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선물: , 사랑, 절제"


잠언 31:10-31; 시편1:1-5; 디모데후서 1:7-10; 마르코복음 9:30-37


유르겐 라이켈 목사(Jurgen Reichel)

 

 왜 선교를 해야 하나요?” 독일에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다른 종교를 믿어왔던 사람들이 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나요? 선교사들이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부정하는 행위는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요? 선교사들은 왜 감히 다른 사회의 문화를 바꾸려고 하는 것인가요?”

 

너무 무례하다독일, 프랑스, 영국 사람들에게 요즘 많이 듣는 얘기입니다. 이들은 누가 저같이 기독교 선교회에서 일한다고 하면 세계 어딘가에서 사람들을 개종시키려는 계획을 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거부감은 사실 기독교 신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들은 세계 모든 종교가 똑같다(equal)고 주장합니다 똑같이 좋은 점도 있고 똑같이 나쁜 점도 있으며, 아무도 다른 사람의 종교를 부정할 자격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제가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복음선교연대(EMS)를 통해 서로 협력하는 교회, 즉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인도, 요르단, 독일, 가나, 남아공의 기독교인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다양한 배경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고민해 보는 것은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선교의 경험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죠.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이런 대화를 하면 개신교가 전세계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는지에 깜짝 놀랍니다. 이제 더 이상 세계 기독교 운동을 이끌어가는 것은 유럽의 교회가 아닙니다. 영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규모 면에서 봐도, 역량 면에서도 더 이상 유럽 교회가 앞장선다고 할 수 없습니다.

 

  • 예컨대 레바논이나 요르단의 교회는 선교 활동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법에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죠. 아랍권 국가 대부분이 이슬람 국가이고 배교행위를 법적으로 처벌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활동은 범죄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 인도네시아와 인도에서는 기독교 선교활동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을 유럽 문화와 결부시켜 외래종교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인도인과 인도네시아인들이 이미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 가나나 남아공에서는 유럽에서 선교를 비난하는 시선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유럽에서 들어온 것 중 가장 좋은 것이 기독교라고 아프리카 사람들은 말합니다. ‘유럽인들이 우리를 학대하긴 했지만, 그들 덕분에 구원자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그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과 복음을 위해 때로는 목숨까지 걸었던 선교사 분들께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선교연대와 같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우리가 얻은 깨달음입니다: 우리의 기독교 선교 경험은 매우 다양하고 이렇게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참 다행입니다. 예컨대 세계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한국의 기독교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지난 몇 십 년 사이 한국 교회가 얼마나 빠르게 성장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일본 식민지배와 군사독재 하에서 겪은 고통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한국 공동체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심을 목격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세계 공동체로서 저희가 얻은 또 하나의 깨달음은 함께 성서를 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입니다. 함께 성서를 읽음으로써 배우게 되는 것이 경험을 공유하며 배우는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우리는 동아시아, 남아시아, 중동, 유럽, 아프리카에 퍼져있지만 성서 말씀은 하나입니다. 제가 지금 읽어드릴 말씀은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선포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각자 고유의 경험과 특수한 문화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마음에 새기는 말씀입니다: 바로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1 7절에서 10절 말씀입니다:

 

7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은 우리에게 비겁한 마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를 주십니다.

8 그러므로 그대가 우리 주님을 위해서 증인이 된 것이나 내가 주님을 위해서 죄수가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시오. 오히려 하느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나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시오.

9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은총은 천지 창조 이전에 벌써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10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제는 분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없애버리시고 복음을 통해서 불멸의 생명을 환하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선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이 구절에서 결정적인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 이것은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은총은 천지 창조 이전에 벌써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1 9)

 

하느님의 역사는 태초 이전에, 모든 것이 존재하기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우주에서부터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우주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지구라 부르는 이 작은, 위기에 놓인, 여전히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행성을 눈 여겨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 중에서도 인간을 특별하게 여겨 오셨습니다..이 모든 게 태초 이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항상 기억해 주시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소중하게 여겨 주십니다. 여러분도 저도,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다 소중하게 여겨 주십니다. 한국인이든 독일인이든 일본인이든 인도인이든 상관 없습니다.

우리가 뛰어난 수재이든 아니든, 신앙심이 투철하든 아니든, 법을 잘 지키고 하느님을 열렬히 섬기든 아니든 전부 상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전부 상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은총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1 9)

 

이 말씀으로 인해 우리는 순서를 뒤집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복음을 선포하고, 그리고 나서 하느님의 부름을 좆을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면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려 주시는 것일까요? 바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결정이 가장 먼저 있었습니다. 태초 이전에 이미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위한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 주시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교회가 생기기 전부터, 한국인과 독일인이 존재하기 전부터, 지구와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태초 이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태초 이전부터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최근에서야 우리는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었음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 모두의 운명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과, 이웃들과 우리의 자손의 운명까지 모두 결정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선교는 장기 프로젝트입니다. 우리 가족, 우리 국민, 인류, 지구, 우주의 역사보다 오래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선교는 영원합니다.

 

100, 200년 전 선교사들의 임무도 이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선교사들과 100년 후의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태초 전부터 모든 인류의 형제이자 친구였던 그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하느님을 위한 일입니다.

 

동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기독교인들이 함께 협력한다면 하느님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교는 사람들이 하는 사업의 일종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모두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음식을 먹습니다. 모두 다른 노래를 부릅니다 예배 중에 부르는 찬양조차 다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우리의 유일한 공통점은 모두 같은 성서를 읽는다는 것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 앞에 무릎 꿇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태초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바울과 같이 주님을 위해서 죄수가 됩니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1 8) 사도바울은 디모테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나와 함께 고난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고 주님을 위해서 증인이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1 8)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꼭 운 좋은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부나 건강으로 증명되는 것도 아니고, 가족 내에 불화가 없다고 믿음이 증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속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사도바울은 성공적인 사업가는 아니었습니다. 생계는 이어갈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가족도 없었습니다. 여러 차례 당국의 억압을 받고 투옥되거나 태형을 맞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에서 처형당한 것도 아마 이 편지를 쓴 지 몇 년 되지 않아서였을 것입니다.

 

기독교 선교는 정의의 문제에 있어 비판적인 입장을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소외된 지역으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외된 지역에서 기독교 공동체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소외된 자와 소외된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소외된 자들에게 눈을 돌릴 수 있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떤 이들은 사치 속에 사는 반면 다른 이들은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는 현실의 불평등을 규탄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비폭력이 최우선임을 선포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타인을 악마 취급하는 언행, 특히 이를 통해 무장이나 전쟁을 합리화 하는 이들을 절대 신뢰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폭력을 극복할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애국심이 없다거나 애국심이 충분하지 않다고 쉽게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반드시 운이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연합회인 복음선교연대는 한국 공동체의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고 성령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느님께서 새생명을 창조하심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저희는 여러분들이 겪은 일본 식민 지배하의 고난과 한국 전쟁의 공포, 군부 독재에 대한 평화적 저항을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어려운 시기에도 교회를 지킨 것에 그치지 않고 더욱 성장할 수 있게끔 해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한반도의 긴장 상황에 대한 소식이 들려올 때 마다 저희도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한 여러분들의 노력을 지지합니다. 독일에서 저희는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았던 장벽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기 대신 두 손에 든 촛불과 희망만으로 무장한 채 거리로 나와 평화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굳게 믿고 함께 기도한다면 동아시아에서도 수문이 활짝 열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은 우리에게 비겁한 마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를 주십니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1 7)

 

그러면 이제 우리는 왜 선교를 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선교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라고 답해야 합니다. 선교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저와 여러분들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인간과 문화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기 전부터, 천지 창조 이전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태초 이전부터 하느님은 지구상 모든 사람들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선교 활동을 한다고 무언가 새로운 것이 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의 선교활동은 그저 항상 존재해왔던 것을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선교 활동이 다른 사회 문화의 변화를 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지구상의 모든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우리의 선교는 먹을 것, 입을 것, 음악 또는 예배 형식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문화는 그 문화적 배경 속에서 기독교인으로써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최선일지에 대한 가장 적합한 답안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소외된 자의 권리 보호, 사회 정의 그리고 평화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라면 문화적 변화를 이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꼭 이뤄낼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