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과 환대 사이에서

잠언 22:1-2, 8-9,22-23; 시편 125; 2:1-10,14-17; 7:24-37

 

올해 초 세계를 뒤흔든 사건은 프랑스 파리 도심에 있는 시사 만화 잡지 <샤를리 에브도> 사무실에 이슬람 무장 괴한 3명이 침입해 총기를 난사함으로 편집장·만화가 등 언론인 10명과 경찰관 2명이 숨진 일이었습니다. 이 잡지는 이슬람이 금기시하는 무함마드 풍자 만화 등을 몇 차례 실어 무슬림들의 반발을 사온 것입니다. 며칠 후 세계 지도자들이 파리에 모여 테러 규탄 거리 행진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샤를리 에브도>가 또다시 이슬람이 금기시하는 무함마드 만화를 그리면서 논란의 초점은 테러규탄에서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로 번져갔고,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모욕하거나 희화화하지 말아야 한다<샤를리 에브도>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아일란 쿠르디]

 

올 여름 지금 유럽과 세계의 뉴스를 장악하고 사건은 중동과 아프리카 출신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넘어 유럽으로 몰려오고 있는 이주현상입니다. 올해만도 이미 20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천 명이 배의 침몰이나 배고픔 혹은 콘테이너 냉동창고 안에서 숨이 막혀 죽어갔습니다. 엊그제는 지금 여러분이 화면에서 보는 바, 바닷물에 밀려 터키 해변가에 엎드려져 죽어 있는 세 살짜리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모습은 인터넷을 타고 세계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형도 엄마도 모두 익사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대하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철조망을 세워 이동을 방해하고 동물 취급을 하며 집단 난민촌에 밀어 넣고 있습니다. 저들은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며 정당한 보호를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유엔보고에 따르면 약 4년 이상 진행된 시리아 내전으로 인구의 절반이 넘는 약 8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그중 400만 명이 시리아 국경 밖으로 갔고 이중 200만 명은 터키로 100만 명은 레바논으로 갔습니다. 지금 요르단은 인구의 10% 그리고 레바논은 자기 인구의 20%를 넘는 난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많이 받아들인 독일이 인구 천명당 6명의 난민을 받아들인 반면 터키는 21, 레바논은 232명을 받아들인 셈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요? 우리는 시리아난민을 받아들인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작년 한해 받아들인 난민의 숫자는 350명인데, 이중 300명이 북조선 출신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북의 영역을 대한민국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으니 따지고 보면 북은 난민이 아닌 셈이니 결국 50명의 동아시아의 난민을 받아들인 셈입니다. 5천만 명의 50명이라면 천명당으로 계산하면 겨우 0.001명 아예 대한민국은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정정: 다음날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시리아 내전 이후 약 700명의 시리안 난민 신청이 있었고, 3명이 허락받음. 올 1-7월까지의 난민 신청자는 2669명)

 

작년 말 현재 세계적으로 약 6천만 명의 난민이 있다고 하는데, 남한이 세계 13위의 경제력을 갖고 있고 인구 5천만명이 넘는 나라라면 이중 최소한 백분지 1 혹은 200분지 1에 해당하는 최소 3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이는 나라가 되어야 세계의 당당한 한 일원이 되지 않을까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의 일부 국민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내 집의 방 하나를 내어줄 수 있는 각오는 해야 하겠지요?

 

오늘 잠언 말씀에 가난한 사람에게 제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제 먹을 것을 주지는 못할망정 제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람은 되어야 복의 근처라도 가지 않겠습니까? 야고보의 말씀은 더 적나라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누가 그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는 믿음이 아니라 僞善(위선)입니다.

 

[내전, 난민, 미국]

 

그런데 지금 이러한 대규모 난민이 시작된 계기는 시리아 내전과 그 이전에 있었던 리비아내전입니다. 이 두 내전은 모두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자기들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전쟁입니다. 이들 나라들은 부족 중심이기에 정권이 취약합니다. 그래 정권 반대파에 무기를 공급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내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갑니다. 그러면 미국과 동맹국들은 이를 독재정권과 악으로 규정하고 군대를 파견하고 무차별 공중폭격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을 넘어뜨렸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시리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친이란 친러시아 반이스라엘인 아사드 정권을 넘어뜨리기 위해 반군에 무기를 공급했습니다. 그래서 4년 전에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일이년이면 리비아마냥 현 정권에 반대하는 민중항쟁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계산에 착오가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이락 북부에서 시작한 알카에다의 뒤를 잇는 이슬람국가 세력이 이제는 시리아까지 그 세력을 확대해 왔습니다. 미국은 이슬람국가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고 무차별 공습을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라크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 무인기 공중폭격이 시리아에서는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반군과 이슬람국가는 미국을 향해서는 친미와 반미로 서로 적대적이지만, 아사드정권을 향해서는 같은 수니종파이기 때문입니다. 시리아의 경우는 이슬람국가 세력을 죽이겠다고 공습을 한 것이 오히려 아사드정권을 돕는 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반군 사이에 친미와 반미로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곤란한 상황 속에 빠졌습니다. 전쟁을 피해 외국 난민촌에 머물던 수백만의 시리아 사람들은 그저 어느 쪽이 승리하든 전쟁이 곧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려 왔는데, 그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오리무중(五里霧中)으로 빠진 것입니다. 그래 이들은 고향 돌아가는 일을 포기하고 유럽으로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거 모두 미국이 만들어낸 난민들입니다. 그간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국민들 종파간 싸움 붙여놓고 중간에서 무기 팔아먹는 장사꾼 미국이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아이들이 장난삼아 던진 돌멩이가 개구리에게는 처참한 죽음이 되듯이 미국이 자국 경제발전 시켜보겠다고 시작한 무기판매사업이 약소민들에게는 처참한 죽음이 된 것입니다.

 

지금 미국이 경제가 좋아졌다고 하는데, 좋아질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이런 전쟁을 통해 미국의 수많은 군수공장들이 활발하게 돌아가고 석유 값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 놓고는 유럽의 난민 대책에는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미국과 영국이 국경 경비만 강화하고 있지 난민 구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책을 세우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독일만이 8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며 이웃나라들에 동참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한 이후 지난 4년 동안 미국은 한해 200명 정도의 시리안 난민을 받아들이는 생색내기만을 하여 왔습니다. 미국은 병 주고 약 주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이 병 준 것은 생각 안하고 약 준 건만 기억하고 은인의 나라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갖고 있는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양면성을 잘 보아야 합니다.

 

[밑으로부터의 역사]

 

대개 사람들은 역사를 지배자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지 피해자의 관점에서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박노자교수가 지적했듯이 개화기 시대의 김홍집과 유길준을 개혁가 혹은 계몽가로 이해하고 있지 이 두 사람이 일본군과 공모하여 동학농민 학살을 저지른 범죄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건국"을 이야기할 때에도 "건국"의 밑바탕에 깔린 제주4.3 민중항쟁을 비롯한 수많은 양민들이 흘린 피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박정희의 "산업화" 공로를 치하하면서도 산업화의 주역 곧 저임금에 고강도 착취를 당한 수출공단의 수많은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희생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미동맹"을 생각할 때도 그 "동맹"에 희생된 양공주들과 미군기지 주변의 주민들이 당해야 했던 굴욕과 피해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본군인들에게 희생당한 위안부는 얘기하면서도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성폭력과 이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 따이한 2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당한 아픔만 생각하고 자기가 남에게 가한 아픔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서는 이러한 지배자 중심의 역사관 곧 국가권력 중심의 역사관에 반하는 피해자 곧 민중 중심의 역사관을 갖고 있습니다. 창세기 처음부터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띄고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과 딸임을 선포합니다. 왕과 귀족 노예의 차별 신분 사회에서 인간 평등을 선포했습니다. 단지 평등을 선포하는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이 친히 불러 세운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는 노예들과 떠돌이들로 구성된 나라였습니다. 예수 또한 당시 로마와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들로부터 차별받던 갈릴리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치셨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되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당시 로마와 헤롯왕가 지배자들의 역사관을 정면으로 거부하셨습니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한마디로 인간의 역사를 지배자의 관점이 아니라 피해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학문입니다.

 

이명박정권 이후 시작된 역사논쟁이 박근혜정권 중간시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가열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의 김무성대표를 중심으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 김용주와 박근혜씨의 아버지 박정희를 비롯한 일제 부역자들을 건국의 역군으로 그리고 산업화의 일꾼으로 변질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박정희군사독재 시절로 돌아가 모든 국민들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래 지난주에는 서울대 다수의 역사교수들과 역사교사 2225명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선언을 했습니다.

 

반대의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첫째 대한민국 헌법은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의 결과물로 민족의 화해 협력과 민주개혁의 가치를 말하는데, 국정화는 이러한 헌법적 가치를 말살하고 둘째 똑같은 역사교재로 전국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우리 사회의 역사적 상상력과 문화창조 역량을 크게 위축시키고, 민주주의는 물론 경제발전에도 장애를 초래할" 비민주적인 일이며, 셋째 이는 역사교육의 본질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비교육적인 일이며, 넷째 이는 OECD 국가 어느 나라에서도 시행하지 않는 역사의 퇴행이며 다섯째 국가와 사회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 반사회 반민족적인 잘못임을 밝혔습니다.

 

히틀러나 일제의 군국침략주의는 모두 국가가 일방적으로 가르쳐온 역사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게르만민족의 혈통은 다른 모든 민족보다 우수하다는 혈통논리, 일본의 모든 백성은 천황의 전사들이라는 천황숭배사상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하는 파시즘국가로 나아가는 근거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장기집권을 꾀하고 있는 아베정권과 박근혜정권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부모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감추기 위해 국정교과서라는 구시대적인 제도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스꽝스러운 일은 엊그제 박근혜씨가 중국 방문 중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아베정권이 조선의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려는 시도는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일처럼 어리석은 일이라고 비판했는데, 왜 자기가 시도하는 과거사의 미화는 그렇게 인식하지 못할까요? 남이 하면 불륜이요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고 주장하는 자가당착(自家撞着)입니다.

그렇다면 피해자의 역사를 말하는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외치는 현재 남한의 주류 개신교는 여기에 대해 어떠한 입장인가요? 지난 8월 광복 70돌 기도회로 시청광장에서 모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독재자로 영구집권을 꾀했다가 419항쟁으로 쫓겨난 이승만에게 제1회 대한민국건국 공로대상을 수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행했습니다. 이승만과 박정희에게 역사의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현 정권과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 시대의 로마 황제와 헤롯왕을 옹호하는 일과 같은 일입니다. 이는 반성서적이요, 반복음적이요, 반예수적인 일로서, 이미 시작된 남한 주류 대형교회들이 얼마나 국가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입니다.

 

[예수와 모욕]

 

오늘 마르코복음서의 본문 이야기는 그 해석이 쉽지 않는 구절입니다. 악령이 들린 딸은 둔 이방 여인이 예수께 와서 고쳐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함으로 이 여인의 요청을 거부한 것뿐만이 아니라, 개에 비유하는 엄청난 모욕을 준 것입니다. 도대체 왜 예수는 이 여인에게 이런 모욕감을 주었을까요? 이를 우리는 흔히 예수께서 이 여인의 믿음을 떠보는 얘기였다고 이해하는데, 과연 이것이 옳은 행위였을까요? 만약 이 여인이 이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화를 내면서 예수를 욕하고 돌아섰다면 그때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합니까? 모욕을 견디어 끝까지 예수에게 매달리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고 이 여인을 비난하겠습니까? 아니면 고치지 않으려면 그냥 상대를 피하면 되었지 굳이 상대를 에 비유하는 욕을 함으로 상대방에게 모욕과 수치를 갖도록 하였느냐고 예수를 비난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지금 이렇게 말한 사람이 예수이니까 우리가 아무런 항의를 못하는 것이지 만약 제가 그랬다면 여러분이 저를 두둔하겠습니까? 다들 저를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을 하지, 제가 아무리 그 여인의 믿음을 떠보기 위해서 해본 말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여러분은 구차한 변명은 집어치우라고 말하면서 저에게 돌을 던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예수께서 이 여인을 시험하기 위해 모욕을 주었다고 해석하는 일은 옳지 않고 이방 여인을 차별을 했다고 보는 것이 바른 이해이겠습니다. 그것이 유대민족주의 사상에서 나왔든 아니면 성차별이었든 차별은 차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차별을 했는데, 이 여인의 답변이 그만 예수의 생각을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선생님, 그렇습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지 않습니까?” 여기서 예수는 크게 한방을 얻어맞습니다. 자신의 차별의식을 깨달은 것이지요. 저는 예수가 차별의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얘기가 전해내려 온 배경에는 예수를 따르는 집단들은 자기 집단만의 이익을 꾀하는 이기적인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타 집단에 대한 수용과 환대를 가르치기 위한 구절로 이해합니다.

 

[사람, 장소, 환대]

 

최근 인류학자 김현경교수는 사람, 장소, 환대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 세 개념은 서로 맞물려 있는데, 그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 일인데, 이는 환대를 통해 얻어진다는 주장입니다. ‘노숙자들을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말과 통합니다. 저자는 사회는 발전하고 모두가 이전보다 더 평등해진 것 같은데 왜 는 이전보다 더 살기 힘들어졌을까를 묻습니다. 그건 공적으로는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실제는 신분제 사회로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한 예로 박재동화백의 인권애니메이션 <사람이 되어라>(2005)의 한 장면을 언급합니다. 학교는 짐승을 사람으로 만드는 동물농장으로 나옵니다. 고릴라 원철이는 숲에서 홀로 교양을 쌓아 갑자기 사람의 얼굴을 하게 됩니다. 이때 담임교사는 칭찬은커녕 누가 네 맘대로 사람이 되라고 했어?”라며 대학 가서 사람 되자는 급훈을 가리킵니다. 아무리 인격이 훌륭해도 능력이 있어도 대학을 나와야만 사람대접을 받는다고 하는 오늘의 신분사회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대한항공의 땅콩 리턴사건에서 보았듯, ‘높은 사람에게는 작은 결례도 큰 모욕이 됩니다. 매뉴얼대로 했지만, 땅콩봉지에서 땅콩을 꺼내주지 않았다고 비행기 안에서 사무장과 승무원을 꿇어앉히는 모욕을 주는 것은 단순한 화풀이가 아니라, 상대의 인간 본질을 부정하는 폭력입니다. 말하자면, ‘야 항공사 사장인 우리 집안은 너희들과는 그 씨가 다르다고 하는 일종의 신분우월주의에서 나온 만행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법은 잘살건 못살건 배웠건 못 배웠건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돈이 있으면 무죄 돈이 없으면 유죄가 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회라고 부릅니다. 지금 자본이 왕이 된 신자유주의는 말로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고 있습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로저와 나>(1989)는 제너럴 모터스의 로저 스미스 회장을 찾아가는 우여곡절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33천명의 노동자를 하루아침에 해고한 회장에게 집세를 내지 못해 집에서 쫓겨나는 노동자를 생각해 보았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그런 건 집주인에게 물을 일이지 왜 내게 묻느냐?”. 저자는 이것이 바로 자본가에게는 무한한 자유를 주고, 노동자에게는 극도의 순응을 요구하는신자유주의 술수라고 고발합니다.

 

지금 남한은 10년 너머 세계 제1의 자살률국가가 되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왜 이런 삶의 마지막 절벽으로 내몰렸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때린 사람은 없는데, 피해자만 속출하고 있습니다. 지은이는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공공성을 회복하는 환대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주거수당이나 실업수당 같은 복지는 사회 안에 약자들이 살아갈 자리를 마련하는 환대의 형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회는 시스템을 통해 저절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노력으로 실현된다고 그는 힘주어 말합니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이다.”

 

[환대인가? 모욕인가?]

 

보통 어느 나라나 한두 명의 외국인에게는 환대를 베풉니다. 그러다 수가 많아지고 자신들보다 위에 올라서면 이를 철회합니다. 외국인에 대한 환대 철회는 그들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 의해 정당화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받는 대접이 못마땅하다면 자기네 나라로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을 한번 바꾸었다가 다시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미국에서 백인과 다투다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너희 조상이 먼저 이 땅에 왔으니 네가 먼저 돌아가라. 그러면 나도 돌아가겠다.” 지금 사우디아라비아나 카타르 UAE와 같은 아랍 국가들이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이미 저들 나라에는 수많은 외국인 단기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카타르같은 나라는 인구의 80% 이상이 이러한 외국인들입니다. 그래서 외국인들을 위협적인 대상으로 생각하고 난민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유럽은 난민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놓고 수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 장벽을 높이 세우고 저들의 진입을 막을 것인가? 아니면 최선을 다해 저들을 돕고 환대할 것인가?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늘 우리는 동남아시아의 이주민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백만이나 되는 이주민들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내어 줄 마음은 갖고 있는가? 난민의 문제는 유럽 사람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동시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사도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화려한 옷을 입고 온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베풀고 남루한 옷을 입고 온 사람에게는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런 차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택해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어 하느님 나라에 주역이 되게 하신 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땅콩 회항 사건의 주인공처럼 상대의 지위가 낮다고 그의 인간성마저 부정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형상을 찾아내는 일이 곧 신앙의 기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방 여인의 강아지라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라는 신앙의 도전 속에서 사회의 변두리 사람들 곧 노예들과 떠돌이들을 다가오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역사의 주역으로 삼으시는 야훼 하느님의 깊은 환대를 헤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들의 부스러기 신앙이 오히려 온전한 빵을 먹는 우리와 같은 기득권자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고 하는 것이 오늘 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가르침입니다.

 

1급 장애자로 태어났지만 영문학교수로서 많은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세 번에 걸친 기나긴 암 투병 속에서도 삶을 끝끝내 노래하다 3년 전에 돌아가신 장영희교수님의 시 내가 살아보니까입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살아보니까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남을 쳐다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정말이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비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깎아내리는 바보 같은 짓인 줄 알겠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더라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더라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은 TV에서 보거나 거리에서 구경하면 되고

내 실속 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더라

재미있게 공부해서 실력 쌓고 진지하게 놀아서 경험 쌓고

진정으로 남에 대해 덕을 쌓는 것이 결국 내 실속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더라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남의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더라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9월의 기도 - 윤영초

 

길게 늘어진 서러운 더위만 머무른 흔적 다 지우고

햇빛 찬란한 코스모스 하늘거리는 9월이게 하소서

 

바람이 지나간 자리 홀로 서게 하지 마시고

알알이 영그는 가을이게 하소서

 

마음에 가득 찬 욕심보다

배려가 넘치는 모든 것 포용하는 가을 하늘이게 하소서

 

푸른 나무에 아름다운 흔적으로 단풍들게 하시고

우리 모두 마음에도 훌륭한 단풍이 들게 하소서

 

9월엔 후회 없는 우리 가슴마다 사랑으로 가득차고

지천으로 나부끼는 가을 부끄럽지 않은 그리움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