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719() 하늘뜻펴기

 

우리가 더욱 지혜롭게 되기를!

(예레미야 23:1~6, 시편 23:1~6, 에페소 2:11~22, 마르코 6:32~34/53~56)

 

홍태영/고상균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홍태영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결말부에 제시되는 약간의 반전이 인상적이지만 평범한 소설인 이 책은 그 매력적인 제목의 힘 때문인지 어느덧 대형서점의 스테디셀러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독일 교회의날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처음 떠오른 생각이 바로 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문장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번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하늘뜻펴기 강단에 서기를 권유 내지는 강요받지 않을까하는 기대반 우려반의 예감이 말 그대로 틀리지 않았고, 워낙 순종하는 저는 결국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여행을 출발하기 전 김태준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담헌 홍대용 선생님의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라는 기행문을 읽으며 계획적으로 준비하고자 했으나 막상 여행이 시작되고 난 뒤에는 여행 중의 부산함과 정신없는 많은 일정 속에서 방금 교우 여러분에게 소개드린 사진 몇 장과 저의 개인적인 기억과 소회만이 두서없이 남았을 뿐입니다. 앞서의 소설 속에 나오는 대사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라는 문장처럼 짧지만 의미 깊었던 독일 교회의날 행사 방문의 느낌을 한달 반 전의 기억을 더듬어 지금부터 짧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이 복장은 2015년 독일 교회의날 테마인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는 시편 9012절의 말씀과 교회의날 행사 로고가 그려진 셔츠와 머플러입니다. 올해 교회의날 주제로 주어진 말씀의 신앙적인 의미는 이어서 하늘뜻을 전해주실 고상균 목사님께서 해주시리라 믿고 저는 더 가벼운 주제로 이야기를 드립니다. 지난 주 조헌정 목사님의 말씀처럼 종교와 신앙에 대한 관심이 옅어진 유럽이라지만, 예배당과 학교, 그리고 광장 등 도시 전체가 교회의 날 행사장으로 변한 인구 60만의 도시 슈트트가르트에 독일 전국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모여든 10만 여명의 청중들이 예배와 토론, 그리고 각종 프로그램에 즐겁게 참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어진 공간의 안팎의 구분 없이 마치 도시 전체가 하나의 행사장이며 거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함께 나누는, 한 마디로 참 보기 좋은 모습의 축제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63일 오후 축제의 분위기로 술렁이던 슈트투트가르트 시내 중심의 슐로스플라츠 신궁전 광장에서 개막예배가 시작되자 광장은 세계 80개국에서 온 수만명의 기독인들의 인파로 가득 찼습니다. 개막예배는 저에게 본 행사에 대한 강렬한 첫인상이었습니다, 개막예배를 드리는 동안 제 곁의 많은 독일인들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였고 찬송을 함께 부르는 목소리에선 간절한 마음과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후 여러 곳에서 진행이 되는 행사마다 직접 참여하고픈 프로그램을 찾아 제가 지금 목에 걸고 있는 프리패스를 이용하여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는 것도 역시 색다르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대형교회들의 형식적이고 상업적인 대단위 연합예배와 같은 대규모 병력, 아니 인원이 동원되는 종교행사가 있긴 하지만 어딘지 불편한 마음이 드는 그런 광신적인 행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유로운 형식의 예배와 진지한 토론 그리고 문화가 어우러진 축제가 도시 전체와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자유롭게 전해지는 경험이 비록 언어의 제약 때문에 말이 자유롭게 통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저곳 방문하여 행사를 직접 체험한 제게도 그 의미가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독일 교회의날이 젊은이들과 평신도들에게 이렇게 매력적인 이유는 교회가 사회의 책임자와 만날 수 있는 통로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번 제35회 독일 교회의 날은 우리들이 더욱 지혜롭게 되기를이라는 주제에 따라, 교회가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현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자리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반성과 사회적 책임을 되새기는 가운데 난민 문제 해결과 평화정착, 불평등한 경제구조를 바꾸기 위한 국제적 노력,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교회의 실천 등이 주요 이슈로 다뤄졌습니다. 교회의날 참가자들은 이렇듯 사회적 이슈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교회가 존재해야할 이유라고 고백하였으며, 이번 대회가 끝난 후 조직위원회가 이번 대회를 통해 독일에서 기독교가 시민사회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평가와 의의를 발표했다는 기사를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쯤에서 얼마 전 7월 초에 있었던 향린의 가족들과 함께 한 또 하나의 여행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 여행은 10살 어린이와 젊은 대학생들부터 나이 드신 중장년층 어르신들까지 마음모아 함께 한 들녘으로의 여행입니다. 해마다 생명환경 위원회와 선교부가 준비하여 초여름 논일을 거들고자 내려가는 하나의 행사이지만, 올해는 특별히 들녘과 향린의 만남이 20주년이 되는 해로써, 상생과 땅의 영성을 알리고 체험하고자 40 여명의 교인들이 함께 3일간 수고와 노력의 땀을 함께 흘렸던, 정신적으로는 뜻 깊고 육체적으로는 속된 말로 빡센시간이었습니다. 막연하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전원생활에 대한 환상과 귀촌 계획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힘든 강도의 노동 속에서, 나는 왜 일당을 받는 것도 아닐뿐더러 도리어 회비를 내고 와서 이러고 있는지 아주 잠시 회의를 품기도 했지만,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라는 야고보서 2장 말씀에서 믿음에 이르는 길을 실천이라고 정의한다면, 생명과 환경의 가치를 살리고자 여러모로 어려운 농촌 현장에서 조금이나마 내 몸으로 행동하는 모습이 바로 믿음과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신 예수, 즉 땀 흘리는 민중과 함께 하신 농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78일 동안의 근사한 독일에서의 행사와 좁은 버스에 몸을 싣고 간 들녘에서의 23일 동안의 고된 농촌 활동 두 여행의 경험 속에서 얼핏 보면 대조적이지만,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현장에서의 실천으로 그 뜻을 이루는 값진 체험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오늘의 본문 말씀처럼 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라는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유라시아 대륙의 동편과 서편, 우리에게 먼 곳 슈투트가르트와 가까운 곳 완주군 이서면에서 각각 머리와 마음, 육체의 정성 모은 이들에게 주신 큰 가르침이라 믿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예배당 구석 한편의 제 자리로 돌아가 실천의 현장에서 작은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올 가을 10월에는 올해로 6회째를 맞이하는 한국 교회의날 행사가 있습니다, 독일에서처럼 2년마다 열리는 행사로, 특별히 올해는 10년을 기념하는 자리가 되겠습니다만, 아직 이 행사를 아시거나 참여해 본 분들은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에 가서 직접 보고 경험해 온 것처럼 살아있는 공동체로써 세상에 영향력을 주는 모든 참여자가 어우러진 축제의 한마당이자 치열한 논의의 장을 마련하여 생동감 넘치는 행사를 조직하고 준비하는 일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11월 이후, 추수가 끝난 완주에서 들녘교인들과 함께 나누는 예향과 문향의 문화 행사와 들녘-향린의 만남 그 간의 20주년을 정리하고, 한중 FTA를 비롯한 우리 농촌의 현안에 대해 고민과 앞으로의 농촌과 도시의 생활공동체간의 상생 관계로 발전하기 위한 의견을 나누는 심포지엄의 형식을 통해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하고자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사회적 실천 의지를 삶의 현장에서 몸소 다하고 계신 향린의 많은 가족들께서 앞으로 올해 하반기에 진행될 한국 교회의날 행사와 들녘과 함께하는 땅의영성을 위한 행사에 깊은 관심과 참여를 간곡히 부탁드리며 말씀을 이만 마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우리가 더욱 지혜롭게 되기를!]

고상균

 

독일 교회의 날 현장에서의 느낌을 잘 전달해 주신 홍태영 교우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홍태영 교우가 등록한지는 불과 2년도 되지 않지만, ‘홍반장이라는 그의 별명이 말해주듯 신도회, 선교부와 재정부, 성서 배움 마당 및 각종 소모임 등 교회의 많은 자리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향린의 새로운 엔진중 한 분입니다. 앞으로 선배님을 포함해 많은 분들의 격려와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이어지는 태풍으로 습도 높은 더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협착증으로 통증이 커지신 양무용 집사님과 같은 병증으로 입원치료를 받고 있는 허학범 집사님를 포함해 향린의 모든 선배님들과 병상에 계신 교우님들을 포함하여 각양의 모습으로 주일 예배에 함께 하시는 모든 분들의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위해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앞서 홍태영 교우가 전해주었듯, 이번 독일 교회의 날의 주제는 우리가 더욱 지혜롭게 되기를!”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는 예배를 통해 반복하여 언급했던 지혜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현장에서 실천을 통해 얻게 되는, 그리고 얻어야 할 주님의 지혜였습니다. 다음은 여는 예배 중 선포된 설교의 일부입니다.

 

전쟁, 불평등, 종교적 억압, 혐오 등 세상의 여러 곳에는 어려움에 직면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풀려나고 싶습니다. 우리는 평안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우리에게 더욱 많은 실천과 움직임이 있기를! 이를 통해 우리가 더욱 지혜로워지기를! 또 이를 통해 다양성이 지혜롭게 공존할 수 있기를! 이를 구현하기 위해선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니, 실천하는 지혜 가운데 주님의 지혜가 더욱 함께 하시길.......

 

이렇게 연인원 십 만 명 이상이 운집하는 대회에서는 혐오를 뛰어넘어 공존에 이르는 실천적 지혜를 겸허히 구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작은 실천으로 개회식전 행사에서는 역사적으로 독일과 독일교회가 성소수자에게 가했던 폭력에 대한 증언과 반성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유사한 시간, 성소수자들 및 함께하는 이들의 소중한 자리가 혐오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자들에 의해 위협당해야 하는 한국의 상황이 안타까워서, 또 수 백 명이 차가운 바닷물에서 살해당하는 것도 모자라 일 년이 넘도록 원인과 이유조차 알 수 없어야 하는 이 나라의 모습에 목이 메어서, 지혜를 구하는 수만의 청중과 함께 찬양하는 가운데 저는 그만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습니다. 이제 오늘 함께 모시는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절망에 직면하는 지혜: 예레미야]

 

이 저주받을 것들아!”라는 일성(一聲)을 통해 저자의 비분강개와 비장함을 느낄 수 있는 오늘의 1성서 본문은 예레미야서의 일부분입니다. 예언서 예레미야.......52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사야, 에제키엘과 함께 3대 대 예언서로 지칭되고 있으나, 마른 뼈가 일어나는 환상과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된다는 신탁으로 유명한 에제키엘과 2성서에서도 자그마치 22번이나 언급될 만큼 유대교 및 초기 그리스도교인 전체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이사야에 비해 언급되는 중요성이나 교회일반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성서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같은 대 예언서인 이사야와 에제케엘과 같이 고난을 능히 뚫고 나갈 만큼의 희망을 보여주고 있지 않아 보임에도 그 원인이 있겠고, 1성서의 다른 본문과 달리 히브리어 판과 그리스어 판이 분량과 내용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는 등, 접근과 해석에 있어서도 녹록치 않은 성서이기 때문이겠습니다만, 더욱 분명한 이유는 예레미야 본문 전체에서 발견되는 절망에 대한 불편함 때문이지 않을까싶습니다.

 

바빌론 왕이 씌우는 멍에를 메어라. 그 왕 느부갓네살을 섬겨라. 그렇지 않는 민족과 나라가 있으면, 나는 그 민족을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더라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주고 말 것이다. 이는 내 말이다. 어김이 없다. (예레미야 27:8)

 

팔레스타인을 지나 이집트까지 병탄(倂呑)할 목적으로 진군해오는 바빌로니아의 위협 앞에서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이 있사오니식의 애국애족 정신을 발휘하지는 못할망정, ‘야훼가 바빌로니아의 멍에를 부수고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라고 외치는 하나니야 승리의 희망을 신탁으로 전하는 예언자들을 향해 예언서 속 예레미야는 오히려 ‘~바빌로니아 군에 항복하면 산다. 목숨 하나 건지는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기게 될 (38:2)’이라며 냉소를 날립니다. 본문 속 예레미야는 왜 이와 같은 비애국적, 반민족적 행위를 신의이름으로 자행했던 것일까요? 그는 시대의 이완용이었던 것일까요?

주전 609, 남 유다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것은 위기에 빠졌던 국가가 그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의 중심, 요시야 왕이 므깃도에서 이집트 군에 의해 허망하게 전사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기울어져가는 앗시리아와 이집트, 그리고 신흥강국으로 급부상했던 신바빌로니아 등의 국제정서를 면밀히 살피는 가운데 이들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구가했던 요시야의 대외정책은 꺼져가던 유다의 촛불을 다시금 피워 올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이는 요시야를 왕으로 등극시켰던 암 하아레쯔, ‘땅의 사람들로 명명되던 비예루살렘 지주 중심 결사조직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얻었습니다.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것으로 보이는 예루살렘 근교 아나돗 출신 예레미야 역시 이들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 했고, 그들과 함께 잠시나마 국가공동체의 밝은 미래를 꿈꾸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젊은 왕의 비극적인 죽음이후, 예레미야는 집권세력의 친 이집트 정책이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불러일으킬 것임과 안타깝게도 이를 피할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정치세력에 대해 여과 없이 표현되는 분노는 당대 친 이집트 계 집권세력이 종교적 열광을 통해 무고한 백성들을 전쟁으로 몰아가는 가운데 종국에는 파멸해 버리고 말 것에 대한 절절함, 그 안타까움의 표현이며, 피할 수 없는 위기를 손바닥으로 들어 하늘을 가리는 식으로 외면하려는 위정자들에 대한 절규였던 것입니다.

 

양떼를 죽이고 흩뜨려 버리는 목자라는 것들아, 야훼의 말을 들어라! ~ 똑똑히 들어라! (예레미야 23:1~2)

 

예레미야, 그리고 이를 기억했던 저자는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절망을 직면하자! 바로 그것이 이 안타까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하느님의 지혜이다!’ 예레미야서가 본문 전체를 통해 지금의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바로 절망을 직시하는 지혜라 할 것이며, 이는 허황된 축복이나 허무한 축원과는 다른 위로, 즉 어려운 현실을 직면한 이가 힘들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극복을 위해 움직이게 하는 격려가 될 것입니다. ‘이 때가 되면 야훼, 우리를 되살려 주시는 이라는 이름으로 그 분을 부르게 될 것이다!’

 

[다양성의 공존을 염원하는 지혜: 에페소]

 

이방으로 태어난 여러분으로 시작하고 있는 두 번째 하늘말씀 에페소는 바울 정신의 계승단위에 의해 여러 교회에 회람할 목적으로 작성된 서신입니다. 그리고 유럽선교에 집중했던 바울의 뜻을 강하게 이어받겠다는 저자의 의도는 자신을 이방인 여러분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포로가 된 나 바울로라고 지칭하고 있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그 가운데 특히나 오늘 함께하고 있는 본문은 그 핵심단락입니다. 바울로의 활동 이후인 주후 80년 정도 등을 저술 시기로 볼 수 있는 에페소서에는 유대전쟁 이후 지중해 지역 전역에 형성된 유대교 디아스포라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간의 긴장관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지 몸에다 사람의 손으로 행하는 할례를 받은 소위 할례자들로부터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에페소 2:11)

 

불과 수 십 년의 연원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 신흥종교,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명한 인지도와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던 유대교 공동체는 그 발전과정에서 자신들의 신앙에서 연원을 찾고 있는 그리스도공동체가 매우 불편하게 여겨졌고, 이는 특히 양 공동체가 모두 존재하는 도시에서는 행정구역 전체의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클라우디오 황제에 의해 단행되었던 유대교,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로마추방령은 이와 같은 갈등 및 그에 대한 행정조치의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한편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서신 속 저자는 지역의 유대인, 혹은 긴장관계가 형성되었을 수도 있을 유대교 공동체와의 연관 관계 속에서 서신 속 교회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조심스레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공동체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나 유대인들에게나 다 같이 평화의 기쁜 소식이 됩니다. 우리는 한 시민이며 한 가족입니다.’ 한 마디로 함께 사는 것, 다양성 공존의 지혜를 강조하고 있는 서신 에페소는 그 지혜의 실현가능성을 예수 그리스도, 낮은 존재에 대한 몰아냄에 대해 온 삶을 통해 공존해야 함을 외쳤던 예수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예수는 그 사잇돌입니다. 온 건물은 이 사잇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함께 주님의 성전, 즉 몸이 됩니다. (에페소 2:20~21)

 

우리 성서에는 모퉁이 돌로 명명되어 있는 단어는 본래 아치형태의 석조 건축물을 만들어 갈 때, 최종적으로 끼워 넣는 사잇돌을 의미합니다. 이는 바닥에서부터 쌓아 올라오다가 점차 안쪽으로 각도를 기울여 마침내 닿게 되는 아치형태 구조물의 최종작업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하는 본문은 그 공정으로 뒤바꿔 사잇돌을 중심으로 연결되고 커져서 마침내 몸이 된다는 선언을 합니다. 이는 석조 건축물 작업 현장에서 쓰고 남은 조각돌이 전체 구조물의 최종 완성을 위해 매우 요긴하게 쓰인다는 점에서 착안된 노동 현장의 지혜이고, 바로 그 사잇돌에서부터 전체가 시작된다는 가치 전복의 지혜이며, 다양한 돌들이 함께 이어져 하나의 구조물이 형성된다는 다양성 공존의 지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에페소에 보내진 서신은 다양한 가치와 정체성이 공존하는 것이 하늘의 평화임을 강조했던 지혜의 메시지였습니다.

 

[실천의 지혜: 마르코]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이제 마르코 복음에 이르렀습니다. 본문은 갈릴리 호수 동편의 데카폴리스, 즉 수탈과 영토 확장으로 목적으로 로마가 건설했던 열 개의 식민도시로 상징되는 갈릴리 호수 동편의 긴장관계와는 달리 서쪽 갈릴래아에서는 예수의 먹이고 살리는 이적이 많았다고 기술하고 있는 마르코 특유의 서사구조에 무척 충실합니다. 두 개의 본문을 연결하는 중간 내용이 바로 예수의 이적 기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오병이어 사건과 물 위를 걷으시는 예수 이야기이니 말입니다.

수 천 년의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는 예수의 신적 상징이라는 이해와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씩 자신의 것을 내놓았고, 높은 물결로 인해 호숫가를 거닐었던 예수의 모습이 마치 물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는 식의 자유주의적 해석 사이를 오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신앙 고백했던 해석공동체에 대한 연구 및 그에 대한 비평적 계승을 통해 본문 속 예수, 그리고 그의 이적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이들, 심지어 앞질러 가서 자리를 마련하는 무리들, 즉 오클로스와 함께하는 자리에서만 발생하는 사건으로 기술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위대한 하느님의 자녀 예수도 함께하는 이들이 없으면 이적을 행할 수 없다 것이고, 이는 결국 예수의 신기 묘묘한 이적이야기의 실상은 오클로스와 함께 현장에서 만들어져갔다 민중 신학 특유의 고백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의 실증 역사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이야기를 신앙 고백했던 이들, 특히 이것이 민중의 땅이라는 현장에서 오클로스와 함께 함이라는 실천을 통해 구현되었다는 마르코 공동체의 해석과 신앙고백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 현장의 지혜를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향린 공동체 여러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각양의 느낌과 모습으로 함께 예배에 참여하고 계신 모든 여러분! 오늘의 날씨만큼이나 세상은 참 어둡습니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떠들던 자들에 의해 평화적 공존을 요원하게 할 전쟁연습이 자행되고 있고,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며 천문학적 규모의 무기를 도입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어불성설을 가능케 하는 분은 전지전능하신 미국이라 합니다. 이집트가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니 바빌로니아와의 일전을 준비하라 침을 튀기며 소리를 질렀을 예레미야 당시의 위정자들의 광분이 생각납니다. 조장되는 공포와 위기를 반대하며, 평화의 정착을 위한 실천의 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를 위한 주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또 지금 우리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회장의 총수일가가 벌이는 돈놀이에 대한 기사는 연일 뉴스와 신문지상에 상세히 전하면서도, 해고된 KTX 여승무원의 자살은 기사 한줄 제대로 다루지 않을 정도로 몹시 비정한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난 316일 세 살배기 아이를 둔 채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던져야 했던 그녀는 대법원에서 내린 원심 파기 환송, 즉 해고된 여승무원들은 KTX가 고용한 노동자가 아니라는 법원의 최종판결에 따라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던 직장에서 영구히 멀어졌음에 희망이 꺾였고, 1.2심의 승소를 통해 지급되었던 8,640,000원을 갚아야 한다는 결정에 삶의 의지를 접었습니다. 힘이 있으면 살 수 있는 나라, 아니 힘이 있는 것들만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작은이들, 소수자들,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국민도, 시민도, 사람도 아닌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이 무서운 얼음나라에서 생명을 틔워 낼 실천의 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며, 독일 교회의 날 대회 중 나이지리아, 가봉, 카메룬, 우디아라비아 등에서 자행되고 있는 성소수자 탄압에 대한 증언을 진행하던 카메룬 여성 활동가의 외침 중 일부분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적어도 성소수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직접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무슬림과 서구의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 수 습니다. 가톨릭은 교리적으로 죄라 선언했고, 서구 개신교는 침묵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은 지금 기독교가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간절히 구해야 하는 지혜, 그 지혜가 펼쳐져야 할 세상,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은 미군에 의해 택배로 살상무기인 탄저균이 배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메르스 사태가 불거지고, 국정원이 과거 대통령 선거 기간에 해킹을 위한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사찰대상이 급격하게 늘어났다는 내용이 밝혀지자마자, 국정원 담당직원의 갑작스런 자살소식과 그의 마지막 유서에 대한 공개가 가족들의 반대로 불가하다는 경찰발표가 꼬리를 무는 곳입니다. 수 백 명의 세월호 유가족에게 밤새 물대포를 뿌리고, 폭우가 쏟아지는 길거리에서 천막하나 치지 못하게 하던 경찰이 언제부터 유가족들의 입장을 그리 존중했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세월호에서 어처구니없게 몰살당한 이들을 가족 품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그리고 왜 그 분들이 죽어야했는지를 밝혀야 한다는, 참으로 당연하고도 상식적인 주장을 대놓고 했다는 이유로 인권활동가 박래군 선생이 구속당해야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의 구속은 이제 이 땅의 권력이 어떤 존재들은 공존할 대상으로 보지 않겠다고 규정하는 구체적인 사례임과 동시에 진실규명을 향한 우리의 기도와 실천이 부족했음, 그러니 더욱 힘써 기억해야한다는 촉구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바로 그 현장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이와 같은 실천의 지혜를 가슴에 새기며 오늘 하늘뜻펴기의 마무리는 옥상달빛의 노래 희한한 시대로 대신하겠습니다.

 

이 희한한 세상을 바꿔나갈 실천의 지혜를 구하며 잠시 침묵기도 하겠습니다.

 

 

 

 

 

 

 

 

 

늘 부족하지만, 마음을 다해 위로합니다.

힘을 내십시오. 평안하십시오.

그리고 진리 안에서 해방의 자유를 만끽하십시오.

 

늘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십시오. 함께하십시오.

그리고 삶 가운데 꼭 한 걸음만큼의 실천을 이루십시오.

 

이를 통해 삶의 현장에서 실천을 통해 깨닫게 되는 주님의 지혜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살아갑시다.

 

이제 서로를 향한 축복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가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