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반전의 희망

욥기 38:1-6; 시편 104:1-9/24; 히브5:1-10; 마르10:35-45

    

인생에 있어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만납니다. 가끔 일을 하다가도 마쳐야 하는 과제, 그리고 나에게 벌어진 일로 숨을 헉헉거리며 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깊은 숨을 쉬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막막하고 불안하고 힘을 내야하는 순간마다 크게 숨을 쉬면서 잠시 멈추는 연습입니다. 그렇게 할 때면 바로 앞에 놓인 문제들을 좀 더 진지하게 보는 힘이 생기는 듯합니다.

 

지난 주일에 조헌정 목사님의 하늘뜻펴기를 들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오늘의 욥기본문까지 잘 다뤄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하늘뜻펴기는 지난주와의 연결선상에서 고난을 마주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자 합니다.

 

[지혜문학으로서의 욥기]

 

욥기의 기록 연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략 바빌론 포로기 이후로 추정되지만 그 기원이라는 점에서는 훨씬 이전의 고대부터로 출발합니다. 욥기는 특정 시대 특정한 전기와 같은 것이 아닌 고대 근동 지혜문학이 집약된 하나의 작품과도 같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지혜문학 가운데는 이른바 바빌로니아의 욥기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최초의 욥 이야기로 알려진 <고난과 순정>은 기원전 2000년대의 수메르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의 작품으로 <말 잘하는 농부의 항변>은 욥기의 구조와 아주 닮았습니다. 이렇게 욥기는 고대 근동의 지혜문학 전통이 이스라엘의 역사적 맥락에서 집약된 것입니다. 욥기는 잠언과 같은 낙관적 지혜론과는 대비되는 비판적 지혜론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욥기가 다루는 주제의 기원이 아주 오래되었다는 것은 욥기의 보편성을 나타냅니다. 그럼에도 최종형태로서의 기록연대를 이스라엘의 포로기 이후인 페르시아 통치 시기라고 보는 것은 사탄이라는 단어의 사용과 아람어 사용의 흔적과 함께 유다 국가의 멸망과 유배, 풀려남 이후에도 미래를 낙관할 수 없었던 그 시대의 분위기가 인간의 고통에 관한 물음을 새삼 환시키기에 적절한 조건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패러다임의 충돌: 고난]

 

토마스 쿤에 의하면 인류가 가지고 있는 공통견해를 패러다임이라 정의하는데 패러다임이 해명할 수 없는 문제가 나타날 때 이상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결되지 않는 이상 현상이 누적될 때 위기가 오고 결국 패러다임의 전이로 이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의 패러다임이 문제에 직면할 때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나고, 그것은 사물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새롭게 제공해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의주의는 이러한 역사의 순간에 나타나는 성숙을 위한 진통이기도 합니다.

 

[욥기와 중동문헌의 공통점]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고대 중동의 문헌들이 각각 전환기적 사회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집트 문헌들의 배경이 되는 주전20세기는 이집트의 제1중간기에 해당하는데 심각한 침체의 시대였습니다. 역경에 시달려 지칠 대로 지친 많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알고 믿어왔던 모든 것이 마지막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전환기의 사회 속에서 혼란과 갈등 고난과 좌절을 경험하며 지혜서 안에 삶의 의미에 관한 중요한 물음들과 참과 거짓에 대한 판단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담았고, 이것은 기존의 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욥기 또한 당시의 패러다임 충돌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욥기는 고난이라는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들이 대립하여 제시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 처한 욥과 율법의 잣대로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전통적인 지혜의 입장을 대변하는 친구들과의 대화, 그리고 이들의 논쟁에 제3자의 입장에서 끼어드는 엘리후는 각각 서로 다른 현실이해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맞서고 있습니다.

 

욥이 추구했던 고난에 문제를 통해 다가온 새로운 시대로의 고민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무고하게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난을 신은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난 받는 이를 정죄하며 수동적인 방향으로 살게 만들어 버리는 당시 지배층의 통치기재에 대해 항거하는 처절한 투쟁의 모습이 보입니다. 욥기는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고 거기에 반로로 속박하고 규제하는 신이 아닌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하며 인간을 자유케하는 위로의 신을 찾습니다.

 

고난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패러다임의 변화상에서 의도치 않게 만난 고난에 대해 투쟁할 수 있고 그 가운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폭력의 희생자가 존재하는 한 누구도 이를 정죄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고난 받는 이들의 눈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이들이 항의하는 고난의 외침을 듣고 함께 참여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32장부터 다시금 지배체제의 영향아래 편집의 재 과정을 겪었다고는 하나 그것이 31장까지의 이야기를 수정하지 않은 채로 고난에 대한 욥의 몸부림치는 항거가 남아있는 것은 당시 고난당하는 수많은 약자들의 투쟁의 힘으로 그 모습이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난을 마주하기]

 

리스도교와 유대교에 있어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아주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후 히브리서 공동체는 유대교의 위기에 맞춰 내부적인 결속과 강화로 인한 이단색출로 회당축출이라는 고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로부터는 투옥과 재산몰수, 순교로 이어지는 박해의 이중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점차 공동체의 일부 구성원들은 박해의 고통을 이겨내기 어려워 공동체를 나가는 현상도 벌어졌습니다. 히브리서 공동체가 곤경에 빠져있는 때에 저자는 히브리서 공동체가 살아남도록 변론 그리고 정체성을 찾기 위한 작업을 합니다. 고난을 이겨냄의 모범과 전형으로 대제사장 예수를 제시합니다. 더 나아가 히브리서 공동체는 자신들을 고난을 감내하는 공동체로 규명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 언약의 상속자로 그들의 위치를 곤고히 하려합니다. 공동체 내부의 첨예한 갈등과 상호반목을 불식시키기 위한 상생의 방법으로 바로 대제사장 기독론을 전개합니다. 이는 유대교와의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히브리서 공동체의 우월한 새로운 속죄 신학의 패러다임을 제시합니다.

 

[고난을 대하는 마음]

 

오늘의 마르코 본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는 예수와 함께 한 제자들이 정치적 야욕을 품은 체 결국 예수운동의 본뜻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마르코공동체가 보는 예수를 따르는 운동은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는가?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라는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세례와 잔이 뜻하는 바는 이 세상의 변화를 향함에 있어 오는 한마디로 죽음을 각오한 고난의 길을 함께 갈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는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죽음의 길일지라도 그 고난의 현장을 마주했습니다. 물론 그 결과는 죽음이었고, 실패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이야 말로 고난을 이겨내는 가장 큰 저항의 운동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압제자들을 향한 저항, 민중의 고난을 짊어진 삶은 끝없는 추락과도 같지만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가야 할 길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욥이 그토록 고난 속에서 찾았던 신의 모습과 같습니다. 고난을 어떤 이유에서든 정죄하지 않고 그저 고난의 자리에 함께 하는 것, 고난을 함께 짊어지는 것 속에서 새롭게 나오는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향린교회에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는 디스크가 저에게도 불현 듯 찾아왔습니다. 조금씩 이상한 신호를 보내던 허리통증은 끝내 신호등을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만들었고 그 주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1년 중 한 번의 휴가일정을 모두 취소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모든 휴가계획을 취소한 채 양약과 한방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하는데 집중하면서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금 느끼게 해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디스크는 계속 저를 괴롭히겠지만 거기서 얻어진 사실 하나는 제 주위에 디스크로 고생하시며 교회에서 음식점에서 바닥에 앉기를 꺼려하시던 분들의 마음, 예배 중간에도 허리가 아파 가끔씩 일어나야만 하는 분들의 고통스런 마음을 좀 더 깊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개인이 의도치 않게 만난 고난과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구조악으로 인한 고난 등 이 모든 어려움은 그것을 경험하고 대면할 때 신기하게도 우리는 이웃의 고난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수많은 고난을 통해서도 다시금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세월호 침몰로 인한 단원고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죽음, 용산과 순화동 그 철거민들의 안타까운 현실, 그리고 기업의 횡포로 인해 맞이해야 하는 해고노동자들의 삶, 생각지 못한 건강의 악화와 빚더미에 올라않게 되는 가정의 어려운 형편, 그리고 이 모든 괴로움을 견디기 어려워 스스로의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살 등, 이런 일들을 보며 우리는 그저 이모든 것을 고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고난을 어떻게 극복해 가야 하는지가 우리의 과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왜 고난을 피할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고난을 겪음으로서 고난 가운데 있는 이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약자들의 고난을 함께 마주함으로 고난은 반전의 희망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의미하는 바대로 고통스럽지만 고난을 만나는 가운데 파멸하지 않는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직면하는 힘, 그리고 그 안에서 고난을 준 당사자, 죄인이라 규정하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정당화를 위한 신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만나는 신의 깊이를 느끼고 고난의 아픔을 함께 가져 나의 이웃과 새로운 변화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변화되는 시점마다 버티기에 어려운 한계들이 있었고 그 안에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또 다른 변화의 길에 의해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알 수 없는 고난과의 만남! 이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히브리서 공동체와 마르코복음의 공동체를 볼 때 그들이 살고자 고난을 만나기를 멈추기 위해 기득권으로부터 오는 권력에 의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고난의 현장에서 그 고난을 더 겪더라도 몸부림치며 견뎌내려는 강한 힘을 찾게 됩니다. 고난을 대하는 우리는 이제 고난의 한가운데로 가야하며 그리고 그렇게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할 때에 새로운 연대의 힘으로 희망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잣대로 우리를 힘들게 하여도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이웃들과 함께 아파하며 죽어도 사는 길, 져도 이기는 길이라는 것일 믿고 갔으면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연대하여 함께 이겨내는 가운데 새로운 변화의 길을 가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고난이 반전의 희망으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