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을 언제까지 미루겠습니까?

시편 132: 15-18; 여호수아 24: 14-18; 딤전 6:3-10; 요한 18:33-17

    

 

교회의 절기로 보면 오늘은 한국교인들에게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왕국주일입니다. 영어로는 Reign of Christ 라고 하니 그리스도 통치주일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통치자이시자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는 매주일 이런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오늘을 그리스도 통치 주일이라고 부르는가? 그건 교회력으로 말하면 오늘이 한해를 마감하는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주일부터는 아기예수를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합니다. 곧 한해가 새롭게 시작하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은 한해를 마감하면서 올 한해 우리의 형편이 어찌하든지, 사업에 성공을 했던지 혹은 실패를 했던지, 사랑에 성공을 했던지 혹은 실패를 했던지, 건강하게 살아왔던지 혹은 병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왔던지. 즐거웠던 시간과 고통스런 시간 모든 시간을 종합하고 초월하여, 우리가 지내온 이 한해는 주님께서 통치하고 지배하신 주님의 해였다는 사실을 고백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오늘 성서일과 본문은 사무엘하 23장의 다윗 왕이 죽음의 순간 마지막 말로 야훼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씀과 요한묵시록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섬돌향린교회의 윤영수장로와 더불어 평신도 하늘뜻펴기를 하게 되면서 이 본문들을 장로님께서 선택하신 여호수아와 디모데전서의 본문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은 김명선집사께서 장로로 임직을 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장로를 임직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의 행정과 교우들을 섬기는 일을 위해 대표자를 세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장로로 임직 받는 교우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더욱 분명하게 세우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복음서 저자의 고민]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요한복음서의 예수와 로마 총독 빌라도와 대화입니다. 먼저 우리는 4개의 복음서를 보면 빌라도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에 법적인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최고위직의 사람이지만, 마치 그는 원하지 않는 일을 유대인들의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입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에게서 죄를 발견하지 못하겠다는 발언, 빌라도의 아내까지 등장을 시켜 대야에 손을 씻으면서 예수의 피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발언, 더 나아가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를 질문하는 철학자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빌라도는 매우 포악적인 총독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를 종교적인 이유로 처형하고자 했다면 유대인들은 그에게 돌을 던져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는 로마의 지배에 항거하는 정치 게릴라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시행하는 십자가에 의해 처형당했습니다. 복음서는 빌라도에게 우호적으로 말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빌라도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는 예수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했음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서 기자들은 왜 빌라도 총독에게 책임을 지우려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복음서가 기록되던 당시는 66년에 시작한 예루살렘 항쟁 이후 74년 마사다 항쟁에 이르기까지 여러 해동안 진행된 유대인들의 투쟁적인 항거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초토화가 되었고, 로마는 아예 거기에 주민이 더 이상 살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로마당국의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이 최고로 높았던 시기였습니다. 오늘날 서구나 미국에서 단순히 모슬렘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간주되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정치사회적인 상황에서 만약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가 정치범으로 로마당국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명시한다면 복음서는 불온문서로 낙인이 찍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뿐더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반로마 불온 정치집단으로 찍혀 전도는커녕 모임 자체를 가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유대인들에게 돌렸던 것이고 이로 인해 지금도 그러하지만 유럽 기독교 안에는 반유대정서가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의 예수와 빌라도의 대화 또한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4개 복음서 중에서 가장 반유대적입니다. 아예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유대공동체에서 추방당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묻습니다. “네가 유다인의 왕이냐?” “그것은 네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하는 것이냐?” 예수가 오히려 질문을 던집니다. “너의 유다인 동족들이 너를 고발했다. 도대체 너는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나를 위해 싸웠을 것이다.” “아무튼 네가 왕이냐?” 계속 빌라도가 묻자,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듣는다.”

 

예수 자신이 유대인의 왕임을 부정하는 말인지 긍정하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난 유대인의 왕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발언하지 않습니다. “그건 네 말이다.”라는 말은 긍정으로도 해석할 수 있고, 부정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건 예수는 분명히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땅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왕으로 오셨지만, 그러나 그건 단순히 로마 황제와 같은 이 땅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땅을 포함한 모든 세상 우주의 지배자임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창과 화살로 지배하는 무력지배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작은 자 사랑에 기초한 순종 자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의 내용입니다.

 

[난민을 향한 이중적 태도]

 

지금 유럽은 파리 테러로 인해 온통 혼돈에 빠져 있습니다. 이번 주부터 수십만 명이 모여 진행하는 파리기후변화 국제대회를 앞두고 이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해 모였던 G 20 정치 지도자들은 기후변화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고 주로 테러에 대한 비난과 대책을 논하는 자리로 바꿔버렸습니다. 점점 추위는 다가오는데 전쟁으로 인해 집을 떠나 길에서 헤매는 수백만 난민자들에 대한 반대 목소리만 높아가고 있습니다. 전쟁은 자기들이 일으켜놓고 이제 와서 그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이기적인 목소리만 높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은 가장 이기적입니다. 독일의 80만 난민 수용의사를 포함해서 모든 유럽의 국가들이 최소 수만명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난민들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미국은 한해 만 명 그것도 수년간에 걸쳐 엄선된 사람들만을 받아들이겠다는 오바마정부의 발언에 대해 거의 반수에 달하는 주지사들이 우리는 한명도 받지 않겠다고 반대 선언을 하고 있고, 심지어는 기독교인들만 받아들이겠다는 매우 야비한 발언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마치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요 이슬람교는 테러의 종교라는 편협하고 독선적인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문화를 전체적으로 비교하면 미국이 훨씬 더 야만적이고 미개합니다.

 

이번 파리테러에도 불구하고 유럽 곳곳에서는 반난민정서에 반해 친난민정서를 공공연히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는 이번 테러 이후 희생자들이 말하는 발언을 들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내를 잃은 한 파리 시민은 페이스북을 통해 자기는 미움과 증오의 희생자가 되지 않겠다. 비록 테러로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지만, 한살박이 아들과 함께 우애와 사랑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겠다.”고 선언하는가 하면, 파리 중심가에서는 모슬렘 사람 몇몇이 나는 모슬렘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내 말을 신뢰한다면 저를 포옹해주세요.’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서 있습니다. 그곳을 지나가던 수많은 파리 시민들이 그에게 다가가 뜨거운 포옹을 합니다.

 

저는 이것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신앙 행위라고 믿습니다. 단지 예배 시간에 찬양과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피 냄새와 죽음에 대한 공포가 휘몰아치는 현장에서 사랑과 우애와 신뢰를 선포하는 행위 그것이 바로 오늘 왕국주일이 갖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지난 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서 69세의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을 역임하셨던 백남기선생께서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약력을 보면서 이분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진정한 신앙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오시고 서울에서 법학대학을 다니셨는데, 박정희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시위주도로 말미암아 세 번의 제적과 복교를 반복하셨습니다. 제적기간 중 가톨릭 수사로 봉직하기도 하셨습니다. 198034세에 뜻한 바 있어 늦은 나이에 복교를 하셨다가, 518 광주민중민주항쟁 직전 박정희유신잔당(전두환 노태우 신현확) 장례식의혈중앙 4000인 한강도하를 주도하셨고 이로 인해 계엄군에 의해 체포당하시어 2년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루셨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보상금 신청대상자이셨지만, 살아있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보상신청을 거부하셨고, 이후 우리밀살리기 농사꾼으로 정직한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20년째 같은 값으로 개사료 값에 3분지 1 이하로 떨어진 쌀값 현실을 개탄하고 우리쌀 먹거리야 말로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진정한 안보라는 큰 뜻을 갖고 나섰다가 불행한 일을 겪으셨습니다. 백남기선생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산 증인자로 생각합니다.

 

교복을 입은 어느 여학생이 광화문 지하도에서 국정화반대자작 오행시 팻말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 교회 한 여집사님께서 기특하다고 과자를 사주시고는 그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셨습니다.

 

민의 여론은 전해지지 않고 언론은 공정성을 잃었습니다.

말 바꿔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닌 우리나라의 미래인데

살은 왜 자꾸 미래를 바꾸려는 자들에게 들이대는 걸까요

대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강행하는 역사왜곡은 반드시 큰

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잊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50대의 나이 지긋한 남성 두 분이 지하철 안에서 나눈 대화라고 합니다. 한분이 말합니다. "요즘 애들 역사 교과서 국정화갖고 말이 많던데... 먹고살기 바쁜데 뭐 그런 걸로 싸우고 지랄이야?" "야 임마. 니는 칼라텔레비젼보다가 강제로 흑백으로 바꾼다카믄 열 받겠나 안 받겠나?" 저는 이분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무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평신도 하늘뜻펴기로 윤영수장로께서 나오시겠습니다. 오늘 평신도로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어떻게 살아가는 일인지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평신도 하늘뜻> -윤영수장로-

 

정의평화를위한기독인연대에서는 작년에 처음으로 7개 교회가 참여하는 <평신도 강단교류> 활동을 하였습니다. 올해로 두 번째 <평신도 강단교류>를 실시하였는데 8개 교회가 함께 하여 1025일 주일부터 시작하여 모두 마쳤고 저는 마지막으로 향린교회에서 평신도 설교를 맡게 된 윤영수입니다. 향린교회에서는 평신도설교가 익숙하지만 아직 한국교회에서는 소수의 교회만이 실시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평신도 설교의 발단은 향린교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조헌정목사님이 2003년에 부임하셔서 10명의 평신도 설교자를 정하고 목사님과 함께 준비하는 과정을 거쳐서 매월 한두 번의 평신도설교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며 그 때 저도 얼떨결에 평신도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평신도 강단교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15개 교회들을 접촉해보니 사정이 다르기는 하지만 여전히 평신도설교가 확산되려면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독인연대는 <평신도 강단교류>가 우리 사회와 교회개혁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활동이라 생각되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입니다.

 

이번에 평신도설교를 준비하면서 섬돌향린교회로 분가하여 나간 지 3년만에 향린교회에서 예배를 하며 두 번째 평신도 설교를 한다는 것의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향린교회 예배는 그 동안 몇 차례 지방에 갔을 때 동영상예배를 보았고 회의와 모임 때문에 매월 여러번 교회를 오고 있으며 교회 소식도 꾸준히 듣고 있지만 향린교우들 앞에서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인지 25년 동안 다녔던 이 자리가 무척 낮선 느낌입니다. 이런 저의 느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금년도 <평신도 강단교류>의 주제는 교회의 개혁과 평신도의 주체적 신앙에 관한 것이며 이런 주제에 맞추어 성서본문을 본문을 정하였습니다. 1성서의 본문은 여호수아서(2414-18)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끈 지도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억눌리고 착취당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이끌어내어 자유롭게 하셨고, 이제 여호수아를 통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입성은 야훼 하나님의 선물인데, 여기에서 신앙 공동체는 이전의 애굽과는 다른 나라를 건설해야 하며, 그것은 주변 다른 족속과도 달라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서본문은 여호수아의 두번째 고별사로 이스라엘 회중에게 출애굽의 구원 역사를 생생히 상기시키고(24:1-13), 자신을 본받아 야훼를 섬기라고 촉구하는 장면(24:14-15), 백성들이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다짐하는(24:16-18)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 야훼가 출애굽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친 중요한 지혜를 2013년 독일 교회의 날은 오늘날의 세계를 향하여 되새긴 바 있습니다.

 

[독일 교회의 날]

 

2005년에 첫 번째 교회의날 행사를 한 이후 20156차 행사까지 조직위원회에 참여한 경험 때문에 저는 독일 교회의 날에 관심이 생겼고 그 덕분에 2013년 함부르크와 2015년 슈튜투가르트 독일교회의 날 현장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금년 7월에 향린교회에서는 2015 독일 교회의날을 다녀온 두 분을 통해서 독일 교회의날의 사회적 역할과 구체적인 프로그램 그리고 교회의날 현장의 모습들을 설교를 통하여 나누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함부르크에서 진행된 2013년 독일 교회의날 주제는 당신이 필요한 만큼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출애굽기 1618절에 나옵니다. 출애굽기는 이집트에서 종살이로 오랫동안 고생하던 이스라엘민족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목숨을 걸고 힘들게 이집트에서 빠져나와 하느님이 예비하신 목적지를 향해 70여일을 광야를 가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배고픔으로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고 이에 하느님은 우리가 만나라고 알고 있는 먹을 것을 내려 주시면서 그날 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게 하여라.(4)’ ‘각자 먹을 만큼씩만 거두라’(16)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거둔 사람들이 보관하고 있던 음식들은 썩게 하셨습니다.

 

독일 교회의 날이 2013년에 당신이 필요한 만큼이라는 주제를 정한 이유는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세계를 주도하는 경제이념으로 자본주의만이 운영되면서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모습들이 인간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것이 극에 달했다고 판단하고 다시금 하느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경제생활을 성서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기심과 욕심이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기본원리임에 반하여 성서는 우리가 필요한 만큼만가지고 살아야 더불어 함께 잘 살 수 있다고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경제주체인 정부와 기업 그리고 가정은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하여 여유 있게 축적해야 하고 더 많은 것들을 쌓아둘 수 있는 것을 능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은 우리가 필요한 것만큼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맞다고 알려줍니다.

 

[한국 경제의 안타까운 모습들]

 

이번에 하늘뜻을 준비하며 저는 30년 동안 직장인으로 살면서 경험한 한국 경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되돌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처음 10년간은 대기업 제조업체에서 그리고 5년간은 해외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차입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그때 대기업에 대하여 자주 접하던 용어는 자전거론과 대마불사론 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자전거론대마불사론이 무슨 뜻인지 아시는지요? 자전거는 페달 밟기를 멈추는 순간에 쓰러지기 때문에 전망이 좋지 않은 사업이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사업을 확장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그 확장에 필요한 자금은 은행에서 빌려야 했습니다. 대마불사론은 바둑에서 크게 집을 지으려고 하면 잡혀죽지 않는다는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사업성과 기술에 기초한 사업운영보다는 권력의 힘과 부정한 방법으로 기업을 인수하고 필요한 자금을 금융권에서 빌릴 때도 같은 방법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규모를 키워 놓으면 그 자체로 부정한 힘을 얻어 돌아간다는 현상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총알(자금)을 만들어야 하는 역할을 하는 재무담당의 역할은 최대한의 금액을 아무런 담보 없이 싼 금리로 오랫동안 빌릴 수 있는 것이 능력이고 이러한 업무를 잘해내면 승승장구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5년 정도는 부동산 개발회사에서 사업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 때 같은 땅이라고 모두 같은 것이 아니며 부동산 개발업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용산참사의 원인이 부동산개발이고 홍대 두리반, 최근의 순화동 또한 부동산개발로 인한 현장입니다. 향린교회가 2011년에 겪은 명동의 카페마리도 결국은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의 탐욕이 더 큰 재물을 갖기 위해 어렵게 살고 있는 서민들의 보금자리를 깨뜨리고 쫓아내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부동산개발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아메리카에 도착해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원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언을 쫓아내고 죽이기까지 했던 미국의 초기 역사가 부동산개발사업의 시초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국적 재무컨설팅기업에서 기업인수 및 기업구조조정, 부실채권 업무를 하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리며 기술을 개발하고 상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그런 일들을 하는 회사를 얼마짜리라고 계산하고 얼마에 사고 얼마에 파는 것이 이익이 되며 더 높은 가격에 거래하려면 사람을 얼마나 줄여야 하는지를 계산하는 것이 능력으로 판단되는 그런 곳을 똑똑한 젊은이들이 선호한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의 엄연한 모습입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사람은 누구나 재물을 좋아하는데 그 정도가 지나쳐서 결국은 재물이 사람을 지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성서는 많은 곳에서 그런 사실을 지적하며 우리에게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를 촉구할 뿐 아니라 그 둘을 같이 섬길 수 없음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본문(마태복음 624)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음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재물로 번역된 아람어 맘몬(Mammon)’은 돈과 재산을 지칭하는 말인데 마치 섬길 수 있는 인격적인 것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과 맘몬이 천칭저울의 양쪽 끝에 달려있고 그것의 경중을 잴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가르침이 실행된 것은 맘몬이 갖는 위력이 하나님 못지않게 여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안타까운 모습들이 많지만 그 중 대학과 교회가 자본주의화 되는 것이 제일 걱정입니다. 과거에는 가족과 마찬가지로 학교와 교회는 공동사회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두 사회집단을 공동사회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서울에 있는 많은 대학들이 정문이나 입구쪽에 대규모 상가시설을 짓고 상인들에게 비싸게 임대하고 학생들에게 이용하도록 하는 모습은 익히 아실 것입니다. 올해 8월에 부산대학교의 교수 한분이 총장직선제를 외치며 투신하신 사실도 기억하시지요? 대학을 경영의 대상으로 하려는 현실에서 순수한 학문은 설 자리가 없고 참다운 인간을 교육하는 목적은 실종된 지 오래입니다. 취업율이 대학의 격을 결정하는 잣대가 된 사회에서는 썩어 없어지더라도 필요한 것 이상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판을 치고 그로 인해 부족한 사람들은 굶주리고 염려하며 매일 매일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들도 점점 더 자본주의의 길로 가면서 큰 회사가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요? 얼마 전에 쿼바디스라는 다큐멘타리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저도 시사회로 봤는데 서초동에 있는 사랑의 교회 건물이 자주 나오더군요. 한국 교회의 부정부패한 모습들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주로 대형교회들의 문제들을 다루지만 작은 교회라 하더라도 과연 이런 문제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엄청난 돈을 들여 성을 만들듯 교회를 짓고, 목사가 교회 돈을 횡령하고,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고, 교인들을 성추행하고도 버젓이 또 목회하는 정말 낯부끄러운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로마로 가서 제도가 되었고,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고, 마침내 미국으로 가서 기업이 되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지면, 한국으로 와서 대기업이 되었죠.” 쿼바디스라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묻는 말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 정말 우리 한국교회는 지금 무엇을 섬기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면 목회서신이라고 불리는 디모데전서(62b-10)의 말씀이 새삼스러워집니다. 디모데전서는 교회의 책임적 직책을 담당하는 이들에게 보낸 것인데 무엇보다 교회 치리에 관한 물음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초기 교회의 재물에 대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서신입니다. 탐욕에 물들지 말고 자족하는 마음을 지니고 돈 욕심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지적하여 특히 돈의 유혹에 대한 강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책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디모데전서의 경고에 다시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들어야 할 자들은 모두 귀를 꽁꽁 닫고 있습니다.

 

[향린의 과제]

 

한국사회와 기독교에서 향린교회가 차지하는 위치와 방향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뜻있는 기독인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한국교회가 갈 바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향린교회가 실천하는 모습과 이루어내는 성과들은 한국교회의 빛과 소금 같은 모습입니다. 억압 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려고 애쓰는 모습과 사회의 불의와 부정에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으로 나서는 모습, 민주적인 교회운영을 위해 다양한 협의기구를 운영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향린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경험할 수 없는 귀한 것들입니다.

 

제가 1988년부터 2012년까지 25년 동안 향린교회의 일원으로 있으면서 경험했던 재정과 관련되어 기억나는 일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향린동산의 매각에 대한 다양한 논의, 향린동산 별도부지 매각 과정과 분가기금 규모에 대한 논란, 재산환원운동에 대한 교우들의 논의와 무산, 홍근수목사님을 위한 기금 마련, 억대 선교헌금 등 그리고 현재의 교회부지 재개발에 대한 논의까지 향린교회도 재산을 가진 교회로써 그 재산에 대해서는 어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향린교우들의 의식 수준과 의사 결정기구의 합리적인 구조,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으로 크게 걱정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오래전에 여호수아가 야훼를 섬기라고 결단을 요구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지금의 향린교우들은 얼마나 다를까요?

 

[장로 임직자에게]

 

공교롭게도 오늘은 향린교회에서 장로임직이 있는 날입니다. 그래서 평신도 하늘뜻을 하는게 더 부담스러운 면이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조헌정목사님께서 권면의 얘기를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돌이켜보니 저는 20085월에 장로임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향린교우도 아니고 시무장로의 역할도 끝난 상태입니다. 향린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한다는 것은 교회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당사자도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장로가 필요한데 본인은 고사하고 싶은 그 지점에 있는게 향린교회의 장로가 아닌가 싶습니다. 현 시점에서 향린교회가 감당해야 할 과제와 역할을 생각할 때 김명선장로님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저는 두 가지를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 향린교회의 대외적 활동에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김명선장로님은 임직 전부터 다양한 현장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이제 장로로 임직하시면 교회 내부의 다양한 과제가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쉽지 않겠지만 그 발걸음은 계속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더 많은 향린의 발걸음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부탁드립니다. 제가 장로고시를 볼 때 저를 면접했던 목사님이 저에게 '이제 새로운 교인 30명을 전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교인 30명당 1명의 장로가 선출되기 때문에 이제 장로가 되었으니 그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그 말을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이번에 새로운 임직자에게 부탁드릴 얘기는 생각하는 과정에 생각이 났습니다. 김명선장로님을 뽑아준 최소한 30명의 향린교우들을 잘 챙기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는 그런 기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장로님들이 그러는데 임직하는 오늘이 그나마 제일 기쁘고 편안한 날이라고 하더군요.

 

이제 하늘뜻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미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성서에서 얘기하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적당히 결합하여 편하고 좋은 것만을 추구하며 살다가 가끔 죄책감을 느끼는 수준에서 스스로를 참된 기독인이라고 자족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돈의 영향력에 따라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로 구분되어 있던 경계가 모두 무너져 이 땅의 학교와 교회가 돈의 지배를 받고 있음에도 불편함을 모르고 살고 있을 수 있을까요? 여호수아가 억압으로 부터 구해주신 야훼를 섬겨야한다고 결단을 촉구하였고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다짐한 이스라엘 백성 같은 우리가 그 약속을 아직 기억하고 되새기고 있다면 현재의 무책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요?

 

누군가 말하기를 살면서 제일 어려운 일은 쉬운 일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물보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어려운 일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기독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좋은 것 인줄 알면서도 오래된 습관과 눈 앞의 즐거움 때문에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 또한 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결단의 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스스로 결단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성서는 다시금 우리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함께 나눈 말씀을 생각하시면서 묵상하시겠습니다.

[보냄의 말]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가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