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폭력에 짓밟힌 인권

스바니야 3:14-20; 12:2-6; 4:4-7; 3:7-18

 

[세계 인권의 날에 역행하는 남한]

 

지난 주 금요일 1210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인권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일 서울 한복판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민주노총 한상균위원장이 교통방해죄로 구속영장이 나온 상태에서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노동악법 저지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조계사로 피신을 하였는데, 한 달 가까이 수천 명의 경찰이 조계사를 에워싸고 경내 침탈이 예고된 가운데, 조계사가 또 다시 군화 발에 짓밟히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스스로 걸어 나온 날입니다. 올해 유엔 인권위원회의 의장으로 한국인이 선출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날 서울 한 복판에서는 범죄라고도 말하기 힘든, 집회와 시위 과정에서 경찰이 제멋대로 부과하는 교통방해죄로 이 나라 약자들의 인권을 대변하는 상징 인물이 체포를 당한 것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쉽게 찾아보기 힘든 일이고, 우리나라에서도 7,80년대 군사독재 시절을 제외하곤 거의 없었던 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1980년 우리나라에서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시민항쟁이 일어났을 당시 공산주의 국가인 폴란드에서도 국가폭력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이 쟁투를 시작했고, 이 일의 중심인물이 그다니스크 레닌조선소 전기공이었던 바웬사였습니다. 힘든 투쟁을 통해 정부로부터 파업권을 얻었지만, 이후 정부는 계엄령을 공포하고 노조 지도자들을 구속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굴복하지 않는 민중들의 저항에 부딪혀 공산정부는 노조의 권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 투쟁의 결과로 자유노조 위원장을 지냈던 바웬사는 노동자로서는 세계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이후 대통령으로 선출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30년 전 공산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일인데, 하물며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하는 오늘의 남한 땅에서는 노조 활동은 위축될 대로 위축이 되어 단지 시위 주도를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위원장이 구속을 당한 것입니다. 약자들의 최종 권리는 집회와 시위를 통한 표현의 자유입니다. 권력은 폭력 집회를 말하지만, 이미 사회와 노동 구조 자체가 힘 있는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폭력인 것입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더 많은 열악한 노동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의 노조 가입률은 10.4%로 오이시디국가 중 최저입니다. 빈자들은 수십 년 살던 집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겨도 어디에다 하소연할 곳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최근 우리와 같은 서울노회 회원 교회인 불광동에 있는 삼일교회는 40년이나 한 곳에 존속하여 왔지만, 종교부지로 등록이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개발업자들이 깡패 용역을 동원해서 교회내의 모든 기물을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예배당을 파괴하여 이 추운 겨울 거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자본의 폭력에 교회마저 이렇게 무참하게 짓눌리고 있습니다. 삼성물산은 뭐라고 얘기하고 있는지 아세요. 법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현재 남한에서의 권력의 힘은 법의 이름으로 자본가와 기업주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지금 국회에서 통과하려는 노동법의 골자는 비정규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현재 2년 법을 4년으로 연장하겠다는 것이고 고용유연화라는 이름으로 해고를 보다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법입니다. 결국 노동자들의 단물만 쏙 빼어 먹고 기간이 차면 고장 난 기계 부품 버리듯이 그냥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날로 심화되어가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아야하는 기업가들의 고민 또한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만, 노동자를 기계 부품 다루듯이 하겠다는 발상은 전연 잘못된 것이고, 이를 국가가 법으로 방지해야 하는데, 오히려 박근혜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 선거자금을 내어 놓는 재벌들의 편에 서겠다는 것입니다. 국가폭력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의 혁명적 선언]

 

성서의 첫 장인 창세기 1장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책의 서문이 그러하듯이 창세기 1장은 성서의 핵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정리한다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야훼 하느님이야 말로 온 우주와 세상을 만드신 곧 창조주임을 고백하고 나서 선언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남자와 여자는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먼저 만들어지고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1장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태어납니다. 곧 남녀평등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갈비뼈의 의미 또한 여성이 남성의 갈비뼈의 가치밖에 없다는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하나됨을 상징하는 말이요 갈비뼈라는 히브리 언어 속에는 옆, 함께 그래서 평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도 중동 지역은 남녀 차별이 가장 심한 곳인데, 그런 곳에서 수천 년 전에 남녀평등을 주장했다는 것은 혁명 그 이상입니다.

 

그리고 더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남자와 여자는 둘 다 공히 하느님의 형상을 띠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인권이 곧 신권이라는 인권천부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인권천부설은 18세기 영국의 로크나 프랑스의 루소 사상가들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배우지만, 아닙니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성서가 선언한 주장입니다. 창세기 1장이 기록되던 당시 중동의 제국들 애굽이나 바빌론이나 앗시리아의 제국들이 선포했던 것은 오직 통치자 왕만이 신의 형상을 띠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말은 곧 신의 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그 첫 장에서부터 모두의 말이 노예를 포함해서 모두의 말이 신의 말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은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이를 단지 선언만으로 그치질 않고 이를 실행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의 법을 설정하는데, 그것이 안식일 법입니다. 하느님이 6일을 일하고 7일째에 쉬셨는데, 너희 인간들도 7일째에는 모두 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피곤해서 쉬었겠습니까? 이는 당시 노예를 비롯한 약자들을 위한 인권보호법입니다. 일하는 노예들이 쉰다면 당연히 소와 말과 같은 동물들도 쉬게 되는 것입니다. 동물의 쉴 권리까지 주장하고 있는 것이 성서입니다. 그리고 노예와 동물의 쉴 권리를 보장하는 이 안식일 제도는 땅을 보호하는 안식년 제도로 나아가고 그리고 급기야는 노예 해방과 빚 탕감이 일어나는 희년제도로 나아갑니다. 땅도 생명이고 사회 구조 또한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 제정은 단순히 일주일에 하루 한번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라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그 온전하고 평등한 사회 구조로 바꿔내라는 명령이 담긴 날입니다.

 

[예수의 희년 선언]

 

예수께서 행하신 하느님 나라 운동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 ! ! 법을 지켜야 한다는 권력자들의 주장에 사람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을 차별하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이 있다면 그건 하느님의 법이 아니라, 인간 권력이 만든 악법이다. 너희 강도들아! 여우야! 회칠한 무덤 같은 놈들아! 회개하지 않으면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는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장애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몸을 팔아서 살아가야 하는 여인들과 이웃들로부터 매국노라 침 뱉음을 당하며 살아가야 했던 세리들을 친구삼아 함께 먹고 마시고 하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겉으로 드러난 저들의 모습과 직업을 넘어서 저들 속에 담긴 하느님의 형상을 통해 너희들이야 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루가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처음 외치신 선언이 곧 희년을 회복하자는 선언이었습니다. 희년 선언은 인간이 빈손으로 태어났던 그 모습 그대로 지금의 부익부 빈익빈을 더욱 심화시키는 세계 자본주의의 악한 구조를 깨고 평등 사회를 회복하자는 선언입니다. 프란체스코교종이 지난 주 베드로성당 문을 열고 자비의 희년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심판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성문을 지나는 우리가 신비로운 사랑과 온유함을 느끼고, 모든 두려움을 버리고,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은총의 즐거움 속에 살 수 있도록 해 달라. 성문을 지나면서 우리는 (강도만나 피 흘리는 길거리의 사람들을 돕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자비를 베풀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루가복음서의 말씀은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말씀이지만, 4복음서는 모두 공히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함으로 예수와 요한은 근본은 다르지만, 일에 있어서는 하나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아 천국을 가겠다고 나온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닥쳐올 징조를 피하라고 누가 일러두더냐? 너희가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 또한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세리 너희들도 정한 대로만 받고 권력의 힘을 이용하여 더 받아내지 마라. 군인들 너희들 또한 무슨 전쟁위협이니 국가안보니 운운하며 백성들에게 겁을 주어 신세대전투기니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하면서 젯밥에만 눈이 팔려 다른 나라보다 훨씬 비싼 값에 구입하는 속임수를 쓰거나 커미션 몰래 받아먹지 말고 자기가 받은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요즘 사회는 직업군도 훨씬 다양해져 있고, 복잡한 구조로 형성되어 있습니다만, 인간욕망과 충족이라는 기본구조는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백남기 농민을 위한 우리의 기도]

 

농민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20년 전에 비해 물가는 몇 배나 뛰었고 비료 값도 몇 배나 올랐지만, 미국에서 대량으로 들어오는 저가의 쌀로 인해 20년 전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농민들이 더 이상 못살겠다고 서울로 올라와 거리시위를 하였습니다. 농민들이 거리 시위 한번 하려면 우선 하루를 까먹어야 합니다. 오고가고 교통비 식비 보통 10만원 없어집니다. 농민들에게 10만원은 도시민들 30만원 50만원에 해당하는 큰돈입니다.

 

여러분이 추운 겨울날 하루 시간 없애고 돈 50만원 드는 거리 시위에 그냥 나서겠습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절박함에 몰렸을 때 나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정부는 선거자금에 도움이 안 되는 농민들 보다는 삼성 현대 재벌 기업가들을 편들어 한중 FTA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외침을 하는 농부에게 물대포를 쏘아댔습니다. 69세의 백남기 농민이 쓰러져서 한 달여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분 30년 이상 농부로 살아왔지만, 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요, 그것도 법대를 나온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 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법이라고 하는 게 약자의 권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분이시기에 국가가 백성들의 생명을 지켜달라고 거리에 나섰는데, 오히려 국가가 차벽으로 입을 막고 물대포로 살인을 한 것입니다.

 

백남기님 얼마나 이 땅의 민주를 원하셨기에 딸의 이름을 민주화라고 지으셨을까요? 막내딸 민주화님이 체온이 희미한 아빠의 손을 잡고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오늘 아빠의 따뜻한 손을 이렇게라도 더 잡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에 오 분 정도 볼 수 있는, 더 이상 웃지도 울지도 않는 상처만 가득한 얼굴이지만 온기 있는 이 모습이라도 더 오래 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겐 흉할지도 모르는 마르고 힘없는 모습이지만 난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만으로도 아빠가 아직 우리 곁에 있다며 안심한다. 엄마가 아빠를 쓰다듬으며 이런 모습도 얼마 못보는거면 어쩌나 하며 우는데 심장이 아프다. 난 아직 준비가 안됐다. 마음은 마음대로 안되는거구나. 아빠. 기다려요 오늘도...”

 

[닭 모가지와 새벽]

 

4.19혁명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에서, 876월항쟁은 이한열의 죽음에서 촉발되었습니다. 박근혜씨는 국가폭력에 의존한 정권이 어떻게 몰락했는지를, 아니 자신의 아버지 박정희가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을 힘으로 누르려다가 오히려 부하로부터 살해당했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민심이 천심이라고 했습니다. 불타오르는 민중의 열망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독재자는 이러한 경우 밀리면 죽는다는 생각 때문에 더한 독재를 폅니다. 이를 성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바로왕의 마음을 더 강퍅하게 하셨다는 신정론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역사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저로서도 오늘 박근혜정부가 밀어붙이는 막가파식의 정국을 보면 이렇게 밖에는 달리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 하늘의 부름을 받은 김영삼전대통령이 유신독재시절 하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 꼬끼오! 새벽이 오고 있다는 알림의 소리는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새벽 그 자체는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독재의 역사를 보면서 왜 우리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가? 어떻게 해서 우루과이란 나라는 국민소득은 우리보다 훨씬 작아도 행복지수는 우리보다 훨씬 높고 남미의 스위스라 불리는 것일까? 이번 UN파리국제기후회의에서도 이미 절반이 넘는 전력을 녹색에너지로 바꾸었고, 가까운 미래에 모든 전력을 녹색에너지로 바꾸겠다고 하여 세계 언론의 박수갈채를 받았는데... 왜 우리나라는 여전히 핵발전소를 짓겠다고 고집을 하는 것일까요? 지구환경이야 어떻게 되든 지금 당장 돈이 되는 것만을 찾아나서는 경제동물로 전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세계 언론들은 지금 박근혜정부를 아버지의 유신독재시대로 돌아간 독재정부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민주화와 경제를 동시에 이룩해낸 나라로 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던 나라가 이제는 바닥까지 내던져졌습니다.

 

[‘헬조선’]

 

2015년에 만들어진 신조어이면서 지금 젊은이들 가운데 가장 유행하는 단어가 무슨 단어인지 아십니까? ‘헬조선이라는 단어입니다. 지옥을 뜻하는 영어단어 에 남한에서는 금기어인 조선을 합성한 이 단어는 단어 자체만으로도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사회구조와 분단으로 인한 비극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거야 말로 민중의 살아 있는 유언비어의 언어로 박근혜정부를 조롱하고 있지만 국가원수모욕법이나 국가보안법을 들여댈 수가 없습니다.

 

지난 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내놓은 ‘2015 삶의 질(How’s Life?)’ 보고서에 왜 그러하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려울 때 의지할 친구나 친척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사회관계 지원항목에서 OECD 34개국 가운데 최하위를 차지했습니다. 예전에는 이웃사촌이라는 좋은 말이 있었습니다.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웃이 없어졌습니다. 각자도생입니다. 이웃도 경계의 대상입니다. 수상하다 싶으면 고발의 대상이고, 층간소음으로 인한 고소의 대상입니다. 재산이 없으면 부모마저도 나 몰라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건강에 만족하십니까? 하는 질문에서도 꼴찌였으며, 밤에 혼자 있을 때 안전하다고 느끼냐?는 항목에서만 겨우 28위였습니다. 어린이가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도 하루 48분으로 최하위였으며 (OECD 평균은 151), 이 중 아빠가 같이 놀아주거나 공부를 가르쳐주거나 책을 읽어주는 시간은 하루 3, 돌봐주는 시간도 하루 3분에 지나지 않았다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의 OECD 평균은 47). 이건 아빠 책임만은 아닙니다. 이 사회가 아빠를 저녁 시간에 집에 돌아가도록 허락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만족도는 최하위권인 29위입니다.

 

이런 나라에서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만, OECD 평균보다 3배나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나라에는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또 하나의 비극은 무엇인가요? 한 언론인은 최근의 한 칼럼에서 지난해 미국인 총기사망자는 12563, 한국인 자살자는 13836명이었다. 한국인에게는 총이 없지만, 한국 사회 자체가 대량살상무기다.”라고 썼습니다. 남북분단과 적대감. 이것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대량살상무기입니다. 테러리스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구조 자체가 테러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삶에 어느 정도 만족하십니까? 물론 100%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가난하고 불행하다 하더라도 그 사회가 돈이 많거나 적거나 권력이 있거나 없거나 법이 공평하게 적용이 되는 사회라면 그리고 누구나 젊어서 열심히 일하면 어느 정도의 노후의 삶이 보장되는 사회라면 그래서 자살충동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만족할만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기에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의 벽을 깰 수 없기에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난 주 어처구니없는 애기를 들었습니다. 10년 동안 상업과목을 가르치면서 고대사 박사과정을 수료하여 역사를 가르친 지 이제 9개월밖에 안된 교사가 국정교과서 집필진으로 선출이 되자 좋아서 자랑하려고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난 주 이 사실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사회적 파문이 일어나자 곧바로 사퇴를 하였습니다. 지금 47명의 국정교과서 집필자 명단이 위원장을 제외하곤 극비에 붙여져 있는데, 이게 무슨 군사작전입니까? 자신들도 부끄러운 짓인 줄 아니까 이름을 감추는 것입니다. 옛말에 서울역 지게꾼도 순서가 있다고 했습니다. 거리의 잡배들도 이런 짓거리는 안합니다. 하물며 국정교과서를 만드는 일을 비밀리 해서야 되겠습니까? 국정이라는 단어를 떼고 개인교과서라고 명칭을 바꾸어야 마땅합니다. 과정이 잘못된 일은 그 결과도 잘못되게 마련입니다. 역사교육은 장차 나라의 주인이 될 학생들의 생각을 좌우하는 일로 백년 오백년의 미래역사를 바라보고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2년 있으면 물러날 그 한 사람 권력자의 입맛에 맞춰 진행되고 있는데, 이건 나라가 아닙니다. ‘헬조선입니다.

 

[‘수저론을 넘어 역사 변혁의 주체]

 

몇 년 전 2,30대 젊은이들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고 해서 “3포 세대라는 말이 생겼는데, 얼마 전부터는 아파트와 인간관계도 포기하여 5포 세대가 되었고, 이제는 꿈과 희망마저도 포기하여 7포 세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 헬조선이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한 또 다른 용어는 수저론입니다. 물밑바닥을 재는 수학의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매끼 사용하는 수갈 수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서양 속담에 왕족 귀족들의 자손들을 가리켜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자들이라고 하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은수저 위로는 금수저, 다이어몬드수저가 나왔고, 아래로는 동수저에 이어 심지어는 흙수저라는 말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알바를 몇 개씩 뛰어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년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사용하는 자조 섞인 용어입니다. 청년이 청년인 것은 꿈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이 죽어 있는 사회의 미래는 보나마나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교회는 우리는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실어주고자 청년마중물 희망프로젝트를 시작했고 그 첫 번째 프로젝트로 베트남평화기행을 준비하고 있고, 이미 18명이 참가 등록을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이런 얘기를 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청년들이 이제는 자기 혼자 열심히 한다고 자신의 삶이 좋아지는 것이 아닌 것을 알기에 삶의 대안 희망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올해 서울대에서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흘 만에 53%이상의 투표 참여를 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18년 만에 처음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혼자 열심히 아무리 스펙을 싼다 한들 미래에 변화가 없을 것임을 알아챈 것입니다. 사회 구조 변혁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에게 기도와 경제로 힘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아기 예수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절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일손을 놓고 언덕너머를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몸단장을 하듯이 내 안에 있는 세속적 욕망을 제거하고 나아가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를 하나씩 하나씩 고쳐나가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모든 것을 고쳐주시겠지 하며 손을 놓고 기다리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로또 당첨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신앙행위가 아닙니다. 이 땅의 권력자들은 우리가 이런 로또 신앙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니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관심하지 말고 죽음 후에 영혼이 가는 천국 신앙만 갖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가 교회 안에서 기도한다고 하여 저절로 오는 것이라면 아기 예수가 마구간에 태어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헤롯은 그를 죽이려고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마리아와 요셉 또한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을 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예수 또한 갈릴리에 가서 힘겹게 복음운동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 변혁의 주체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를 기다린다 함은 우리 모두 또한 역사의 주체자로 나서겠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는 허망한 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꾸면 꿈으로 끝나지만, 같이 꾸면 현실이 됩니다. 예언자 스바니야가 가졌던 오늘의 꿈, 함께 꾸십시다.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니 다시는 화를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그 날이 오면 다시는 수모를 받지 않으리라. 너를 억누르던 자를 다 없애버리고 절름발이는 고쳐주며 길 잃은 자들을 찾아내리라. 그 때가 되면 온 세상에서 내 백성은 칭송을 자자하게 받으며 이름을 떨치리라. 그 때가 되면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