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주일 <하느님을 닮아가자>

열상 19:4-8; 34:1-8; 4:25-5:2; 6:35, 41-51

 

오늘 열왕기상 본문 말씀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아합왕과 이세벨왕후의 후원을 받고 있던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한 직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누가 참 신인가를 증명하는 시험을 했는데, 그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에 있는 동물 희생제물을 태우는 시험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은 하루 온종일 별의별 시도를 다하였음에도 실패했지만, 엘리야는 제단에 물을 흠뻑 붓고도 기도를 하자 단번에 불이 내려왔고, 이에 백성들은 이들 거짓 선지자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왕후는 분을 참지 못하고 내가 반드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선언하자 이 얘기를 들은 엘리야가 도망을 가게 되는데, 오늘 본문은 이 도피 과정 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탈진과 자기 기만]

 

하느님의 참 예언자로, 예언자의 대표로 뽑히는 엘리야가 목숨이 아깝다고 도망을 가는 모습도 좀 거시기하지만, 단지 도망을 가는 정도가 아니라, 차라리 죽여 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 물론 이런 고백이 그리 특별난 신앙고백은 아니지만, 이 고백이 바로 승리 직후에 일어난 일이라 약간은 의아해 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전후사정이 빠져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은 아닙니다만, 이 구절은 특별히 성공 이후에 찾아오는 탈진(Burn out)에 관련한 성서 말씀으로 자주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모두 경험해 본 일입니다만, 오랫동안 꿈꾸며 노력했던 일들을 이루는 순간이 있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는다든가, 사업에 성공한다든가 등등 오랫동안 노력해 일들을 이루는 성공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허탈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건 그만 기력이 다한 것일 수도 있고, 목표를 이루었다는 자아도취에 빠긴 결과이기도 합니다. 엘리야도 승리를 만끽하는 순간 자만감이 넘친 나머지 생각하지 못했던 죽음의 위협이 몰려오자 그만 극심한 탈진 현상이 일어나면서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는 극단적인 자기 포기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렇게 극단의 경우는 아니라 할지라도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탈선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들의 권력형 비리사건이나 여성문제, 인기 절정에 오른 연예인들이 마약을 한다든가 부자들이 도박에 빠진다든가 하는 것들입니다. 물론 이런 탈선행위에는 거의 언제나 술이 함께 합니다. 이는 인기 절정에 오르는 순간 찾아오는 자만심과 그로 인한 고독감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인식하는 내면의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비쳐지는 성공 모델로서의 외면의 자기 사이에서 일어나는 간격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공한 것은 내가 잘나고 똑똑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난 운이 좋았을 따름이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혜일 따름이다. 난 여전히 흠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면 문제가 안 되는데, 그만 외부 사람들의 기대와 박수소리에 빠져 난 특별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자기 도취에 빠져 그만 거짓 자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이는 종교인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대형교회 목사들이 여성문제라든가 재정문제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는 경우라든가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 등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것 또한 같은 이유입니다.

 

물론 탈진 현상은 정상에 오른 사람들에게서 쉽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요즘은 직장에서의 과도한 업무와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그 원인이 되어 사람이 무기력해지고 우울증에 쉽게 빠지면서 자기혐오를 하게 되고 이게 심해지면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시간을 일에 몰두했지만 기대한 보상을 얻지 못함으로 인한 좌절감과 패배감으로 인한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런 탈진 현상 가운데는 오히려 워커홀릭과 같이 일에 너무 빠져 있는 경우도 해당이 됩니다.

 

특히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서비스직의 감정노동자나, 전문성이 필요한 까다로운 직종인 교사나 의사 등 사회적으로 도덕적 수준에 대한 기대가 높거나, 업무상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일수록 탈진현상이 쉽게 일어납니다. 이런 현상이 심해질 경우 수면장애나 우울증은 물론이고 대인관계를 회피하는 심리 현상이 일어나 거식증이나 쇼핑병에 걸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며 생에 대한 의욕을 잃게 될뿐더러 질병에 대한 저항력도 떨어지게 됩니다.

 

[교회의 중독 현상]

 

남한의 경우 세계 십 몇 위의 높은 경제력을 이루었지만, 행복도에 있어서는 세계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고 술 소비량이 세계 1위라든가 자살률이 세계 최고인 것은 아예 남한 사회 전체가 탈진현상을 보이는 버언아웃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를 이겨내는 방식으로 휴식이나 여행이 도움을 주긴 하지만, 서구와 같이 두 달 석 달의 휴가를 가면 모를까 단 며칠 잠깐 갖다오는 휴가는 전연 문제 해결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엘리야 또한 탈진현상을 겪었습니다. 야훼 하느님의 명령을 쫓아 3년 가뭄을 선포한 이후 아합왕의 핍박을 피해 도망을 다니다가 위대한 승리를 갖게 된 것입니다. 비도 다시 오고 백성들은 모두 자기편이 되었습니다. 우쭐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왕후가 자리를 죽이겠다고 하며 군인들이 파견하자 덜컹 겁이 난 것입니다. 백성들도 권력자의 편에 섰습니다. 그래 도망을 가다가 깊은 절망감에 빠져 아예 자기를 죽여 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탈진현상의 극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도 잘못 믿으면 이렇게 잘못된 길로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채야 합니다. 지금 교회가 외치는 복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남들이 다 가는 넓은 길을 따라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입니까? 지금 교회가 어떻게 가르치고 있고, 또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방식으로 복음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아에 대한 깊은 변화가 없는 가짜 복음, 목사가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서 여러분의 입속에 쏙쏙 넣어주는 패스트푸드 종교를 믿어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종교 자체가 일주일마다 반복되고 있는 코카콜라 다른 말로 하면 나를 즐겁게 하는 하나의 쇼핑이 된 것은 아닙니까? 그리고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이러저러한 얘기들과 잡담을 하는 것이 마치 교회생활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교회마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소비 자본주의의 중독이 되었습니다. 군사제일이라는 제국주의의 중독, 내가 최고요 내가 믿는 신만이 절대라는 교회의 중독, 나는 특별하다고 하는 이기의 중독, 인기 중독, 부자 중독, 나는 이 사회의 무능한 제물이라는 패배자의 중독 등등의 중독에 걸려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자기를 똑바로 보고 자기 앞에서 솔직해지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쉽게 사랑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놓아야 하는데, 자기를 계속 거짓과 허위로 감추고 있으면서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유명한 말이 있지요.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7:15-19)

 

[영성은 더하기가 아닌 빼기]

 

이러한 자기를 드러내는 자기 고백이 진정 일어나려면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묵상이고 명상입니다. 듣는 기도훈련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요구하는 기도만 합니다. 요청을 하고나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답을 하시는지를 들어야 하는데, 자기 할 말만 다하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게 기도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힘 있는 사람을 찾아가 자기 필요한 것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이는 무례한 사람일뿐더러 뭔가를 도와주려고 하다가도 그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딱 사라집니다.

 

침묵기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봄으로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내 요구가 너무 일방적인 것은 아닌지, 너무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기도는 아닌지, 정말 거기에 맞는 실천과 행동이 따르고 있는지, 자기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분주하게 살아가면서 이렇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 침묵을 두려워합니다. 보지도 않는 TV는 항상 켜져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세요. 버스 안이든 지하철 안이든 핸드폰 화면에 푹 빠져 있습니다. 노약석에 앉아 나이 드신 할머니가 자기 앞에 서 있는데도 모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가면서도 계속 들여다봅니다. 요즘 이 때문에 교통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만있으면 불안해집니다. 뭔가 손이 움직이든 입이 움직이든 눈이 움직이든 귀가 움직이든 내 몸의 어딘가가 움직여야 합니다. 혹 침묵기도 시간 2분이 견디기 어려우신 분들, 내 안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왜 불안해하는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똑바로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은 아닌지?

 

이기라고 하는 에고의 겉모습에 치우친 나머지 내 안의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안의 실체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집착과 혐오감입니다. 영혼이 있는 사람들은 집착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바라보고 사랑하고 그리고 내려놓습니다. 성숙한 영혼의 소유자는 떠나보내기와 마음 비우기를 잘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로움에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한 듯이 영성은 더하기보다 빼기로 더욱 성장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은 새롭게 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틀 자체를 변화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틀 안에 들어오는 변화만을 찾습니다. 그건 변화가 아닙니다. 카멜리온이 겉의 색깔을 바꿔 주위에 동화하듯이 내면에 변화가 없는 거짓 변화입니다. 여기 가서는 이렇게 저기 가서는 저렇게 변화하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자기 기만입니다.

 

변화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변화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원합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자기 멋대로 살고 나서 죽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버지 집의 하이들이 자기보다 더 나은 것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아들이 아닌 하인으로 살게 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이게 진정한 변화입니다. 아들의 신분마저 포기하는 것입니다.

 

[죽음 통과와 자기 정화]

 

엘리야가 죽기를 자청합니다. 그러다가 천사들이 갖다 준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립니다. 이는 자기가 이룬 과거의 성공이 가져다 준 자기 기만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려가는 자기 정화의 과정을 통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지옥을 겁내는 사람들에 의해 종교가 살고, 지옥을 통과한 이들에 의해 영성이 산다.’ 우리가 바른 영성을 갖기 위해서는 모두 자기 죽음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형식적 종교인들은 자기 죽음의 통과없이 부활과 영생에만 매달립니다. 쉽게 말해 예수가 비난했던 바리새인들은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적인 행위에 믿음이 달려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예수와 같이 광야의 훈련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엘리야가 경험하는 것이 광야의 훈련입니다. 침묵의 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얘기는 이렇습니다. “엘리야가 한 동굴에 머물러 밤을 지내고 있고 있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예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 하느님을 배반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이고 이제 저만 남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을 따르는 7천명이 더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엘리야에게는 그게 안 보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동굴 밖으로 나와 산 위에서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흔들고 바위를 깨뜨렸음에도 그 안에 야훼는 계시지 않았고, 지진이 일어났음에도 그 안에 계시지 않았고 큰 불이 일었음에도 그 안에 계시지 않았고,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려왔는데, 거기에 야훼께서 계셨다고 말합니다.

 

[조용하고 여린 소리]

 

여기서 조용하고 여린 소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는 이는 내면의 목소리라고 이해합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 저 깊은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 여섯 명 속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행복과 자기 기쁨의 영성 그건 자기 밖이 아닌 자기 내면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나 그리심산 성전을 찾아갈 필요가 없이 사제나 율법학자의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이 스스로 하느님을 만나 자기 안에 우물을 만들어내는 영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 내면의 소리를 자기 에고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에고는 불안하기에 언제나 강한 바람과 큰 지진과 큰 불길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우물이란 어떻게 말하면 사도 바울이 말한바 자기 약함 안에서 발견되는 하늘의 강함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의 강함이란 조용하고 여린 소리곧 하느님의 마음이 거하는 곧 약자의 고통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소리는 고통 중의 신음하는 소리입니다. 엘리야는 여기서 보이지 않는 백성들의 고통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고 하느님은 여기서 새로운 인간 역사를 펼쳐나가기 위해 엘리야로 하여금 시리아의 왕으로 하자엘을 기름 부어 세우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아합의 가문을 깨트리고 새로운 역사를 일으킬 예후를 기름 부어 세우게 됩니다.

 

오늘은 남북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평화통일 주일입니다. 저는 처음 우리 사회 자체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행복도와 가장 높은 자살률과 술 소비량을 언급하면서 거대한 탈진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건 분단입니다.

 

[상대 칭찬은 자기 성숙의 표현]

 

분단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나라가 둘로 갈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를 비난한다는데 있습니다. 상대를 욕하는게 남북정부의 일상이 되었고, 하루라도 남북이 적대하는 용어가 언론에 나오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북을 전멸하는 전쟁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욕하는 일에 식상할만도 합니다만, 끊임없이 서로를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그러하듯이 이건 제 책임이 아닙니다 하듯이 말입니다. 지난 60년동안 제가 태어나면서 한 번도 서로를 칭찬하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아무리 못난 사람도 몇 가지는 잘하는게 있지 않습니까? 남과 북이 문제가 많은 나라이지만, 그래도 세계에서 남한이 잘하는 것도 있고 북이 잘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남의 어느 언론도 북을 칭찬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잘한 건 잘했다고 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축구에서 북이 승리했으면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등도 두들겨주고, 상대를 칭찬해줄 때에 자신 또한 행복해지는 것 아닌가요? 물론 북을 만약 칭찬이라고 할라치면 국가보안법 찬양고무죄에 걸립니다.

 

이희호여사께서 북을 방문하고 돌아온 자리에서 이런 분단을 후세에는 남기지 않도록 하자고 했는데, 우리가 이렇게 서로 욕하고 비난하는 일은 남겨주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행복도 최저 국가, 자살률 최고 국가를 우리 자녀들이 계속 이어가도록 해야 할까요? 서로 비난하지 말자고 이미 1972년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 남북정부가 약속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노무현정권 10년을 제외하고 지난 40년 이상 비난을 하여 온 것입니다. 이제는 칭찬하지는 못하겠거들랑 비난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있는 대로 전하면 되잖아요. 그러나 지금까지 남은 간첩단을 조작해서라도 비난하는 일을 계속하여 오고 있습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무조건 북이 했다고 말합니다.

 

[한반도 표준시]

 

북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제 잔재 청산 차원에서 현재 일본 동경 기준인 135도의 표준시를 한반도 기준인 127.5도에 맞춰 30분 늦춘다고 밝혔는데, 남한 언론 어디에서도 이를 잘했다고 하는 내용은 없고 모두 정부 의견을 좇아 비난 일색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남한에서도 국회의원들이 2000년과 2008년에 빼앗긴 표준시를 찾아오자”, “한국인의 생체리듬에 맞게 변경하자며 법안을 제출했으나 통과되지 않았던 일이고 올해 국회에서도 조명철 새누리당 의원 등 37명이 일본 제국주의 잔재를 벗어나자며 다시 법안을 제출해놓은 상태였습니다. 결국 북에게 선수를 뺏긴 남이 자조적으로 하는 비난에 불과한 일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는 자기 에고를 드러내는 조잡하고도 째재한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가 일본에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까지는 127.5도의 표준시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표준시란 그 나라의 중심에 해가 정중앙에 떠있는 것을 말하는데, 현재까지 남북의 표준시는 동경에 맞춘 것이기 때문에, 해가 1230분에 정 중앙에 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표준시에 의하여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 이전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일본과 달리 30분 차이를 두는 것은 매우 당연한 조처입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15년동안 우리는 일본 동경에 맞춘 표준시가 아닌 30분 차이가 나는 서울표준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이 서로 다른 표준시를 갖고 있음으로 인해 불편이 있으니 이를 동경표준시에 맞춰달라는 미국의 요구에 의해 바뀐 것입니다. 이승만정권 시절에도 당연히 미군은 주한미군이 주일미군 사령부 지휘 하에 있었으니 주일미군에 맞춘 시간대 변경을 요구했지만, 민족 자존심을 걸고 이를 거절했지만, 박정희는 이미 스스로가 일본 천황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했던 사람인데다가 쿠데타를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기위해서 이를 변경했던 것입니다.

 

한반도 표준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국방부가 얘기하듯이 미군 작전에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외교부는 경제체제상 각종 혼선 및 비용이 발생한다는 이유로 통일부는 남북 교류, 남북 동질성 회복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전혀 억지에 불과합니다. 한 나라라 하더라도 미국과 러시아와 같이 몇 개의 서로 다른 표준시를 갖고 있는 나라도 있고, 중국과 같이 국토가 넓어도 하나의 표준시를 갖고 있는 나라도 있습니다. 전 미국이나 러시아나 중국이 표준시 문제로 경제나 군사에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표준시를 한 시간 단위가 아닌 30분 단위로 하기 때문에 문제라고 말하지만, 지금 세계 나라들 가운데서 한 시간 단위가 아닌 표준시를 갖고 있는 나라가 인도, 네팔, 미얀마, 이란 등 15개국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나라들은 30분 단위가 아닌 15분대 혹은 40분대의 표준시를 갖고 있는 나라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런 나라를 여행하면서 의아해했지만, 일단 시계만 돌려놓으면 아무런 불편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북쪽이 먼저 표준시를 바꿔버렸으니 남쪽은 바꾸고 싶어도 자존심 때문에 바꾸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만, 정권 자존심보다는 민족 자존심이 더 중요하니 지금이라도 일제와 미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민족 자존심과 남북의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표준시 변경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오늘의 사도 바울의 말씀으로 마칩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하느님을 닮으시오라고 말한 사도바울의 말이 너무 지나친 말인가요? 우리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느님을 닮을 수 있을까? 하느님을 닮는다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아닐까요? 저는 여기서 아버지와 나와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요한복음 말씀에서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 하나되기를 원하고 하느님 닮기를 소원하며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이제야 알겠다. 새벽은 열리는 것이 아니다. 짙은 어둠이 이슬로 맺히는 힘겨운 싸움이 끝나고서야 새벽이 지친 눈빛으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이다. 새벽의 사투가 끝나면 태양이 떠오르고, 사람들은 태양의 눈부심만 기억한다. 눈물처럼 쏟아내던 이슬을 기억하지 못한다. 조용하고 여린 소리 속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이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