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자유

7:7-15; 85:8-13; 1:3-14; 6;14-29

 

지난 두 주간 우리 사회는 국내적으로는 메르시의 감염 열풍과 유승민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배신자 낙인과 사퇴로 시끌벅적하였고, 국외적으로는 그리스의 국가 재정 파탄과 중국 증시의 급격한 하락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90년대 IMF를 통해 부동산 경기의 거품으로 인한 주식투자의 허무함을 경험하였듯이 지금 중국 사람들도 전 재산은 물론 빚을 내서 주식에 투자했던 사람들이 며칠 사이에 폭락을 하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자살자가 생기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언젠가 이런 사태가 오리라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닥칠 줄은 헤지펀드를 주무르는 전문가들 외에는 별로 몰랐을 것입니다. 정부의 개입으로 일단 최악의 사태를 모면하긴 했지만, 사회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중국도 돈맛에 깃든 나머지 세계 자본에 문을 열었다가 혹독한 쓴 맛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폭력을 쓰는 자 폭력에 망하듯이 돈맛에 깃든 사람들은 돈과 더불어 몰락하고 마는 것이 세상의 기본 이치입니다.

 

[믿음과 부의 상관관계]

 

그러기에 바울도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하고 있고, 그러기에 예수님 또한 부자에게는 화가 임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임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삶을 영위함에 있어 돈에 대한 관심과 욕망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복음의 가장 큰 주제로 말씀하셨지만, 그 빈도수에 있어서는 재물에 관련한 말씀이었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목표로 하지만, 생활에 있어서는 재물에 대한 생각을 바로 정립하는 것이 신앙의 기초이자 완성입니다.

 

  목사님들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주로 두 가지를 얘기하는데 하나는 죽어서 천당 가는 영혼 구원 그리고 살아서는 세상 축복입니다. 천당 가는 일이야 그건 죽어봐야 증명이 되는 일이니 논외로 하겠습니다. 문제는 세상 축복 쉽게 말해 예수 믿으면 영혼이 잘됨같이 모든 일이 잘 되어 부자가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에 대해 몇몇 개인들을 예로 들기도 합니다만, 예수 믿고 나서 더 불행해지고 더 가난해진 사람도 있기 때문에 개인들의 예를 드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그래서 보편적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의 예입니다. 저 국가들이 저렇게 강하고 부자나라가 된 이유는 저들이 예수 믿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요?

 

우선 미국만 해도 그렇습니다. 미국은 한때 약속과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이민자들에게는 기회의 나라로 알려져 왔습니다. 대통령 취임식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고 국민 다수가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국가인 것은 맞지만, 그러나 지금 미국은 빈부격차와 범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보수 교회들의 미국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친미를 넘어선 숭미적 태도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서울 시청에서 기도집회를 열면 태극기와 성조기를 동시에 흔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미국 내의 계속되는 총기살인과 인종폭동 그리고 최근의 탄저균 생화학 무기 반입과 대법원의 동성혼 허용 판결을 보면서 깊은 혼돈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간 기독교를 전해준 나라이자 625의 참사에서 수많은 구호품을 전해주었을 뿐더러 수십 년을 북의 핵위협으로부터 지켜주고 있다고 단단히 믿고 있는 세계 최강의 기독교 국가인지라 무조건 짝사랑을 하여 왔던 것인데, 지금은 그렇게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큰 것입니다. 미국대사 리퍼트씨가 김기종씨에게 피격을 당했을 때만 해도 그의 쾌유를 위해 예배 시간에 아멘을 외치며 통성기도를 하기도 했지만, 그가 퀴어 축제에 참여하여 동성혼을 공식적으로 찬성하고 나서자 이제는 그를 사탄의 주범으로 몰아가야 하는 모순 속에 빠진 것입니다. 올해 한기총이 815 광복절 기념예배를 시청 광장에서 드린다고 하는데 또 다시 성조기를 흔들어댈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1인당 국민소득, 복지, 기대수명, 평등지수, 공무원의 청렴도, 행복지수 전 영역에서 최상위권인 나라는 미국이 아닌 북유럽 국가들입니다. 그중 가장 높은 나라는 스웨덴입니다. 그런데 2010년 설문조사에서 신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스웨덴 국민의 몇 퍼센트가 라고 답하였을 것이라고 예상하십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우리나라 현재 종교인 비율은 50%이고 가톨릭을 뺀 개신교인만 해도 22%입니다. 그런데 유럽 국가 중 가장 잘사는 나라인 스웨덴에서 신을 믿는다고 답한 사람은 우리나라 개신교인 비율보다도 못한 18%였습니다. 그리고 이외 복지국가로 잘 알려진 노르웨이나 덴마크, 핀란드의 종교인 비율 또한 우리나라의 종교인 비율보다 훨씬 낮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잘 믿는 것과 부자 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 심각한 국가파탄을 맞이하고 있는 그리스의 기독교인 비율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제가 기억하는 대로는 95%입니다. 이들이 매주 정교회를 출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회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일상의 삶 속에 교회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만이 아닙니다. 현재 심각한 경제위기 봉착해 있는 이탈리아 루마니아 스페인 포르투갈 국가들은 모두 국민의 70% 이상이 신을 믿는 분명한 기독교 국가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잘 믿어서 부자된다고 하는 결론보다는 그 반대로 예수 잘 믿으면 가난해진다는 결론을 내는 것이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입니다.

 

[신앙과 윤리]

 

예수 믿어 부자 된다는 얘기는 빼고 그러면 예수 믿으면 보다 행복해지고 평안해지는가? 우리 남한만을 보더라도 분명히 교회가 적었던 5,60년대에는 자살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세계 50대 초대형교회의 절반 이상을 갖고 있는 남한이 세계 최고의 자살률 국가인 것을 보면 신앙과 행복은 분명히 정비례의 관계가 아닌 반비례의 관계가 맞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동남아시아의 쓰나미 사태나 일본의 후쿠시마 지진 사태 등을 보면서 저들이 이런 불행을 당하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얘기하는데, 생각 있는 지식인들이 이 얘기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사회가 부도덕해지고 악이 넘치고 불행해지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주장에는 또 얼마나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부 예수를 믿어 교회를 다니면 이 사회는 도덕적인 사회가 되고 사랑이 넘치는 사회가 될까요? 과연 그러할까요? 부정부패 저지르는 관료들의 다수가 기독교인 것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국무총리 장관 후보들의 청문회를 보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장관이나 국무총회 후보자가 될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데, 알고 보니 저들 대부분이 집사는 기본이고 장로에 전도사인 것을 보면 도대체 예수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우리 이 시간에 분명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북유럽 국가들이 삶의 질이 높은 사회가 된 것은 신앙 때문이 아니라 국민 스스로가 사회적 정의와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실천하여온 결과인 것입니다. 사회 제도와 법을 국민들의 합의를 통해 만들어내고 이를 모두가 힘써 지켜온 결과인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믿는 믿음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받는 벌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라고 말한 플라톤의 말을 소중히 여긴 저들의 정치의식과 사회참여에 있는 것이지 결코 예수 믿어 구원받았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신앙과 정치의식]

 

우리나라도 법 제도에 있어서는 이들 나라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 국민들의 정치의식입니다. 정치는 정치인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투표 한번 하고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 수준 낮은 참여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신앙인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상한 가르침, 성서 어디에도 없는 가르침을 예수의 가르침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미국 선교사들이 일제와 야합하고 나서 우리를 우민화시킨 가르침인데, 이를 지금까지도 생명처럼 고수하고 있습니다. 주기도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는 분명 이 땅에 임하는 나라이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 사회의 법과 정치 질서를 통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지금 법관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의 신뢰도는 세계에서 최하입니다.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내모는 일에 다 알면서도 동의하고, 어떤 재벌이 왜 내가 희생양이 되어 표적 수사를 받아야 하느냐며 그 억울함을 죽음으로 항거하며 뇌물수여자 명단 메모를 남겨도 청와대 권력의 지시를 따라 생색내기 표적 수사만을 하고 나머지는 얼렁뚱땅 덮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국가에 대한 국민 불신이 높아지고 그렇게 되어 나라의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나라를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 제 살길을 찾아 도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라 망하고 국민 모두가 망하는 망국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110년 전에 이 일을 겪었습니다. 35년간의 일제의 악독한 식민지 생활을 겪었고 그래서 지금도 위안부 문제를 계속 붙들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일을 당한다면 그런 투쟁이 다 무슨 소용이 되는 것입니까? 함석헌선생께서는 생각하지 않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는데, 이 백성의 지도자나 백성들은 그렇게 당하고도 여전히 생각이 없습니다. 부자 만들어주겠다는 소리에 환호하고 조삼모사식의 빵 한 조각 더 주겠다는 소리에 표를 던집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이점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서에도 있지만, 누가 당신 왜 교회 가는거요? 하고 물으면 어떻게 답을 하시겠습니까? 천국가기 위함이라고 답하기에는 너무 치졸하고. 찬양을 하거나 기도를 할 때 마음에 평안을 주기 때문인가요? 이 평안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요가나 묵상 훈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평안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요?

 

저는 우리가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를 찾고 그래야만 인생의 살아갈만한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래야만 교회가 교회다움을 찾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짜 그리스도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 미사 강론에서 가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세 가지를 꼽았습니다. ‘자기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이기적인 사람’,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지만 사실은 세속적인 사람’,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들이밀며 다른 이들에게 부담을 주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교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데, 그건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곧 믿음의 혜택이란 사회적 약자의 아픔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약자의 아픔에 관심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단순히 빵 조각을 나눠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사회의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말했듯이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사람들은 우리를 성자라 혹은 참 좋은 교회라고 말하지만, 저들은 왜 가난한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우리를 위험인물로 빨갱이교회로 비난하게 되는데 여기서 신앙은 더 높은 단계의 깨달음과 실천을 요청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의 말씀들은 여기에 대해 무어라 얘기하고 있는 것인가요?

 

[종교의 두 역할]

 

아모스는 사회적 정의를 외친 예언자입니다. 부자와 권력가들을 가장 힐난하게 비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아마지아라는 종교의 수장과 부딪히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부자와 정치 권력가들을 비난했는데, 왜 성전 제사장이 나서서 저들을 비호하고 아모스를 공격하는 것입니까? 그건 성전이 정치권력과 한 통속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두 역할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예언자 역할입니다. 제사장 역할은 백성들의 죄를 하느님께 아뢰고 하느님을 대신하여 용서를 선포합니다. 백성들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는 대행자의 역할을 합니다. 정치권력은 이 종교의 힘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지배함으로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꾀하는데, 이때 종교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통속이 되어갑니다. 청와대 조찬기도회 뒷면에는 바로 이러한 권력기제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 종교의 예언자적인 역할은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권력자들의 잘못과 비행을 고발하는 일을 합니다. 백성들의 아픔을 빵을 하나 더 줌으로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빵 보다도 더 중요한 인간의 가치 회복을 위해 힘들고 어렵더라도 부조리한 사회 구조를 개혁하는 일에 관심하게 됩니다.

 

이 제사장과 예언자의 대립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성서 구절이 아모스서 521절로 24절까지입니다. “나 야훼가 말한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자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

 

백성들은 야훼 하느님이 좋아하실 것이라고 갖가지 제물을 드리고 찬양의 노래를 드리는데, 정작 야훼 하느님은 듣기 싫다는 것이고 집어 치우라는 것입니다. 부모님 생신을 맞아 자식들이 화려한 식당을 빌려 거창한 잔치상을 마련했는데, 그 자리에 가난한 막내는 없습니다.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오늘도 막노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모님이라면 그 잔치상을 기뻐받겠습니까?

 

[유언비어]

 

복음서의 말씀은 세례 요한의 죽음에 관련한 민담의 이야기입니다. 헤롯왕이 여차여차 하여 부하 관료들과 외교관들이 보는 가운데서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그걸 딸을 통해 자기 아내에게 주었다는 이 얘기는 민중들에 의한 권력 패러디 이야기입니다. 이상하게도 독재 권력가들은 민중들이 자신들의 정치 이야기를 코미디로 만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개콘을 보면서 함께 즐겨하면서 이를 역이용하는 보다 좋은 방식도 있는데, ‘내가 왜 바보냐?’고 열을 내는 겁니다. 오바마는 어떤 연설자리에서 코메디안을 불러 오히려 자기를 소재로 웃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권력가들은 이를 하지 못하도록 권력의 힘으로 내리 누릅니다. 그러나 국민은 다 압니다. ‘야 바보야, 함께 즐기자고 한 얘기에 목숨을 걸고 열을 내니까 진짜 바보지 뭐야.’ 민심을 내리 누른다고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오히려 풍선 효과가 되어 더욱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변형이 되어 유언비어 상태로 번져갑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당시의 유언비어가 수십 년을 지나 민중들 가운데 어떻게 변형되어 전해졌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 헤로디아라는 한 여인에게 농락당하는 권력자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유언비어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국가권력 1인자가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걸 누가 비난합니까? 검찰이 합니까? 법원이 합니까? 국회의원이 합니까? 다들 비리가 있어 까불면 폭로한다는 협박에 꿀 먹은 벙어리들이 됩니다. 그래 결국 하느님은 농사짓던 아모스를 불러내고 광야의 외치는 소리꾼 세례요한을 통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권력자들은 민심의 동요를 두려워하여 이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을 죽인 이 헤롯 왕이 갈릴리 예수의 소문을 듣습니다. 많은 기적을 행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른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그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국가권력이 본 예수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의 부활입니다. 하느님 정의의 편에 서서 국가권력의 불의함에 죽음으로 저항한 사람이 곧 세례 요한이고 헤롯이 본 예수의 정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의 정체성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는 매우 분명한 것 아닌가요?

 

물론 오늘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 구원을 얘기함에 있어 국가권력에 대한 맞섬이라는 이 민중저항적인 정치적 특성을 여러 가지 종교적 언어로 희석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또한 로마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그의 화려한 종교적 언어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핵심을 붙잡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영적 축복의 내용을 길게 설명한 다음 마지막 결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표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약속하셨던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받을 상속을 보증해 주시고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십니다.’

 

[완전한 자유]

 

완전한 자유. 과연 이는 무슨 의미인가? 몸이 세상에 매여 있는데, 하루 세끼를 먹어야 하는 이 육신이 있는데, 어떻게 완전한 자유를 누린다는 말인가? 아니 바울 자신도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악을 행하고자 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죽음에서 나를 구해줄 것인가?’ 라고 호소하지 않았는가? 완전한 자유. 그건 죽음 이후에 오는 부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십니다.’라고 이는 미래적 사건이 아닌 현재적 사건임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십 몇 세에 자의식을 갖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평생을 묻고 또 묻고 하는 인생의 화두는 자유입니다. 어떻게 자유인이 될 수 있는가? 완전한 자유란 어떤 상태인가? 세상만사 돌고 도는 것이라는 도사(道士)적인 깨달음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평등세상을 위한 죽음도 극복하는 자기 신념에 대한 철저한 자기 확신인가? 그렇다면 이단 광신자들이 갖는 자기 확신과는 어떻게 구별이 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신을 부정하는 사회주의자들이 갖는 신념 확신과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가? 죽기 전에는 이 답을 풀고 가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만, 꼭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 제가 답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건 오늘의 시편 기자가 전하는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야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그건 분명히 평화. 우리가 찾는 구원이란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세상. 모든 시가 그렇듯이 모호하지만 그러나 이보다 더 감동적이고 확실한 결론은 없습니다.

 

완전한 자유 그건 내가 원하는 일들을 마음대로 행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자유는 제한적이고 불완전하지만, 우리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회적 정의와 평화를 향해 함께 걸어갈 때, 각자의 불완전함들이 함께 함으로 이루어지는 나눔과 연대에 있지 않을까요?

 

완전한 자유를 꿈꾸며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