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의 주? 자유와 해방의 주?

왕하 4:42-44; 145:10-18; 3:14-21; 6:1-21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 목사로서 이번에 미국 그리스도교단과 제자교단 두 곳의 총회를 참석하면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건 이 두 교단이 한반도 평화통일 문제를 저들의 주요 의제 중 하나로 다루고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결의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시급한 일이 미국 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의 변화입니다. 그래야만 북이 대화의 자리에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북정책의 변화라는 것이 자국에 득이 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평화통일을 위한 근본 조건]

 

최근 쿠바와 외교관계를 열었는데, 이는 코앞에 놓여 있는 쿠바를 아무리 적대하고 경제를 봉쇄해 보았자 별로 득이 없기 때문이고 오히려 쿠바의 개방을 통한 경제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최근 이란과의 핵문제 해결을 통한 경제봉쇄정책을 푸는 것은 경제활성화 뿐만 아니라 휘발유 값을 낮추는 이득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1년이 지나면 현재 60여 불에 달하는 원유 한 배럴당 국제 값이 20불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휘발유 값은 미국인들에게 있어서는 경제를 피부로 경험하는 가장 기본 단위입니다. 만약 휘발유 값이 그 정도로 떨어진다면 1년 후에 있을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기회는 더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미국의 보수 공화당의 집권을 원하는 이스라엘 보수 정권이 이란과의 협정을 극도로 비난하고 나서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북조선의 경우는 상황이 다릅니다. 북쪽과 평화협정을 진행해서 미국이 얻을 소득이 별로 없습니다. 경제봉쇄를 푼다고 하더라도 북한 경제는 어차피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남한 쪽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미국 입장에서는 대북적대정책을 계속 유지함으로 남한과 일본에 첨단 무기를 계속 팔아먹을 수 있을뿐더러 이를 통해 군사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꿩 먹고 알 먹기의 이득을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미국이 스스로 대북적대정책의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결국 지금 평화통일에 직접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평화세력을 키움으로 미국의 평화세력과 연계하여 미국정부를 압박하는 일입니다. 여기에 미국교회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달 사이에 미국을 두 번 가는 일이 체력적으로도 보통 힘이 드는 일이기도 하고 교회에도 어려움을 주는 일이긴 하였지만, 통일운동에 힘쓰는 저로서는 좋은 기회라 여기고 참석하였던 것입니다.

 

[에큐메니칼 연대의 힘]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세계 여러 교단과 선교 관계를 맺어오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맺어오고 있는 교회가 캐나다연합교회입니다. 선교 초기부터 보수적인 미국장로교 선교사들이 백인우월주의에 근거하여 조선 교회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일을 꺼려할 때, 카나다장로교회는 조선의 교회는 조선의 지도자들에 의해 양육되어져야 한다는 열린 태도를 갖고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앞장을 서왔습니다. 여기에 가장 먼저 불림을 받은 사람이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애써 오신 문재린목사님이셨습니다. 이후 문목사님의 열린 신앙과 민족사랑의 지도력은 두 아들 문익환목사님과 문동환목사님을 통해 지금까지 남북한의 교회에 큰 영향력을 끼쳐오고 있습니다. 인물 하나 제대로 키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캐나다교회의 역할은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박정희군사독재정권 시절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김재준목사, 안병무선생님을 비롯한 기장교회 지도자들이 구속되었을 때, 적극 도와준 교회였습니다. 현재 그리스도교단과 캐나다연합교단은 통합을 향한 발걸음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단과 제자교단은 세계선교국을 하나로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세 교단은 사회정의와 인권, 그리고 세계평화문제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목회 전통]

 

그리고 이 세 교단의 또 다른 특징은 평신도목회 전통이 가장 강한 교단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여성지도력 뿐만이 아니라 청년 지도력 양성에도 앞장선 교단들입니다. 캐나다연합교회 총회는 중앙위원회에 정식 위원으로 고등학생까지 참여시키고 있고 그리스도교단이나 제자교단 모두 미래 지도력을 키우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들 총회는 총대회의와 함께 청소년 청년들의 모임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자교단은 미국에 약 36백여개의 교회가 있는데, 다른 교단처럼 투표를 해서 뽑힌 사람만 대표로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는 모두 그리고 각 교회는 교인수에 따라 최소 2명 이상의 대표를 파송합니다. 장로교 총회는 목사와 장로 숫자를 같게 하는 원칙을 갖고 있는데 반해, 제자교단은 평신도 숫자가 목사보다 두 배 이상 많은 것입니다. 매년 약 3,4천명 정도가 참석을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단에는 한인교회가 매우 적어 한인은 한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만, 제자교단에서는 여러 한인목사님들을 만났고 그 가운데는 최근 제자교단으로 소속을 옮긴 향린교회 부목사 출신으로 나성향린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곽건용목사도 있었습니다.

 

[소수자 우선 원칙]

 

그리스도교단이나 제자교단의 또 다른 공통된 특징은 참석자 90% 이상이 백인들이었지만, 앞에 나와서 회의를 주관하는 총회장 혹은 설교자들은 절반 이상이 여성 혹은 흑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제자교단 총회장은 백인 여성이고, 해외총무는 흑인 여성입니다. 지난 번 그리스도교단 총회장은 흑인 남성이 선출되었고, 해외 총무는 백인남성이 뽑혔는데, 총회에서 백인 남성이 선출된데 대해 많은 반대가 있었습니다. 여성들뿐만이 아니라 백인 남성들의 반대 목소리 또한 높았습니다. 논란이 가라앉질 않자 청빙위원이었던 한 여성 위원이 소수자를 뽑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노력을 했지만, 할 수 없이 백인 남성을 선택했노라고 답변을 하였습니다. James Moos 라고 하는 이 백인 남성 목사께서 10월 달에 기장 총회 초청으로 서울에 오게 되는데 그때 오면 향린교회에 와서 설교를 한번 하라고 얘기했더니 기꺼이 승낙을 했습니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가 아닌 소수자 우대 정신]

 

저는 여기서 민주주의란 단순히 다수에 의해 좌우되는 표결 방식이 아니라, 그 다수가 얼마나 소수자의 목소리를 경청하고자 하는 열린 태도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표로 결정하되 표를 행사하는 투표자들이 얼마나 미래를 향해 열려 있고 깨인 사람들인가에 따라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라는 사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히틀러도 투표에 의해 그것도 딱 한 표 차이로 선출된 지도자이지만, 우리가 그를 민주주의 지도자로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선거에 이겼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민주주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더구나 허위 공약과 관권선거 그리고 컴퓨터투표조작 의심이 짙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결코 민주주의 선거에 의한 당선자로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또한 앞으로 지도자를 뽑을 때는 나와 가까운 사람 혹은 내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곧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더 나아가 나와는 비록 생각이 다를지라도 이 교회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갈 수 있는 창의력과 도전감에 넘치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보와 현자의 차이]

 

이번에 또 하나 놀란 사실은 제가 뉴욕서 공부할 때, 바로 옆에 있는 교회라 자주 가보긴 했던 리버사이드교회는 고딕식의 웅장하면서 세련된 아름다운 건물뿐만이 아니라 진보적인 설교와 열린 신앙으로 그 명성이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교회입니다. 몇 년 전에도 한인 스님을 모셔다 법회를 연다고 뉴욕타임지에 광고를 내자 뉴욕의 모든 한인교회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취소하라는 압박을 받았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번 제자교단 총회에 이 교회 담임목사가 설교자로 초청받아 왔는데, 놀랍게도 40대 중반의 백인 여성이었습니다.

 

여성담임목사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40대를 담임목회자로 모신 사실에 놀랐습니다. 물론 미국에는 여성담임목사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제가 아는 대형교회에는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하면 미국의 대표적인 교회라 할 수 있는 리버사이드 교회에 40대의 여성 담임목사가 부임하게 된 일은 미국사회 또한 놀란 일이기에 여러 주류 매체들이 다투어서 인터뷰를 한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저는 이 일을 보면서 현대 사회의 변화의 물결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이번 미국 방문 중에는 미국 내에서 비행기를 탈 때나 자동차를 렌트하는 경우 이멜로 온 티켓을 제가 직접 인쇄해서 가져가거나 혹은 핸드폰에 내장된 QR인식표로 대신하였습니다. 저는 표를 받기 위해 긴 줄에 설 필요가 없이 곧장 탑승구로 가서 비행기를 탔고, 렌트차도 다른 사람들이 줄에 기다리고 있는 동안 저는 곧장 차가 있는 곳으로 가서 제가 원하는 색깔의 자동차를 골라서 타고 나왔습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일에 저도 놀랐습니다. 물론 이것이 확산되면 접수대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해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렌트카를 빌리기 위해 줄에 서 있는 사람들 그들도 핸드폰을 다 들고 있고 이멜을 다 합니다만, 새로운 변화에 무감각하다보니 뒤떨어진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실제 비행기 탑승구에는 저들보다 먼저 갔었고 저들이 줄에 서 있는 동안 저는 이미 차를 몰고 제가 원하는 목적지에 가있는 결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미래 교회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해온 방식이 편하다고 그 방식만 고집하다가는 결국 시대에 뒤떨어진 교회가 되어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그리고 그분의 교회는 이 지상에서 영원하지만, 각각의 교회들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번에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바보는 변했다고 하고 현자는 변하자고 한다.’는 격언이 떠올랐습니다.

 

[총회 주제의 파격]

 

제자교단은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교단이었습니다. 신학이나 교리에 매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신앙을 다름을 인정할뿐더러 미래의 지도력을 의도적으로 키웁니다. 이번에 서울에서 일반대학을 나오고 군대까지 마친 40대의 한인 1세를 제자교단을 대표하는 에큐메니칼 지도자로 뽑았습니다. 이는 기장 총회가 에큐메니칼선교 담당 총무로 한국에서 몇 년 밖에 살지 않은 네팔목사를 선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파격적인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동들은 모두 파격(破格)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놀랐고 기득권을 누리는 사회 지도자들은 예수를 없애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예배 또한 제가 아는 격을 깨는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고, 제자교단이 매우 중요시하게 여기는 성찬식 또한 할 때마다 그 방식을 달리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엄숙하면서도 그러나 영감이 넘치는 찬양을 부르면서 참여하는 모습 속에서 성령의 자유와 기쁨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총회 주제는 'Soar' 였습니다. 이는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갔던 유대민족이 독수리같이 솟아오르리라는 이사야의 예언말씀에서 따온 동사인데, 이는 지난 그리스도교 교단 총회 주제가 Unexpected Place(뜻밖의 장소)로 매우 짧은 함축된 언어였는데, 이번에는 이것보다 더 짧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총회 주제였습니다. 정말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Soar라는 단어와 함께 스페니쉬와 한글로 솟아오르라를 공식적으로 함께 써놓았습니다. 여러분이 동의하시면 우리 또한 저기 붙어 있는 생명의 하느님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라는 주제를 한 단어로 바꾸는 것은 어떠할까요?

 

그리고 개 교회 예배에서 어린이 설교를 함께 드리는 경우는 흔히 보는 경우이지만, 이렇게 수천 명이 모이는 총회 예배의 순서에 어린이 설교시간을 마련하여 부모님을 따라 함께 한 어린이들을 예배의 한 참여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번만 한 것이 아니라 매일 저녁 예배를 드리는데, 그때마다 꼭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 찬양도 중세부터 현대까지 어른들이 좋아하는 찬송부터 십대들이 좋아하는 찬양까지 매우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하는 것을 보고 또 놀랐습니다. 세계교회가 모이면 우리나라 국악찬양 오소서 오소서 평화의 임금을 자주 부르긴 하지만, 이번 경우처럼 드럼이 포함된 관현악단이 편곡을 하여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플롯으로 대금을 흉내를 내는데, 플롯이 저런 소리도 낼 수 있는 사실에 놀랐고, 또 우리의 단순한 음률이 이렇게 웅장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노래로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도 예배 음악에 있어 다양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의 자랑스런 국악예배 또한 국악 찬송만으로 제한받기 보다는 여러 다양한 찬양의 노래들을 국악의 노래로 변형하여 수용하는 방식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성이 음악을 통해 살아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시대와 호흡하여 가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향린교회에 남아 있는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좀 더 다양한 예배 형식과 찬송을 시도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급식기적 이야기의 사회정치적 맥락]

 

오늘의 제1, 2 성서의 본문 말씀은 급식기적 이야기입니다. 열왕기하의 말씀은 어떤 사람이 맏물 곧 첫 수확으로 만든 보리떡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엘리사에게 가져왔고, 엘리사는 이를 같이 있는 백 명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하자 제자가 답합니다. 이 작은 음식으로 어떻게 백 명이 다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눠주라는 말씀을 따라 나눠주었더니 모두가 먹고도 남았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5천명 급식기적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성서를 읽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지금 이 이야기들은 모두 최소 이천년 전에 기록되었고 당시의 청중들을 대상으로 이야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읽어서는 안 되고 2천년전 그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의 틀을 갖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선택하는 핵심 단어가 다릅니다. 육하원칙과 과학적 사고에 훈련되어 있는 우리들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사실 분석에 관심이 있습니다. 빵이라는 물질은 엄청 적고 먹을 사람은 엄청 많은데 이들이 다 어떻게 배불리 먹고 그리고도 남는 일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우리가 이 질문에 갇혀 있는 한 성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애기를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성서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역사서가 아니고 야훼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글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문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글 자체가 하느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손가락 자체가 하느님의 말씀인 것은 아니고 손가락이 지시하는 달이 하느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문자로 이해할 때, 배고픈 사람들 한 끼 해결해 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급식의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빵에 매여 있는 한 달을 볼 수는 없습니다. 달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손가락을 싸고도는 사회정치적 맥락을 파악해야 합니다.

 

[‘바알살리사’]

 

우선 열왕기의 말씀에서 예물을 가져온 사람의 이름이 없고 지방 이름만 나옵니다. 이건 무슨 의미입니까? 그건 사람이 중요하지 않고 지방의 이름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바알살리사북왕국의 성소가 있던 세겜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마을로서 따뜻한 기후로 인해 북왕국 지역에서 가장 먼저 곡물이 열리는 지역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살리사라는 단어 앞에 있는 바알이라는 단어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국시대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저들이 역사 해방의 하느님 야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비와 곡물의 신으로 알려진 토착신 바알을 따르는 일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뒤를 이은 예언자이고 엘리야는 이 바알선지자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갈멜산에서 행한 사람입니다. 바알선지자들은 당시의 권력자인 아합왕과 이세벨왕후의 후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곧 당시에는 바알이 실세였습니다. 그 이름도 바알살리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는 한 농부가 그 첫 열매를 엘리사에게 가져왔다는 것은 비와 곡물을 주장하는 신은 바알이 아닌 야훼라는 신앙고백을 공개적으로 한 것이고 이는 당시 사회의 주류지배계층의 신앙과는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곧 이는 단순한 예물 바침의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당시의 지배계층과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백 명의 사람들이 함께 먹고 나누었다는 말은 단지 빵이라는 물질을 나누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저항의 신앙고백을 나누었다는 말이고 다 먹고도 남았다는 말은 이들의 신앙고백이 여기서만 그치고 만 것이 아니라 다른 지방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파되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엘리야 선지자에게 7천명의 숨은 야훼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듯이 엘리사에게도 백 명의 야훼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곧 이는 단순한 급식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야훼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기초한 민중 저항이 숨어 있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티베리야 호수 건너편’]

 

복음서의 급식기적이야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이 급식기적의 내용에 앞서 이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시기와 장소에 대한 사회정치적 맥락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 때는 과월절의 절기였습니다. 과월절은 히브리노예들이 모세의 영도아래 홍해를 건너 해방 받은 날을 기억하는 유대인들의 가장 큰 축제 절기였습니다. 이때에는 성인 모두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고 그리고 거기서 예물을 드리고 나서는 일주일동안 함께 먹고 마시는 대 축제가 열렸습니다. 이 축제기간 거기 모인 사람은 누구나 배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갈릴리에 있는 예수님 주위에는 아예 이 축제에 참여할 생각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수많은 떠돌이 막장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급식 기적 이야기에서 우리는 삶의 자리를 박탈당한 민중들의 한을 먼저 읽어내야 합니다.

 

더구나 요한복음은 자주 말씀드리지만, 마태마가루가의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상징 언어를 의도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약간은 비밀스런 영지주의 경향을 띄고 있는 복음서입니다. 우선 급식기적을 행한 장소를 이렇게 말합니다. ‘갈릴리 호수가 티베리야 호수 건너편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얘기를 전하는 앞서 기록된 세 개의 공관복음서는 모두 외딴 곳이라고만 나오지 요한복음마냥 특정 지역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명을 언급하는 저자 요한에게는 분명 그 지명 속에 자신의 의도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냥 갈릴리 호수 저편이라고 해도 충분하건만 티베리야 호수 건너편이라는 이름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티베리야는 어디에서 나온 말인가요? 루가복음 2장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의 로마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대의 로마 황제의 이름은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입니다. 여기서 카이사 아우구스투스는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임을 생각하면 요한이 굳이 이를 언급한 그 이유는 분명해집니다. 곧 티베리야는 로마 황제를 기념하여 헌정한 도시이자 세상 절대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예수와 남자 장정만도 5천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사람들이 티베리야 호수 건너편에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로마의 폭행으로 인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민중들입니다. ‘티베리야라는 단어가 로마의 권력을 상징하듯이 건너편이라는 단어 또한 단순히 장소적 의미를 넘어서서 권력 저항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청와대 앞 청운동이라고 하면 그게 무슨 말인지 여러분은 이해합니다. 해고노동자들과 세월호 희생자들을 비롯한 이 땅의 아픔을 당한 민중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저항을 하는 장소입니다. 내일도 NCCK 화해통일위원들과 YMCA, YWCA가 함께 여기서 727 정전협정 62돌을 맞아 남북평화협정 국민청원서를 전달합니다.

 

청와대 앞 청운동이는 청와대의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상징어입니다. 그런데 백년 후에 사람들이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누군가가 오늘의 사회정치적 맥락을 해석해주지 않으면 그 뜻을 알수가 없습니다. ‘티베리야 호수 건너편마찬가지입니다. 곧 요한이 말하는 급식기적 이야기는 그 내용에 앞서 이렇게 로마의 절대권력에 저항하는 사회정치적 맥락 안에서 읽어내려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 공관복음서가 말하는 외딴 곳쓸쓸한 곳 외로운 곳이렇게 심리적으로 읽지 말고, ‘로마의 정치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민중의 아픔이 있는 곳으로 이해하는 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떻게 가능한가?]

 

곧 예수의 급식기적 나눔 이야기는 로마 황제의 권력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회적 낙오자들을 예수께서 돌보셨다는 의미이고 예수께서 추구한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로마가 추구하는 힘의 권력지배사회에서 낙오된 떠돌이들을 위한 나라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사람들은 묻습니다. 필립보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빵을 조금씩이라도 먹이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온다 해도 모자라겠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거금이 우리에게 있지도 않지만, 설사 있다하더라도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어디에 가서 이 빵을 사올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성취를 자본주의적 사고에 따라서 분석합니다. 사실 우리도 1년 예산을 세울 때에 이런 태도를 갖습니다. 과연 이게 가능할까? 저는 그런 분석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산을 세울 때에는 분명히 이성과 분석에 기초하여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낭패를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결과들을 보게 됩니다. 제가 향린교회에 부임한 이래 재정적으로 계속 예산을 증가하여 오다가 섬돌향린 분가 이래 우리가 재정적 압박을 받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매년 재정부장들은 중간 재정보고를 할 때마다 재정의 결산 부족을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한 어느 한해도 년 말에 가서 결산을 할 때, 풍성히 남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족함을 겪지도 않았습니다.

 

이번 네팔 선교헌금도 그러합니다. 3주간 모두가 열심히 참여해서 600만원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를 네팔 선교사님에게 알리자 선교사님으로부터 두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8백만원을 보내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고 제가 목회자마당에 이를 알리고 여러분들에게 혹 참여하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면 한주만 더 연기할테니 여기에 동참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교인이 바로 교회통장으로 나머지 금액을 더했고, 여러 교우들이 함께 해서 모두 천만원이 되었습니다. 보통 장학헌금이나 구제헌금을 하면 3,4백만원입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하게 처음부터 6백만원이 된 이유도 두 분이 본래 히말리야 영성트레킹에 참여하려고 비행기 표를 구입했다가 이를 포기하고 헌금으로 드려 6백만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냥 4백만원만 모였다면 선교사님도 그냥 한 교회 짓는 금액이니 그것만 보내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치 않게 이 이백만원이 더해져 6백만원이 되었고, 그러자 선교사님이 약간 욕심을 내서 8백만원을 채웠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고, 그리고 제가 이를 여러분에게 전하자 이는 천만원이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4백만원이 누군가의 특별헌신으로 천만원이 된 것입니다.

 

예수는 5천명을 먹이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자 필립보가 아예 말도 되지 않는 말씀하지 말라고 이백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시간에 어디 가서 사오겠느냐고 딱 잡아떼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옆에 서 있던 안드레아가 예수님이 조금 안되어 보였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웬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예수님 여기 이 사람들 다 먹이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 그 뜻은 참으로 좋습니다만, 현실이 그러하니 그 꿈을 깨시고 지금 아이가 가져온 것 그 정성을 봐서 이것 예수님이라도 잡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다면 무에서도 유를 창조해낼 수 있다고 믿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작은 정성을 크게 만드시는 기적의 하느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요한복음 본문은 급식기적 이야기에 이어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어둔 밤 거센 물결로 인해 제자들이 저어가는 배가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에 물위를 걸어가시던 예수를 보고 제자들이 예수를 배안에 모시려고 하자 벌써 배는 어느새 목적지에 가닿았다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마냥 예수를 배안으로 모시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마음만 품었는데, 배는 이미 목적지에 가닿았다는 또 하나의 기적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하느님의 나라 과연 실현될 수 있을 것일까요? 관권선거개입이라는 엄청난 비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독재의 문을 꽉 걸어 닫고, 그리고 비극적 슬픔을 겪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선한 일을 하고 있는 박래군씨를 구금하는 이 불의한 권력 앞에서 그리고 우리 개개인의 카톡과 컴퓨터를 해킹하고 감시하는 반민주주의의 거대한 어둠의 세력을 우리가 이길 수 있나요?

 

그런 부정을 저지르고도 사회적 문제가 일어나자 성실하게 상사의 명령에만 충성하며 살아오던 한 부하의 의문에 찬 죽음을 이용하여 민중의 지탄에서 벗어나려는 이 야비하고 비열한 국정원의 무소부재한 절대 바알의 권력 앞에서 그리고 이와 한통속이 된 검찰과 법관들 앞에서 과연 하느님 나라는 가능하겠습니까? 제자 필립보도 안된다고 하고 제자 안드레도 의심하였지만, 저자 요한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희생당한 부활의 주 예수께서 함께 하신다면 도대체 불가능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급식기적 이야기를 자유와 생명 해방의 하느님 나라를 향한 살아 있는 복음의 말씀으로 받아드릴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2천년 전 저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루어진 빵의 이야기로 받아드릴 것인지는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바울선생 또한 말합니다.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높고 깊은지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깨달아 알기를 기도한다고.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향린이 겪어온 과거 62년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진 자유와 해방의 역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역사이긴 하지만, 우리가 만든 역사는 아닙니다. 이는 민중 속에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역사입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저자 요한이 진리가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품었듯이 우리 모두 이 확신을 품을 때, 예수의 기적의 힘은 또 다시 우리를 승리의 그 자리에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 기적을 믿으면서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727 정전협정 증언]

 

홍대극집사

 

교우 여러분 반갑습니다. 강단에 올라와 서서 보니 더욱 반갑습니다.

 

늙으면 작은 박물관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85살 늙은 박물관에 간직되었던 이야기를 몇 가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내일은 바로 31개월 간 처절하게 싸워왔던 전쟁을 일시적으로 중단키로 하는 협정을 조인 및 발효한지 62돌이 되는 727일입니다. 당시 저는 23살 육군소위의 신분으로 육군백마사단에 소속되어 강원도 철원 금화 지구 최전방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맡고 있던 임무는 전사자 시신을 수습/화장처리해서 후송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유가족도 대부분 피난상태였기 때문에 유골을 바로 전달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이런 경우에는 국가로부터 전시사용시설로 징발된 부산 범어사에 임시 봉안되곤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인으로서 죽음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3년간의 전쟁에서 개전 1년이 지나면서부터 2년간 정전회담을 하다 보니 정말로 정전을 하는 것인지 매우 헷갈리던 1956727, 마침내 그날이 왔습니다. 아침 일찍 갑자기 소집된 작전회의에서는 육군본부에서 하달된 특별명령이 전파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금일(727) 오전10시에 정전협정문에 조인/날인하고, 오후 밤 10시에 정식으로 발효하니 만반의 준비를 하라!

 

병사들의 시신을 다루던 저로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충격적이었고, 반면 무척 기쁘기도 했습니다. 주변의 병사들도 이제는 살아서 집에 갈 수 있겠구나라며 좋아했지요. 하지만 조인과 발효 사이의 열 두 시간은 결코 설레이는 기쁨의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전보다 더욱 요란하게 쏘아대는 포성과 총성이 진동하는 가운데, 10시까지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길고 지루하며, 또 두려운 것인지 몰랐습니다. 참 다행스럽게도 제가 있던 부대에서는 당일 전사자는 없었지만, 10시를 5분 남겨둔 시간까지 부상자는 끊임없이 발생했습니다.

 

727일을 기준으로 3개월 전부터 전 전선에서는 매일 24시간, 1분도 쉬지 않고 모든 총포탄을 쏘아 올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열이 오른 포신에 물을 부어 가며 포탄을 쏘아대고, 최전방 병사들은 진지 속에서 하늘에 공포탄을 쏘아댔습니다. 주어진 표적이 없이 말이지요. 당시 안양에 전방으로 보급되는 탄약고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부터 최전방까지 수많은 탄약을 실은 군용트럭들이 쉬는 시간 없이 운행했습니다. 탄약 소모를 위해 벌어지는 이와 같은 행위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한편 이런 와중에 밤10시가 다가오고 있었고,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재깍 재깍 초침이 천둥처럼 들려왔습니다.

 

958, 59.......그리고 드디어 10.......! 감격, 기쁨, 안도의 한숨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벼락 치듯 천지를 요동치게 하고 귀가 멍멍할 정도로 발사되던 포성이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서해에서 동해까지 155마일에 이르는 전선 전역에 말 그대로 일순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격과 충격이 교차되는 가운데 눈물이 흘러내리는 적막의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이었습니다. 그때의 느낌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서 자리 잡고 있으며, 제 인생의 나침반이 되고 있습니다. 그날 밤, 우리 부대 병사들은 밤을 세워가며 살아남은 것에 대한 기쁨의 춤을 추었으며, 대치하고 있던 전방의 중국인민군 진지에서도 밤새 꽹과리와 피리를 불어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드리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려면 끝이 없겠습니다. 나머지 말씀은 다음 기회에 드리기로 하고 몇 말씀 사족을 붙였으면 합니다.

 

먼저 정전협정의 핵심은 협정이 발효되면 그 시점으로부터 3개월 이내에 평화협정을 위한 회담을 개최키로 한 것입니다. 북쪽에서는 이 조문을 굳게 믿고 이 날을 전승절(戰勝節)로 정하고 해마다 큰 경축행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반면, 남쪽과 미국에서는 언제든지 전쟁을 다시 할 수 있다는 날로 규정한 채, 긴장을 조장하고 무기를 팔아먹을 궁리만 하면서 62년이 흘러오는 동안 여러 가지로 의기의식을 조장하여 많은 무기를 한반도에 배치해왔습니다. 남쪽은 그저 열심히 그 무기들을 사왔었던 것이고, 시간이 지나 지금은 그 대부분이 고물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행위들이 국가안보를 위해서라고 합니다.

 

저는 앞서 말씀드렸던 경험을 통해 한국전쟁과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전시에 한국을 지켜준다라는 허울의 진실은 이를 빙자해 돈을 벌어들이는 미국의 무기장사패거리들에게 우리가 피를 흘려가며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한국전쟁의 정전시점도 역시 비축된 탄을 소모하는 시간에 대한 계산 하에 설정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정전협정을 맺은 날을 지켜오던 북쪽은 협정체결 60돌에 되던 2013, 미국에게 조용히 물러가던지, 그렇지 않을 것이면 정전협정을 무효로 하고 한판 붙던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냈고, 아직까지 미국은 답이 없는 상태입니다. 만의 하나 전쟁이 발발한다 하더라도 3~일주일 이내에 과학 발전에 의해 이른바 패자 없는 전쟁으로 종결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부디 늙은 박물관이 죽기 전에 많이 찾아 주세요. 골동품이 많이 있습니다. 두서 없는 이야기를 경청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김낙중선생께서 보조 발언을 통해 1955년 본인이 파주에서 개성까지 그리고 개성에서 신의주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보니 북한 땅 전체가 폭탄으로 말미암아 논이고 밭이고 모두가 웅덩이 천지요 도시에 어떤 건물이나 집도 남아난 게 없었고, 사람들은 토굴을 파서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 기차 길을 따라 큰 웅덩이들이 많았는데,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기차길은 너무 많은 폭탄으로 아예 흙이 다 없어져서 주위에 있는 흙들을 긁어모으다보니 저렇게 큰 웅덩이가 많아졌다.

 

[파견사]

 

복음을 읽다 빗소리

박영길

 

세상에 비의 체온만큼 촉촉한 게 있을까?

비의 기척만큼 가만한 게 또 있을까?

빗소리만큼 지친 영혼 가림없이 다독이는 복음이 있을까?

 

복음이란 무엇인가?

독단적 교리와 배타적 경배가 우거진 광신의 숲에서 나와

광야의 메마른 영혼들 하나하나 손잡아 눅지게 하는

부름이듯 부름 아닌 부름이 아닐까?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울리는 더 나직한 음성이 아닐까?

 

비가 온다.

종파도 교단도 없는 무소속의 비가 온다.

그치고 나면 그뿐

가난한 영혼 속에 전존재로 스며 이름마저 지워질 비가

루카요한마르코마테오 그 너머 참 복음으로 내린다.

 

우리는 안다. 어머니 음성처럼

빗소리를 본능으로 알아듣는다. 아니다.

어머니 체취처럼 냄새 맡을 뿐. 아무도

비의 목소리를 모른다.

 

비는 제 음색을 지운지 오래다.

처음부터 제 목소리를 가진 적 없다.

목소리를 벗은 비는 무인격의 허수로 내린다.

가랑잎에는 가랑잎의 서걱임으로

풀꽃에는 풀꽃의 속삭임으로

개울에는 개울의 여울 소리로

 

내가 아닌 너의 때깔로 내린다.

내려서 너의 피가 된다. 몸이 된다.

비는 마테오 26장 이십 칠팔 절 쯤의 그런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