자는 가난한 이들의 억울한 삶을 보는 깨달음은 있었으나 실제 행위로는 뛰어들지는 못하고 그저 자신의 상황에서 모든 부조리한 세상이 허무하다는 고발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저자가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우리가 집중하게 되는 점은 그의 자리가 이미 기득권의 자리 상류층의 자리였음에도 민중의 아픔을 보려했고, 억압받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했다는 점입니다. 남성중심의 언어이지만 그 가운데 여성적 언어인 지혜바람을 통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억누르는 이들을 향한 이러한 비판적 깨달음은 당시 민중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함께하기]

 

고린토후서 본문은 대상을 위해 살아가는 것에 대해 좀 더 바라보게 합니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바울로의 헌금 사업은 틀림없이 50년대 중반에 있어서 중요한 활동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곳보다 그래도 넉넉한 자리로 살아가는 고린토교회 공동체에게 그들이 있는 것을 가난한 공동체를 위해 헌금하여 나누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부와 가난의 균형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더 있어 너에게 주는 것, 그래서 가난으로 허덕이는 이들이 굶지 않게 하여 균형이 잡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역시 상대는 어렵다는 대상화를 통한 행동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도움으로서의 함께 아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르코 본문은 아픔을 가진 이들이 어려운 현실을 조망하고 거기에 더 넘어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는지를 제시합니다. 현시대의 아픔을 담고 사는 우리처럼 당시의 유대민중 또한 처참히 깨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유대민중이 처한 삶의 실상을 마르코복음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죽을 지경에 이른 딸과 열두 해 동안 피 흘리는 상태에 있는 이름 없는 한 여인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의 샌드위치 형식으로 드러내고자 한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두주인공은 모두 여성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상황에서 구원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 그리고 두 이야기에서 보이는 믿음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두 주인공의 현실은 모두 유대민중의 삶을 반영합니다. 민중의 삶이 죽어가는 소녀와 같았고 피 흘리는 여인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리를 대신하여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 나섭니다. 백성들의 지도자이자 무리의 대표로서의 회당장이 예수께 왔다는 것은 굉장히 파격적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회당장의 딸이 지금 죽을 지경에 이르러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저변에는 유대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 숨겨져 있습니다. 야이로의 이름의 뜻 즉 그가 살리리라는 뜻의 이름 그대로에서 살리는역할을 수행해야 할 사람인데 그의 딸이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회당장의 딸로 상징되는 유대민중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욱이 마르코복음535절에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받게 됩니다. 이는 주후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함락이 이 이야기의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니 당시 유대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그래서 유대민중의 삶이 죽어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서는 유대민중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지만 아직 죽은 것이 아니고 성전이 파괴되었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 이 안에서 새로운 세계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유대민중에게 희망으로 제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죽을지경에 이르른 딸의 현실을 부정적이고 절망적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딸이 구원받아 살게 되기를 바라는 기대와 소망을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 투사합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유대민중의 현실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혈루증 앓는 여인의 이야기를 준비합니다. 후에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혈루증 앓는 여인이 고침을 받는 것과 같은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마르코는 혈루증 앓는 여인의 믿음을 통해서 제시하려고 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앓는 여인의 이야기 사이에 내제되어 있는 편집적 구조 속에서 현재 속에 과거를 삽입합니다.

 

마르코복음서의 독자가 처한 현실로서 유대민중은 지금 야이로의 딸처럼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민중을 살려야 하는 지도급 인사들은 회당장 야이로처럼 속수무책임을 나타냅니다. 혹시 메시아가 오셔서 손을 대면 나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법적인 막연한 기대가 그들에게 남겨진 유이한 희망으로 비춰지게 합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전적으로 의존적인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마르코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과거의 유대민중은 피흘리는 여인처럼 착취와 억압을 당하면서도 예수를 통해 믿음을 회복했던 것을 회상하게 합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보여주는 과거역사의 믿음이란 유대민중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민족적 존엄성을 잃지 않음으로서 피의 근원이 마르게 할 수 있었던 과거의 믿음 그것이야말로 지금 죽어가는 유대 민중에게 마르코가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요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감히 피흘리는 상태로 금기를 깨면서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나와 예수의 옷자락을 만진 혈루병 앓는 여인에게 예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녀의 죽음을 각오한 적극적인 구원을 위한 행동이 자신을 살렸다는 이 믿음이 절망적인 유대 민중의 현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마르코는 주장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믿음은 의존적으로 그쳐버리는 것이 아닌 적극성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입니까? 마르코저자는 현실을 되살릴 수 있는 믿음의 전형을 과거에서 찾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함락소식을 마르코저자는 야이로로 하여금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하는 비보로 듣게 하여 이 백성이 이미 죽었다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는 나라의 패망을 전제하고 예수를 통해 다시 살릴 길을 찾아 제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야이로의 딸로 상징되는 유대 민중을 살려내는 구원 과정을 우리도 함께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가 야이로의 소녀의 죽음소식을 듣고 결코 죽지 않고 자고 있음을 말하고 그 소녀를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 소녀에게 외칩니다. “탈리다 쿰!” 이 말은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번역해야 알아들을 수 있는 탈리다 쿰을 쓴 것일까요? 적어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유대인을 멸망시킨 로마당국이나 지배자들이 들어서는 안 될 소리이기 때문에, 아람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만이 알아듣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일어나라는 뜻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외침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을 말합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이야기를 일어남과 걸었다는 표현을 첨가하면서 그 소녀는 부활하여 무언가를 행하며 살았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절망적인 자기 현실 속에서 예수가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시는 것을 그려 보임으로서 멸망당한 유대 민중을 살릴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마르코는 부활이라는 것이 앎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변화가 동반되는 것임을 말합니다.

 

마르코는 예수가 죽고 난 이후의 현실 속에서 예수를 끌고 와 그분이라면 죽은 야이로의 딸을, 지금의 민중을 이렇게 살려냈을 것이라면서 따르는 이들에게 우리도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는 이야기 안에는 살려내는 힘이야말로 과거의 혈루증 앓는 여인에게서 찾은 자력적인 믿음임을 말해줍니다. 예수의 옷에 직접 만지고 그와 접함으로서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달은 자기 자각을 가질 때에 구원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어려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변화가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버겹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과거의 있었던 성공했던 일들만을 떠올리며 살기에는 변화의 힘을 찾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 신비주의자 페테르 우스펜스키 이반 오소킨의 인생 여행을 보면 지금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인생을 다시 산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이 책은 한 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남자가 자살을 결심하고 집을 나섰다가 마법사를 만나면서 인생을 다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똑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기에 우리는 지금 달라져야 한다는 깨달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는 언제쯤 우리 집은 대출이 끝날가?, ’언제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평안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언제쯤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현실 안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라고 늘 생각합니다. 이 시점에서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는 정말 쉽지 않은 일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알아서 구원해줄거라는 수동적이고 의존적 자세로는 현실을 헤쳐나갈 수 없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지금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변화된 삶은 과거의 우리가 이루었던 민주화, 그리고 독립의 길을 갔던 선배들을 통해 더욱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들의 목숨을 각오한 적극적인 삶을 통해 우리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음을 압니다. 주님께서 함께 해주신 지금까지의 역사를 기억하며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다시 힘을 내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혼자만이 힘겹다고 멈출 것이 아니라 힘겨워하고 있는 이웃에게 탈리다 쿰! 하며 함께 일어서자고 외쳐 나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