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9일 대림절1 하늘뜻펴기

 

신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다!

(예레미야 33:14~16, 시편 25:4~10, 데살로니카전서 3:9~13, 루가복음 21:25~33)

 

고상균

 

11월 후반인데 이게 겨울인가 싶을 정도로 포근한 날이 이어지다가 지난주 들어 첫 눈이 내리더니 기온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공동체의 귀한 선배님들께서 다시 찾아온 겨울동안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챙기시길 기원 드립니다. 또 병상에 계신 모든 교우들에게도 한 마음으로 염려하는 전체 교인들의 마음이 따뜻하게 전해지길 소망해 봅니다. 끝으로, 지금 이 시간 전광판 위에 계신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동형제들을 포함해 한국 사회 여기저기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람답게 살기위한 싸움에 임하고 계신 모든 분들, 그 주님의 가장 아픈 자녀들이 힘을 내실 수 있었으면 하는 여러분 모두의 마음을 모아 두 손 모읍니다. 늘 이 자리는 제 마음을 두근거리게 합니다만, 오늘은 또 다른 무게감이 더해지고 있는데요, 그것은 하늘뜻펴기에 이어 향린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성찬집례를 담당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공동식사 이후에는 여러분 모두가 기다리시는 문향 10주년 기념공연까지 있다 보니, 그 어느 때보다 메시지는 분명하게, 하지만 시간은 짧게, 게다가 이어지는 집례까지 손색없이 소임을 다해야 할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니 저 놈이 잘 하나 어쩌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노려보지 마시고, 애정과 격려의 마음을 가득 눈길에 담아 바라봐 주심을 통해 공동체 전체의 신앙고백을 함께 흠향하시는 야훼 하느님께 드릴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라는 말로 오늘의 하늘뜻펴기를 부드럽게 시작하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몇 주 전 평소 저에 대한 애정을 직언에 담아 조언해 주시는 한 교우께서 제게 목사님의 하늘뜻펴기는 시종일관 너무 듣는 이를 팽팽하게 긴장시킵니다. 완급조절이 필요하지 않을까요?’라는 말씀을 주셨고, 그것이 저에겐 무척 중요한 배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해주셨던 교우께서 지난 밤 경찰에 의해 폭력적으로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 급히 만나고 돌아온 새벽녘,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어 서재 방에서 밤을 지새우는 가운데 저는 다시금 팽팽한 감정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나라의 공권력은 이 부족한 사람의 하늘뜻펴기도 이토록 방해를 합니다. 이에 조심스럽게 양해와 이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신의 약속은 파기 될 수 없다!]

 

나 야훼가 말한다. 라마에서 통곡소리가 들린다.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구나. 그 앞에 아이들이 없어 위로하는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구나! (31:15)

 

국가멸망의 그 처절한 상황이 느껴지시나요? 야훼가 바빌로니아를 쳐부수어 주신다는 내용의 국가주의적 신탁이 판을 치던 때에 앞서 언급했던 내용과 같은 멸망예언이 중심 주제인 예레미야서 예언 중 일부이며 이 주제에 가장 부합된 예입니다. 유다 멸망 직전이라는 상황 속에서 대다수 종교인들은 권력자들의 비위에 잘 맞는 신탁, 예를 들자면, ‘야훼께서 말씀하시길, 바빌로니아를 너희들의 손에 맡긴다. 야훼가 바빌로니아의 멍에를 부수고, 유다에게 해방을 가져올 것이다따위의 예언을 늘어놓던 때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을 선언했던 예레미야는 본문과 유대교의 전설을 통해 구금과 폭행 등 집권세력에 의한 폭력에 시달렸고, 끝내는 이집트로 끌려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인물입니다. 이처럼 왕과 종교 권력자들의 기세등등한 압박에도 시종일관 국가멸망을 말하던 그가 오늘 함께 모신 하늘말씀에서는 돌연 희망찬 회복의 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공권력의 기세에 눌려 끝내 변절해 버리고 말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나름의 살길을 모색해야 했던 것일까요? 예레미야서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그 혹은 그를 추종하는 예언공동체의 신학적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계약을 맺으셨다 그런데 우리가 그 분과의 계약을 파기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어려움들의 원인은 우리에게 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과의 계약으로 다시 돌아기만 하면 주님은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리실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자칫 내게 주어진 고난은 다 내 잘못을 징계하려고 하느님께서 벌주시는 것이다. 내 잘못을 찾아 회개하면 다 좋아질 것이다라는 식의 사고, 다시 말해 하느님은 자신만 바라보게 하기 위해 사랑하는 이를 괴롭히는 새디스트로 규정하고, 자기 자신은 율법 혹은 교회가 규정한 법이라는 무한궤도를 영원히 돌리고 살아야 하는 존재로 설정해 버리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앙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일제 식민지배와 6.25 전쟁의 비극은 모두 하느님께서 이 땅의 사람들을 가르치시려는 계획이라던 문창극씨의 발언과 만나게 되겠습니다.

예레미야 공동체의 신학은 결코 이와 같은 쳇바퀴를 말하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고, 끝내 신마저도 죽었거나 우리를 버리지 않았겠냐는 절망감이 공동체 전체에서 퍼져나갈 때, 하지만 그럼에도 신은 우리와 연결된 끈을 영원히 놓지 않으신다고, 그렇기 때문에 아직 우리에게는 희망이 남아있다고, 비록 상황은 비참할지언정 신의 약속은 결코 파기될 수 없다고, 그러니 다시 힘을 내서 살아보자는 말을 구성원 모두에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계약의 주체자를 야훼로 고백했고, 직접 당사자를 신앙공동체로 인식하는 가운데 자신들과 신이 맺은 약속을 희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신은 아무것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희망 그 자체였던 것이지요. 이런 그들의 꿈은, 그들의 희망은 이후 어찌 되었을까요? 비록 전설 속 예레미야는 꿈에 그리던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쓸쓸히 눈을 감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만, 이후 예레미야 예언 집단은 서슬 퍼렇던 바빌로니아의 멸망을 목도하였고, 고향 땅에서 새로운 꿈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신의 약속은 그들의 믿음을 통해 끝내 파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약속에 담은 염원]

 

약속에 담은 희망은 두 번째 본문인 데살로니카전서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굳건해져서, 우리 주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다시 오시는 날 우리 아버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살전3:13)

 

데살로니카전서는 바울로의 서신으로 명명되는 문서들 중 분명한 바울로의 직접 저작으로 인정되는 7개의 편지 중 하나로 상당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것은 사도행전 17장 등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행전 속 바울로는 실라와 함께 데살로니카의 유대교 회당에서 예수를 전했고, 큰 반향이 있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유대교 추종자들에 의해 소요가 발생했고, 바울로 일행은 서둘러 기약 없는 피신을 해야만 했습니다. 첫사랑의 기억만큼 설렜을 데살로니카 초대 공동체와 바울로와의 만남이 갑작스레 끝나고 난 후, 이제 첫 걸음을 내딛었던 예수 공동체에 비해 모든 것이 안정적이었던 유대교 공동체는 언제나 기세등등했고, 그러한 만큼 바울로와 공동체의 만남에 대한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만 갔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바울로는 데살로니카 공동체에게 하느님 안에서 맺는 약속을 전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다시 만나 여러분의 믿음에 부족한 것을 채워 줄 수 있게 되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살전 3:10)

 

과연 이후 그들의 만남은 이루어졌을까요? 아쉽지만 적어도 데살로니카전서 전체의 내용을 통해 유추해 볼 때 바울로가 이후 이 공동체를 다시 방문했을 가능성을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것, 즉 신앙 안에서 바로 서 있는 공동체이길 바라마지않았던 그 희망은 이 서신을 온전히 보전 할 수 있을 만큼 공동체가 안정적이었을 가능성과 위서이기는 하나 바울로를 계승한다는 의식 속에서 후서가 기록되었을 만큼 오래도록 유지되었다는 점 등을 생각해 볼 때, 역시 파기되지 않고 이어졌다 볼 수 있겠습니다.

 

[낮은 이를 통해 드러나는 신의 약속]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크다!’, ‘저 아름다운 성전이 다 무너져 내릴 것이다!’ 등 무척 도발적인 내용으로 시작되는 루가복음 21장의 중후반에 등장하는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천지개벽의 날을 약속하는 예수를 그리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이 끝장나고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사람들.......그러한 이들이 당대의 지배자과 권력자들이 아니었을 가능성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렇기에 루가복음은 2성서의 다른 복음서에 비해 월등하게 낮은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두드러지고, 예수의 족보도 예수 즉 여기 있는 사람라는 현실에서 시작해 아담, 과거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지난 현실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모두가 다 아시듯, 예수 탄생을 처음 듣고 한 달음에 달려온 이들 역시 동방박사나 고관대작이 아닌, 들에서 양치는 목자들입니다. 그러한 이들이 모여 형성된 공동체는 처음부터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존립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로인해 직면하게 되었을 현실적 어려움 앞에서도 결코 고개를 숙이거나 해산할 수 없었던 이들은 지금 너머의 세상을 설파하시는 주님을 신앙 고백하는 가운데, 이를 신과 맺는 약속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의 첫 주입니다. 기다림.......이를 종교적 의미로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희망으로 믿는 행위일 것입니다. 약속의 주체인 신이 당사자인 우리들과 맺은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의 약속에서 어떤 희망을 품고 계십니까? 개인적인 소망? 혹은 소망을 넘어선 욕망? 어떤 이들에게는 무한한 자본이나 영원한 권력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신앙 고백하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맺는 약속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희망일 것이고, 신의 편에서 생각해 보자면, 그 계약의 상대방, 즉 우리의 믿음과 실천을 통해 자신의 염원을 이루시려는 신의 간절함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께서 여러분과 혹은 우리 공동체와 맺은 약속은 바로 그 분의 염원입니다. 그와 같은 염원을 희망에 담아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다음과 같은 약속을 나누고 싶습니다.

 

- 우리의 향린공동체는 더욱 정의로운 사랑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 채운석 피택장로를 포함해 불의한 권력에 의해 구금된 이들이 해방될 것입니다.

- 노동자가 노동함이 한스러워 우는 일이 없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 자신의 성 정체성으로 인해 혐오받지 않는 세상이 펼쳐질 것입니다.

- 지금도 통일이 되어 가기만 하면 흥남부두가 바라보이는 논두렁에서 피난 전 부모

께서 묻어두셨다는 사기그릇조각, 그 집안 땅의 경계를 찾아낼 수 있다 믿는

저의 어머니를 포함해 원치 않는 전쟁으로 나뉜 남과 북의 자매형제, 수많은 인연

들이 다시 만나 한집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 세월호에 갇힌 생명들이 끝내 규명되는 진실로 부활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속에서 신께서는 여러분과 어떤 약속을 하고 계십니까? 그이의 약속이 파기 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함께 살펴보았듯 이 약속의 실현을 끝까지 믿고 그 현현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이 끝까지 존재해왔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약속의 현현이신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이러한 때에 감히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여쭙습니다. 여러분의 하느님은 여러분과 어떤 약속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신과 어떤 약속을 하고 계십니까? 그 약속 가운데 여러분과 우리 공동체가 자신의 손과 발이 되어 주시길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의 염원이 희망으로 자리 잡아 가시길 기도합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늘 부족하지만, 마음을 다해 위로합니다.

힘을 내십시오. 평안하십시오.

그리고 진리 안에서 해방의 자유를 만끽하십시오.

 

늘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십시오. 함께하십시오.

그리고 삶 가운데 꼭 한 걸음만큼의 실천을 이루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신의 약속입니다.

그러니 담대히 각자 삶의 자리에서 신의 뜻을 이루십시오.

그렇게 서로의 희망이 됩시다.

 

이제 서로를 향한 축복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가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