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맞이주일: 일어나 비추어라

60:1-6; 시편 72:1-7; 3:1-4; 2:1-12

 

1월은 우리 옛말로는 해오름달 혹은 해솟음달이라 하여 어둠을 깨고 일어서는 새로움의 달로 표현하여 왔습니다. 서양에서는 야누스의 달로 말해왔습니다. 야누스는 한 머리에 얼굴이 앞뒤로 두 개가 달린 로마신의 이름인데. 시작과 끝 혹은 처음과 변화를 주재하는 로마의 수호신이었는데, 얼굴이 둘이다 보니 1월에 그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영어의 January가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1월은 한편으로는 지난 한해를 아쉬움으로 돌아보지만 동시에 희망을 안고 새해를 바라보는 달이기에 탁월한 이름짓기입니다.

 

[어거스틴의 시간론]

 

성 어거스틴 혹은 아우구스티누스하면 5세기경의 위대한 신학자로 <삼위일체론><신국론> 그리고 <고백론>을 떠올립니다만, 그는 당대의 철학과 신학을 통섭한 최고의 사상가로서 신앙과 이성은 대립한다는 시대적 사고의 틀을 깼던 학자로서 나는 믿기 위해서 안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이후 교황이 왕을 지배하는 유럽 역사에서 암흑기라 불리는 7,8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스콜라철학이 등장하면서 나온 유명한 말이 신학자 안셀무스의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입니다. 어순만 갖고 본다면 안셀무스와 어거스틴은 반대로 이해되지만, 사실은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는 명제도 여전히 신앙 우선의 명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없이 먼저 믿어버린다면 도대체 올바른 순서란 무엇이겠는가?” 곧 안셀무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성이 신앙보다 우위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된 신앙은 계시의 내용을 이성적으로 추구할 때 비로소 완성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과학적 비판적 사고의 관점에서 말하는 이성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이성 곧 천동설을 믿는 이성인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사상에 대해 좀 더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어거스틴 신학의 기초는 시간론에 기초한 주관성입니다. 어거스틴은 시간을 객관적 시간과 주관적 시간으로 나누었는데, 이는 성서가 말하는 크로노스의 자연적 시간과 카이로스의 영적 시간의 구분과 같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개념을 각각 기억, 직관, 기대라는 개념과 짝을 지어 설명합니다. 과거는 지금 내가 기억하는 범위 안에서만 존재하고 현재는 지금 내가 직관하는 범위 안에서만 존재하고 미래는 지금 내가 기대하는 범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과거 현재 미래는 구별되는 시간이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틀 안에서만 이해되고 존재한다. 천오백년 전에 이런 얘기를 하였다는 것은 대단한 사고입니다.

 

어거스틴의 이러한 현재 중심의 주관적 시간관은 자연히 인간의 주체적 의지의 삶을 강조하게 됩니다. 곧 인간은 악을 거부하고 절대 선이신 신을 향해 나아가는 결단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은 성서의 야훼 하느님을 영원한 현재라고 불렀는데 이 또한 매우 탁월한 사고이며 천국에 계신다고 하는 공간 신이해에서 영원한 현재로 이해하는 시간 신이해로의 전환은 오늘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신 이해입니다.

 

여러분이 자주 들어보았던 <우리 시대의 역설>이란 유명한 잠언시가 있습니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으며 생활은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란다.

전문가들은 많아졌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며

너무 적게 책을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드물게 기도한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 하며 거짓말은 더 많이 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평균 수명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을 왔다가지만 길을 건너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는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내면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정화기는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은 부수지는 못한다.

 

제프 딕슨이라는 사람이 처음 인터넷에 글을 올린 이후 지금도 이 시는 덧붙여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주 예배시간에 카톡을 하던 고동학교 동창 서클 얘기를 한바 있습니다만, 연말연시를 맞아 덕담을 하는 수준으로 이멜이 오고 가더니 의사인 한 친구가 31일 밤 광화문의 한 모임에 갔다 온 이후에 글을 올렸는데, 내용이 좋아 함께 공유하고 싶습니다.

 

[친구로부터 온 새해 편지]

 

어제 밤 여전히 광화문 교보생명 사옥에는 큼지막하게 글판이 걸려있더군. 25년간이나 삶에 지친 시민들의 시선을 잡아왔다니 대단하지. 그동안 걸려있던 글판 69개중 가장 내 마음을 울린 글판을 꼽아달라는 설문조사 결과 1위가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2위가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지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3위가 내가 좋아하는 한양여자대학교 교수이신 장석주시인의 "대추" 란 시이네. <대추가 저절로 붉어 질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장석주님은 시도 아름답게 잘 쓰시지만 다른 시인의 시에 대한 따뜻하고 독특한 시각의 해설로도 유명하지. 그에게 있어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지혜이고 용기이지. 그는 시는 지적 근육을 만드는 수단이라며 시를 자주 읽으면 삶의 직관력이 생겨 세상을 새롭게 보도록 해주며 정신수련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해 주는 방법이기도 하다고 말한다네.

 

저 커다랗게 걸려 있는 광화문 글판을 보면 늘 생각나는 것이 바로 저 글들이 이 성적지상주의, 금전만능주의, 외모지상주의로 가득한 이 천민자본주의 사회, 피로사회. 소진사회, 위험사회, 불행사회를 향한 거대한 정신적 처방전 같다는거지. 저 걸려있는 거대한 처방전이 하루 평균 40여명씩 자살하는 이 약간 맛이 간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했을까? 이 나라에서 그렇게 교회는 외적으로 융성 발전하였는데 왜 사람들은 갈수록 괴로워하고 불행해하고 몸을 던질까? 단지 그들 개개인들의 문제일까? 아녀. 사회가 엄청 병들어 있는거지. 필요한게 돈, 경제적 발전이 아니지. 왜 교황님이 한국은 "윤리적으로 거듭나야한다" 라고 하셨을까? 홍콩의 모 재벌 총수는 한국이 필요한건 "명상"이라고 충심어린 조언들을 하였을까? 숲속에 있는 우리들은 모르지만 숲 밖에선 뭔가 보이는거겠지.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를 다둑거려 주고 위로해 주는 건 바로 시 등의 문학이라고 생각하네. 정현종 시인은 그의 시 ""에서 타인에게 다가가길 원하지만 사람은 서로 이리저리 상처주고 배반하기 쉽다고 지적하고 있지. 삶의 구원은 바로 어떠한 종교이건 신앙에 대한 믿음과 예술 특히 문학을 통한 마음 수련을 통해서가 아닐까 어쭙잖게 생각해본다네... 흔히들 시 읽기라면 먹물 인텔리겐챠들의 배부른 짓거리로 폄하하지만 시를 자주 읽고 습작이나마 좀 끄적거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심적으로 정화됨을 시나브로 느끼게 된다고 하더라고. 삶의 직관력도 생긴다는데 난 그것까지 잘 모르겠네만.

 

따라서 초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남을 배려하고 더불어 사는 윤리교육과 더불어 문학 수업을 좀 더 강화 할 필요가 있다고 보네. 학교 교과서 법전 의서 등 각종 책을 달달 외워 지식으로 완전 무장한 기계인간들이 한국 학교라는 공장 컨베어벨트를 통해 계속 생산되어 나와 차고 넘치니 헬조선이 되는거지. 우리도 경험했잖아? 복도에 떡 ~하니 모의고사 성적표..1등서부터 250등까지... 개인의 정체성은 없고 성적 몇 등짜리 인생인거지. 당연히 인성교육을 못 받은 우리들이니 아픈 국민의 마음을 다둑거려 주고 감동을 주는 감성의 정치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거지. 정치야 서로 저주와 욕설을 퍼부어야 뭔가 돋보인다고 착각하는거고. 오바마는 총기난사 교회 장례식에서 연설도중 Amazing Grace라는 찬송가를 불러 국민들을 감동시켰다는데, 설번트 리더로서 말이 필요 없는 감성의 리더십을 보여준게지. 한국 같으면 니 책임 내 책임이니 물러나라 싸우고 시위하고 난리법석을 벌였겠지. 이게 우리가 과거 천박하다 그렇게 멸시하던 양키들의 사회 밑바탕에 깔려있는 감성의 저력이 아닌가 하네.

 

이 나라에 오래 살다보면 심성이 메마르고 거칠어지기 쉽기 때문에 가급적 틈날 때마다 시 읽기를 함으로서 삶을 부유하고 깊이 있게 만드는게 필요하지. 각종 책들 처세술, 피터린치, 잭 월치의 투자 자서전.. 등등 보다는 기형도 김춘수 정호승시인 등의 시집 한권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네. 우리가 만나면 술잔을 들고 끊임없이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서로의 사랑과 결속을 외치지만 실상 내가 진정 어렵고 외로울 때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도 찾을 수 없다네. "아무도 없어ㅠㅠ" 이게 이 나라 삶이자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르겠군. 늘 건강들 하시고 가정평안 뜻하는 일 잘 이루길 빕니다.

 

학교 다닐 때에는 가장 친한 친구였고 지금도 지하철 타면 세 정거장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직장이 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 본지가 2년은 넘은 것 같습니다. 목사직이라는게 스스로를 외주(外周)시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 또한 이민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기에 급급하여 자녀교육에 아쉬움이 많은데, 딴 일은 다 제쳐두고 자녀들과 하루 한편의 시를 함께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품습니다. 오늘 여기 자녀들과 함께 참여한 부모님들 새해의 결심으로 이를 첨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향린교회가 사회선교 활동만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실제 우리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인문학 활동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십오년 이상 진행되고 있는 안병무읽기, 매주 월요일 저녁 직장 끝나기가 무섭게들 모여 두꺼운 책을 들고 파고드는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역사공부하기, 그 외 목회실과 길목 주관으로 인문학 강좌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향기로운 이웃 합창팀, 국악공연팀 얼쑤와 연극팀 문향 등등. 향린은 거리에서 깃발만 높이 드는 교회가 아니라 인간성의 풍성함을 위한 여러 모임들이 자발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올해는 시 읽기그룹도 하나 덧붙여지면 좋을 듯 싶습니다.

 

[2의 을사늑약]

 

지난 해 2015년을 정리하는 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는 '혼용무도(昏庸無道)'였습니다. '마치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무도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논어(論語)''천하무도(天下無道)'에서 유래했는데,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의 실정으로 나라 전체의 예법과 도의가 송두리째 무너져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한 교수는 연초에는 메르스사태로 나라가 온통 혼란에 휩싸였고 중반에는 여당 원내대표에 대한 청와대의 사퇴압력으로 삼권분립과 의회주의 원칙이 크게 훼손됐으며 후반기에 들어서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선택의 이유로 삼았는데, 여기에 2015년 마감을 사흘 앞두고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군위안부 사태까지 일어났으니 혼용무도보다 더 적절한 사자성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대처하기 위해 해외유학파 20대들이 모이는 인터넷 그룹이 있는데, 여기에 주동 역할을 하는 친구가 지난 주 예배에 참석하고 면담을 요청해서 만났는데 위안부문제에 관련하여 저에게 조언을 요청해왔기에 이런 글을 보냈습니다.

 

190511월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이 있었다. 그런데 그해 7월 미국 루즈벨트의 특사 태프트 군사장관과 일본 외상 가츠라가 비밀리에 만나 일본의 조선지배와 미국의 필리핀지배를 서로 양해하는 외교협약을 맺었다. 이는 마치 마피아 두목들이 모여 구역을 나눠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는 단순히 일본만의 지배가 아니라 배후에 미국의 지배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예수시대에 유대를 식민지통치하는 일에 있어 로마가 뒤에 있고 헤롯이 앞에 있었듯이 말이다.

 

이번 종군위안부한일간의 협상은 단순히 위안부 문제만은 아닙니다. 위안부 문제로 한일정부의 대립으로 인해 미국이 주도하는 <대 중국 한미일 군사협정>을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이 주 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올해 안에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양 정부를 밀어붙인 것이다. 본래 아베정권은 평화헌법을 폐지하고 군사강국으로 나아가고 미국을 대신하여 동아시아의 패권국가가 되어 한반도 주둔을 원하고 있었으니까 저들은 원하던 바를 이룬 것입니다. 다만 박근혜정권은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한미일 군사협정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던 일이었지만, 이미 남한은 미국의 정치외교군사 식민지로 전락했을 뿐만 아니라 박근혜정권을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는 비밀문건을 손에 쥐고 위협하였기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현재 남한의 교역에 있어 수출은 중국이 1위이고 무기 수입은 미국이 1위입니다. 지난 해 세계에서 무기수입의 1위는 남한이고 남한은 미국의 무기 수출의 20%가 넘는 가장 중요한 고객입니다. 돈은 중국으로부터 벌고 쓰기는 미국을 위해 쓰니 중국이 결코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결국 이번 한일종군위안부협상은 태프트가츠라 밀약의 재판인 것입니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여성피해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일본의 한반도 재침략 말하자면 65년 전의 미소대리전쟁이 아닌 중미의 대리전쟁이 한반도에서 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건 피해당사자인 우리들의 바람일 뿐이고 패권국가들은 그런 것 따지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전쟁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절대 다수의 시리아 국민은 평화를 원하지만, 전쟁은 외세에 의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사람이 죽어가고 백성 절반이 나라밖으로 피난을 가고 이제는 피난이 아니라 아예 외국 국적을 갖게 되는 패망의 길로 가고 있음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현실은 그러합니다.

 

갈라지면 망하는 것은 불변의 이치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국민들은 복지와 의료혜택을 통한 건강회복이 아닌 생명 자체를 지키기 위해 우리 백성이 깨어나야 하고 남북이 하나되는 길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천년 전 로마의 식민지 지배에 시달리던 유대백성들은 해방의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건 6백년 전 바빌론의 포로로 살아갈 때,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주었듯이 그런 간섭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성서는 고레스 왕을 메시야라고 부릅니다. 오늘 마태오복음서의 동방박사의 출현 그건 단순히 별을 보고 연구하던 박사들이 별을 따라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유대 땅에 왔다는 그 이상의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방은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들이 세운 파르티아제국을 말합니다. 비록 로마와 더불어 무려 5백년이나 중동을 지배했던 나라였고, 한때는 헤롯왕이 저들의 침공을 피해 로마로 도망을 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황금 유황 몰약의 예물은 단지 왕과 영원을 상징하는 종교적 예물이 아니라, 파르티아제국의 대표적인 교역품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정치역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 저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헤로데왕이 당황하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는 본문이 제대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단순히 영혼 종교 구원자로서의 메시아가 아닙니다. 이 땅의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사회정치 구원자로서의 메시아였습니다.

오늘 누가 이 동방박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까요? 누가 부당한 국가권력의 지배를 끝내고 해방과 자유를 불러오는 민중의 희망이 되어야 할까요? 이사야서는 말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향린교우 여러분 새해가 밝았습니다. 야훼의 영광이 향린교회에 비추고 있습니다. 일어나십시오!그리하여 야훼의 빛을 드러내십시오. 2016년 한해도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 하늘의 복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신앙고백에 이어 자기 십자가 달기예식을 진행합니다.

 

[보냄의 말: 새해의 기도]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며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아아

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나는 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이게 하소서

(이성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