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개혁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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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일의 기원]

 

오늘은 독일의 신학교 교수였던 말틴 루터 신부가 498년 전 15171031일 비텐부르크 성전 정문에 하늘보다 높다던 로마교황청의 부패한 권력에 저항하여 95개의 신학질의서를 붙인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당시 교황청은 베드로 성당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죽은 자들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면죄부를 판매하였는데, 이는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됨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 질의서는 당시 이탈리아를 중심한 르네쌍스라는 인문주의운동, 독일 영주들의 지방분권화운동과 농민들의 혁신운동이 함께 맞물리면서 유럽 사회의 지각을 뒤흔드는 거대한 혁명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를 서구권에서는 Reformation(‘개혁’)이라 부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여기에 종교라는 말을 붙여 종교개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 종교개혁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미 언급하였다시피 이 개혁은 단순히 종교영역에만 머문 운동이 아닙니다. 당시 중세 가톨릭은 종교라기보다는 유럽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정치권력체제였고, 사회, 문화, 인간의 사고 영혼의 운명까지도 지배하던 거대한 이념체계였습니다. 500년 전에 일어난 개혁운동은 유럽 전체를 뒤흔든 거대한 역사변혁운동이며 인간의 내면세계까지도 지배함으로 결국 인간을 노예화했던 신절대중심 세계관에서 개개의 인간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비판하기 시작한 인간상대중심 세계관으로 바뀌어 가는 세계와 인간 사고의 근본 변혁운동이었습니다. 단순히 가톨릭으로부터 개신교가 새롭게 시작한 종교개혁운동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근시안적인 역사이해입니다.

 

두 번째 이 단어가 유럽에서 종교개혁이라고 불린다면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질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여러 종교가 존재하는 다종교사회에서 종교라는 일반 명칭을 붙이는 것은 이웃종교인들로부터 개신교의 오만함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습니다. 더욱이 본래 예수께서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었던 것이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타자존중 우선원칙을 말씀하셨으니 종교라는 단어는 쓰지 않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개신교의 뿌리가 되는 가톨릭에 대한 오만함을 드러내는 말이니 개신교개혁혹은 교회개혁이라고 부르거나 아예 영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레포메이션이라고 쓰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저는 그간 기회가 닿는 대로 공적인 자리에서 이런 주장을 하여 왔는데, 여러 신학자들과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저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관행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용어를 수정하는 일에는 주저하고 있는데, 이는 개혁을 말하면서도 단어 하나부터 개혁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모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가톨릭을 신앙의 동반자로 인정하는 최근의 미국과 유럽의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한발자국 더 나아가 오늘을 Reformation Sunday라 부르지 않고, All Saints Day로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역사책에서는 그대로 Reformation이라고 부르지만 교회 내에서는 이 단어를 쓰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신교가 루터의 개혁신앙을 강조하다보면 결국은 가톨릭을 부정하게 됨과 동시에 구원의 교리에 있어 하느님의 은총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신앙의 실천행위가 부정되고 있는 모순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루터의 주장 가운데 핵심이자 예수말씀의 중심 사상인 만인사제를 개신교 개혁운동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삼자는 것입니다.

 

[신앙과 이데올로기/이념의 차이]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만인사제 주창은 가톨릭의 교황제도와 사제제도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고 있는데, 프란체스코 교황이 이끄는 가톨릭이 개신교보다 더 개혁적이어서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는 구교가 되어가고 있고 구교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교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역전의 상황에서 올해 어떤 보수장로교단은 총회 결의를 통해 가톨릭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잘못을 저질렀는데, 이는 남한 개신교의 몰락을 재촉하는 자충수일뿐더러 남한사회와 교회가 처한 분단 사고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앙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결과입니다. 성서 구절을 들이대고 하느님의 이름을 언급한다고 해서 모두 주장이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차이를 다름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절대화함으로 상대를 차별하는 것은 결코 신앙이 아닙니다. 이는 신앙의 허울을 쓰고 있는 자기 이데올로기일 따름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참된 가르침이니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 하나는 누가 결정합니까? 가톨릭에서는 교황이 결정합니다. 물론 교황 뒤에는 이를 주관하는 추기경의 교리기구나 주교회의가 있습니다. 그러면 개신교는 누가 결정합니까? 각각의 교단들이 결정합니다. 그런데 교단끼리 부딪히면 누가 결정합니까? 대법원이 결정합니까? 교리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결정합니까? 결국은 개인이 합니다. 그러면 진리가 하나밖에 없습니까? 과장되게 말한다면 결국 진리는 개인의 수만큼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가 개인의 수만큼 많다는 결론은 모순이지만 레포메이션 이후 그리고 오늘날의 권위가 부정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자 또 하나의 진리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누구를 상대로 하신 말씀인가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모세의 율법만을 하나의 진리, 절대의 말씀으로 주장했던 사람들입니다. 진리가 하나이면 거기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이 말씀은 진리는 하느님께만 있고 그리고 어느 누구도 하느님을 소유할 수가 없으니 결국 진리는 부분적으로 모두에게 있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진리, 진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가 되려면 그 생각이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오직 나 자신만을 향한, 그래서 나 자신마저도 또 하나의 상대로 만드는 비판적 지성으로 남을 때만이 비로소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룻기에 담긴 변혁]

 

오늘의 말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룻기는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의 이름이 붙어있는 4장으로 된 짧은 책입니다. 게다가 룻은 모압여인으로 이방여인입니다. 이방여인의 이름으로 된 룻기는 남성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전쟁이야기로 가득 찬 여호수아서와 판관기 사이에 끼어 여성들의 사랑 얘기를 전하는 파격적인 책입니다. 형식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내용 또한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의 핏줄을 타고난 유대인들만이 구원받는다고 하는 선민사상을 깰 뿐만 아니라, 이미 결혼한 과거가 있는 과부가 저들이 최대로 존경하는 다윗왕의 할머니가 됨으로 비주류와 주류의 경계가 깨어짐을 선언하는 이 책은 구원 진리의 기준이 하나가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예수 말씀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구원의 선행 조건인 죄사함을 위한 희생제사와 번제물 없이도 우리의 마음과 뜻과 생각과 힘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그것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 이는 당시의 구원과 진리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뒤집어 없는 혁명적 선언이었습니다. 사람이 마음과 뜻과 생각과 힘을 다하는가 하는 판단 기준은 누구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번제물과 희생물이라면 다른 사람이 판단할 수 있지만, 마음과 생각은 남이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과 하느님만이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구원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진리의 내면화이자 진리 안의 자유입니다. 예수는 문자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진리 안에서의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지만, 역으로 개혁자들은 오히려 문자를 통해 진리의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개인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를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사제들이 읽는 라탄어 발음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레포메이션 시대 쿠덴베르크의 인쇄 기술은 개인에게 성서를 쥐어줌으로 모두를 진리의 판단의 주체로 일깨웠습니다. 라틴어 성서가 사제의 손을 떠나 자국의 언어로 성서를 읽게 되자 진리는 교황의 손을 떠나 개인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구원의 근거가 면죄부나 신부의 성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고 깨닫는 앎과 실천 속에 구원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서말씀에 기초한 구원의 확신이 지난 500년 동안 너무나 많은 목사들과 신학자들의 서로 다른 해석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대중들은 이 목사가 이렇게 얘기해도 아멘 저 목사가 저렇게 얘기해도 아멘만을 외치는 또 하나의 신앙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누구의 말도 신뢰하지 않는 불신의 시대에 있다는 것을 역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뢰도의 추락]

 

새삼스러운 애기는 아니지만, 종교계에 대한 일반인의 신뢰도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발표한 한 여론조사 연례보고서에 의하면 남한사회기관에 대한 신뢰도 조사에 있어 의료계가 21.9%로 가장 높았고, 이어 시민단체가 21.5%, 금융기관 20.5%1,2, 3위를 차지했고 종교계는 6위로 11.8%의 신뢰도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의료계는 신뢰가 떨어져도 병이 들면 찾아가게 마련이고 금융기관도 신뢰가 떨어져도 장사를 하려면 돈을 빌려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이용을 해야 하지만, 종교는 신뢰가 떨어지면 안 나가면 그뿐이니 신뢰문제는 종교계에 있어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교회가 신뢰를 잃게 되면 교인들은 교회를 떠날 명분을 얻게 되었으니 일단 교회를 쉽니다. 교회를 나가지 않으면 첫째 늦잠을 잘 수 있어 좋고, 둘째는 동료들과 산과 들로 놀러갈 수가 있어 사교와 건강에 좋고, 셋째 또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일거삼득의 효과가 있습니다. 거기에 말하기 치사하긴 하지만 거기에 헌금까지 포함하면 일거사득의 효과가 일어납니다. 십일조의 압박, 그거 율법 조항이라고 겉으로는 자신 있게 말을 해도 속으로는 이것 때문에 천국 못가는 것은 아닌가 내심 캥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종교계의 신뢰도가 지난해까지는 그래도 25%의 신뢰도를 유지하였는데, 올해는 11.8%로 대폭 하락했는데, 그것도 모든 종교가 다함께 하락한 것은 아니고 천주교는 39.8% 불교는 32.8%로 작년 수준을 그런대로 유지하였는데, 개신교만 10.2%로 대폭 추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추락한 가장 큰 이유가 재정투명성에 있다고 하니 결국은 교회의 성장과 대형화가 신뢰도의 추락의 원인이 된 셈이니 이 또한 모순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자연히 목사의 입김이 세어지면서 재정투명성이 떨어지게 되는데, 이것이 역으로 교회의 신뢰를 떨어뜨려 교인 감소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현재 대형교회마다 이런 재정문제에 걸려 있지 않은 교회들이 없습니다. 강남의 M교회는 800억에 달하는 담임목사 비자금을 측근 장로가 교인들 몰래 비밀리에 운영하여왔는데, 비리문제가 터지자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유서를 써놓고 자살까지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성직자 신뢰도 역시 신부가 51.3%, 스님은 38.7% 목사는 17%에 불과합니다. 이런 판국에 제가 계속 설교를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10.2%17%의 수치가 의미하는 것은 목사가 열 마디 하면 한두 마디만 신뢰를 하고 나머지 여덟아홉 마디는 믿지 않는다는 말인데, 믿지도 않는 말을 해야 하는 오늘의 저의 처지가 서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신뢰도의 문제는 대형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목사를 길러내는 신학대학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주 한 집사님의 감사기도에서 불쑥 이 대학 얘기가 나와 교인들이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감리교는 지난 수년동안 내부 교권 싸움으로 잠잘 날이 없었는데, 결국 그 불똥이 신학대학으로 옮겨 갔습니다. 이사회의 전횡으로 말미암아 학내문제가 폭발을 하여 이사장이 사퇴를 하고 신임이사장이 왔는데, 비리를 조사하던 신학교수와 학생들을 횡령죄로 고발하는 등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에 존경받는 교수 두 분이 교수직 사퇴를 선언하고 현재 동료교수와 학생들은 단식농성에 돌입하였습니다.

 

감신대학만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기장의 한신대학도 처음으로 재임에 성공한 C총장이 임기 절반을 지나던 중 갑자기 경동교회 담임목사로 결정이 되면서 내홍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장 목사 천명이상이 한신대학 개혁을 요구하는 서명을 하기에 이르렀고, 한 노회는 만장일치로 결의를 하여 총장의 즉각 사임과 총장 중도 하차에 대한 이사회의 문책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기장 안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간의 잠겨 있던 부조리에 대한 불만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요즘 문교부가 일부 대학을 정리하기 위해 여러 압박을 넣고 있어 구조조정에 직면한 한신대 학내문제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그래도 객관성과 투명성이 요구되는 신뢰도 우선의 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청와대 권력의 입김이 들어간 문교부만 교수회의에서 천거한 1순위 총장후보자를 제치고 2순위 후보자나 제3의 후보자를 선택하는 잘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신대학에서도 교수를 뽑는 일에서 이런 일들이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

 

여러해 전 일입니다만, 교수회에서 1순위로 추천되었다가 낙마하자 이에 실망한 본 교회 출신인 한 목사는 지금 교계를 떠나 잠적 상태에 들어가 버렸고, 가까운 한 선배 목사도 이런 일을 겪은 후 교계와는 발을 끊고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있으며 최근 똑같은 일을 겪은 한 후배 목사도 그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쉽게 말해 진보라고 자처하는 한신대학마저 공적 신뢰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총장에게 최후 결정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교수회에 반하는 선택을 하는 경우에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공개적인 해명을 통해 객관성과 과정의 투명성을 보장해야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어떤 교수들이 공들어가며 추천작업을 하겠습니까? 아예 처음부터 총장에게 맡기고 말지.

 

그런데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과 같이 지금 남한 땅이 이러한 투명성에 있어 나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국가투명도는 김대중 노무현정부 때 세계 십몇 위까지 올라갔는데, 지금 이명박박근헤정권에는 43위로 추락했고 부패지수는 아시아 최하위입니다. 지금 정부각료를 뽑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검찰총장이든 대법원 판사든 언론에는 후보자 몇 명이 물망에 떠오르는 것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합니다. 능력이나 경력은 아무런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 더 청와대 권력에 복종하는 사람인가에 따라 결정이 납니다. 여왕의 수첩에 그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가 기준입니다. 객관적 기준과 과정의 투명성은 이미 지나간 옛 얘기일 따름입니다.

 

[권력가들을 믿지 말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146편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권력가들을 믿지 말라. 사람은 너희를 구원할 수 없으니,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 때에는 모든 계획 사라진다.” 그러면서 하느님은 억눌린 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시며,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묶인 자들을 풀어주신다.’고 말합니다. 아까 언급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은 남한 사회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로 '빈부격차의 해소'(42.8%) 꼽았고 가장 소중한 사회적 가치로는 '공평과 평등'(24.3%)을 꼽았습니다.

 

지금 국정교과서 소동으로 노동문제가 뒤켠으로 밀려나 있습니다만, 노동개악법에 대한 관심 또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난 주부터 예배 후 마당에서 진행되고 있는 노동개악저지를 위한 국민투표에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253번째 목요촛불거리기도회가 여의도 새누리 당사 앞에서 열렸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8년 넘게 거리에서 투쟁하고 있는 콜트콜텍 기타 악기회사의 부당해고노동자들이 농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분들이 최근 이곳으로 농성장을 옮긴 이유는 김무성대표가 노동악법을 제안하면서 콜트콜텍의 예를 들어 이 회사들이 문을 닫은 것은 강경노조 때문이다라는 이미 대법원에서 조차 허위로 판결이 난 새빨간 거짓말로 또 다시 이분들을 모독하였기 때문입니다.

 

근 한달째 단식농성 중이신 방종운지회장은 말합니다. ‘지난 9년동안 나는 나의 아들딸들이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니는 동안 저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못난 아비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투쟁을 계속하는 것은 내 자녀들이 노동자로 일하다가 부당해고를 당함으로 못난 어미 못난 아비가 되는 일을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지금 국정교과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가 북조선과 뱡글라데시등 몇몇 국가에서만 시행되고 있습니다. 종북이 북조선을 따라하는 행위를 두고 하는 말이라면 지금 박근혜가 밀어붙이는 국정교과서제도는 북조선을 따라하는 종북행위입니다. 자라나는 학생들의 머리를 재단하여 하나의 획일집단으로 만들겠다는 생각 이는 독재로 나아가는 첫길입니다.

 

히틀러의 나치스정권이 집권을 하자마자 착수한 첫 사업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독일어사전 변경작업이었습니다. 당시 널리 애용된 독일어사전에 '국가사회주의'(나치스)에 대한 정의는 '극우적인 독일의 한 정당의 세계관'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히틀러가 총리가 된 1934년 개정판에는 '독일민족민중의 해방을 가져온 세계관, 피와 땅, 충성과 전우애라는 근본개념에 기초하고 있다'라는 설명으로 바뀌었고, 이 해석에 기초하여 국정교과서 역사교육을 받은 당시 독일 젊은이들은 히틀러의 개가 되어 수백만의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참혹한 세계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국정교과서는 인간을 개나 로봇으로 만드는 비인간화의 작업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자녀들이 그런 광기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역사수정이 아닌 역사부정]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공화국이다라고 하는 헌법 제1조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역사학자 90% 아니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의 이 땅의 모든 지식인들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민이 주인됨을 부인하는 독재행위입니다.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일은 역사수정이 아니라 역사부정입니다. 아니 이는 과거의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박근혜씨가 20051월 한나라당 대표 시절 신년 연설에서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역사에 관한 일은 국민과 역사학자의 판단이다. 어떤 경우든 역사를 정권이 재단해선 안된다.”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은 정신분열증 환자에게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일입니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아니고서는 이 땅 대부분의 종교인들과 학자들과 교수들과 교사들이 반대하는 일을 밀어붙일 수는 없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저희들 젊은 시절 곧 70년대 박정희독재시대에는 대중가요도 검열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전 국민적 대중가요라고 말할 수 있는 긴밤 지새우고로 시작하는 아침이슬은 물론이고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는 대중노래까지도 검열에 걸려 노래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송창식의 고래잡이라는 노래까지 금지한 것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건 어부노래가 아닌가요. 아마 고래 잡으러 가자라는 용어가 걸렸던 모양인데, ‘고래 잡으러자기 잡으러로 들리는 것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증세입니다. 대중가요가 이 정도였으니 문학이나 연극과 같은 예술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지금 또 다시 재연되고 있습니다. 권력에 순응하지 않는 기관장 교체나 예산 삭감은 물론 이미 예정된 공연은 물론 하고 있는 공연마저 취소시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한 교우께서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예술을 검열하고 제 입맛에 맞게 재단하려는 권력은 망한다. 예술은 태생적으로 혁신적이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보고 듣기 좋은 것이나 늘어놓는 예술은 썩은 것이기 쉽다. 예술은 권력을 비판하고 현실을 풍자할 줄 알아야 한다. 정신이 숨쉴 수 있게 끝없이 신선한 공기를 펌프질해대는게 예술의 역할이다. 정부가 박근형 연출의 연극을 비롯한 작품들을 검열하고 공연을 방해하는 것은 미개한 짓이다. 후진국의 척도가 바로 예술탄압이다. 예술인들은 결코 이런 야만을 '좌시'하면 안된다.”

 

[외통수 파국의 길]

 

바둑이나 장기에서 쓰는 용어 가운데 외통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하는 수란 뜻으로 승리를 의미합니다. 저는 관권개입에 개표부정으로 얼룩진 대선으로 시작하여 세월호 폭침으로 침몰 위기에 몰린 박근혜정권이 국정교과서 이념 논쟁으로 국민을 몰아가는 것은 다른 선택이 없는 외통수의 길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외통수는 아버지 박정희가 부마항쟁 얘기를 듣고 걱정하자 차지철이 각하, 캄보디아 마냥 탱크로 이백만쯤 죽이면 됩니다.'라고 말하자 회심의 미소를 띠우고 나서 곧 바로 김재규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운명을 달리하였듯이 이 정권의 승리를 보증하는 외통수가 아니라, 죽음을 향한 최후의 몸부림으로서의 외통수입니다. 몰락을 자초하고 있는 이 정권이 이제는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국정교과서를 죽기 아니면 살기로 밀어붙이고 있지만, 천심인 민심을 이긴 정권은 역사 이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419와 광주항쟁, 그리고 부마항쟁과 6월항쟁의 승리를 경험한 자유시민들입니다. 저는 요즘 조중동에서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선전들이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는 외통수로 보여 애처롭게 보입니다.

 

대학1학년 동양사상 강좌에서 함석헌선생께서 하셨던 한마디가 잊히지 않습니다. 아래서 내려다보면 산정상이 보인다. 그런데 정상을 올라가보면 또 하나의 바위가 있다. 그것마저 올라가려다 사람들이 다친다. 네팔 히말리야에는 8천미터가 넘는 고봉이 9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낮은 마차푸츠레 산은 신성한 산으로 아무도 오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권력이 왜 몰락하는가? 정상에 올라 그 위에 놓인 또 하나의 바위를 올라서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박근혜씨는 역사문제는 건들지 말아야 했습니다. 지혜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어찌되었든 자신이 청와대의 안주인이 되었던 것으로 만족하고 그대로 물러서는 것이 아버지의 명예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만,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듯 끝까지 만용을 부리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꿀이자 독입니다. 이제는 가만히 두어도 스스로 쓰러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순리(順理)의 길이 아닌 역리(逆理)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정상 꼭대기에 있는 바위는 올라가는 길은 있어도 내려가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로 인해 불필요한 국력이 소비된다는 것이요, 내부다툼으로 상처만 깊어진다는 것이고 세계인들의 놀림감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뱃속에 아이를 남긴 채 헤어져 65년 만에 백발이 성성하여 만난 이순규/오인세님의 눈물어린 상봉 장면과 대화를 기억합니다. 남쪽의 아내가 묻습니다. ‘사랑이 뭔지 알아’ ‘알아’ ‘뭐야’ ‘젊은 남녀가 만나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남과 북이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일 그게 민족 사랑이고 겨레 사랑이자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사랑이자 하느님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북의 형제를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개혁주일의 말씀을 마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