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의 존재

(루가 1:68-79; 이사 40:6-8; 야고 4:13-17; 루가 12:13-21)

 

안 선 희 목사(이화여자대학교 교목)

지난 주에 내린 눈과 비로 이제 나뭇잎이 거의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쓸쓸합니다. 진한 외로움이 느껴지는 시기입니다. 계절의 스산함이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때입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탄생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또 우리 마음 가운데 새로이 그리스도를 모실 준비를 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희망과 기다림의 절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근신과 참회의 절기이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갈망하며, 빛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분과 더불어 맞이하게 될 세상을 희망하는 절기이지만, 동시에 오실 그이를 맞이하기에는 부족한 자신을 되돌아보며 근신하고 참회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도래와 더불어 끝장날 인간역사와 인간실존의 마지막을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독일교회에서는 이맘때 죽은 자들의 주일혹은 영원주일로 지킵니다. 영원주일이 되면 독일 교인들은 올해 세상을 떠난 교우들, 그리고 이미 하늘나라에 간 교우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인생을 성찰합니다.

 

유학시절 독일루터교회에 다니면서 영원주일 예배에 여러 번 참석해보았습니다. 영원주일이 되면 독일교회 목사님들은 예배시간에 한 해 동안 세상을 떠나 하느님 품에 안긴 교우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합니다. 그 이름을 들으면서 저는 저와 전혀 무관한 독일인들의 죽음이지만 마음이 울적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고인의 가족이 되는 교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흐느껴 웁니다. 독일교회의 영원주일은 예배참여자들 모두가 깊은 슬픔에 잠기는 애수의 주일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인생이 계속 이어질 줄 알았습니다. 꿈도 많았고 욕심도 많았습니다. 때로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 앞에서 교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에는 끝이 있고 인생에는 마지막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올해 90세가 된 시인 김종길은 지난 해, 그가 89세가 되었을 때 황락이란 시를 발표했습니다. 황락이란 가을철에 식물의 잎사귀가 누렇게 물들어 떨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황락의 일부를 들려드리지요.

 

널따란 연잎들이/ 누렇게 말라/ 쪼그라든다.

내 뜰의 황락을/ 눈여겨 살피면서/ 나는 문득 쓸쓸해진다.

나 자신이 바로/ 황락의 처지에/ 놓여 있질 않은가!

내 뜰엔 눈 내리고/ 얼음이 얼어도, 다시/ 봄은 오련만

내 머리에 얹힌 흰 눈은/ 녹지도 않고, 다시 맞을/ 봄도 없는 것을!

 

황락은 말기에 접어든 인생의 비유어입니다. 시인은 구십 세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인생의 황락기에 접어든 셈입니다. 식물의 세계에서는 황락기를 거치면 다시 생명이 되살아나는 소생기인 봄이 찾아오건만, 인생에는 황락기에 이어지는 소생기가 없습니다. 이런 인생의 일회성이 인생 황락기의 서글픔, 애수의 근원이 되겠습니다.

 

자연과 달리 인생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데서 마음속 깊이 슬픔이 스며드는 것이겠지요. 인생이란 학교에서 두 번은 없다는 것이 아쉬움이겠지요. 하지만 이런 애수가 무겁고 어두운 침통의 상태로 이어져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맞게 될 삶의 끝자락을 담담하게 맞는 것이 하늘의 순리일 것입니다.

 

서구기독교 전통에서 영원주일이 존재해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두 가지 의미가 있겠습니다. 첫째는 통과의례적인 의미입니다. 영원주일은 삶의 단계에서 죽음의 단계로 넘어가는 신앙인을 위한 통과의례적인 역할을 합니다. 통과의례란 인생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갈 때 베푸는 의례입니다. 청소년들이 나이가 들면 주위에서 성인식이라는 통과의례를 베풀어주지요. 성인이 아니었던 청소년들이 나이가 들었다고 바로 성인에 포함되는 것은 몹시 두려운 일이지요. 성인이 되면 이제껏 부모에게 부려왔던 어리광도 더 이상 부릴 수 없고 성인으로서의 품위와 책임의식도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 혹은 종교인들은 성인이 되는 청소년들의 심리적 충격을 줄여주기 위해 성인식이라는 통과의례를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사건이나 현상 가운데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죽음입니다. 말로는 죽으면 그만이라고들 하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공포를 가져다주는 게 죽음입니다. 죽음은 차안적인 삶의 단계에서 피안적인 삶의 단계로 넘어가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죽음이 주는 두려움이나 심리적 충격을 줄이기 위한 통과의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위한 통과의례는 한두 번 시행해서는 효과가 없습니다. 죽음이란 인생의 단계는 이전의 인생단계들과는 질적으로 너무나 다른 국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서구기독교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영원주일이라는 통과의례를 베풀어온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영원주일이 지닌 통과의례적인 의미는 우리 신앙인으로 하여금 앞으로 닥칠 죽음의 순간을 미리 경험하면서 삶의 끝자락을 담담하게 맞도록 해주는 데 있습니다. 영원주일의 통과의례적 의미는 미래에 올 죽음의 순간을 미리 현재화하면서 인생의 종착지를 있는 그대로 맞이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래에 올 순간을 미리 현재화하는 것을 철학이나 신학에서는 선취라고 합니다. 한자로 선취의 선자는 먼저 선이며 취자는 취할 취입니다. 그렇다면 영원주일의 통과의례적 의미는 우리 신앙인으로 하여금 죽음의 선취를 통해 죽음이 가져올 심리적 충격을 완화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원주일이 지닌 두 번째 의미는 실존적인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실존이라고 하면 주체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실존적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영원주일은 죽음이 가져올 심리적 충격을 줄여주는 통과의례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주일 이후에 펼쳐질 인생을 더욱 주체적이고 풍성하게 가꾸어주는 역할도 합니다. 영원주일에 우리 신앙인들이 죽음을 선취하게 되면 남은 인생을 긴장감을 갖고 더 충실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원주일을 통해 죽음을 미리 경험해보았는데 신앙인들이 방만하고 보람 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저 멍하니 지내다가 허송세월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희소성을 직시하며 한번 주어진 삶을 이웃과 사회, 교회를 위해 성실히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영원주일은 삶에 끝이 있음을 마음에 새기며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마음을 다잡는 거룩한 주일입니다. 이렇듯 영원주일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심코 흘려버린 인간의 유한성, 죽음을 대면하고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도록 도와주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루가복음 본문도 인간의 유한성, 인간의 마지막을 대면하게 해줍니다. 루가복음 본문은 흔히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 불립니다. 이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분은 유산에 관한 논쟁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구약율법에 따르면 큰 아들은 아버지의 땅 전체와 아버지의 다른 재산들의 반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장자이외의 아들들은 나머지 재산들을 서로 나누어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형과 동생이 율법의 규정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려고 다툽니다. 그러다가 결국 예수님에게 와서 중재를 요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재산분배를 조정해주시기는커녕 재산에 대한 탐심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들려주시는데 이 비유가 두 번째 부분을 이룹니다. 이 부분이 그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농사가 잘되어 밭에서 아주 많은 소출을 거두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소유하고 있는 창고에 수확한 곡식들을 다 저장할 수 없게 됩니다. 이에 그 부자는 기존의 창고를 헐고 더 큰 창고를 지어 자신이 거둔 많은 곡식들을 저장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고는 공상에 잠깁니다. 새 창고가 세워지면 거기에 많은 곡식들을 쌓아놓고 떵떵거리며 살 꿈을 꿉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부자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자에게 나타나 오늘밤 그의 영혼을 찾아가시겠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서 비유는 급작스럽게 끝이 납니다.

 

이 비유가 들어있는 루가의 복음서 12장의 맥락은 종말론적입니다. 그래서 신약성서학자들은 12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교들을 해석할 때 종말론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도 종말론적인 맥락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물론 이 비유를 우주적 종말론의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것은 무리입니다. 이 비유는 개인적 종말, 그러니까 죽음의 맥락에서 해석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비유를 계속 이어나가셨더라면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까요? 부자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창고를 크게 짓겠다는 계획을 백지화했을까요? 아니면 부자가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래 계획을 고집하다가 죽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이 비유를 기록한 누가는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열린 결말로 비유를 마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누가가 이런 식으로 비유를 마무리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루가가 열린 결말로 비유를 마친 것은 그가 독자들에게 개인적 종말의 선취, 죽음의 선취를 권고하신 예수님의 입장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자에게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비유를 마무리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부자가 창고의 확장을 포기했다거나 원래의 자기 계획을 고집하다가 죽게 되었다는 것을 덧붙였더라면 비유의 초점이나 강조점이 분산돼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했을 겁니다.

 

어리석은 부자비유의 핵심은 개인적 종말의 선취, 죽음의 미리 맛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죽음의 선취를 통해 남은 인생을 보다 충실하고 진지하게 살아가라고 충고하십니다.

 

오늘 루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인간은 죽음에의 존재입니다. 죽음을 향한 존재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루하루 죽어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날 때 죽음도 함께 가져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 시인은 생일날 자신과 함께 태어난 자신의 죽음에게 미역국을 바치는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나와 함께 태어난 죽음.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죽어야만 죽음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죽음은 삶의 엄연한 구성요소입니다. 죽음은 삶과 쌍둥이 의미체계이지요. 예수님이 염두에 두는 인간은 죽음과 관계를 맺으며 죽음을 자신의 한계상황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미래에 다가올 죽음을 미리 앞당겨 경험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옛날 로마제국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이 얼굴에 붉은 칠을 한 채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서 로마시내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개선장군의 마차 뒤에는 노예들이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이 노예들에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외치도록 시켰습니다. 메멘토 모리란 우리말로 번역하면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것입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개선장군 얼굴에 붉은 칠을 해주는 것은 개선장군을 신의 반열에 올려 경의를 표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뒤에 따르는 노예들에게 메멘토 모리를 외치게 한 것은 개선장군이 오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한 장치였던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마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개선장군에게 이런 인생의 엄연한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던 것입니다.

 

어디 로마의 개선장군처럼 지체 높은 사람들만 죽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자신이 죽음에의 존재임을 상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죽음에의 존재로서 인간에게 지금 자신이 어떤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지가 중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앞으로 어떤 인간으로 존재할 것인지를 결단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라는 결단이 지금의 자기모습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은 어떤 결단을 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답변하려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야고보의 편지 본문과 이사야서 본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야고보의 편지 414절과 15절을 펴보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야고보서 414, 15절입니다.

 

당신들은 내일 당신들의 생명이 어떻게 될는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만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이런 일 저런 일을 해보겠다." 하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는 우리 신앙인이 유한성을 자각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을 결단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에 맞춰 일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도 야고보와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사야서 407절과 8절을 펴보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사야서 406절 하반절부터 7, 8절입니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스쳐가는 야훼의 입김에.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이사야는 우리 신앙인이 풀이나 꽃과 같이 금방 사라질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야고보와 이사야의 이런 말씀은 우리 신앙인에게 참으로 유익한 권고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구현하기 위해 정진하고 또 정진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 각자가 나 자신의 유한성, 나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보편적인 죽음을 인정합니다. 모든 인간의 죽음은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명제를 이야기하면서도 나의 죽음은 예외적인 현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각자는 나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 루가복음 본문에서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죽음을 이야기하시지 않습니다. 특정한 인간, 그러니까 어리석은 한 부자에게 그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죽음에의 존재라고 하는 경우 그때의 죽음은 무엇보다도 너의 죽음도 아니며 너희들의 죽음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죽음도 아닙니다. 이때의 죽음은 무엇보다도 나의 죽음입니다. 내가 죽음에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내가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화려함과 풍족함으로부터 돌아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세상에서 살지만 그 관심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비록 땅에 살지만 하늘의 뜻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땅에서도 하늘을 살아갑니다. 땅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와 달리 재물에서 자유롭습니다. 세속적인 것의 가치를 상대화시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오늘을 살지만 그 관심은 영원한 하느님입니다. 때문에 그의 오늘은 그냥 오늘이 아닙니다. 영원에 잇대어 있는 오늘입니다. 그래서 오늘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와 달리 오늘에서 자유롭습니다. 오늘의 가치를 상대화시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하늘과 영원이 모든 피조세계가 끝난 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하늘과 영원이 역사의 종말 이후에만 존재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지극히 내세적이고 타계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하늘과 영원은 오히려 땅과 오늘에 잇대어 있습니다. 땅에 살지만 땅만 생각하지 않고 하늘을 믿으며 땅에서도 하늘에서 사는 것처럼 살면 땅도 하늘이 됩니다. 오늘을 살지만 오늘만 생각하지 않고 영원을 믿으며 오늘을 영원처럼 살면 오늘도 영원이 되는 것입니다.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혹여 여러분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매 순간 누군가의 죽음의 소식을 접하시면서도 자신이 죽음에의 존재임을 애써 외면하며 사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만일 교우 여러분이 나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보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죽음에의 존재임을 외면하며 사신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을 뿌리부터 다시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죽음에의 존재, 유한한 존재로 규정하시는 것도 알고 보면 우리로 땅과 오늘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땅과 오늘을 상대화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땅과 오늘을 하늘과 영원에 이어주기 위함입니다.

 

하늘과 영원에 잇대어 살면 땅에서 일어나는 삶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됩니다. 부유하면 부유한대로,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성공하면 성공한대로, 실패하면 실패한대로 살 수 있습니다.

 

하늘과 영원에 잇대어 사는 신앙인에게는 티가 나지 않습니다. 부해도 부한 티가 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가난한 티가 나지 않습니다. 성공해도 성공한 사람의 티가 나지 않습니다. 실패해도 실패한 사람의 티가 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지금 경제적으로 넉넉하십니까? 그래서 세상에 취해 있으십니까? 안락함에 빠져 있으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지금 경제적으로 가난하십니까? 그래서 낙심 가운데 계십니까? 누군가를 원망하고 계십니까?

 

이제 마음을 돌이키고 신앙을 새롭게 합시다. 땅과 오늘만 바라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영원하신 하느님을 바라봅시다.

 

지금 세상에서의 삶이 좋다고 그것에 취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안락하고 풍족하다고 교만할 이유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이미 죽음을 경험한 우리에게 지상에서의 삶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세상에서의 삶이 비루하다고 안달할 이유도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 세상에서의 삶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이 아직 멀다고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선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선취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과 영원을 맛볼 수 없습니다. 고작해야 땅과 오늘에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향린교회 교우들 모두가 죽음의 선취를 통해 하늘과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