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830() 하늘뜻펴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이사야 35:1~10, 시편 89:1~4, 베드로전서 1:22~2:3, 마르코 9:33~37)

 

김윤정/박세라/차민호

 

[몸과 지혜가 자라는 향린 어린이: 유아/유치부 하늘뜻펴기, 루가복음 2:52]

김윤정(유치부 담당 교육전도사)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유치부 김윤정 전도사입니다.

이 시간 유아, 유치부 어린이들과 같은 마음으로 함께 말씀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준비 되셨나요? 출발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맞아요~ 이것은 씨앗이예요. 씨앗이 쏙! 땅속에 심겨졌어요.

씨앗은 캄캄한 땅속에서 무서웠어요. 하지만 멋진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땅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용기를 내기로 했어요. “영차! 영차!” 씨앗은 뿌리를 땅속으로 쭈욱~ 뻗어서 냠냠 짭짭 맛있는 영양분을 먹었어요. 얼마 후 씨앗은 새싹이 되어 쏘옥~ 땅위로 고개를 내밀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은 뜨거운 햇볕에 아이 뜨거워~ 너무 덥다~ 목말라~”

어느 날은 주르륵 주르륵 비가 내려 아이 차가워~ 너무 춥다~” 새싹은 너무 뜨거워서 또 너무 추워서 피하고 싶었지만 멋진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뜨거운 햇볕도 차가운 비도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꾹 참고 잎을 더 활짝 벌렸어요. 그랬더니 새싹은 쑥쑥 자라서 주렁주렁 열매가 달린 멋진 나무가 되었어요. 그때였어요. 멀리서 배가 고파서 힘들어하는 동물들의 소리가 들려왔어요. 나무는 나에게 맛있는 열매가 있어요~ 내가 나누어 줄게요!” 하고 말했어요. 동물들은 나무에게로 왔고, 열매를 맛있게 나누어 먹고 모두가 행복해졌어요. 그 후로도 나무와 동물들은 사이좋게 서로 도와주며 행복하게 살았어요.

우와~ 씨앗이 참 멋지다. 그렇죠?

그런데 성서에 보면 씨앗이처럼 힘든 일들을 씩씩하게 이겨내고, 쑥쑥 자라면서 점점 더 멋져지고,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으신 분의 이야기가 나와요. 누굴까요? 맞아요!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예수님도 처음에는 작은 아기였어요.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 말씀도 열심히 배우고, 엄마 아빠 말씀도 잘 들으면서 점점 멋지게 자라서 어른 예수님이 되었어요.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어요. 예수님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 예수님이 친구가 되어주신 사람들은 행복해졌어요.

그런데요 우리 친구들, 예수님이 처음부터 이렇게 멋지셨나요? 맞아요! 예수님도 처음에는 작은 아기였어요. 우리 친구들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점점 자라난 거예요.

우리 친구들은 점점 더 멋진 사람이 될 씨앗과 새싹과 나무예요. 그중에서도 말씀을 배운 씨앗이고 새싹이고 나무예요. 그럼 우리가 말씀을 배우지 않은 씨앗과 새싹과 나무와 같으면 될까요? 우린 말씀을 배웠으니까 배운 만큼 더 멋진 씨앗과 새싹과 나무가 되어봅시다. 그래서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올바른 일을 씩씩하게 해내는 예수님 닮은 멋진 향린의 어린이들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처럼! 할 수 있겠어요? 좋아요!

! 그럼 배운 말씀을 잘 기억하고 지킬 수 있도록 말씀을 몸에 붙여 볼까요?

 

예수님처럼 어려운 친구들을 찾아내는 멋진 눈! !

예수님처럼 어려운 친구들의 소리를 들어주는 멋진 귀! !

예수님처럼 어려운 친구들을 도와주는 멋진 입! !

예수님처럼 어려운 친구들에게 나눠주는 멋진 손! !

예수님처럼 어려운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멋진 발! !

예수님처럼 어려운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 !

 

이 멋진 눈과 귀와 입과 손과 발과 마음으로 우리 모두 몸과 지혜가 자라면서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멋진 향린의 어린이! 멋진 향린의 씨앗과 새싹과 나무가 됩시다!

우리 어린이들이 이런 멋진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깍두기를 찾습니다!: 어린이/청소년부 하늘뜻펴기, 마르코복음 9:33~37]

박세라(청소년부 담당 교육전도사)

 

안녕하세요. 오늘, 어린이부와 청소년부의 하늘뜻을 펴는 박세라 전도사입니다.

깍두기를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마르코 복음 933~37절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함께 하는 향린의 성인 교우님들도, 이 시간 어린이 된 마음으로, 그리고 푸른이 된 마음으로 함께 하길 소망합니다.

 

콩을 기르는 데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콩나물로 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콩나무로 키우는 것입니다. 콩나물은 햇볕이 들지 않는 응달에서 물만 주며 키우는데, 콩 속의 생명력이 죽어가면서 콩나물이 자라게 됩니다. 한편, 콩 나무는 콩을 땅에 심고, 싹이 나와서 자라기 시작할 때, 이 싹을 조금만 보살펴 주면, 스스로 땅 속의 자양분을 흡수하여 수십 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의 교회교육이 콩나물이 아닌 콩나무 키우는 교육이 되어 어린이들이 저마다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워서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게 하고, 주어진 현실을 복음의 가치로 보게 해주고, 공동의 선을 위해 역사를 새롭게 바꾸어 가도록 삶과 의식을 일깨웠으면 합니다. 특히 향린이라는 이름처럼 향기 나는 이웃이 되자는 향린의 신앙의 전승이

교회학교의 유아’, ‘유치’, ‘어린이’, ‘푸른이들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사랑과 기도로 함께 가꾸고, 키워 주시길 소망합니다.

 

우리 어린이들~ 그리고 교우 여러분! 제가 짧게 노래 한 소절 불러보겠습니다.

아마 한번쯤 들어들 보셨을 것입니다.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 박기, 망까지, 말 타기,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참 익숙한 노래지요? 이 노래는 예전 개그콘서트에 마빡이라는 코너가 시작할 때 흘러나오는 노래여서 많은 사람들이 제가 부른 딱 요만큼은 어느 정도 알 것이라 여겨집니다. 저는 실제로 이 노래 가사처럼, 어린 시절 골목에서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 박기를 하며 놀았습니다. 그 당시는 방과 후에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고, 지금처럼 PC방이 보편화 되지 않을 때고, 당연히 스마트폰도 없을 때라 주로 아이들은 학교 끝나고 직장에 가신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 까지, 동네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골목놀이를 주로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런 골목놀이에는, 놀이의 배테랑인 고학년 언니·오빠·누나·형들이 있고,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저학년 동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주목 할 만 한건, 놀이를 할 때 항상 깍두기가 존재 했다는 것입니다. “깍두기는 양편의 인원수가 맞지 않고 한 사람이 남았을 때, 그 한 사람을 깍두기 시킵니다. 또 놀이가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나 또래보다 약간 어린 친구들을 그 놀이판에 끼워서 같이 놀기 위해 깍두기로 정하여 함께 놀기도 합니다. 놀이판에서 깍두기는 분명 약자입니다. 그러나 그 약자인 깍두기는 소외 되지 않고 함께 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마르코 복음에서 약자인 어린아이를 소외시키지 않고 깍두기로 공동체와 함께 하도록 품으시는 예수님을 살펴보려 합니다. 마가복음 9:33-37, 그리고 10:13~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축복하시고 사랑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무엇을 의논하고 있었느냐?” 무엇을 가지고 논쟁하였는지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아마 짐작하건데, 그들이 서로 논쟁을 벌일 때, 그들은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이며 싸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일순간 제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며 할 말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언성을 높이며 싸웠던 주제는 누가 크냐?’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서 첫째가 되고자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기준이 되는 것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두 팔로 가슴 가득 따뜻하게 안으시며,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린아이는 사회적 지위와 법적 권리가 없었고, 어린아이는 그 당시 사람 숫자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어린아이는 독립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그래서 더욱 타인의 도움과 보호와 양육이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시 사람들이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어린아이를 영접하시는 모습을 손수 보이심으로 자신의 뒤를 이을 제자들도 그대로 행하길 촉구하십니다. 마르코 복음 속 어린아이는 그 시대 미숙하고, 낮고, 작은 자로서 깍두기가 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예수님은 그런 어린아이를 섬김의 대상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37절 말씀에 받아들이는 것의 의미, 저희 청소년부가 사용하는 새번역에는 영접이라고 표현되는데요, 영접하는 것의 의미는 매우 친절하게 환영하는 것, 환대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구약 시대부터 고아와 과부를 돌보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그네 된 자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셨고, 나그네를 사랑하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따라서 아무런 힘도 없고, 권세도 없는 사람을 환영하고 영접하는 것, 따뜻하게 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의 척도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오늘 향린 교회가 신앙의 전승을 교회교육으로 이어가는 이 때에, 우리에게 요구되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낮고·작은 자로 대표되는 어린아이가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것을 막아서지 않고, 따뜻이 품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향린교우들이 우리 교회학교 어린이들을 막아서 무리 가운데 나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깍두기의 형태로라도 함께 하도록 이끌어 주고, 품어 줄 때, 우리 어린이들은 그 안아줌의 경험으로 인하여, 또 다른 약자를 품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 약자인 깍두기는 자라서 놀이의 베테랑이 되어, 또 다른 낮고 약한 이를 깍두기로 참여시켜 신나고 즐거운 놀이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하는 푸른이들에게 특별히 한 가지 더 나누고 싶은 말씀은, 지난주 청소년부 예배 때 우리는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살펴보며 청소년부 공동체 밖으로 잃어버린 양된 푸른이를 되찾고, 청소년부 안에 있지만 그 존재가 약하고 미미하여 우리가 놓쳐버린 잃은 드라크마 된 푸른이를 되찾으며, 청소년부가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의 손과 어머니의 손으로 따뜻이 품어주는 비유 속 탕자의 아버지처럼, 되찾은 푸른이들과 함께 기쁨의 축하 잔치를 열었으면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제는, 향린 공동체에서 낮고, 작은 이, 깍두기 된 이들인 우리 푸른이들이 향린교우들의 안아줌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 청소년부 안에 또 다른 깍두기를 찾아 품어 주었으면 합니다. 한편, 오늘의 제목처럼, 우리 푸른이들 또한 깍두기를 찾아 나섰으면 합니다,” 매주 함께 예배할 때, 함께 들살이를 할 때, 함께 낮꿈을 진행할 때, 그리고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우리와 함께 할 깍두기를 찾는 푸른이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더불어, 청소년부의 모든 깍두기들에게 전합니다. 베테랑처럼 완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부디 스스로 깍두기조차 하지 않으려고 숨거나, 피하거나, 관심조차 두지 않는 모습 보다는 다 같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우리의 깍두기가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차민호(어린이부 담당 교육전도사)

 

본 복음서 본문은 대부분의 교회가 매년 어린이주일이나 교회교육주일에 선택하는 복음서 본문중 하나입니다. “예수님도 아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아이들을 사랑하세요. 교회학교 아이들은 소중합니다.” 등의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 조금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바로 주일학교를 이루고 있는 아이들, 이 아이들이 어떤 존재냐, 하는 이야기를 성서를 통해 나누고자 합니다. 향린에서는 청소년부 친구들을 푸른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주일학교 대부분을 이루는 친구들을 우리는 어린이라고 부릅니다. ‘어린이라는 말은 나이가 어리다라는 뜻도, ‘어리석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리석다는 뜻에서 어린이들은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나누게 될 이야기는 적어도 이 어리석다는 뜻과는 정 반대입니다.

 

여러분은 천도교라는 이웃종교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어린이날 제정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분도 알고 계실 겁니다. 소파 방정환선생입니다. 그는 천도교인이었으며 천도교 3대 교조 의암 손병희 선생의 사위이기도 합니다. 천도교 경전 중 하나인 해월신사법설에는 어린이가 한울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이를 때리는 건 한울님을 때리는 일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한울님은 우리가 말하는 하느님과 같습니다. 방정환 선생 역시 자신의 글 어린이 찬미에서 어린이는 대우주의 순수성을 지닌 한울님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어린이는 큰 우주의 순수성을 가진 하느님이다. 곱씹을수록 참으로 대단한 표현입니다. 한울님이나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존재, 신입니다. 따라서 이 말들은 어린이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이 됩니다. 정채봉 동화작가는 동심이 세상을 구원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어린이 마음이 세상을 구원한다니, 이 말도 결국 위의 말들과 비슷한 말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에는 뭐 비슷한 말이 없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행히 예수님도 비슷한 말을 하셨습니다. 없었다면 아마 저는 그리스도교인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 읽은 성서 본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복음서를 돌아봅니다. 언제나 그렇듯 사내들은 누가 높은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예수님은 화가 났고 급기야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게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천도교의 말과 비슷합니다. 많은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오해하듯 이를 어린이처럼 순수하면 천국에 간다.’ 정도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지금과 2000년 전은 어린이를 보는 눈이 전혀 달랐습니다. 요즘이야 어린이는 최우선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물론 잠시 후 다시 이야기 나누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분명 어린이가 살아가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래도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고, 대부분 사람들이 어린이는 소중하다.”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옛날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어린이라는 말은 사실 아주 나중에 생긴, 발명된 말입니다. ‘어린이어른과 구별되어 사용된 건 근대 이후입니다. 중세까지 어린이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그 시대 가족은 일하는 단위였습니다. 가족은 모두 일을 했습니다. 만들고, 먹고, 쓰고, 모든 것을 가족 안에서 해결 했습니다. 당연히 어린이도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어린이는 그저 모자란 사람, 일을 잘 못하는 사람, 생계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시대처럼 더 옛날, 고대는 어땠을까, 물론 더 안 좋았습니다. ‘어린이는 그저 사람이 아닌, ‘사람의 재료였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서 본문의 예수님 말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이를 껴안았다면 사람도 아닌 존재를 껴안은 것이고, 그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게 자신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했다면, 그건 사람도 아닌, 별 볼일 없고 하찮은 존재를 받아들이는 게 하느님을 모시는 일과 같다는 말입니다. 예수 앞의 그들은 세상 일 중 하느님을 모시는 게 가장 귀하다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린이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게 가장 귀한 일이라고 말한 셈입니다.

어린이란 존재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예수님 주변에서도 신경조차 안 쓰는, 그야말로 어른들의 세계 바깥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어린이를 사람들 가운데 세우고, 껴안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껴안았다는 표현은 마르코 복음에만 나옵니다. 마르코 복음을 토대로 쓰인 마태오와 루가복음의 평행본문에 이 표현은 의도적으로 삭제되어 있습니다. 어린이를 사랑하신 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니 삭제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이 어린이를 껴안았다는 것이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의 저자는 적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이건 좀 너무하네.”하는 마음에서 해당 표현을 삭제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시대입니다.

 

이 같은 시대에 예수님은 왜 그렇게도 어린이를 사랑했을까, 어린이가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어른이 어린이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 이것이 궁금해집니다. 물론 눌린 자, 아픈 자를 사랑하는 예수님이시니 당연히 어린이도 사랑하셨겠지만 뭔가 어른보다 나은 점이 있으니 이런 말들을 하셨을 것이고, 성서에 남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예수님의 말은 아니지만 오늘 우리가 나눈 다른 서신서 본문인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 그 한 답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첫째 편지는 일반적으로 베드로의 이름이 가진 권위를 빌려 익명의 저자가 주후 70년에서 90년 사이에 쓴 회람서신으로 봅니다. 글이 쓰인 당시는 국가차원의 박해사 이루어지기 전이라 본 서신에서 다루는 주제는 지극히 신앙생활을 하며 겪는 일반적 어려움에 대한 것입니다. 해당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용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사람은 얼마 못살고 죽는데, 하느님 말씀은 영원하다. 그러니 그 말씀을 잘 듣고 살아라. 그러면 사람이 변해서 거듭나고, 마침내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된다. 이런 내용입니다. 근데 여기서 지나치면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찾는 마음가짐입니다. 그 마음가짐을 본문에서는 갓난아이가 젖을 구하듯이라고 합니다. 갓난아이는 엄마의 맛있는 젖을 저절로 찾고, 맛을 보고, 또 계속 찾습니다. 아이는 그 젖이 자기를 살게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없으면 죽는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울기도 합니다. 아이에게 엄마는 젖을 주는 사람, 자신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믿고 엄마에게 완전히 의지해서 삽니다. 젖을 찾고 먹는 건 그렇게 완전히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순수한 믿음이 아이에게 있습니다. 좀 더 자라 어린이가 되어도 그런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도 없고, 또 무얼 생산할 수도 없으니 전적으로 부모님을 믿고,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가령 무얼 준다고 하면 바로 믿고, 고사리 손을 내밉니다. 어른들은 다릅니다. 의심부터 하기 마련입니다. 떡을 준다 해도 저거 뱀 아니야?” 하는 것이 어른이란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어린이의 마음을 잘 아셨습니다. 그렇게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어린이를 가운 데 세워 껴안으신 것은 그러한 마음을 가진 존재가 어린이니까 무시하면 안 되고 더욱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린이 뿐 아니라, 여성들, 병자들 등 예수님 주변의 민중들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어린이의 믿음, 즉 순전한 믿음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믿되 완전히 믿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들이 완전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행복하게 사는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살았고, 또한 그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 운동입니다. 또한 예수에게는 그 길이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어린 예수는 이런 걸 어디서 배웠을까. 과연 어린 예수는 하느님 나라라는 꿈의 조각을 어디서 줍기 시작했을까, 궁금해집니다. 이 답은 또한 오늘 읽은 1성서 본문, 이사야서에서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해당 성서본문은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실 이것은 전쟁에 져서 나라가 망하고, 그리하여 포로가 된 사람들, 여러 나라로 흩어져 고단하게 살다 간 그 사람들이 꾼, 그 꿈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쓰고, 읽고, 읽어주며 힘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야기의 힘입니다. 어린 예수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읽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라며 하느님 나라 꿈을 꾸지 않았을까, 하는 흐뭇한 상상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사라지지 않고 사람의 삶을 끌어당깁니다. 예수의 삶이 바로 그랬습니다. 언젠가 병자들은 병도 다 나을 거다. 지금은 주변에 흩어져 비루하게 살지만 미래엔 평화롭고 안전한 길을 따라 한 가운데로 모여 행복하게 살게 될 거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그 꿈을 어린 예수도 꾸었을 겁니다. 겉에서 맴돌며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다시 가운데로 데려오는 것. 주변부의 민중을 중심부로. 이것이 하느님의 구원이라고 오늘 이사야서 본문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그 일을 나도 함께 할 것이라 결단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때문에 매주 예배에서 우리는 복음서 속 하느님 나라의 그 편린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시대를 지나 지금, 우리 현실로 돌아와 봅니다. 민주화를 민주주의 절차로 보느냐, 분배 등의 구조적 차원에서 보느냐는 이견이 있지만 적어도 개인의 자유가 진전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민주화 가운데 유일하게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퇴보한 존재가 있는데, 그것이 어린이들입니다. 독재시절에도 아이들만큼은 자유가 있었습니다. 강제가 없는 많은 시간동안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 놀았습니다. 느리고, 때론 지루하게 전혀 실용적이지도 않은 많은 시간을 놀며 보냈습니다. 여기 계신 많은 분들도 그런 시간을 보내보셨을 겁니다. 실은 그런 시간이 인간성과 정서를 형성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다릅니다. 놀이터에 멍하게 앉아있는 어린이를 보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쿤데라의 표현을 빌려 얘기한다면, 어린이들은 더 이상 신들의 창을 관조(觀照)”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물리적 탄압이나 권위주의적 방식의 교육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훨씬 더 강도 높은 구속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구속은 경쟁력이라는 명분으로 전 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아이들은 철저하게 상품으로 자랍니다. 대안학교들 조차도 이 경쟁력이라는 합의 속에서 이미 그 본질을 잃은 곳이 많습니다. 교육은 더 이상 어떤 인간을 만드느냐가 아닌 얼마짜리 인간을 만드느냐의 문제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 결과 높은 10대 사망률과 그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비정상적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별다른 변화가 없는 한 이 아이들은 자라 역시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OECD 국가 중 최고의 비정규직 비율, 최악의 산재사 통계를 자랑하는 나라에 살아가게 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래서 헬조선이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현실에 고용되어 있거나 지분이 있습니다. 여기 함께 앉아있는 아이들도 역시 이 현실 속 아이들이고, 교회교육도 이런 현실 위의 교회교육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가치관을 우리의 영혼까지 파고들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교회교육은 그러한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교육, 그리하여 이른바 반-교육이며, 그것이 펼쳐지는 주일학교는 자본의 가치관과 복음이 긴장을 유지하는 곳입니다.

 

본문 속 예수님의 말은 이러한 아동인권의 이야기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이들이 귀하며, 또 어른보다 나은 인간이며, 하느님 나라에 걸 맞는 존재라는 것 이상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구원의 길입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일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어른이란 것은 구원의 가능성은 열려있으나 변화의 가능성은 거의 닫혀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모든 것에 열려 있기 때문에 구원 그 자체입니다. 어린이들은 바로 구원의 주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가 한울님이다라는 말도, “동심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도,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게 나를 보낸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동심은 흔히 오해하듯 그 어떤 티 없이 새 하얗고 순수한 마음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런 건 이미 동심천사주의라는 말로 아동문학계에서도 비판받은 지 오래입니다. 동심은 어떤 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침없는 마음이 동심입니다. 어린이들의 부모님들은 너무도 잘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또한 이런 동심을 가진 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왔다는 것도 저 보다 교우 분들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동심이라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 동심을 간직한 한 사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는 동심의 전형입니다. 어른의 일은 부디 아이들이 거침없이 우리를, 또 이 세상을 구원하도록 자유로운 존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안병무 선생님이 말한바 현존의 그리스도는 바로 여기, 어린이들이기도 합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