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913()                                                                 향린교회 주일예배 하늘뜻펴기

 

지혜: 진흙을 떠나지 않는 연꽃

(잠언 1:20~28, 시편19:7~9, 야고보서 3:1~12, 마르코 8:31~38)

 

                                                                                                                         고상균

 

낮의 따가운 태양은 아직 위세가 대단하지만, 밤과 새벽에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완연한 가을과 벌써 그 넘어가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향린 공동체 여러분 모두와 특별히 존경하는 여러 신앙의 선배님들, 그리고 지금 이 시각, 국가인권위원회 옥상 전광판 위에 계신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순화동 철거현장의 두 분을 포함해 길을 집삼아 살고 계신 모든 분들에게 건강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마음모아 기원 드립니다.

 

언제나 이 강단에 서는 것은 저에게 설렘과 함께 걱정을 주지만, 특히나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는 것은 저에게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1성서 본문인 잠언 때문이었는데요, 그건 제가 사실 잠언에 대해 평소 매우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저자를 알 수 없는 글의 필자로 유다 절대 왕권의 상징인 솔로몬을 운운하는 의도도 마음이 편지 않지만, 제가 참을 수 없이 불편한 것은 잠언이 가진 여성에 대한 관점입니다. 일단 한 번 들어보시지요.

 

누가 어진 아내를 얻을까?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다. 남편은 넉넉히 벌어들이는 아내를 믿고 마음이 든든하다. 백년을 한 결 같이 속 썩이지 않고 잘해 준다. 양털과 모시를 구해다가 손을 놀리니 즐겁기만 하구나. ~ 밭을 사도 잘 생각해서 사고 제 손으로 벌어 포도원을 장만한다. 허리를 동인 모습은 힘차고 일하는 두 팔은 억세기만 하다. ~ 불쌍한 사람에게 팔을 벌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친다. 온 식구를 두둑이 입혀서 눈이 와도 걱정이 없다. ~ 항상 집안일을 보살피고 놀고먹는 일 없다.(잠언 31장 중)

 

어떠신가요? 읽어드린 내용은 잠언의 대미를 장식하는 31장인데요, 마음 든든해하는 것 이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남편과 달리 어진 아내는 그야말로 소처럼 일만 하는데,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어진 아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놀라운 지혜의 보고라는 잠언의 맨 얼굴입니다. 이렇게 도처에 나타나는 남성의, 남성을 위한 글인 듯 한 잠언의 남성 중심사고가 저에게는 늘 불편하기만 했던 것이고, 이와 같은 선입견은 저에게 지난 수 주 동안 잠언 본문에 대한 독서와 묵상에 있어 심각한 저해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편한 기회(?)를 통해 저는 잠언서가 가지는 한 가지 독특성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전과 조금은 다른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방금 전 제가 독특성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요, 사실 잠언이라는 문학형태가 이스라엘만의 독창적인 장르는 아닙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훈육서 등 고대 서남아시아와 북 아프리카 일대 문명권에서 잠언이라는 일종의 문학 장르는 젊은 세대에 대한 교과서로, 혹은 지배 이념을 전승시키기 위한 지침서로 많이 작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서에 포함되어 있는 잠언이라는 글은 당시 인근 국가 여기저기에서 작성되고 낭독되었던 유사 문학들과 함께 존재했던 수많은 잠언들 중 단지 하나인 셈입니다. 이즈음에서 마치 생떽쥐베리의 소설에 등장하는 어린왕자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소행성의 장미꽃, 온 세상에 단 한 송이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 신비한 존재가 지구에 와보니 수백 수천 아니 셀 수도 없을 만큼 무리를 지어 있음을 보며 어린왕자가 가졌던 당혹스러운 마음이 드시는 분도 계실 합니다. 우리의 이 소중한 성서가 널린 것들중 단지 하나일 뿐이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흔하디흔한 형태의 글 가운데 성서 속 잠언은 본문 곳곳에서 다른 지역의 그것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독특성을 보이고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정의에 대한 문제입니다.

 

야훼께서는 가짜 저울을 역겨워하시고 바른 저울추를 좋아하신다.(잠언 11:1)

 

잠언 11장에 기록된 이 본문으로 대표되듯 잠언에는 지배계급에 의해 작성된 글로 보기엔 참 어색한 내용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됩니다. 그 어색함이란 적어도 가짜 저울로 이익을 볼 자는 그것으로 배를 불릴 자본이거나, 조작된 눈금으로 세금을 수탈할 지배계급일 터, 가짜 저울을 싫어하시는 야훼는 잠언 저자의 사회적 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신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중 오늘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본문 역시 지배자들에게는 불편한 내용일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일단 공동체가 어떤 위기에 직면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본문은 그 위기가 무지한 것들, 거만한 자들, 그리고 미련한 자들에 의해 자초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송두리째 위험에 빠지게 할 자들이라면 서민보다는 집권세력 혹은 상위 계급에 위치한 이들을 말 할 가능성이 크다 하겠지요.

, 그들에 대한 성토가 거리, 장터, 네거리, 성문 어귀 등 민()이 살아가는 터전을 기반으로 퍼지고 있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지배자들에 대한 저항이 공동체 삶의 자리 곳곳에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압제와 폭정에 시달리던 이들의 외침을 외면하는 이들, 그들에게 본문 속 신은 다음과 같은 심판을 내립니다.

 

두려움이 태풍처럼 덮치고 참변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기막히고 답답한 일이 들이닥치면, 그제야 너희들은 나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잠언 1:27~28)

 

주전 58689, 홀로 남은 성 예루살렘은 태풍처럼 몰아닥친 바빌로니아 대군에 의해 끔찍한 참변을 겪고 있었습니다. 성벽과 성전은 파괴되었고, 약탈과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몇 일전까지 떵떵거리던 고관대작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질질 끌려나와 포박 당했습니다. 또 예루살렘의 살아남은 이들은 개구멍을 찾아 도주하다 체포되어 광장에 꿇어 앉혀진 채, 눈앞에서 두 아들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마지막 왕, 이후에는 두 눈이 뽑힌 후, 사슬에 묶여 병사들의 놀잇감이 되어버린 시드기야를 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폭풍처럼 몰아닥친 기막히고 답답한 일을 겪어야 했던 이들은 그 시간을 온 몸으로 살아내는 과정에서 깊은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졌고, 이는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지혜의 가르침이 되어 후대로 전해졌습니다. 그로부터 500여년이 지난 후, 그리스, 로마 제국의 식민통치하에서 신앙 자유와 정치적 독립을 위한 투쟁이 번번이 좌절되어가는 동안 그러한 시대를 아파했던 이들은 과거 역사로부터 전해지는 격언들 중 힘든 현실을 넘어 다음을 바라 볼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모아 기록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잠언 등 성서 속 지혜서는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비록 기록자들, 즉 중장년 남성 식자(識者)들의 마음에는 다소 불편할지언정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과 대중성을 지닌 오늘의 본문 등은 성스러운 문서의 하나로 기록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히브리의 지혜는 이처럼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한 중간에서 포기하지 않고, 아니 포기할 수 없는 삶을 이어갔던 ()에 의해 탄생되었던 것이며, 이 때문에 성서 속 잠언의 특수성, 성공을 위한 처세술이나 민()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통치술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인근의 잠언들과는 달리 고난의 구조적 원인과 문제에 대해 매우 분명한 관점을 정의라는 측면에서 사유하는 특징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의 지혜, 그것은 고난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피어난 한 송이 장미였던 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렸던 소설 속 어린왕자가 그 당혹스러움의 시간을 지난 뒤, 세상에 장미는 무척 많지만 나와 관계를 맺은 장미는 오직 한 송이 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저에게 있어 오늘의 본문인 잠언은 그렇게 수많은 잠언 들 중 독특하고 귀한 느낌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는 명제로 우리에게 친숙한 야고보서는 1성서 잠언을 통해 생각해 보았던 정의의 지혜에 있어 또 다른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말조심해라!’ 정도의 단순 격언으로 느껴지는 오늘의 본문은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2:26)’라는 야고보서 간판 구절에 후행하는 가운데,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어들인다(3:18)’는 내용을 결론으로 가진 전체 단락의 중심입니다. 여러분께서 익히 알고 계시듯 야고보 공동체는 믿으면 의인이 된다!’는 바울의 칭의론에 대해 믿는다고만 하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자의적 해석을 내림으로 인하여 신앙인의 행동과 실천을 외면했던 바울계승 참칭세력들에 대해 분명한 문제제기를 했던 단위였고, 야고보서는 이러한 그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전() 이해를 가지고 볼 때 본문에서 주목하고 있는 에 대한 여러 가지 경계는 단순히 입조심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신념과 정신의 실천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때 하워드 진이 말한 것과 같이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듯신앙인의 실천현장에서 단물과 쓴물이 공존할 수 없으니, 정의의 편에서 실천함을 택하라는, 이른바 행동하는 정의의 지혜를 결연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의의 지혜는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다시금 실천으로 구현될 것을 주문받게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어들입니다. (야고보서 3:13/18)

 

혹시 저는, 여러분은, 그리고 우리는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오는, 참 이상한 샘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쯤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울의 선교정신이 값싼 복음으로 변질되었고, 이를 통해 권위적 교권이 대세를 점유해 갔던 당시 유럽 그리스도교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형성된 정의와 행동의 지혜, 다시 말해 복음의 변질이라는 위기상황에서 피워 올린 또 한 송이의 꽃이라 하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마르코 838)

 

결연한 마음으로 정의로운 지혜의 실천을 촉구하는 성서의 가르침은 오늘의 복음서인 마르코복음 본문에서 예수의 입을 빌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이적 기사 중 가장 스케일이 큰 사천 명 급식 사건에 이어 베싸이다 맹인의 눈을 완전히 보이도록 하는 등, 마르코 복음 속 예수의 활동 이야기 중 가장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바로 순간에 이어 참으로 짓궂게도 마르코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예수의 수난 고지는 변화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모습변모사건과 아이에게 들린 악령을 물리치는 기사에 이은 두 번째 암시와 여리고의 맹인의 눈을 뜨게 하기 이전에 나타나는 세 번째 언질 등 가장 멋지고 화려한 순간에 느닷없이 예고됩니다. 이는 마치 유다 독립의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불길처럼 타 올랐던 주후 66년이 지나자마자 단행된 로마군단의 거침없는 침략 앞에 거의 속수무책으로 밀렸고, 주후 702년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포위되었던 끝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으며, 이어진 성전 포함 시내 전역의 파괴, 그리고 11만 명이 넘는 유다인 학살 등 절정과 몰락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찾아왔던 마르코복음 저술 직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과정에서 최초에는 무장투쟁에 반대했던 나자렛 당, 즉 예수신앙인들은 저항군과 양민의 학살, 그리고 예루살렘 함락이라는 위기 앞에서 농기구를 들고 로마군단에 맞선 싸움에 동참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 신앙 공동체는 가장 처절한 싸움의 일원이 되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고, 로마군에 의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으며, 유대인 사회를 재건하려는 랍비들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동족이라는 이들에게서도 박해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쓰여진 마르코 복음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그 상황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예수의 결연한 음성을 통해 다음과 같은 대답을 내 놓고 있습니다.

 

나는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마르코복음 8:34~35)

 

마르코복음은 이렇듯 고통과 슬픔의 진창에서 회피하지 않고 딛고 일어선 이들이 피워낼 수 있는 연꽃의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지금의 우리에게 절절한 음성, 즉 정치범의 사형틀을 맬지언정 정의의 편에 섬을 통해서 진정한 생명에 이르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향린 공동체 여러분! 역사와 국민 앞에 도무지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내고, 한국군 전체 전역대상 중 0.5%도 되지 않는 50여명의 전역 연기가 엄청난 애국인양 회자 되는 등, 지금은 스스로 으쓱거리는 지혜가 횡행하고 온갖 말들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옥석을 분별하는 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아울러 내 삶의 자리에서 서 있어야 할 현장을 깨닫고, 솔직히 두렵기도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물러서지 않을 만큼의 지혜로운 용기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굳건하게 자리하시길 기도합니다. 이와 같은 현장의 지혜를 따라 지난 십년의 싸움 끝에 지난 820일 합법화를 쟁취해낸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여러분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또 노노간의 갈등 등 안타까운 점도 많았지만 지난 주 꿈에 그리던 노동현장으로 복직하게 된 재능교육투쟁의 남았던 노동자들에게 위로와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늘뜻펴기의 시작에서 언급했듯 온갖 힘든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전광판 위와 길바닥 등 하느님의 지혜가 함께하시는 현장에 계신 분들 모두에게 굳은 용기와 신념이 샘솟아 흐르시길 소원합니다. 끝으로 이와 같은 주님의 지혜를 향한 믿음이 공동의회를 앞둔 우리 공동체와 구성원 각자의 마음 곁에 함께 하시길 마음 다해 두 손 모읍니다. 오늘의 부족한 하늘뜻펴기의 마무리는 씨ᄋᆞᆯ 함석헌 선생의 말씀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소리를 못 내는 것은 썩음이다. 생명이 없다. 이 썩음에서 연꽃처럼 살아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된다. (함석헌)

 

침묵기도 드리겠습니다.

 

 

 

 

 

늘 부족하지만, 마음을 다해 위로합니다.

힘을 내십시오. 평안하십시오.

그리고 진리 안에서 해방의 자유를 만끽하십시오.

 

늘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십시오. 함께하십시오.

그리고 삶 가운데 꼭 한 걸음만큼의 실천을 이루십시오.

 

이를 통해 손을 잡고 있는 이들의 다리가 됩시다.

주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리로 나아가 그이들의 다리가 됩시다.

실천의 지혜가 임하고 있는 자리로 나아가는 다리가 됩시다.

진흙을 딛고 일어서 연꽃을 피워내는 다리가 됩시다.

우리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살아가는 다리가 됩시다.

 

이제 서로를 향한 축복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가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