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17

    바뀌어야 할 것들  

최소영 목사(감리교 여성지도력개발원 총무)

 

1.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들을 이렇게 뵙게 되어 참으로 반갑습니다. 여러분들 중 몇 분은 거리 기도회에서 뵈었지요. 향린이 걸어온 길들을 자랑스럽게 지켜봐온 사람들 중 하나로서, 이런 교회공동체가 한국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부디 한국교회에 향린 같은 교회공동체가 많아지길 바랍니다  

2. 오늘 저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있었던 일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여신도주일을 맞아, 한국교회와 사회가, 그리고 우리들이 바뀌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2-1.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는 요한의 이름으로 기록된 복음서에만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에서 두드러진 몇 가지 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여자여라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헬라어로 γυναι라고 하는데, 자기 어머니를 부르는 말로는 좀 특이한 단어지요.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2번이나 어머니를 γυναι, 여자여라고 부릅니다. 여기 2(4)에서, 그리고 19(26),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을 새로운 가족으로 맺어주실 때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9, 나오는데 그중 6번이 요한복음에 나타납니다. 대부분 예수께서 여성을 부를 때 사용하셨더군요.

그런데 특별히 예수께서 다른 여자도 아니고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는 이유는 뭘까요? 과연 예수께 어머니 마리아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2-2. 어떤 목사님들은 가나의 혼인잔치를 설교하면서 어머니 마리아를 순종의 본보기로 설명합니다. 그 순종으로 기적을 일궈냈다고 설명하는 거지요. 어떤 이들은 오지랖 넓은 아줌마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남의 혼인잔치에 가서 포도주 떨어진 걸 가지고 오지랖도 넓게 참견한다고 말이지요. 저로서는 이 두 해석 모두,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어머니 마리아의 태도가 그리 순종적이지는 않았지요? 아직 가 아니라는 예수의 반발에도 꿋꿋하게 자기 생각을 관철시킨 것을 보면 말입니다. 오히려 가나 혼인잔치의 이야기가 표징’, 단순한 기적이 아닌 구원자, 해방자 예수를 드러내는 ‘sign’, ‘세메이온이라는 걸 감안해본다면, 마리아의 부드럽지만 흔들리지 않는 요청이 예수의 태도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라는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오지랖보다는 어머니 마리아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느낍니다.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하는 마음... 그 마음으로 우리는 세월호 부모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아파하고, 공권력의 폭력에 쓰러져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맴돌고 계신 백남기 님의 병실 바깥을 찾고, 용산 참사 7주기가 되어도 남일당 터를 찾습니다. 그 마음으로 일본군 위안부할머니들의 지울 수 없는 아픔에 공감하며, 발뒤꿈치를 땅에 딛지 못하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 그 맨발에 신길 양말을 뜨개질하기도 합니다. 100명으로 신고된 수요시위 현장에 몰려든 1000여 명의 마음... 덕분에 정대협은 신고 범위 이탈로 준법 시위가 아니라며 경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게 되었다지만, 그들의 마음은 그 누구도 강제할 수 없는 것이지요. 평화의 소녀상 지키겠다고, 그 마음 하나로, 이 추운 겨울날, 천막조차 치지 못하고 비닐로 눈보라를 막아내며 일본 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떠나지 못하는 청년들의 마음, 그 실천의 출발은 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로 느끼는 마음입니다.

김복동, 길원옥, 두 할머니의 쌈짓돈으로 시작된 나비기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시 성폭력의 희생자였던 이분들이 오늘 이 세계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또 다른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 콩고 내전 성폭력 피해자나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들을 위해 연대의 나비 날개를 펴는 마음... 이 모든 공감과 안타까움과 분노와 실천을 오지랖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여성들에게 공감, 함께 느끼게 만들어주는 신체 부위 중 하나가 자궁’, 히브리어로 레헴이랍니다. 이 자궁의 복수가 라하밈인데,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라하밈의 떨림으로히브리 노예를 구원하기로 결심하십니다. 지극히 모성적인 하나님의 이 공감, 자비, 연민은 그래서 정의와 맞닿게 됩니다. 부족한 것, 약하고 힘없는 것, 중심부에서 밀려나 경계선 언저리에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이들에게 공명하며 눈을 맞추는 것, 생명을 살리기 위해 끓어오르는 열정을 가지는 것, 그래서 불의에 저항하고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공감, 하나님의 연민,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2-3. 또 하나, 정결법 물 항아리와 포도주, 그리고 여자인 어머니 마리아를 묵상하면서, 레위기 정결법이 부정하다고 규정하고 있는 여성들의 생리, 출산 후 하혈 등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 이것을 묵상하게 된 건 왜 물보다 포도주가 더 낫다고 여기게 된 거지?”라는 물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예수의 피로 설교하는 이들 덕분에 쉽게 붉은 피와 어머니 마리아라는 여자의 피를 연결해 생각하게 된 듯합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묵상과 이미지의 연결이기에 이것이 옳고 유일한 해석은 결코 아닙니다. 그저 제 속에서 이뤄진 이미지들의 연결이 이러했다는 것이고, 이 묵상이 저에게 알려준 하나의 통찰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는 것입니다.)

원래 정결법은 레위기에 규정된 것처럼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19:2b)는 명령에 근거한 것입니다. 제물이나 제의에 관한 것,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해서는 안 되는 행동 같은 것들이 정결법에 하나하나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이 규례를 지키기 위해, 먹어서는 안 되는 고기와 먹어도 되는 고기를 같이 다루는 음식점에는 갈 수 없습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고기가 들어가면 그 그릇과 그릇에 담긴 모든 것이 똑같이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정결법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전염병에 걸린 이들을 격리하는 것을 넘어서 일반적인 환자들까지 부정하다고 보는 것, 아기를 낳은 산모의 건강을 위한 격리를 넘어서, 단지 피 흘림 때문에 부정하다고 보는 것, 생리하는 여성들이나 그들이 앉았던 자리, 그 자리에 닿은 사람들까지도 부정하다고 보는 것 등입니다. 부정하게 된 사람은 옷을 빨고 물로 목욕을 하고도 저녁때까지 부정한 상태로 간주됩니다. 심지어 여성은 생리가 끝나고도 1주일간 부정한 상태입니다. 한 달 중 절반은 부정한 상태라는 말이 되지요. 그러고도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정결 선언을 받을 수 있습니다.(15:19-30)

위생법의 일종이었던 정결법은 종교적 제의와 연결되면서, 이런 터부와 금지규정이 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정죄의 도구, 차별의 도구가 되어갔습니다. 여성들에게는 열등하고 불결하고 부정한 존재라는 자기통제를, 사회 구성원에게는 여성 차별의 사회적종교적 규범을 제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결법 물 항아리가 붉은 포도주로 바뀌었을 때, 그것도 한낱 여자에 불과한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에 의해 예수의 때가 드러나게 되었을 때,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마리아가 누구입니까? 열 서너 살 어린 나이에, 정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에게 찾아온, 아마도 로마군에 의한 성폭력으로 잉태되었으리라 추측되는 생명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여자. 스스로를 비천한 신세라 인정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 비천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을 믿으며, 환영받지 못할 이 생명의 탄생을 통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며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시는 하나님”,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시고,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하나님을 고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가 되었던 마리아는, 그저 거룩한 동정녀의 표상으로 박제화된 성모 마리아도, 오지랖 넓고 치맛바람과 세상 물욕에 찌든, 그래서 한쪽으로 치워놓고 싶은 수다쟁이 아줌마도 아닙니다. 때로 흔들리면서도 예리한 칼에 찔리는 아픔”(누가 2:35)을 견디며 끝까지 십자가 곁을 지켰던 마리아, 바로 그 여자가 예수의 를 요청한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시작할 때라고!

 

3. 요한복음서 기록자의 특별한 신학적 해석은, 가나 혼인잔치 바로 뒤에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을 수록한 데서도 드러납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 그 첫 등장은 거대한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그 체제를 뒤집어엎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른 복음서가 성전 정화 사건을 예수 공생애의 마지막에 배치하여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면, 요한복음서는 예수의 공생애 자체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됐고, 그렇기에 십자가 사건을 향한 표징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종교권력으로 군림하며, 불결한 이들을 단죄하고, 정결을 위한 대가를 요구하던 예루살렘 성전 체제. 죄인들과 여자들, 이방인들을 배제하고, 오로지 정결하고 상처 하나 없는, 그래서 오히려 피 묻은 마음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살고자 했던 성전 브로커들. 그들을 향해 분노하며 채찍을 드셨던 예수께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향해 하나님 나라의 첫 선포를 시작하신다면, 뭐라 말하실까요? 오늘 우리의 삶에서 또 다시,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자 하신다면, 깊게 숙성되어 좋은 포도주가 되길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요청하시겠습니까?

아마 바뀌어야 할 것들을 리스트로 만든다면 끝도 없을 테지만, 저는 바뀌어야 할 많은 것들 중 세 가지만 나누고자 합니다. 이것은 제가 꾸는 하나님 나라의 낮꿈, daydream입니다.

 

3-1. 첫 번째로 생명을 돌보고 키우는 일이 교회의 중심, 삶의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생명을 돌보고 키워온 여성들의 돌봄과 생명 재창조의 헌신이 없었다면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이 소중한 일은 끝없이 되풀이되어야 하는 일이고 매순간 호흡하는 공기처럼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서 귀하게 여기지 않고 한쪽 구석(주방이나 자모실 같은)으로 밀쳐두기 십상입니다. 흡사 회당 바깥쪽에 따로 구역을 정하고, 말씀을 읽는 회당 앞자리에는 나오지 못하도록 했던 때처럼, 아직 교회여성들의 자리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돌보고 키우는일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생명 돌보미의 자리는 교회의 중심에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일을 생명 돌보미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겠지요. 예배에서도, 당회나 노회, 총회에서도, 국회의원을 뽑거나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일에서도, 관심을 바라는 아이의 맑은 눈 마주하는 일에서도! 그렇기에 이 일은 구획지어 여성들에게만 미뤄둘 일이 아닙니다.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은 마땅히 생명을 돌보고 키우는이로 살아가야 합니다.

 

3-2. 두 번째는 서로의 다름을 끌어안는 너른 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그런 일을 경험하곤 합니다. 아이가 자랑스레 써놓은 글자를 바르게 교정해주고, 가지런히 쌓여 있는 벽돌 틈 튀어나온 모서리를 정으로 내리치고 싶은 충동, 지나치는 낯선 아가씨의 비뚤어진 치맛자락을 바로잡아주고 싶은 충동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런 충동 자체는 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아이의 반짝이던 눈이 자신감을 잃고 움츠러들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튀어나온 모서리는 멀리서 보면 또 하나의 문양을 이루는 일부일 수도 있고 비뚤어진 치맛자락은 멋스럽게 디자인된 옷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문제는 우리가 가진 경계와 장벽, 고정된 틀일 수도 있습니다. 낯설고 다르고 튀어 오르는 것들을 끌어안을 만한 너른 품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지구촌 곳곳에서 나와 다른 이들, 낯선 이들, 타인들에 대한 혐오와 범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익산 할랄 식품단지에 대한 유언비어, 악성루머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이 자리에 서 계시다면, 타인들을 향해 혐오와 증오를 퍼부으며, 무기를 들고 타인들을 말살하는 성스러운 전쟁에 다시 나서라고 하실까요? 때로 우리의 혼돈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내리치는 채찍일 수는 있어도, 예수님의 방식은 죽임의 방식이 아닌 살림의 방식입니다.

늘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이 가르쳐준 경쟁과 성공과 규모의 신화에서 벗어나 작은 것들,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생명들의 독특한 아름다움,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부디 우리가, 부족한 것 그대로를 품어 안을 줄 아는 넉넉함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3. 세 번째는 향린 공동체가 잘 하고 있는 일, 그러나 한국교회가 너무나 자주 외면하고 있는 일, 바로 억울한 눈물을 닦아주는 일입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이들 중에는 상처 깊은 이들이 참 많습니다. 소외된 이들, 경쟁에서 탈락 당한 이들, 나아가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이들. 그러나 교회는 너무나 자주 그들을 밀어냅니다. 세월호 유가족 교인들이 교회에서 밀려났고, 수많은 가나안교인들과 청년들이 교회에서 밀려났습니다.

이제 교회는 교회에서 밀려난 이들을 찾아 거리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광야에, 호숫가에, 고기잡이 배 위에 서신 이유, 세리의 집에 찾아가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밀려난 이들, 쫓겨난 이들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억울해도 억울하다 말조차 못하는 이들, 그저 한숨과 비탄으로 우는 이들의 눈물과 피가 하나님께 호소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때로 말없이 손 잡아주는 것, 함께 기도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아픈 상처를 싸매주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따뜻한 밥 한 끼 나눠먹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억울해도 왜 억울한지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일일 수도, 무한경쟁과 탐욕의 세상살이에 대해 단호히 거부하는 일이거나 세상이 그어놓은 경계를 뛰어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로 인해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불려 다니고 벌금 대신 노역을 살게 될지라도 말입니다.

신앙과 실천의 기준이 더 많이 갖는 것 대신 빼앗긴 이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바뀌는 일, 이런 하나님 나라의 낮꿈’(daydream)을 꿉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손을 내밀어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는 여자,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마리아의 요청에 응답하여 물을 포도주로 숙성시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을 드러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오늘 우리의 삶에서 바뀌어야 할 것들이 온전히 바뀔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바뀌어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