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손가락과 달

16:2-4, 9-19; 78:23-39; 4:1-16; 6:24-35

 

8월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힘든 시기이지만, 자연의 식물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기운을 한층 뻗어내는 성장의 시기인 것을 생각하면 덥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없이 고마워해야 할 달입니다. 그런데 8월은 우리나라 역사로 본다면 35년간의 일제 식민지에 해방을 받은 815라는 국경일과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829 경술국치일이 함께 있는 달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랑스러운 것만 기억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수치스러운 일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815라는 광복은 829라는 국치가 없었다면 애당초 있지도 않았을 날이기에 엄격히 말하면 815보다는 829를 더 높이 기억하는 것이 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행동일 것입니다.

 

[829가 있어 815가 있는 것]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829는 정부가 기념식을 가져본 적도 없을뿐더러 815라는 광복만 열심히 기억하고 축제를 벌입니다. 올해는 70돌이라 해서 정부가 엄청난 돈을 들여 거창한 행사들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벌써 광화문 주위 빌딩에는 거대한 태극기가 몇 개씩 붙어 있습니다. 덩달아 보수교회들도 다음 주 일요일 오후에는 시청광장에서 대규모 광복절 기도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항상 그래왔듯이 말은 남북통일을 위한 기도회이지만, 내용은 북의 멸망을 재촉하고 미국에게 감사하는 말로 채워질 것입니다. 그런데 815 해방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얻었다기보다는 미국이 가져다 준 것이고 그래 미국의 이익을 위해 우리를 둘로 나누었어도 지금까지 여기에 제대로 항의조차 못하고 살아온 것입니다. 항의는커녕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큰 절을 올리며 감사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70돌을 맞이한 지금 남북의 반목과 적대감은 최고점에 도달해 있어, 지난 몇 년동안 정부간의 대화는 단절이 되었고, 민간단체들의 만남을 처음에는 허락할 듯이 하더니만 결국은 이 또한 모두 단절시키고 말았습니다. 이희호여사 일행만 방북을 하게 되었습니다만, 미국의 대북 정책에 근본 변화가 없는 한 이번 방북을 통해 특별한 희망을 기대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런 대결 상황에서 815의 광복을 기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정말 그게 기뻐할만한 일이 되는 것인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마치 롯데재벌의 두 아들이 서로가 후계자가 되기 위해 세력 다툼을 벌이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돈은 형제의 피보다 진하다고 하는 세상 가치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기 지분이 더 많다고 힘겨루기를 하는 저들의 뻔뻔스런 얼굴에 정말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입니다. 기업이 개인 것입니까? 그리고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함께 사이좋게 살아가면 뭐가 잘못되는 겁니까? 세상에 딱 하나 있는 혈육이잖아요? 그 많은 돈 다 쓰고 갈 것도 아니잖아요? 정말 어리석은 다툼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저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듯이 세계는 남과 북이 벌이는 경쟁적인 815 행사를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기업의 공공성 회복]

 

말 나온 김에 우리나라 재벌 부자들 왜 그렇게 가족을 챙길까요? 능력 없는 자식들에게는 그저 평생 먹고 살 가게 하나씩 챙겨주고 대신 세계적 기업의 CEO는 능력 있는 직원 가운데서 한 사람 앉히는 길은 없나요? 재벌족보 보면 다 비슷한데, 신격호회장 또한 3번 결혼해서 관계를 맺은 직계 가족들은 중요 기업 회장 한 자리씩 다 해먹고 있습니다. 그들 한사람 한사람 회사 족보를 그려보면 또 그 가족들이 중요한 자리 한자리씩 다 차지하고 있겠지요. 결국 우리나라 기업들 몇몇 가족 사돈의 팔촌들이 다 해먹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서구에서 이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높은 거지요.

 

강철왕 카네기가 은퇴하면서 후계자를 발표하던 때였습니다. 막대한 부와 명예를 가질 수 있는 그 자리에 과연 어떤 사람이 앉게 될 것인가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었습니다. 카네기는 의외의 인물인 쉬브를 임명했는데 그는 중학교도 나오지 못한데다가 회사에 청소부로 입사한 사람이라 모두가 놀랐습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쉬브 자신도 너무 놀랐습니다. 카네기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쉬브씨는 내가 유일하게 이름을 알고 있는 청소부였습니다. 정원을 청소하라고 하면 항상 그 주변까지 즐겁게 자발적으로 청소를 하곤 했지요. 내 비서 일을 할 때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공부하며 기록하더군요. 업무 시간이 끝나도 내가 퇴근을 하기 전에는 항상 자리를 지켰지요. 이런 사람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으면 어떤 사람에게 물려주겠습니까? 좋은 학력에 유능한 사람은 매년 수만 명씩 나타나지만 이런 성실성과 책임감을 가진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나라 재벌 중 하나라도 이런 CEO가 나오길 그래서 세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기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도 삼성 이재용회장이 삼성과 제일모직 회사를 합병하는 일에 대해 지분을 가진 서구인들이 반대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거 가족 한 사람이 그렇게 다 해먹으면 절대 권력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손실이 생길 확률이 높다는 겁니다. 물론 국내언론은 삼성 무서워서 그렇게 얘길 쓰질 않고 뭐 삼성이 커지는 것을 시샘한다는 투로 썼습니다. 결국 국민연금재단까지 편을 들어 3표 차이로 겨우 통과가 되었습니다만, 부끄러운 일입니다.

 

[신문배달 10계명]

 

얼마 전에 제목이 특이한 책이 하나 출간이 되었습니다. 왜 부자들은 모두 신문배달을 했을까세계적인 마케팅 컨설턴트 제프리 폭스는 우연한 기회에 유명한 기업들의 CEO들이 대부분 신문배달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신문배달 10계명'을 만들었습니다. 1. 절대로 빼먹어선 안 된다. 2. 시간이 생명이다. 3. 아프지 않게 몸을 관리해라. 4. 휴가를 함부로 쓰지 말라. 5. 캠프도 가지 말라. 6. 비에 젖어 찢어진 신문은 있을 수 없다. 7. 자전거를 관리해야 신문을 잘 돌릴 수 있다. 8. 길을 절대로 잃어버려선 안 된다. 9. 피곤한 생활 습관을 버려라. 10.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이 가르침이 모든 경영의 기본이자 자기 관리의 기본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서구에서는 부모가 돈이 많아도 중고등학생 때에 자기 용돈을 스스로 벌도록 합니다. 그래서 기업인이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재용씨가 중고등학교 시절 신문배달을 해보았겠습니까? 유학시절 접시를 닦아보았겠습니까? 조현아의 땅콩회항사건에서 보았듯이 재벌 23세들이 왕자공주병에 걸려 있습니다.

 

저도 미국 전도사 시절 한 1년 신문배달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자전거가 아니라 차로 배달을 했고 일요일에도 배달을 해야 했습니다만, 차를 정지하지 않은 채 운전석에 앉아서 창밖으로 신문을 던져 정확하게 원하는 장소에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았다면 여러분이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하루는 어느 통일모임에 갖다가 너무 늦어 배달장소에 차를 세워두고 차안에서 눈을 잠시 붙였는데, 떠보니 해가 중천에 떠있었고, 그래 1계명과 2계명을 동시에 어기게 된 겁니다. 보급소로 신문 안 왔다고 전화는 계속 걸려오지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보급소장은 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어 애만 탔었지요. 늦게 배달을 했습니다만, 한번만 더 그런 일이 생기면 해고라는 통고를 받았지요. 팁이 생명이었는데, 그 주에는 팁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외 여러 에피소드가 있습니다만, 저도 목사의 길 대신 기업쪽으로 갔더라면 혹 제가 CEO라도 되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물론 그것도 이 남한 땅 안에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인 것이고 아마도 보급소장 정도 했었겠지요.

 

[2의 태프트가츠라 협약]

 

오늘은 기장 서울노회와 일본동경북지구의 교회가 함께 동아시아 평화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원수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평화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잘못을 철저히 고백하는 일이 선행이 되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독일이 두 번이나 세계 전쟁을 일으켰음에도 지금 존경받는 국가가 되어 있는 것은 철저한 회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미쯔비시 회사가 중국인들의 강제 노역에 대해서는 배상을 하면서도 똑같은 일을 했던 한국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른 채하는 이중 잣대 짓거리는 결코 하지 않은 것입니다.

 

현재 아베정권이 미국의 동아시아 회귀 정책에 호응하여 평화헌법 9조를 제멋대로 해석하여 군비증강에 적극 나서고 있고 미일방위조약에 따라 해외 파병까지 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해외란 한반도를 말하는 것이니, 일본의 재침략이 코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이는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로 정당화시키는 현대판 가츠라태프트 비밀협약입니다. 1900년대 초기에도 우리들이 단결하지 못하고 친중, 친러, 친일, 친미파로 나뉘어 세력다툼을 벌리다 결국 식민지로 전락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부전여전]

 

그런데 이렇게 일본의 군사 재침략이 가시화되어가는 이 엄중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목요일 박근혜씨의 여동생인 박근령씨가 일본에 위안부문제 등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또 일본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다. 심지어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일제 식민지 지배를 통해 한국에 근대화가 일어났다는 얘기를 했다고 하니, 도대체 이 여인은 한국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인간이란 모름지기 자기가 직접 겪지는 않았어도 다른 사람이 겪은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여기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을 갖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정신대 할머님들이 열 댓 살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일본 군인들의 성노예가 되어 하루 20명씩 상대해야 했던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았다면... 여자로 태어나 결혼도 할 수 없고 아이도 가질 수 없는 이분들의 한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았다면... 감히 이렇게 무례한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저로서는 도대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20만 명의 우리의 어머니들이 이렇게 억울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였고 지금도 그 증거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그건 자기들이 직접 하지 않고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했다고 하는 해괴망칙한 논리를 펴면서 그 책임을 피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사를 끄집어내는 일이 부당하다고 하니 이 분은 이번 기회에 일본으로 귀화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지난 20년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태양이 작열하나 매주 수요일 정오 일본 대사관 앞에서 규탄 집회가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통령의 여동생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나이가 60이 넘어 세상 이치를 다 알만한 사람이 이렇듯 비상식/몰역사/반민족적인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분노를 넘어 깊은 수치를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면서 언니 근혜씨 또한 자기와 생각이 같다고 말하였는데, 그러고 보면 박근혜씨가 일본 정부를 향해 사과 운운하는 것은 국민들로부터 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쇼일 따름이고, 그의 마음은 근영씨와 하나 다를 바 없다는 판단을 갖게 됩니다. 하긴 일본 천황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다까기 마사오 아버지 박정희가 이들 자매에게는 우상이나 다름없는 존재이고 이 박정희가 술만 먹으면 일본 군가와 일본 유행가를 즐겨 불렀다고 하니 어려서부터 일본의 노랫소리를 듣고 자란 이 두 사람의 머리에 친일 정신으로 가득 찼다는 사실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만일 김재규장군의 총에 의해 박정희가 죽지 않고 독재를 계속 했더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까?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와 같은 참혹한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만 해도 온 몸이 으스스해집니다.

 

[폭력의 기원]

 

왜 인간은 살상을 하는 것인가? 동물의 세계와 같은 영화를 보면 동물들도 싸우긴 하지만, 그러나 그건 먹이와 짝 때문이지 사람마냥 증오에 가득차서 상대를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동물들은 싸우다가도 한쪽이 물러나면 그걸 쫓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도망을 가는 사람의 등을 향해 총을 쏩니다. 쿄토대 총장인 야마기와 주이치가 쓴 인간성의 기원을 탐구하는 폭력은 어디서 왔나(2015)라는 책을 보면 몸집이 거대한 수컷 고릴라 두 마리가 싸움을 벌이면 새끼나 암컷이 중간에 끼어들어 말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마음을 내려놓고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한참동안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화해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릴라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진화했다고 하는 인간은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진화라고 하는 것이 항상 바른 쪽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인간은 고릴라에게서 상생을 배워야 합니다. 상대를 완전히 몰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현대전에서는 살인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별의별 무기를 다 생산해내고 있으며 지구를 몇 조각 낼 수 있는 핵무기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탄저균 생화학무기까지 사용하려고 합니다. 저는 미군이 탄저균을 실험한다고 해서 아직 탄저균무기를 개발하는 과정에 있는 줄 알았더니 오래 전부터 남한 주둔 미군들은 의무적으로 탄저균 백신주사를 맞아왔더군요. 같은 미군부대에 있어도 한국 군인들은 제외했다고 하니, 탄저균을 살포한 다음 우리 한민족은 몽땅 몰살시키고 이 땅을 미군들이 차지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욕을 할 수는 없지만, ‘나쁜X이라는 욕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이런 걸 보면서도 미국까지 가서 전 미8군사령관 무덤에 가서 큰 절을 하는 정치지도자가 있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차기 대통령 후보자 중 한사람이라고 하는데, 그 나라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면 탄저균보다 더 무서운 무기도 생산된다고 합니다. 그건 전자총을 든 로봇 군인이 등장을 하게 되고, 30년 후면 로봇의 인식능력이 사람을 능가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로봇들의 반란이 일어나서 인류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터미네이터같은 미래전쟁 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 이게 꾸며낸 얘기가 아니라 실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 최근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로봇 군인 개발을 금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정신, 곧 얼을 지닌 존재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깊게 서로를 들여다보면 비록 얼굴 색깔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신의 이름도 다르지만, 한 껍질의 피부를 드러내면 그 안의 살과 내장은 모두 같고 혈관을 흐르는 피 또한 모두 같은 붉은 색입니다. 곧 인류의 기원은 하나입니다. 지금 총을 맞대고 싸우는 남과 북은 말할 것도 없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인, 시아파와 수니파, 텔레반, IS반군, 쿠르드족, 시리아인들은 모두 한 가족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혜와 이성의 힘을 발휘하여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생각을 버리고 상생하는 길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무기도 군대도 점차 줄여나가야 합니다. 저는 가끔 국가라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회의가 자주 일어납니다. 지금 세계의 전쟁하는 모습을 보면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국심을 자극하여 이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어 놓고 권력과 무기 돈놀이에 빠져 있습니다. 인간이 겨우 백년 살다 먼지로 사라지는데, 미워하고 전쟁하다 죽음으로 생을 마치는 것은 훈장을 찬 영웅이 되는 길이 아니라 개보다 못한 어리석은 짓입니다.

 

[가나안의 축복: 손가락과 달]

 

야훼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국가라는 이름하에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모습에 혐오를 느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애굽에 있는 히브리 노예들이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자 모세를 세워 저들을 노예로부터 해방을 시켜 가나안땅으로 가서 전연 새로운 운명공동체를 만들도록 명령하십니다. 이를 위해 율법을 주었으며 이 율법을 배우고 훈련하기 위해 40년동안 광야에서 머물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많은 질문과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광야 40년도 마찬가지입니다.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광야에서 그리고 무려 2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일주일이면 건너갈 그 시나이반도 광야를 40년이나 돌아다녔다고 하는 이 이야기 속에서 성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그 핵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 얘기는 저들이 광야에서 겪은 만나 기적 이야기입니다. 만나 기적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하느님은 나에게 언제 그런 만나를 주실 것인가? 그런데 오늘 출애굽 본문에서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리라' 말씀의 손가락은 만나이지만, 손가락이 지시하는 달은 백성들이 하느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 여부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 만나의 핵심은 하루치의 양식만 거두어들이기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내일을 염려합니다. 그래서 이틀치 사흘치 할 수 있는 한 많은 식량을 여분으로 갖고 있기를 바랍니다. 돈은 바로 식량의 대체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오늘은 오늘 하루치만 염려만 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을 믿는 믿음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식량을 창고에 쌓아 주시는 분이 야훼 하느님인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몇날 며칠의 식량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하루치의 식량만 거두어들이는 그것이 바로 야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성서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출애굽의 본문 말씀은 이렇게 마칩니다. “야훼의 명령이니 저마다 먹을만큼씩 거두어 들여라. 한 사람에 한 오멜씩 식구 수대로 거두어들이면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키는 대로 하였다.” 이 후에 이어지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많이 거두어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덜 거두어들이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참으로 심오한 의미가 숨어 있는 말씀입니다. 신체가 건강한 청년은 부지런히 움직여서 많이 거두었습니다. 몸이 불편한 노인이나 임신한 여성이나 장애인들은 조금 밖에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똑같아졌다. 여러분 이걸 어떻게 이해하세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하느님이 많이 가진 사람의 바구니에서 끄집어내서 적게 가진 사람의 바구니에 넣어주었다는 것 외에 다른 해석이 가능한가요? 물론 문자를 믿는 보수신앙인은 이걸 하느님이 직접 하셨다고 말하고 좀 깨인 사람은 사랑에 기초한 연대와 나눔이라고 말을 하겠지요.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

 

요한복음의 5천명 급식기적 이야기 핵심 또한 같습니다. 공짜 빵을 먹은 군중들은 예수를 왕으로 세우고자 합니다. 인간의 기본 욕구인 먹는 문제가 해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들을 피해 가파르나움으로 돌아왔는데 거기까지 예수를 따라 왔습니다. 그러자 예수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빵에 매여,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제2의 모세로서 우리 또한 먹여주십시오.”

 

그러나 광야 만나의 핵심은 만나가 하늘에서 먹을 것이 내렸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돌아와 보니 모두 같아졌다라는 사실에 있음을 아신 예수께서는 빵을 주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 하느님이시다.”라고 기적의 참 뜻, 만나가 아닌 돌보시는 그 분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보이는 빵에 매여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어쩔 수 없이 직접화법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그러자 저들은 어떻게 사람을 먹을 수 있나 하면서 예수를 떠나갑니다.

 

마치 선문답 같은 얘기입니다만, 여성학자 정희진은 조지프 어메이트의 먼지-작은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의 역사라는 책을 읽고 나서 과학기술의 발달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게 되자 보이지 않았던 것을 통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모든 사유의 시작이다.”(한겨레 2015.8.1. 2)라는 말을 합니다만, 사실 이는 이미 이천년 전 예수의 근본 가르침이자 저자 요한의 줄기찬 주장이기도 합니다.

 

[성찬과 세족의 상관성]

 

전 여기서 5천명 급식기적 이야기의 보다 깊은 뜻을 찾아내기 위해 요한복음 신학 전체의 눈에서 한 말씀을 더 드리고자 합니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차이를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들은 공관복음서가 모두 전하고 있는 떡과 잔을 나누는 마지막 만찬 곧 성찬 제정의 얘기를 저자 요한은 제자들의 발을 씻긴 세족 이야기로 대체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요한의 실수일까요? 아니면 요한의 의도일까요? 요한은 공관복음서의 내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교회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성찬 제정 이야기를 뺀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그가 성찬식을 지키는 당시의 예수공동체에 실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실망이란 곧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비판했던 내용입니다. 예배 후 아가페라는 식사나눔 친교를 가졌는데, 부자 교인들과 가난한 교인들이 나눔 없이 그냥 자기 가져온 것 자기가 먹었고 그럼으로 인해 어떤 가난한 교인들은 굶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찬의 기본이 무엇이냐? 요한은 묻는 것입니다. 성찬의 기본은 예수의 5천명 급식 사건에 있고 그리고 5천명 급식 기적은 히브리 노예들의 광야 만나 기적 사건에 그 뿌리가 있고 만나 기적의 핵심은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같아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 요한은 하나의 종교예식으로 전락한 성찬 제정의 얘기를 빼버리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준 섬김 실천의 얘기로 바꾸었던 것이며 예수는 금요일에 희생당한 것이 아니라 목요일에 돌아가셨다고 함으로써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유대종교의 틀 안에서 축소 해석하는 것을 경계했던 것입니다.

 

저자 요한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그 자유를 예수가 보여준 삶을 따름으로 누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믿는 것이다.” “그러면 모세가 행한 기적을 보여 주십시오?” “빵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셨다.” “어찌되었든 빵을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를 믿는 믿음이란 입술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입술믿음이 아니라 티베리야 로마 황제가 말하는 세속의 성공의 길이 아닌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를 좇아가는 다른 성공의 길, 설사 그 길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지더라도 빵의 문제를 넘어서는 그래서 세속으로부터 해방을 받는 영원한 자유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성 프란치시코의 평화사상을 실천하는 일에 애쓰는 리차드 모어 신부는 그의 책 물 밑에서 숨쉬기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4세기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하느님의 본성'(벧후 1;4)으로 변화되라는, 그래서 이 땅에 '새로운 창조'(6;15)를 가져오는 깨달은 사람이 되는 일 대신에 초월적 진리 주장들, 예를 들면 예수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삼위일체시다. 마리아는 동정녀이다라는 교리를 우선시해야만 했다. 그 뒤로 교회는 어떻게 예수를 구체적으로 따를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의 통일된 제국으로서 예수를 예배할 것이냐가 중심과제가 되었다. 예수는 '나를 예배하라'고는 단 한 번도 말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도 말이다! 교황이나 주교들이 아닌 황제들이 몇 차례 교회의 공의회를 주관하였는데 그들의 관심은 언제나 예배를 통한 치유보다 제국의 통일과 지배에 있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비폭력에 대한 명백한 가르침과 단순 소박한 생활양식과 변두리 인생들에 대한 치유는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12-13쪽 한국기독교 연구소. 2015)

 

우리 모두 기적의 참 뜻을 발견함으로 신앙의 변두리가 아닌 중심에 서서 내가 곧 기적이다!’ 라고 선언하는 당당한 예수 따르미들이 되기를 바라면서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모든 일에 성공할 수 있도록

그러나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겸허함을 배울 수 있도록

 

나는 건강을 부탁했습니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허약함을 선물 받았습니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는 부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가난함을 받았습니다. 더 현명해질 수 있도록

 

나는 강한 힘을 원했습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나약함을 선물 받았습니다. 신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모든 것을 갖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삶을 선물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들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나는 하찮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