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듣는 시편

3:1-5; 4:13-17; 127; 9:24-28; 12:38-44

 

11월은 단풍의 계절이자 낙엽의 계절입니다. 아름다움은 잠시 모든 잎들은 겨울채비를 위해 낙엽이 되어 스스로를 떨어뜨립니다.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죽음을 연상하는 슬픈 감상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얻는 교훈도 있습니다. 복효근시인의 <낙엽>이라는 시입니다.

 

떨어지는 순간은

길어야 십여초

그 다음은 스스로의 일조차 아닌 것을

무엇이 두려워

매달린 채 밤낮 떨었을까

애착을 놓으면서부터 물드는 노을빛 아름다움

마침내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죽음에 눈을 맞추는

찬란한

 

낙엽의 떨어짐을 애착을 놓는 삶의 결단으로 죽음에 눈을 맞추는 투신의 행동으로 시인의 착상이 멋들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절정기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물러서는 법을 모릅니다. 악착같이 그 자리에 머물려고 몸부림을 치다 애착과 애욕의 부끄러운 발자취를 남기고 결국에는 사라져갑니다.

 

정부가 강제 고시한 국정화 교과서 대표집필진에 70에 가까운 명예교수 한 분이 왜 그렇게 애착할까? 안타까웠습니다. 독재정권에 아부하던 사람들의 말로가 죽음 후에 어떻게 평가받는다는 것을 다 아는 사람이 왜 저럴까? 결국은 낮술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서 여기자에게 말한 성희롱 발언으로 스스로 물러서고 말았지만, 애초부터 창 밖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지혜를 얻었어야 했지요. 책만 보고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금의 명예는 잠시요 역사에서 평가받는 명예가 더 중요하다고. 애초부터, 이것이 역사교과서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발언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만 남습니다.

 

성서는 야훼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과 하느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구원의 책입니다. 특히 시편은 악인과 선인을 극단적으로 대비합니다. 그건 시편은 선과 악의 근원을 따지는 이론의 책이 아니라 본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시편은 말씀의 책이 아니라 노래 가사집입니다. 시편에는 본래 악보가 그려져 있어야 했는데, 악보가 사라진 가사집입니다. 그래서 시편을 읽을 때에는 우리는 머릿속으로 노래를 떠올리면서 읽으시는 것이 바른 읽기입니다.

 

[순례자와 노래]

 

가사 내용에 따라 감사시와 찬양시와 탄원시 왕 즉위시 등등 몇 가지로 분류가 되는데, 오늘의 시편 127편은 순례시로 분류가 됩니다. 일 년에 몇 번 있는 축제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가면서 부르는 순례자들의 노래입니다. 120편부터 134편까지 15편이 모두 순례자들의 노래입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가까운 곳에서 하루 이틀 만에 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외국에 거주하다 한 달 이상을 걸어오는 순례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길을 오래 걸으면 저절로 노래 가락을 흥얼거리게 됩니다. 몇날 며칠을 함께 걸으면서 그냥 걸어올 리가 만무합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걷습니다.

 

(사설조)“이 산 저 산 쳐다본다.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야훼에게서 나의 구원이 오는구나. 네 발이 헛디딜까 야훼, 너를 지키시며 졸지 아니하시리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 졸지 않고 잠들지도 아니하신다. 야훼는 나의 그늘, 너를 지키시는 이, 야훼께서 네 오른편에 서 계신다. 낮의 해가 너를 해치지 않고 밥의 달이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야훼께서 너를 모든 재앙에서 지켜주시고 네 목숨을 지키시리라. 떠날 때에도 돌아올 때에도 너를 항상 지켜 주시리라. 이제로부터 영원히.” 121편은 집을 떠나면서 부르는 순례의 노래이지요.

 

야훼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도 기뻤다. 우리는 벌써 왔다. 예루살렘아, 네 문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예루살렘아, 과연 수도답게 잘도 지어졌구나. 모든 것이 한 몸같이 잘도 지어졌구나. 야훼의 모든 지파들이 이스라엘의 법도 따라 야훼 이름 기리러 올라가는구나. 우리 모두 평화의 소리 외치자. ‘집에 평화!’ ‘성에 평화!’ ‘궁궐에 평화!’ 내 겨레, 내 벗들 나 사랑하거늘 그대에게 평화 있으라!’ 야훼의 집을 나 사랑하거늘, 그대에게 복이 있으라!” 이 시편은 성전 앞에 당도하여 부르는 노래입니다. 순례자들이 서로를 향해 평화를 외치는 노래입니다.

 

만약 여러분들도 일주일을 걸려 이 자리에 당도했다면 여러분 모두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입을 맞추고 얼싸안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차를 타고 휘익! 날라 왔으니 만남의 기쁨이 줄어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도 한번 외쳐볼까요? 제가 외칠테니 마지막 구절만 서로를 바라보며 외치시기 바랍니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치는 겁니다. “내 겨레 내 벗들이여 그대에게 평화 있으라!” ‘그대에게 평화 있으라’ “야훼의 집을 사랑하는 그대에게 복이 있으라!” ‘그대에게 복이 있으라!’ 말씀대로 사는게 신앙이고 시편을 소리쳐 부르는 것이 예배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한 달이상 노숙하며 걸어온 순례자들이 성전에 가까이 오자 무리가 됩니다. 수백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한 덩어리 한 몸 되어 한 목소리로 노래 부릅니다. 베토벤의 환희의 합창마냥 감격에 겨운 노래가 광야 한 가운데에 울려 퍼지고 저 멀리 메아리 되어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오늘의 시편 127편은 군중의 노래라기보다는 그 내용을 보면 순례의 중간 길에 가족들이 부르는 찬양입니다. 특히 가장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일이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밤늦게 자는 것도 먹으려고 애쓰는 것도 모두 다 헛되고 헛되니 야훼께서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잘 때에도 배불리신다.’

 

그런데 후반 부분 자식은 야훼의 선물이요 태중의 소생은 그가 주신 상급이다. 젊어서 낳은 자식은 용사가 손에 든 화살과 같으니 복되어라 전동에 화살을 채워 가진 자이 자식 축복에 대한 말씀들은 전쟁과 농사일을 주로 해야 하는 고대인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로되 오늘날과 같이 청년 비혼률이 높아가고 환경오염과 생존의 압박으로 출산 자체가 힘들어지는 현대에는 별로 다루고 싶지 않은 말씀입니다.

 

30대 초반 처음 단독 목회를 시작하면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얘기를 할 때입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의 한과 아픔을 얘기하면서 석녀(石女)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예배 후 사석에서 장로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의 집 아이는 남동생의 아이를 입양한 것입니다. 우리 권사가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그때부터 저는 자식이 하느님의 축복이다라는 표현을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부자되는 일과 병 낫는 일이 하느님의 축복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모순입니다. 그러면 가난하고 병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축복의 길에서 멀어진 사람들입니까? 사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는 종교인들을 비난하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는 말씀이 가난한 자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고, 시각장애자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의 죄로 인한 것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는 누구의 죄로 인한 벌이 아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열 손가락으로 유연하면서도 힘찬 피아노 협주곡으로 127년의 역사 깊은 쇼팽콩쿠르에서 아시아인으로 최초의 우승을 한 조성진씨의 연주도 감동적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한쪽에 두 손가락밖에 없어 모두 네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이희아씨의 쇼팽의 즉흥환상곡 연주는 더욱 감동적이지요. 게다가 이희아씨는 다리도 무릎까지 밖에 없습니다. 올해 서울예고에 입학한 피아니스트 최혜연양은 사고로 어렸을 때, 오른팔이 잘려 팔꿈치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팔꿈치에서 나오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말 그대로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불행이 불행이 아니라 축복을 가져오는 행운으로 바뀐 것입니다. 음악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먼저 바뀌고 음악을 하게 된 것인지는 모릅니다만, 저들의 얼굴에 드러나는 환한 웃음이 이미 은혜 넘침을 말합니다.

 

[잠과 은혜의 역학 관계]

 

야훼께서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잘 때에도 배불리신다.’ 공동번역성서에는 이렇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개역성서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왜 하느님의 축복을 얘기하는 자리에 갑자기 잠 얘기가 나왔을까? 누구에게나 잠 못 이루는 날들이 있습니다. 깊은 고민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일 때, 괴롭습니다. 일부 너무 신경이 무뎌 베게에 머리만 다면 바로 코를 골고 잠을 자는 사람도 있다지만, 일반적으로 잠을 잘 자는 사람들은 걱정 고민이 적은 사람들입니다. 왜 사람인데 걱정과 고민이 없겠습니까? 다만 걱정하고 고민해보았자 별다른 해결책이 없으니 일단 자고 보자는 믿음(?)아닌 믿음을 가진 사람인 셈이지요.

 

누가 참된 신앙인인가? 성경말씀 많이 아는 사람 아닙니다. 잠 잘 자는 사람, 하느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며 편안히 잠을 자는 사람이야말로 참 신앙인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조는 사람 하느님의 은총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철야기도 새벽기도. 글쎄 우리 교회가 안하니까 변명하자고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인생에 한두 번 정말 죽기 아니면 살기로 기도를 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미국 목사들에게 우리나라 새벽기도는 백 년 전 미국 선교사들 시절에 시작했다고 말을 하면 이렇게 답합니다. ‘그 선교사들이 커피를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나는 잠이 많아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자책하지 마세요. 야훼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자주 암송하시기 바랍니다.

 

킴벌리가 쓴 만일 알았더라면이라는 시는 언제 읽어도 깨달음을 던져 줍니다. 류시화씨의 번역문이 잘 알려져 있지만, 원문에는 없는 첨가나 지나친 의역이 있어 몇 군데는 제가 고쳐보았습니다.

 

[만일 알았더라면]

 

나는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를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뭘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탄력 있는 피부를 소중히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걱정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알았으리라.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깨닫고

그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열중하고 그 사랑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으리라.

설령 바라던 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더 좋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믿었으리라.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담대히 행동했으리라.

친구들의 장점을 발견하고 그들과 나눴으리라.

단지 인기가 많다고 해서 친구들과 어울리지는 않았으리라.

 

분명코 난 춤을 배웠으리라. 그리고 흘러가는 대로 내 몸을 맡겼으리라.

여자 친구를 신뢰하고 또 신뢰할만한 여자 친구가 되었으리라.

남자 친구를 신뢰하지는 않았으리라(이건 농담!!)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 즐겼으리라.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하였으리라.

 

어제 토요일 아침 8시 반 하늘뜻펴기를 여기까지 썼을 때에 고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두세 시간은 더 써야 하고 오후에는 교회 일정으로 시간을 낼 수도 없는데, 9시부터 시작하는 서촌기행에 참여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보통대로라면 그 전날인 금요일에 거의 완성하고 이 시간에는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어야 했는데, 집사님의 아버님께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에 다녀와야 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아침 창밖에 보이는 단풍이 늦은 가을비를 맞아 색깔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헌정아! 네가 하늘뜻에서 말한 대로 행동해야지. 교인들에게는 더 많이 놀고 덜 걱정하라고 말하면서 너는 걱정하며 살아서야 되겠느냐? 교인들에게는 가슴의 소리에 귀를 기울리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주저하며 되겠느냐? 교인들에게는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더욱 담대하게 행동하라고 말하고는 너는 늙은이처럼 걱정하며 살아서야 되겠느냐? 가슴이 말한 대로 행동할 것인가? 머리가 시키는 대로 행동할 것인가? 여러분 제가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습니까? 이후의 글은 오늘 새벽에 쓴 글입니다.

 

제가 히말라야 등정을 하는 중에 일요일을 맞아 제가 하늘뜻펴기를 하게 되었는데,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저와 아내는 함께 여행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결혼 초기에는 몰랐습니다. 왜 우리 부부는 여행만 가면 다투는지를... 그랬더니 거기에 참여한 세 쌍의 부부는 물론이고 모두가 껄껄대며 웃더군요. 저는 몇 년이 지나 알게 되었습니다. 여행에 대한 기대가 전연 다른 것을.... 제 아내는 여행이란 일상을 떠나 정한 장소에 가서 편히 쉬었다가 오는 것. 저는 여행이란 일상을 떠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그래서 저는 계획에 없던 일을 계속 원했고 제 아내는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니 다툴 수밖에요. 그게 부부의 차이이고 이 차이를 통해 서로를 하나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론 깨닫는 일과 또 이를 몸으로 받아들이는 일에는 아직도 간격이 있습니다. 만약 제 식대로 여행을 계속한다면 차에서 잠을 자거나 역 대합실에서 밤을 새워야 하는 경우가 자주 생겼을 것입니다.

 

지난 번 예향창립20주년 음악회를 가졌는데, 참여하신 분들은 아시지만, 히말리야 등정을 함께 했던 분 가운데 충청도 홍성에서 농부의 아내로 유기농을 짓는 분이 계시는데, 이분이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그냥 자연이 들려주는 운율을 듣고 가사를 붙여 노래를 만드셔서 혼자 불러오셨습니다. 악보도 없이 그렇게 해서 외우고 있는 곡이 50곡이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모인 자리에서 자주 노래를 불러 별명 또한 노래님이 되었는데, 히말리야 자연의 분위기와 어울려 모두가 좋아했습니다. 트레킹 마지막 날 헤어지기 전 예향 20주년 음악회에 초청하면서 노래님이 참석을 하면 노래 한곡 부르게 해드리겠다고 하지 않아도 될 얘기를 덜컹 한 것입니다. 순간적인 판단에는 홍성에서 서울까지 오리랴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음악회 이틀 전 전체 카톡에 참석하겠다고 글을 올리신 것입니다. 저에게 전화를 했다면, ‘아 그때 너무 생각없이 얘기를 했는데, 한번 알아보겠다.’고 답변을 드린 다음에 정중히 거절을 하면 되었는데, 모두가 보는 카톡에 올린 것입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모두가 들었는데, 제가 그냥 모른 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지난 주 개혁주일 하늘뜻펴기에 저는 개신교의 신뢰도가 추락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목사의 신뢰도가 신부나 스님보다 한참 낮은 것도 얘기하였습니다. 그 얘기가 저의 발목을 잡는 얘기인지도 모르고 말을 한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게 노래님에게 한 약속과 얽힌다는 사실을 공연장에 가서 그분의 얼굴을 보니 생각이 났습니다. 공연장을 들어가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면서도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함만 있었습니다. 사실 한동철집사님이나 조계연집사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 애당초 이런 얘기는 안 될 것을 알고 있었고, 사실 이건 누구라도 찬성할 수가 없는 일이지요.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저도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매 주일 드리는 예배 순서 하나 더하고 빼는 것에도 신중하고 뒷말이 있거늘, 몇 년 만에 아니 20주년 기념 음악회 순서를 아무리 목사라고 바꿀 수 있나? 아 정말 힘들었습니다.

 

제 인사말 순서가 앞부분이었으면 이런 얘기는 못 꺼냈는데, 하필이면 또 마지막인 것입니다. 하여간 당일 음악회는 최고였습니다. 어디 가서 들어볼 수도 없는 최고 수준의 국악 공연을 본 것입니다. 속으로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높은 수준인줄 알았으면 애당초 말을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노래님은 제 말만 믿고 자기 교회 예배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지, 게다가 무대 데뷔한다고 친구 분까지 데려왔지, 트레킹에 함께 다녀온 목회자를 비롯한 몇 분도 참석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당해 보지 않았으면 제 마음을 모릅니다.

 

하여간 예향 단원을 비롯한 수고하신 분들 속으로는 저런 엉터리 같은 목사가 다 있나 하고 제 욕을 많이 했겠지만, 저에게 직접 대놓고 말을 하신 분은 한분밖에 없어 이 자리를 빌려 정말 감사드립니다.

 

새벽에 일어나 본문 성서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머리를 쉴 겸 해서 카톡을 열어 보니 노래님이 노래 한 곡을 올려놓았습니다. ‘냉이노래란 노래인데, 지금 이 노래 들려드릴까 말까 고민 중입니다. 이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짓이잖아요. 본래 계획에도 없었고. 어떻게 할까요?

 

우선 가사만 들려드리겠으니 듣고 나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냉이야 어떻게 겨울을 사는거니?

냉이에게 묻는다 냉이야 나에게 말해다오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사는지를 냉이가 나에게 알려주네

물이 얼고 땅도 얼고 바람까지 얼면 온 세상이 얼지 그때 나도 어느거야 그냥 함께 어느거야 어느 걸 겁내지마

내 몸이 얼어갈 때 두려움이 덮쳐와 두려움을 피하지마 두려움이 너를 끌고 가지 못하도록 마주쳐봐 두려움이 사라져

어는 건 죽는게 아니야 어는건 죽는데 아니야

어는 건 죽는게 아니야 어는건 죽는데 아니야

 

냉이야 냉이에게 묻는다 냉이야 나에게 말해다오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사는지를 냉이가 나에게 알려주네 냉이가 나에게 말해주네

물이 녹고 땅도 녹고 바람까지 녹으면 온 세상이 녹지 그때 나도 녹는거야 그냥 함께 녹는거야 내 몸이 녹아갈 때 내 생명을 붙잡아 녹는 물에 뺏기지마 너무 좋아 너를 놓치지 못하도록 네 숨만 봐 그 숨결에 너를 맡겨 어는건 죽는게 아니야 어는건 죽는게 아니야

 

내가 쉬는 숨은 네게서 나온거지 네가 쉬는 숨은 내게서 나온거지 너와 나는 한 호흡 한 호흡을 사는거야 네가 바로 나인거야 내가 바로 너인거야]

 

어떻게 할까요? 그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후 전태일거리 기도회도 있고, 시편의 말씀을 주제로 곧 하늘뜻을 노래로 듣는 시간이니 이 노래 듣는 것으로 마치고자 합니다.

 

[보냄의 말]

 

{예수믿기} - 조희선

 

예수를 믿는다는 건

그분 말씀에 내 삶을 싣는 것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 음성, 그 빛을 향해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야하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건

벼랑 끝에서도

독수리 날개 하나 바라고

나를 내 던지는 것

그리하여

불확실한 미래를

오늘, 지금 살아야 하는 것.

그것은 늘 두렵고 진저리나는 일이다.

그것은 늘 불안하고 막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