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는 길

잠언 9:1-6; 시편 34:6-14; 에페 5:15-20; 요한 6:51-59     

조 은 화 목사

성가대를 대신하여 찬양으로 함께 해주신 희청, 청신, 새청의 청년들과 청년남신도회의 나집사님, 두 분의 목사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청년찬양 준비 시작단계부터 편곡과 노래지도로 수고하신 심예원 교우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오늘 노래 상록수하면 어떤 나무가 떠오르세요? 저는 소나무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소나무의 영어표기를 아시는지요. 영어로는 제페니즈 레드 파인(Japanese Red Pine)입니다. 서식지가 한반도인데도 일본 표기로 서양에 알려지면서 붉은 일본 소나무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소나무 외에도 4천백여 종의 영문 이름에 외국 지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국립수목원은 우리나라 자생 식물의 영문 표기에 일본등 다른 국가명이 들어간 식물 이름을 새로 정리한다고 밝혔습니다. 분명히 한국에서만 자라는 독특한 식물들임에도 제페니즈를 붙인 영어식 표기로 불려지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올해로 광복70돌을 맞습니다. 어제는 광복절을 맞아 분주하게 평화통일을 위한 시위와 모임으로 많이들 함께 하셨을 것입니다. 나라가 해방된 지 70!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일제청산이 완전히 이루어졌습니까? 박근혜씨 일가를 통해서도 아시겠지만 일제치하시절 일본 압잡이 노릇을 하며 권력을 탐하던 친일세력이 해방이후에 그대로 힘을 갖고 떵떵 거리며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봅니다.  

광복70돌에 대해서 KBS 이사장 이인호씨가 지난 13일 언론 기고를 통해 광복은 1945년이 아니라 이승만 정부 수립해인 1948년으로 해야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1945년을 중심으로 친일과 독립운동가라는 구도가 아닌 1948년의 좌익과 우익 구조로 바뀌게 되어 친일파 문제가 묻히게 됩니다. 역사의 초점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지요.  

지난 일본 방송을 통한 박근혜 씨의 동생 박근령 씨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1960년대 한일 국교정상화로 경제재건을 이룬 만큼 일본에 보상요구를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우리가 위안부의 그 여사님들을 더 잘 챙기지 않고 자꾸 일본만 타박한 뉴스만 나간 거에 대해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그런 뉴스가 나가기를 아주 좋아하는 세력들과 우리가 지금 맞서 있다. 한국 국민들은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주시고, 우리 한국을 많이 사랑해주시길 바라고, 일본 국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라고 고개숙이며 인사하는 박근령 씨의 모습 속에서 일본의 왕을 천왕이라며, 더 이상 과거사에 사과할 필요 없다. 박근혜대통령이 못하는 얘기 내가 대신하는 것이라며 하는 말은 참담함 그 자체였습니다. 친일파 자손은 대통령도 해먹고 헛소리를 해도 떵떵거리며 잘사는데 나라의 독립을 위해 통일을 위해 일하는 이들의 삶은 왜 그리 어렵고 험난한 것일까요? 

600만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했던 아돌프 아히히만의 사형사건을 포함하여 유럽에서는 지금도 2차 대전 중에 저질러진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해 전범을 잡아 법정에 세우고 있습니다. 허나 우리는 버젓이 사람을 죽이고 득세하는 친일파가 존재함에도 아무런 제지도 힘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악이 늘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것 같은 이 시대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살아야 할까? 자포자기 하고 싶은 마음, 계속되는 싸움 속에서 치이기만 하는 약자들의 삶을 보며 힘겨운 싸움의 중심에 무엇을 기대고 살아야 하는지 고민해 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지금의 자리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길을 안내해 줍니다.

 

[슬기로운 길]  

오늘의 잠언서 본문은 이집트 지혜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지혜는 세상의 질서나 훈계 가르침을 의미하기 보다는 오히려 패역한 이스라엘에 필요로 하는 구원자로 등장합니다. 잠언서 1장에서 9장은 전체의 서론 역할을 하는데, 다양한 여성의 이미지를 통해 내용을 전달하는 독특한 전개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인 잠언서 91-6절에서 의인화된 지혜는 생명을 공급하는 이로 등장합니다. 구원자요 생명을 주는 지혜는 야웨의 구원사역을 담당하는 주체로서 등장하여 지혜 없는 자들을 불러 모아 생명에로 인도합니다  

지혜가 일곱 기둥을 세워 제 집을 짓고 소를 잡고 술을 따라 손수 아주 큰 잔치를 베풀며 미련한 자들을 생명축제에 참여하라고 초청합니다. 그리고 이것과 대조적으로 배우지 못한 자들을 죽음에 이르는 축제에 참여하라는 유혹이 함께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은 초기 페르시아 시대에서 유대 전승과 이방인 문화 사이의 갈등을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시된 두 길,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무시할 것인가에 따라 생명과 죽음의 길이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식민시대를 살면서 이스라엘을 몰락시킨 강대국의 사악한 힘을 혹여 배울까하는 염려가 깔려 있습니다. 강대국에 의해 포로 생활을 경험한 유대백성들에게 있어 그들과 같은 힘을 갖게 되는 꿈이야 말로 거짓되고 허망한 것이다는 것을 공동체에게 알려주고자 합니다. 이 경고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지혜의 길로 가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복되게 살려거든 철없는 짓을 버리고 슬기로운 길에 나서라.” 그 슬기로운 길을 간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길로 가는 구체적인 사건은 우리가 어떻게 경험하고 만나야 할까요?

[성찬예식 VS 디오니소스제의]  

오늘 요한복음 6장 본문은 우리에게 몸과 피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공동체 안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와는 다르게 나타내고 있는 성찬례와 같은 이 본문은 당시 디오니소스제의에서 가져온 듯 합니다.  

나의 살은 빵이다.” 라는 것은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바울과 공관복음의 표현과는 다른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한의 성찬은 그리스-로마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것은 유월절 식사 전통에서 있는 공관복음서나 바울의 기록과는 대조적입니다. 여러 가지 디오니소스의 특징 중에서 포도주와 식인의식은 요한복음서의 성찬과 아주 관련이 깊습니다. 요한은 디오니소스의 모델을 따라 기록하였는데 디오니소스의 제의에서 행하는 날고기를 찢어 먹는 의식인 식인풍속의 형태를 취합니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와 황홀경의 신입니다. 예로부터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와 관련된 기적을 행한다고 간주되었습니다. 숭배자들은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디오니소스 신 자체를 자신 안으로 받아들인다고 믿었습니다. 술을 마시면 신이 인간에게 들어와서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디오니소스 술잔치의 절정은 소의 생살을 조각조각 뜯어서 그 생살을 먹는 의식입니다. 그 찢겨지고 조각난 동물의 살은 신의 성육신으로 간주되어 숭배자들은 피가 흐르는 살을 먹는 예배적 행위가 생생한 디오니소스의 힘을 먹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의에 사용된 가장 흔한 동물은 황소였는데 그 이유는 황소가 고대 문헌에서 디오니소스의 현현이라고 묘사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공동체는 유대교 뿐만 아니라 헬라화된 유대 사회 속에서 당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그리스-로마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켜 왔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유대교와 그리스 로마와 비교할 대 초대 기독교는 소수자였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디오니소스에 대한 모방과 변형, 경쟁을 통해 예수를 보다 나은 디오니소스로 묘사하는 것은 종교가 취할 수 있었던 하나의 효과적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빵: ]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 로마 시대에 나타나는 부정적인 식인주의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식인주의와는 다르게 요한복음서는 새로운 식인주의를 두드러지게 나타내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합니다. 고대문학에 나오는 부정적인 식인풍속의 묘사와 달리 요한은 디오니소스가 다른 사람의 생살을 먹는 대신 예수가 자신의 살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냅니다. 식인풍습을 긍정적으로 재평가 하여 요한의 성찬에 적용합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서가 대신 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51절후반부에 나오는 살아있는 ’, 이것은 디오니소스제의의 식인주의 풍속을 차용하지만 실제 다른 점이 있는데 생살을 뜯어먹는 행위는 예수자신의 희생적인 죽음을 강조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살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자신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만지게 하였고 예수 자신의 살이 그들의 이빨 사이에서 씹혀지게 하여 그를 받아들여서 그들의 예수에 대한 사랑을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54절에 트로곤이라는 독특한 용어사용에 집중해보자면. 마태복음에서 한 번 요한복음에서 여섯 번을 사용합니다. 그 중 네 번이 6장에서 쓰여졌습니다. “소리를 내면서 우적우적 씹어 먹다. 갉아먹다. 물어뜯어 먹다.”의 의미를 가진 트로곤이란 용어는 디오니소스 제의에서 살을 먹는 행위로 자신의 성찬을 설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증거입니다.  

살과 피가 동시에 나오고 그것을 동시에 먹는 것은 디오니소스 제의에서 하는 것처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을 먹을 때만 가능합니다. 살과 피는 생명 즉 사람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 살과 피는 예수 자신이었습니다. 이것을 먹고 마시는 행위는 오로지 완전하게 인자를 받아들이고 그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식인언어는 당시의 영지주의와 가현설에 대응하기 위해 더 부각되어 사용했을 법도 합니다. 

요한복음 656절은 자신의 살을 먹고 자신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는 그 사람에게 거하여 그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공동체의 연합을 뜻합니다. 죽은 빵으로서의 만나가 아닌 살아있는 빵인 살을 뜯어먹는 현재적 사건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요한공동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공동체야말로 나의 희생과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숨을 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몸을 직접 먹듯이 자신들도 그렇게 먹임의 주체가 되어가는 공동체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지혜]  

당시의 에페소는 터키에 위치한 소아시아 에게 해 연안에 있는 도시로 고대 그리스의 아태네에 의해 건립된 식민도시입니다. 식민지 역사에도 불구하고 자리의 이권상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축된 웅대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제국 시대에 건축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물인 도미티아누스 신전으로도 유명합니다  

에페소를 향한 바울로의 권고는 이렇습니다. 빛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촉구하는가운데 그리스도교적 실존의 위협을 의식하게 하였고 에페소의 문화, 종교적으로 어둠의 침입에 대해 힘을 다해 저항하라고 공동체를 향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공동체 모임에서 술에 취하는 것, 술에 의지하는 삶을 경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술에 취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닌 다른 무엇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나를 보여주기는 어렵습니다. 분명 에페소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술에 취한다는 것은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기보다는 무엇인가에 의지하는 삶으로 산다는 것, 즉 그것이 술 이상의 의미로는 부의 휩쓸려 돈과 힘에 의지하는 그들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지금의 박근혜 정권이 무엇에 취해있습니까? 우리가 왜 박근혜공주님이라고 이야기할까요? 현 정권은 힘과 권력에 이미 취해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본모습을 나눌 힘도 없고 그래본 적도 없는 이들이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사람과 마음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독재는 더 강화되고 소통이 부재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오늘 본문은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 무엇에 취해있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공동체가 살기 위해서는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요?

 

[함께 가는 길]  

요한복음의 빵은 곧 예수라 합니다. 모세의 빵은 이제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빵은 사람을 배불리긴 하나 생명을 대중 자신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생명의 권한을 누가 장악하느냐로 다가갈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빵, 그 생명의 빵은 다른 것을 차용하는 것이 아닌 예수 자신이었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혹여 우리 공동체가 가고 있는 평화를 위한다는 걸음이 고통 받는 이의 시선에서 이야기하기 보다는 고통을 거래함으로써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부류의 이야기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은가 조심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를 살리고자 함께 평화의 길을 간다고 하지만 정작 함께 나누는 빵이 남의 빵으로 나눠지거나 그저 배만 불리는 것으로서의 빵으로 멈춰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그 귀한 생명의 빵을 받아 또다시 내 자신을 나누어 주어 공동체를 살리는 삶, 내가 찢겨 누군가의 입으로 먹임이 되는 삶에는 바로 거기에 공동체가 서고 함께 평화의 걸음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청년들이 부른 노래는 상록수입니다.

저들의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붙들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라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말라고 땀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되리라...”  

이 노래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생전에 자주 부르던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곡을 만든 김민기 씨가 노동현장에서 운동을 할때 노동자들이 결혼할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리게 되는데 이 때 상록수 노래를 만들어 직접 불러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 우리의 현장에서는 투쟁의 노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늘 푸를 수 있는 마음을 담아 끝내 살아가자는 다짐이 담겨 있어 우리 모두에게 힘을 내게 해줍니다. 공동체를 향해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삶 가운데는 힘이 있습니다.  

요즘 뜨는 암살이란 영화로 김원봉 등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이 다시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관순 외에 알려진 바가 없었던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묻혀있었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재발견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봅니다. 그들의 목숨을 내놓는 헌신적인 투쟁이 있었기에 함께하는 공동체를 살리고 오늘날의 광복 70돌을 맞이하게 된 것이지 않을까요  

지난 812일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에서 80대의 최현열 씨가 분신을 시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최현열씨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로 해방 직후 좌익운동과 관련된 부분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광복70주년을 앞두고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역사적 진실마저 부정하는 아베정부의 역사왜곡에 항거하기 위해 분신이라는 극한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이기까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애쓴 그 마음을 느껴봅니다 

제가 오늘 하고 나온 스톨은 존경하는 목사님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여기에 두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떡이 담긴 그릇, 다른 하나는 피가 담긴 잔의 그림입니다. 스톨에 새겨진 두 그림을 보면서 공동체를 향한 예수의 정신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광복70! 이제 우리는 평화통일의 길로 더 가려합니다. 그 가는 길은 이념도 권력도 아닌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의 빵으로 가는 길입니다. 생명의 빵인 주님의 몸을 함께 먹고, 나의 몸도 내어 놓을 때 공동체는 힘을 내어 살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가 가는 길에는 끝내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