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사랑 그리고 감사

90:1-6; 34:1-8; 3:12-17 2:41-52

 

교회력은 오늘을 성탄절 첫번째 주일이라고 부르지 송년주일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25일 성탄절로부터 2주간을 성탄의 기간으로 정하고 계속하여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2015년 마지막 주일이면서 우리 교회는 올해 우리 곁을 떠나가신 교우들과 가족들을 추모하는 성도추모주일로 함께 지킵니다.

 

성탄절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함께 우리 곁을 떠나간 성도들과 사랑하는 가족을 추모하는 슬픔으로 넘어가는 일이 너무 성급합니다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 안타깝습니다. 500년 전까지만 해도 중세 유럽에서는 성탄절과 새해는 같은 날에 지켰습니다. 그러다 성탄절의 의미가 퇴색하여 가기에 성탄절과 새해를 나누면서 새해를 아기 예수 탄생 7일째가 되는 곧 예수의 할례 날을 정하여 지켜온 것이 오늘날 세계가 지키는 새해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본래는 성도추모와 관련이 없기에 제1성서의 본문 말씀은 성도추모와 관련한 말씀으로 교체를 하였고, 2성서의 말씀은 교회력을 따른 것입니다. 오늘의 하늘뜻펴기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하겠습니다. 한해를 보내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는 말씀은 제가 전하고 성도추모에 관련한 말씀은 최명수장로님을 추모하여 김태준집사님께서 하시겠습니다. 지난 장례식장에서도 하시긴 하셨지만, 전체 교인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다시 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졌고, 다른 한분은 송정바우집사님이십니다. 송정바우집사님? 고개를 갸우뚱거릴 분이 많은실텐데, 얼마 전 송바울집사께서 이름을 개명하셨습니다. 송정바우집사님 아버님은 35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올해 하느님 곁으로 가신 성도들을 추모하지만, 실은 우리 마음속에는 기억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랑하는 이들을 함께 추모하고 있습니다. 이시간 저도 2년 반 전에 돌아가신 제 아버님을 마음속에 다시금 그리듯이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송바울집사님이 아버님을 그리는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골로새서 말씀에서 한해를 보내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는 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를 간추리면 용서와 사랑 그리고 감사입니다. 이 주제에 따라 한해의 우리 마음을 돌아보면서 2016년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라고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힌 다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따뜻한 동정심과 친철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 주고 피차에 불평한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를 강조합니다. 기도의 본이 되는 주의 기도문에는 사랑이란 단어도 감사란 단어도 나오지 않지만, 용서는 나옵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많은 잘못을 범하기에 수시로 하느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라고 부탁하고 있지만,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이 순서를 바꿔서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어느 것이 옳은 순서일까요? 바울이 말한 대로 하느님의 용서의 힘에 기초해서 우리가 우리의 형제자매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먼저 형제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준 다음에 자신의 잘못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전 지금도 주기도를 암송할 때에 이 구절에서 종종 침묵합니다. 내 안에 용서하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에 무슨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요? 사실 바울도 자신이 누구인지 좀 더 성찰하였더라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는 이미 우리가 하느님께서 뽑아 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성도들이며 사랑을 받는 백성들임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안에 용서의 힘이 이미 있다는 말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를 얼버무리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상처에 더 이상 매이지 않고, 나의 현재를 과거의 부정의 힘에 의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하나의 선언이자 하느님이 이끄시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어두웠던 과거를 떨치고 일어서겠다는 결단의 행동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에 용서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산상수훈 말씀 마지막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늘 어버이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그냥 완전하라도 아니고 하느님같이 완전하라. 이거 또한 말이 되는 얘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용서를 생각할 때 용서의 대상으로 나에게 아픔을 준 상대를 먼저 생각하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도 이웃 사랑 이전에 자기 사랑이 먼저입니다. 네 몸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여라. 용서 또한 자기 용서가 먼저 있어야 다른 이의 용서가 가능한 것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일 이 먼저입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지 않으면 자기 용서가 일어나지 않고 자기 용서가 없으면 다른 이의 용서 또한 일어나지 않습니다. 히브리말에 완전하라는 단어의 또 다른 뜻은 있는 그대로입니다. 하느님께서 있는 그대로 존재하듯이 너희들 또한 있는 그대로 존재하라는 말로 이해한다면 하늘 어버이같이 완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올 한해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든지 새해를 제대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쉬움과 후회를 떨쳐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불평과 원망 또한 떨쳐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있다면 이점에서 용서와 사랑 그리고 감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30년 전 유행했던 바램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가사는 이러합니다.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등에 짊어진 삶에 무게가 온 몸을 아프게 하고 매일 해결해야 하는 일 땜에 내 시간도 없이 살다가 평생 바쁘게 살아왔으니 다리도 아픕니다. 내가 힘들고 외로울 질 때 내 얘길 조금만 들어준다면 어느 날 갑자기 세월에 한 복판에 덩그러니 혼자 있진 않겠죠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한마디 지친 나를 안아주면서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준다면 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준다면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것이다라는 말과 우리네 인생이란 늙어가는 것이 아닌 조금씩 익어간다는 표현이 마음에 남습니다.

 

왜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할까요?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물질 욕망과 소유로 인해 우리는 사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손 안에 든 것이 빠져나갈까봐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그러자 이 두려움을 잊기 위해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뭐든지 바쁘다는 것으로 핑계를 삼지요. busyness 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에는 바쁨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세상 성공에 분주함이 필요조건이 되었습니다. 요즘 거리를 지나가면서 창문에 자주 보이는 풍경입니다만, 커피집에 연인 둘이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저의 고등학교 친구들 카톡방이 있는데, 어제 보니까 한명이 자신은 지금 성탄절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고 하면서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을 뒤늦게 알고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야 그거 예배 시간에는 좀 꺼놓고 살수 없냐?’ 하느님과 대화하겠다는 예배 시간에도 친구들끼리 카톡을 하는 사람. 몸은 이 자리에 있지만 생각은 전연 딴 곳에 가 있는 상태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와 영의 자기 분리 속에 어떻게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일요일에는 집에서 아침에 출발할 때부터 아예 전화기를 끄는 습관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핸드폰을 끄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느님을 볼 것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성탄절과 연말만 되면 사랑의 선물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산타들의 행렬 기사를 보고 마음이 절로 흐뭇해졌습니다. 24일 새벽 전북 완주군 용진읍사무소 민원실 앞에 20kg짜리 쌀 30포대를 두고 사라졌습니다. 8년 전부터 해마다 이때쯤이면 쌀을 두고 사라지는 쌀천사가 방문한 것입니다. 1억원이 넘는 돈을 기부하는 대구키다리 아저씨는 올해도 어김없이 무명으로 12천만원을 대구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달했습니다. 부산 초량6동 주민센터에는 어려운 학생들을 우선으로 사용해달라는 쪽지와 함께 쌀 100포대가 전해졌고, 해운대의 주민센터에는 40대 중반 남성이 놓고 간 종이 상자에 동전이 가득합니다. 동전은 모두 12천여 개, 99610원입니다. 10년째 동전을 기부해 온 '동전천사'입니다. 충북 제천에는 연탄 2만장 보관증이 전해졌는데, 이 천사는 12년째 연탄만을 전달하는 연탄천사이구요. 의정부에서는 바나나천사, 충북연탄창고에는 연탄천사가 몰래 다녀갔습니다, 수원에서는 허름한 옷차림의 70대 부부가 1년을 모은 돈이라며 100만원을 전달하였습니다. 100만원이 100억으로 보이더군요.

 

지난 주 저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80세의 이웃 교회 장로님께서 500만원을 현찰로 주면서 목사님 필요하신 일에 쓰세요합니다. 죽기 전에 재산을 여기저기 나누는 중이라고 하면서 제가 스무 번째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식들에게는 남기지 않으려고 한답니다. 여러분도 그러하시지만, 저도 매달 만원에서 10만원까지 정기 후원하는 사회단체가 칠팔군데가 됩니다만, 정작 어려운 활동가들을 만나서는 밥이나 한 끼 사주지 다른 건 별로 해주지 못하였는데, 올해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있다 새교우가입식에서 유언장을 써서 내게 됩니다만, 작은 재산이라도 죽기 전에 미리미리 나누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행동입니다. 저희 교우들 가운데도 재산의 일부를 교회에 기증하신 분도 계시고 고 박영숙권사님은 살림이빌딩을 교회에 기증하셨습니다. 성공이라고 하는 것이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일이라면 이것보다 더 성공적인 삶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한다고 바울선생 또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나눔을 통해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감사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감사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데살로니카전서 5장에서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어떤 처지는 감사가 나오지 않는 힘든 상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거울을 쳐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얼굴에 만족한 기쁨의 미소가 있다면 감사하는 사람일 것이고 찡그리고 어두운 얼굴이라면 불평과 불만에 차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발칸 산맥의 장미에서 나오는데, 그런데 이 장미꽃을 따는 사람들은 새벽 2시경에 딴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때 따는 장미가 가장 향기를 많이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장 어둡고 가장 추울 시간에 장미의 향기가 가장 많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올해 생각지 아니한 여러 일들로 많이들 힘드셨지요? 여기까지 오시느라고 애 많이 쓰셨습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진한 향기를 만들어내시기 바랍니다. 일설에 의하면 하느님도 초저녁 잠이 많으시어 새벽 2시경에 자리에서 일어나신다고 하더군요. 지금 옆에 있는 분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시면서 수고했어요 교우님 칭찬과 격려를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고 최명수 장로님을 추모하며] -김태준집사-


지난 127일 우리는 향린교회의 어른의 한분으로, 재야의 통일 운동에 앞장서 오신 최명수 장로님을 영결(永訣)하고, 오늘 추모 예배를 봉헌합니다. 92세까지 큰 병 없이 건강을 누리신 것도 쉽지 않은 장수의 복일 터인데, 잠자리에 드신 채 조용히 천당 길로 옮겨 가신 복이야말로 세상에서 부러워할 고종명(考終命)이며, 하늘이 내리신 장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잠언>>에서는 장수하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면서, 욕심을 버리고(잠언28;16) 하느님을 경외하며(잠언10;27), 부모를 공경하라(6;2-3)고 가르치셨지요. 최명수 장로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어머니 한 순복 여사의 뱃속에서부터 전라도에 처음으로 세워진 목포 양동교회(1897설립) 교인이었다 하고, 중학교 이후는 일본에 유학하여 노력 동원으로 고된 단체생활 속에서도 건강과 신앙으로 살았다고 고백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최 장로님은 90이 넘은 고령에 이르러서도 교회에 나오실 때는 동대문에서 전철을 내려 명동 교회까지 사시사철 걸어서 오가시고, 이런 걷기의 생활화는 그분의 평생 이어진 부지런함과 장수의 비결이었음에 틀림없을 터입니다.

최명수 장로님과 나는 일찍이 1980년대에 초동교회 교우로 만났습니다. 우리 가족은 그때 을지로 4가에 살면서 막내아들 효민 집사의 아기 세례를 앞두고 초동교회로 나갔는데, 그때 초동에 출석한지 오래지 않은 최 장로님과 만났습니다. 최 장로님은 민중극단의 설립 단장으로 이름을 떨치는 배우이며 영화배우로도 활동하는 이름난 연극인이었고, 주태익 황금찬 등 문인들과 문화활동 위원회를 만들어 교회연극을 활성화하는 등 자주 어울렸습니다.

그리고 초동교회가 종로 3가 쪽으로 옮겨가고,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가 향린으로 옮긴 것이 19912월 무렵, 향린교회는 통일운동으로 수감 중이던 홍근수목사님의 석방운동과 공안정국을 규탄하는 거리투쟁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그리고 향린은 통일운동에 힘써서,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교회갱신선언과 함께, <<통일공화국 헌법>>(초안)을 만들고, 지금 서울시장이 되어 있는 박원순변호사 등 전문가를 초청해서 초의 평가회를 열던 시점이었습니다.(<<향린40년사>>참조)

 

최명수 장로님은 향린으로 옮긴 저를 댁 근처 도봉산까지 불러 좋은 밥을 사주시면서 어서 초동으로 돌아오라고 권하셨는데, 몇 년 뒤, 어느 주일에 최장로님 스스로가 향린으로 나오셨어요, 최장로님은 1988년에 초동의 장로 임직을 하신 분이어서 이번에는 내가 장로님 어서 본교회로 돌아가시라고 밥도 사 드렸는데, 최 장로님은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향린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최 장로님과 나는 우연히 띠 동갑으로 소띠여서 고집불통, 천당에 가셔서도 향린교우로, 오늘 향린의 국악 예배에 무릎장단을 치고 계시겠지요. 최장로님 얼쑤!

 

지금 저는 한국영상자료원이 만든 <<최명수, 구술 생애사>>라는 책을 들고 나왔습니다만, 최장로님은 한국 영화사에서도 길이 남을 역사가 되셨습니다. 특히 최장로님은 조국 통일에 대한 염원이 대단하셔서, 민간 통일 단체로 남북평화재단과 협력하여 <통일을 준비하는 사람들(통준사)>을 창립하고 그 기틀을 마련해 오신 공적은 가장 기념할 공적입니다. 장로님은 이 일을 우리 후배들에게 남기시고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셨지만. 이 일은 그분의 신앙정신으로 우리 향린이 앞장서서 이어가야 할 그분의 유산이라 믿습니다.

 

장로님이 92살까지 건강하신 삶을 사셨으니 천수(天壽)를 누리시고, 새벽 편안히 잠든 채 숨을 거두셨으니 이야말로 고종명으로 하늘 복이 크신 분입니다. 장로님은 향린교회와 초동교회의 장례식과 위로예배는 물론, 최고령의 연극인, 탈렌트로 연극협회 등의 추모 속에 저 세상으로 옮기셨으니 영광이 크다 할 것입니다. 특히나 구순을 훌쩍 넘기신 노구(老軀)로 노심초사 민족의 평화 통일에 헌신해 오신 통일꾼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런 안타까움과 책임을 넘겨받은 후배들은 그 평화통일의 염원과 정신을 되새기며 통일을 이루어 가야 할 터입니다.

 

최명수 장로님은 일찍이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의 축복 속에 자랐고, 평생에 신앙과 교육과 예술로 봉사의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고인의 이런 삶과 신앙을 기리며, 장로님이 앞장서서 닦아놓으신 평화 통일을 우리의 신앙으로 이어받는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끝으로 최명수 장로님이 남기신 통일의 염원으로, <민족혼을 회복하라>는 글의 한 구절을 이끌어 오늘 향린 추모 예배의 한 다짐을 삼고자 합니다.

 

우리가 희구하는 평화는 통일을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음을 말한다. 북녘은 적이 아닌 동족으로 함께 가야할 운명체다. 함께 살아가야 할 한 민족이다.”(통준사; <우리의 소망> 2010) 아멘. (김태준)

 

아버지를 추모 합니다(송정 바우)

 

한해를 믿음의 집 이 곳 향린에서 마무리 할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저는 저희 아버님을 기억하고 추모합니다.

죄스럽고 송구한 마음으로요.

 

강인했던 아버지는 1932년생, 돌아가실 당시 49,

19804월의 봄, 올해로 35주기가 되네요.

저희는 21녀로 저는 차남, 그 해 인생을 배우로 살겠다 결심하고 공부하기 위해 안양예고 1학년 막 다닐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생각해보면 젊은 날 황소를 때려잡을 정도의 장사,

부모형제들의 일찍 여의고 가난 속에 건축업을 하셨는데

가족을 돌보시려고 쉼 없이 일하시던 모습,

촌스럽지만 있는 그대로 속 깊은 사랑, 전쟁 참전 희생자로 신체에 흉상,

당신 몸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방광암으로 몇 해를 아프시다 운명,

몸과 마음고생 마다하지 않고 희생을 다하신 어머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모든 장례과정을 가까운 친구 분이 도와주셨고

저희 가족은 큰 위로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다니던 영등포 도림교회에 작지만 제 연극적 재능을 아낌없이 다했습니다. 아버지의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요.

제게 신앙은 살아있는 아버지고 예수님이고 연극을 제 삶의 출구입니다.

 

각별히 감사한 것은

아버지의 군 계급과 신체부상이 행정당국의 군 계급 조작이 인정되어

국가로부터 명예가 회복되어 올해 국립현충사로 이장해 모셨습니다.

가족들의 인내와 포기하지 않은 투혼이 자랑스럽고

살포시 아버지의 긍정의 고개 짓, 투박한 웃음 지으시겠지요.

 

오늘 어머니의 남편으로

저희 형제들의 아버지를 기억하며 추모의 기도를 드립니다.

나의 아버지 송대성님 편히 쉬셔요,

어머니도 행복하게 잘 모시겠습니다.

 

[한해를 보내면서 올리는 기도] -이해인 -

 

마지막이라 말하기에 너무나 아쉬운 시간

저 멀리 지나가 버린 기억 차곡차곡 쌓아

튼튼한 나이테를 만드십시오

한해를 보내며 후회가 더 많이 있을 테지만

우리는 다가올 시간이 희망으로 있기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십시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감사안부를 띄우는 기도를 하십시오.

욕심을 채우려 발버둥쳤던 지나온 시간을 반성하는 시간이

너무 늦어 아픔이지만 아직 늦지 않았음을 기억하게 하십시오.

작은 것에 행복할 줄 아는 우리 가슴마다 웃음 가득하게 하시고

허황된 꿈을 접어 겸허한 우리가 되게 하십시오.

맑은 눈을 가지고

새해에 세운 계획을 헛되게 보내지 않게 하시고

우리 모두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