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개인의 고난과 역사 바로 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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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전 미국 사회에 선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책 한 권이 있었는데, 그 제목은 선한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길 때”(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였습니다. 헤롤드 쿠쉬너라는 유대 정통 랍비가 14살의 아들을 불치병으로 잃고 과연 하느님은 계시는가 하는 물음으로 시작한 책입니다. 당시 미국사회는 경제적으로 매우 부강한 시대였고, 정치문화 모든 부문에서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고, 종교적으로도 매우 강성해서 성서가 말하는 약속의 땅 가나안은 다름 아닌 God bless America, 존 무어가 그린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땅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고 있는 미국이라고 하는 확신이 깊어가던 시기였습니다. 이 책은 개인의 삶에 일어난 불행의 의미를 찾아가는 일종의 신앙서적이었지만, 그 책이 큰 관심을 얻었던 것은 30년이 지난 오늘의 시대에서 평가해 보면 악에 관련한 미국 사회 전체에 던지는 실존적인 예언의 소리가 그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의 근원?]

 

악의 출처에 관련하여 그리스 신화는 제우스신이 열지 말라는 상자를 여성 인간신인 판도라가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염으로 그 안에 담겨 있던 욕심 질투 질병 등등의 온갖 악이 세상으로 나왔고, 다만 그 안에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희망만이 남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성서는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악이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둘 다 여성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는 점에서 당시의 성차별적인 사회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리스 신화는 온갖 악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음을 말하고 있고, 창세기설화는 첫 인간들이 죄로 인해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을 당하지만, 그러나 하느님이 저들에게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얘기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저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설화는 모두 악이 세상에 퍼지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 것은 그 악이 원래 어디에서 유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야훼 하느님을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선과 정의의 주로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욥을 사이에 두고 하느님과 게임을 벌리는 사탄은 과연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그래서 대부분의 고대의 민족 설화는 선한 신과 악한 신 두신이 본래부터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입니다. 또 우리는 야훼 하느님을 절대선이자 동시에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몰랐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또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려면 아예 처음부터 그 주위에 강력한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을 쳐놓아 아예 접근조차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어야지 이거야 말로 병주고 약주는 것 아니냐? 원죄는 인간의 책임이 아니라 신이 먼저 유혹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죄가 없다. 물론 여기서 인간에게 선과 악의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고 하는 자유책임론이 출발하고 있습니다만, 하여간 이것이 악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악은 선의 미완의 상태]

 

신이 본래 원치 않았던 악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하느님의 창조는 완전하지 않다. 그렇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는 분이다. 전능하지 않다면 신이 아니다. 그래서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겪고 나서 미소가 죽음의 핵 대결을 벌이던 60년대 미국에서는 신 죽음의 신학이 나왔습니다. 이는 신 자체가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그런 전지전능한 절대 신은 있지 않다고 하는 선언이었습니다. 5세기의 성 어거스틴은 악을 설명하기를 아직 덜된 선이다라고 하는 억지 결론을 내놓았습니다만, 이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라는 신학적 대 전제를 깨지 않은 채 악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습니다.

 

랍비 쿠쉬너는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 묻습니다. 죽음이 죄로 인한 결과라면 도대체 우리 아들이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요? 욥기가 다루고 있는 주제를 자신의 얘기로 옮겨 묻습니다. 고통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자연 재해로 인한 고통이 있습니다. 10년 전 일어났던 동남아시아의 해일로 인해 수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당하자 어떤 정신 나간 대형교회 목사는-지금 그 목사는 교회 돈을 횡령한 죄로 감옥에 있는데, 예수 안 믿어서 그런 불행이 생겨났다고 말하였습니다만, 사망자 중에는 단지 무슬림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크리스챤들이 있었으니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에 아멘하는 어리석은 기독인들이 많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며칠 전 미국 동부에 천년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한 엄청난 폭풍우가 몰려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고 여러 명이 죽었는데, 그럼 이 경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자연재해는 이유가 없습니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예수를 믿던 모하멧을 믿던 상관이 없습니다. 불행은 무차별적으로 일어납니다. 그저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우주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만약 우주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 우주는 불완전한 우주일 따름입니다.

 

이와 반대로 어떤 악은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피할 수 있는 불행도 있습니다. 해일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해일로 말미암아 핵발전소가 폭발을 해서 수십만이 희생을 당했는데, 이 경우의 희생은 피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핵발전소가 편의시설인가 악의 시설인가 하는 판단과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지 이를 신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핵을 반대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개인이 당하는 불행이 있습니다. 이 경우는 같은 불행이라도 우리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불행이 있는가 하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불행도 있습니다. 전쟁에서 한 병사가 다리를 잃었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 희생이었다는 점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었을 경우 그 고통의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앞차와 부딪히는 그 순간을 피할 수만 있었더라면... 내가 그때 그 길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갔더라면... 신호대기에서 조그만 더 기다렸더라면.... 앞차를 추월하지만 않았더라도... 등등 자신의 다리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당한 불행의 의미를 찾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탈무드에 재미있는 얘기가 나옵니다. 홍해나 십계명과 같은 영화를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십계명이 새겨진 무거운 두 돌 판을 한 손에 하나씩 들고 내려옵니다. 그런데 내려와 보니 백성들이 아론과 더불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 상에 절하고 그 주위를 돌며 춤을 추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이 뭡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두 번째 계명은 아무 형상이라도 만들지 말라. 이는 형상의 이름이 야훼라 하더라도 형상으로 만들어지는 한 그게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의미]

 

그런데 모세의 눈앞에서 이를 어기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이에 모세는 분노해서 그 두 돌판을 던져 부숴버립니다. 아니 어떻게 거룩한 하느님의 계명이 새겨진 십계명의 돌 판을 던질 수가 있느냐? 여기에 유대인들의 답은 이렇습니다. 그건 모세가 소의 형상을 보는 순간 그 돌판의 글씨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래 그가 던진 돌판은 십계명 돌판이 아니라 그냥 돌덩어리였다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서 이야기를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떠올리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아니 그 무거운 두 돌판을 책을 들듯이 가볍게 들 수가 있었느냐?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합니다. “십계명이 새겨져 있었을 때는 돌판이 무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고통의 순간에도 거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한 쉽게 견뎌낼 수 있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같은 고통을 겪고 있어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을 견뎌내지만,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은 자그마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 버립니다. 여기에 종교가 필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도 불행한 일이 생기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찾아낼 수는 있습니다. 물론 이 또한 남의 불행이라면 쉽게 답이 나오겠지만, 자신의 불행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종교는 여기에 답을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의미를 찾아낸다고 해서 그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고통이 나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런 고통이 재발하지 않도록 서로 연대하여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신이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이 완벽한 세상을 만들지 않았음을 용서함으로 신이 본래 계획하였던 그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어거스틴이 말한바 악은 아직 덜된 선이라는 신학적 선언이 본래 어거스틴이 뜻한 바는 아니었지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덜된 것을 되게 만드는 책임을 신은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이는 결코 신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인간을 동역자로 부르시는 바로 이 부분이 신의 완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는 역설적으로 생각합니다.

 

시지푸스의 돌이 정상 위에 머물도록 하려면 우리는 시지푸스가 그 돌을 밑에서부터 굴려 올라오는 동안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그 정상의 끝을 깎아 돌이 머물 수 있도록 홈을 파야 하는 것이지 또 굴러 떨어질 돌을 왜 헛수고를 하며 또 끌어올리는 것이냐고 빈정대는 구경꾼의 자리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추구해온 한겨레의 백의민족이 강토가 갈리고 가족이 나누어진 이 불행의 원인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불행이 계속 이어지지 않도록 행동으로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의 의미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자기 부정의 체계]

 

우리 시대의 뛰어난 사상가인 슬라브예 지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유와 책임의 종교인 기독교가 금지와 죄책감이라는 자기부정의 체계 속에 감금되어 있는 탓에 기독교 본래의 혁명성을 상실하였고 그것이 바로 오늘의 기독교가 타락하게 된 이유라고 말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젝이 기독교의 혁명성을 찾아낸 인물이 욥이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흔히 욥의 가장 큰 주제를 인간이 당하는 모든 불행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그것이 의식 중에 저질렀던 혹은 무의식중에 저질렀던 인간이 행한 잘못에 대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갈라디아서 6장의 말씀이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하느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멸망을 거두겠지만 성령을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둡니다.” 그런데 욥은 이에 저항합니다. 나는 잘못한게 없다. 그러니 하느님과 따져야 하겠다. 그런데 따지려고 보니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구나. 그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또 욥기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욥기 마지막 부분에 가서 하느님께서 따져 묻는 욥을 향해 이렇게 되질문합니다.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그렇게 세상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이런 식으로 하느님은 욥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무려 38394041장 넉장에 걸쳐 하나도 답변하기 힘든 질문 백여 개를 사정없이 던져 욥을 구석으로 몰아넣습니다. 욥기 마지막 장인 4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알았습니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고 야훼는 욥과 쟁론을 벌였던 친구들을 비난하시고 욥의 불행을 배나 행복으로 바꿔주십니다. 해피엔딩입니다.

 

[지젝의 신학적 반전]

 

이렇게 욥기 얘기를 마치려고 제가 지젝을 들고 나온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여기에서 신의 승리로 얘기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만, 지젝은 오히려 여기서 신학적 반전을 꾀합니다. 38장에서 41장까지 야훼께서 욥에게 수없는 말로 그를 몰아붙였지만, 이 모든 것은 욥의 핵심적인 질문 왜 선한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났느냐?’는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젝은 오히려 이를 공허한 잡담으로 허약한 핑계라 여겼고 거기서 무기력한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지젝은 욥에 대한 일반적인 신앙 이해 곧 그는 신을 향한 절대 믿음을 회복했고 그래서 결국 자신의 고통을 이겨냈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시종일관 불평했고 자신의 운명을 거부했으며 고통의 무의미성에 전율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런 욥에 대해 하느님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지젝은 한발 더 나가 말하기를 신이 욥의 실패를 선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욥이 신에 대해 침묵했고 침묵 속에서 욥이 깨달은 것은 무력한 신, 곧 자신을 실험했던 신의 자기 실패였다는 것입니다.(재인용. 이정배신학, 타자의 텍스트를 읽다’2015)

 

그리고 이 욥이 깨달은 신의 무능함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그 유명한 절규 곧 오늘의 시편 22편 기자가 말한 단락과 연결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타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가 경험한 것 또한 신의 무능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무능하고 실패한 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신실함, 바로 그것이 유대 공동체의 독특함이고, 바로 그것이 초대교회 특히 바울이 깨달았던 위대한 신앙의 발견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타종교에서는 부정의를 정당화하며 신에 대한 환상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반면에 유대교는 이러한 신에 대한 이념적 환상 자체를 제거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외마디 외침을 통해 신의 죽음을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신의 자기 포기를 통해 십자가의 새로운 빛 곧 부활이 일어났는데, 이를 명확하게 깨닫고 실행에 옮긴이가 바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간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을 말하겠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땅을 이야기 하지 않고 하늘만을 이야기하는 일종의 몽상가로 비판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지젝은 오히려 바울이 깨달았던 십자가상의 예수의 죽음 곧 신의 무능함을 통한 새로운 주체 논리를 세웠는데, 이는 곧 부활신앙을 통해 성령에 의한 예수 공동체였다. 그런데 이것이야 말로 세상의 모든 논리를 거부하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곧 여자나 남자나 주인이나 종이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하는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선언이 가능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역사 뒤틀기는 민족반역 죄]

 

요즘 국정역사교과서 문제로 온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국사교과서를 정부가 허용하는 하나의 책만 허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욥기를 해석하는 일에 있어 전통적인 해석 욥이 하느님께 졌다는 해석만을 가르치라는 것처럼 낡아빠진 주장입니다. 일종의 역사의 기록인 성서를 해석하는 일에 있어 오직 한 가지 해석 곧 모든 목사들은 같은 설교를 하라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자 세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와 대부분의 역사교사들이 반대하는 일을 밀어붙이는 것은 자기 아버지 독재자 박정희의 친일의 과거를 덮겠다는 이유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권력의 횡포입니다. 단지 권력의 횡포가 아니라 이는 역사를 뒤집는 엄청난 반역입니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면 박근혜는 역사쿠데타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절대왕정인 조선시대에도 사관들이 쓴 사초나 실록은 임금이라도 들여다 볼 수 없었습니다. 딱 한번 예외가 있었으니 폭군 연산군이 재위 10년이 지났을 때, 가족 사조를 작성하지 못하도록 명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고치거나 실록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왕조시대에도 이처럼 역사의 기록은 공정하고 엄격하고 권력으로부터 독립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전 독립기념관장이자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평전을 써낸 김삼웅씨가 말하듯이, 자고로 3류급의 위정학자들이 역사를 뜯어고치고자 하고 후세의 평가가 두려운 세습권력이나 아류 정권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록을 삭제 변형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일본 아베정권이 역사교과서를 뜯어고쳐 조선침략을 정당화 하고 독도를 자기 땅이라 우기는 일과 같은 역사부정 행위입니다. 일제가 1910년 대한제국을 병탄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전국의 경찰과 헌병을 총동원해서 조선의 사서를 비롯하여 전통 문화 예술 인문 전기 열전 충의록 무용전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압수하여 불태운 일입니다. 그리고는 그 이후 27년에 걸쳐 엄청난 돈을 들여 조선사 35권 사료총서 102편 사료복본 1,632편을 편찬하였는데 이는 철저히 우리 민족사상을 말살하기 위해 당파성을 강조하고 우리 문화의 독창성의 결여를 강조함으로 사대주의를 키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최남선 이병도 등이 편수관으로 참여를 하였는데, 요즘 관변역사학자들은 이들의 문하생들인 것입니다.

 

[또 다른 식민사관]

 

일제의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현재 아베수상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인데, 그가 19459월 조선을 떠나면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조선이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을 더 걸릴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조선에게 총보다 더 무서운 식민사관을 심었기 때문이다.” 식민사관에 젖어 일본 천황에게 혈서로 충성맹세를 쓴 박정희의 피를 이어받은 박근혜 그 또한 말은 현재의 교과서가 북조선의 주장과 내용이 비슷하다면서 이를 바꾸려고 하는데, 알고 보면 이는 억지 주장일 뿐 뉴라이트계열 학자들이 주장하는 또 하나의 식민사관입니다. 심지어는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쓴 국가기록원 현판을 교체했는데, 이는 과거 간첩사건 연루자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가 국가 폭력에 의한 조작된 간첩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얘기인데, 이는 고문에 의한 조작 간첩 사건을 재조작하는 부정행위인 것입니다.

 

심지어는 6,70년대 이런 간첩을 조작하는 일에 가장 앞장을 섰던 공안검사 출신인 고영주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라는 사람은 한술 더 떠,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로, 노무현전대통령은 변형된 공산주의자로, 현재의 역사학자 90%와 국민의 60%를 좌경으로 모는 정신병 환자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씨 또한 평양을 방문해서 김정일위원장과 악수를 하고 김일성주석 생가 방명록에 자기 이름을 남겼는데, 이 또한 북을 찬양하고 고무한 일로 분명한 공산주의자이지요. 물론 따지고 보면 박정희가 진짜 공산주의자였고, 여순항쟁 사건의 주모자로 경찰에 붙잡히자 동료들의 이름을 팔아 자기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니 박근혜 의 피 속에 공산주의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현재 국정교과서를 채택하는 나라는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북조선과 방글라데시 등 일부의 이슬람국가들이 채택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박근혜씨는 지난 815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인 1948815일을 건국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되면 임시정부 27년의 역사와 독립운동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제외됩니다. 이렇게 되면 대한제국 병탄의 책임도 정신대의 책임 또한 물을 수가 없습니다. 안중근을 의사라고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대한민국 수립 전에 일어난 일로 역사적으로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니까요. 친일파 매국노 부일협력자들의 죄상을 밝히거나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없습니다. 이 또한 대한민국과는 관계가 없는 딴 나라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같은 해 99일에 건국을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도 역사적으로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됨으로 통일의 정당성과 역사성을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냉전사고에서 평화공존의 사고에로 전환]

 

역사는 해석이고 역사를 배우는 것은 무엇이 불의한 일이고 무엇이 옳은 일인지를 인간의 긴 세월을 통해 깨닫는 일입니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인식의 기본 틀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적인 이익을 꾀한 일을 공적으로 확대해석하고 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면 가치관과 세계관에 큰 혼란이 일어납니다. 사적으로 보면 모두가 옳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하구한날 군사쿠데타가 일어납니다. 자기 눈에는 자기 밖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시기입니다. 그렇게 세계가 변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나라 미국에서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샌더슨 의원의 인기가 날로 높아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 하는 낡은 틀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국정교과서를 통해 이를 냉전적 사고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역사의 퇴행일 따름입니다.

 

나는 무관심한 자들을 미워한다.” 무솔리니의 전체주의 정권 하에서 저항운동을 펼쳤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남긴 말입니다. 지젝은 기독교가 타락하게 된 이유가 바로 기독교 본래의 혁명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홍근수목사님의 2주기를 보냈습니다. 저는 홍목사님의 위대함은 단지 공영방송에서 공산주의자들 또한 휴머니스트들이고 주체사상을 대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토론할 수 있어야만 참된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는 외침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설교라는 일종의 기독교가 갖고 있는 성역을 깨어 버렸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초점은 하느님 나라에 있고, 이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는 세상 나라에 대한 대안의 나라로서 모두가 차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노래하고 무슨 생각이든지 자유롭게 말하고 토론하고 그래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에 있다고 믿습니다. 정치가 인간의 삶의 영역을 다루듯이 설교 또한 인간의 삶의 영역을 빼어놓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는 얘기는 부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가 아니라 부자라 하더라도 나사로와 같이 부가 자기 생명을 지켜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저는 바늘귀를 당시 안식일 시작 나팔 소리와 함께 모든 성문이 닫힌 후에 상인들이 드나드는 바늘문이라고 불리는 매우 작은 문이 있었는데, 이때 낙타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무릎으로 기어야만 이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저는 이를 두고 한 말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저는 이 말씀에서 의를 위해 일한 사람들이 현세에서 박해를 받는다는 말씀도 이해하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도 이해할 수 있지만, 현세에서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인지? 욥은 가상의 인물이니까 이전보다 배나 더 많은 복을 받았다는 말은 이해하지만, 예수가 가상의 인물은 아닌 것이고, 또 거짓으로 약속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혹 이 땅에서 예수를 따름으로 백배나 더 많은 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아시는 분이 계시면 예배 후 저에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다고 하는히브리 기자의 뜻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