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숲

8:1-3; 5-6,8-10; 19; 고전 12:12-31a, 4:14-21

 

체감온도 영하 20도의 살을 에는 날씨입니다. 지금 이 추운 날씨에도 죽음과 맞닿는 경계선상에서 거리 농성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가깝게는 서울 시청 앞 옛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꼭대기 좁기도 하거니와 기울어져 있어 바람 불면 떨어질까 하여 24시간 몸에 밧줄을 걸고 반년 가까이 고공 농성을 하는 두 분의 노동자분들도 계시고 일본 대사관 소녀상 앞에는 얇은 비닐 한 장에 의지하여 온 밤을 지새우며 종군성노예위안부 한일졸속협상에 반대하는 젊은이들의 투쟁이 있고 서울대병원 앞에는 경찰의 물대포로 인해 쓰러지신 농민 백남기 어르신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농성장이 있습니다. 지금 서울에서만도 이렇게 목숨을 내어놓고 거리 투쟁을 하는 농성장만도 16곳이나 됩니다. 춥다춥다 하지만 저들을 생각하면 오늘 우리는 천국에 앉아 있는 셈입니다.

 

엿새 전 월요일에도 오늘과 같은 매서운 추위가 밀어닥쳤습니다. 당일 18일 저녁 이 예배실에서는 늦봄 문익환목사님 22주기 추모음악회가 있었는데, 그날 아침에는 이 시대를 가장 뜨겁게 그러면서도 가장 치열하게 사셨던 고 신영복선생님의 장례식이 있었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신영복선생님은 한마디로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27세에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다가 국가 전복 혐의라는 일명 통혁당 사건으로 본인은 들어본 적도 없는 일로 인해 사형 언도를 받았다가 결국 20년 징역을 살다 세상에 나와 성공회대 교수로 27년을 더 사시다 가신 분입니다. 지옥에서 천당으로 라는 말도 있지만, 모두가 혐오하는 간첩으로 낙인이 찍혔다가 온화한 인품과 동양사상에 천착한 깊은 가르침으로 인해 좌우 이념을 떠나 모두로부터 사랑받는 스승으로 사시다 생명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열흘간의 곡기 단식을 통해 장렬하게 불태우시고 가셨습니다. 사랑에 기초한 인간관계를 통한 정의로운 사회 구현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시대에 깊은 파장을 남겨 주신 분입니다.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성공회대 교수로서 신앙의 테두리 안에 계셨고, 본질에 있어 변방이 역사의 주인으로 나서는 변혁을 꿈꾸었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갈릴리 하느님 나라 운동에 맞닿아 있는 분이시기에 오늘은 무명의 그리스도인 신영복선생을 기리는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제가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단독 목회를 시작하던 1988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을 접했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 표면은 잔잔하지만, 수면 아래에 엄청난 풍랑이 이는 것 같은 글에 깊은 충격을 받았고, 그때 책장을 덮으면서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야지 하고 30년 가까이 책장에 보관하여 왔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너무 아까 와 두고두고 먹어야지 하며 냉장고에 보관하다 시기를 놓쳐 먹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이 제게는 그런 셈입니다. 다시 한 번 읽겠다고 책장의 먼지를 털고 꺼내들었고 계속 가방에 넣고 다녔는데, 제대로 읽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 이리저리 넘기다보니 이 글귀가 눈에 들어옵니다. “새해가 겨울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까닭은 낡은 것들이 겨울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 이후로도 선생님은 주옥같은 책들을 펴내셨습니다. <더불어 숲>, <담론>, <강의> 등등 저마다의 감칠맛 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옥 안으로부터의 사색>은 엽서라는 제한된 면적으로 인한 글의 압축성과 감옥이라는 내용의 독특성으로 인해 출옥 이후의 책보다 더 큰 울림을 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6년 전 홍목사님 시절 심원 안병무선생 강연회에 초청을 받으셔서 향린교회에 오셨던 적은 있었지만, 저 또한 모시고 싶어 몇 년 전 두어 번 접촉을 했었지만, 건강으로 인해 외부 강연이 어렵다는 답변을 들어왔는데, 황망히 우리 곁을 떠나고 나니까 지인들을 통해 좀 더 적극적으로 초청을 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늦봄 음악회 사회를 보던 장빈목사가 문익환목사님과 신영복선생님을 이라는 단어 하나로 두 분을 하나로 엮었는데, 탁월한 착상이었습니다. 이는 오늘 서신서의 본문 말씀인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해서 발이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라는 구절과도 연결이 됩니다. 발에 관련한 세 글이 모두 더불어 숲을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 발바닥으로]

문익환

 

하느님

이 눈을 후벼 빼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볼 겁니다

이 고막을 뚫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들을 겁니다

이 코를 틀어막아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숨을 쉴 겁니다

이 입을 봉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소리칠 겁니다

단칼에 이 목을 날려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당신 생각을 할 겁니다

도끼로 이 손목을 찍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풍물을 울릴겁니다

창을 들어 이 심장을 찔러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피를 철철 쏟으며 사랑을 할 겁니다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발바닥에 불질러보시라구요

젠장 난 발바닥 자죽만으로 남아

길가의 풀포기들하고나 사랑을 속삭일 겁니다

 

발에 관련한 신영복선생의 말입니다.

 

머리 좋은 게 마음 좋은 것보다 못하고,

마음 좋은게 손 좋은 것보다 못하고

손 좋은게 발 좋은 것보다 못하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는 어떤 사람이 가진 사상이나 생각이 바뀌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다. 생각이 가슴까지 이르면 감동이 일어 상대방을 받아들이는데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는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긴 여행도 있지만, 가슴까지 갔더라도 거기가 인생의 끝은 아닌데 왜냐하면 인생은 한 번의 감동만으로 살아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감동에서 출발한 실천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긴 여행도 있지만, 가슴에서 발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긴 여행이 있습니다. 이는 곧 현장으로 나아가는 실천을 말함인데, 이를 신영복선생은 성숙의 여정이라고 말하며 또 다른 용어로 실천은 연대를 담보하고 있기에 이를 숲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나아가는, 여정이 가장 긴 여행길이 되는 것은 그 길이 내려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처음 접했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감동받은 구절은 이것입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 징역은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저도 짧은 기간이지만, 철장 안에서 칼잠을 잔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칼잠도 서로 머리를 가지런히 하는 칼잠이면 그런대로 괜찮은데, 사람이 더 많아지게 되면 머리 가지런한 칼잠이 아닌 머리가 엇갈리는 지그재그 칼잠을 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 코와 옆 사람의 발가락이 맞닿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쪽으로 틀어도 발꼬랑지 냄새 저쪽으로 틀어도 발꼬랑지 냄새 결국 냄새가 덜 나는 쪽으로 몸의 방향을 정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그럴 때는 냄새 덜한 친구에게 감사하게 되고 몸 또한 간사해서 처음에는 참기 힘들다가도 자기 똥냄새에 쉽게 적응하듯이 발꼬랑 냄새에도 곧 적응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장미가 아닌 안개꽃]

 

그런데 신영복선생의 말씀이 더 다가온 것은 바로 그러한 애증 섞인 경험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희망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장미가 아니라 함께 핀 안개꽃입니다.” 사랑을 남녀간 혹은 1:1의 관계만으로 한정할 때, 우리는 장미의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그러다 정작 가까이 다가가면 가시에 찔리는 아픔을 경험하게 되고 꽃이 떨어진 다음 허무에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안개꽃은 그 이름이 암시하듯 사람의 시선을 끌만한 색의 강렬함은 없습니다. 그래서 쉬이 지나치기 쉽지만, 꽃말이 암시하는 삶의 교훈을 깨닫고 나면 보면 볼수록,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질리래야 결코 질릴 수 없는 질박(質朴)한 향기를 내품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경쟁적인 장미꽃같은 인생을 꿈꿉니다만, 안개꽃같은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이 성공적인 인생의 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움츠려 드는 게 일상인데, 오히려 기나긴 수형생활을 통해 더욱 삶이 빛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몸은 가둬도 영혼만은 가둘 수 없다는 신념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수십 년을 신념으로 견뎌 온 장기수 어르신들이 많이 있고, 문익환목사님은 물론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대통령, 만델라대통령, 아웅산 수지 여사가 있고 이 정치 지도자 반열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잘 알려진, 우루과이를 남미의 스위스로 만들어낸 무희가대통령도 빼 놓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간디, 본훼퍼목사, 말틴 루터 킹목사와 같은 분들 또한 감옥생활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더욱 빛낸 분들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나치의 강제수용소 생활을 통해 로고테라피라는 심리학 이론을 개발해 냈으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감옥 안에서 시민은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국가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하는 <시민불복종> 개념을 만들어냈고, 네루는 딸에게 보낸 편지를 묶어 억압받는 민중이 주인됨을 역설하는 <세계사편력>을 펴냈습니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쿠바의 저항 시인 파디야가 쓴 시 제목 <최고의 시는 언제나 간수의 등불 밑에서>입니다. 이는 모두 기독교의 핵심적 가치인 No Cross, No Crown 곧 십자가의 고통 없이 영광의 면류관은 없다는 진리를 여실히 드러내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매혈(賣血)의 양심]

 

신영복선생의 얘기입니다. “내가 징역살이에서 터득한 인간학이 있다면 모든 사람을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는 것입니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유심히 봅니다. 그 사람의 인생사를 경청하는 것을 최고의 독서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번에 나누어서라도 가능하면 끝까지 다 듣습니다. 유심히 주목하면 하찮은 삶도 멋진 예술이 됩니다. 예술의 본령은 우리의 무심함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젊은이의 얘기를 전합니다. 일거리가 없어 돈을 못 버는 날이면 매혈을 해서라도 몇 푼을 들고 가야 식구들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던 한 젊은이가 매혈을 하기 전에 수돗물을 잔뜩 들이켜 피의 농도를 속였다면서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한다는 것입니다. 소를 팔 때 소금과 물을 먹여 근수를 높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수돗물을 들이킨다고 해서 피의 농도가 결코 엷어질 리가 없지만, 그 가난한 청년은 그렇게 높은 양심을 지니고 있었다는데, 도대체 지금 나의 양심의 잣대는 무엇인가? 우리는 끄떡하면 내 양심을 걸고 맹세한다.’라고 말하는데, 그이 앞에서 양심이라는 단어는 사치(奢侈)이자 사기(詐欺)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사실 열흘 전 신영복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을 <더불어 숲>이라고 해야지 라고 먼저 마음을 정하고 오늘의 하늘뜻펴기 본문을 보았는데, 어쩌면 그렇게 상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느헤미야의 말씀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 한 곳에 모여 그동안 마음 놓고 읽지 못했던 율법서를 큰 소리로 읽고 제사장 에즈라가 하늘뜻을 펼치자 백성들이 모두 눈물로 감격을 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수콧이라고 불리는 축제의 기원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3년마다 성서의 전체 말씀을 읽고 말씀을 나누듯이 유대인들은 1년마다 토라를 반복하여 읽는데 그 관습이 이렇게 시작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온 백성들이 <더불어 숲>을 만들어 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성도는 모두 몸의 각기 다른 지체임을 말함으로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하나일뿐더러 강한 지체는 약한 지체를 보호하고 보다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약자 보호, 소수자 우선의 원칙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몸 가운데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을 더욱 조심스럽게 감싸고 또 보기 흉한 부분을 더 보기 좋게 만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도 변변치 못한 부분을 더 귀중하게 여겨주셔서 몸의 조화를 이루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몸의 지체가 다르듯이 우리가 맡은 지위와 역할도 다름을 밝혀 말합니다. 우리가 다 모두 사도일수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다 방언을 말하거나 모두 다 병 고치는 사람일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라고 반문하면서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라는 말로 12장을 마감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사도의 직분보다 기적을 행하는 직분보다 더 큰 은총의 선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게 그가 말하는 사랑의 선물이고 이는 다음 주에 조은화목사께서 전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저는 조은화목사님의 앞길을 여는 문지기에 불과합니다.

 

루가복음서의 말씀은 예수께서 세상에 나와 외치신 첫 말씀입니다. 예수의 사역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밝히신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눈먼 사람들에게는 보게 함을,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보장하는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1성서의 핵심은 율법이었고, 율법의 핵심은 바로 이것 은총의 해의 실현이었습니다. 여기에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가 있는 것이고 예수가 꿈꾸는 새 역사의 주역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이는 신영복선생이 말하는 새역사 창조의 힘은 변방에서 나오다는 얘기와 같은 맥락입니다.

 

[향린교회를 향한 당부의 말]

 

16년 전 향린교회에 오셔서 하신 첫마디입니다. “우리 사회가 당장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지만, 향린교회가 민족교회로서 통일 담론을 가장 앞서서 뜨겁게 이끌어 내는 산실이라는 사실에 존경을 표합니다. 분단에서 오는 낭비와 폐단은 실로 엄청난데, 이런 모순을 그대로 둔 채 잘사는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분단의식이 만들어낸 일종의 환상이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계 자본의 눈으로 보면 남한은 일종의 노동자 합숙소와 같이 하루하루를 겨우 겨우 살아가는 열악한 자본인데, 거기에 엄청난 분단비용을 짊어지고 가면서 잘사는 나라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기대 자체가 분단 논리에 다름아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모두 똑똑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신영복선생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바람에 일종의 쐐기를 박는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4.19, 5.16시대 때에 대학생이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독서서클 운동을 할 때 기준이 아주 똑똑한 사람들,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고 사상도 진보적이고 그런 사람들을 선호하고 그들과 논의도 많이 했는데, 지금 와서 제 주위를 돌아볼 때, 같이 열띤 토론의 밤을 지새웠던 많은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똑똑한 친구들은 지금 그 길에 없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때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사람들만 꾸준하게 그 길에 있다. 이념적으로 사명감으로 뛰어든 사람이 아니고 안 하자니 양심에 가책 받아 미안해서 할 수 없이 들어온 양심적인 사람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쩔 수 없이 오던 사람들만이 꾸준히 남아 있다. 참으로 이상하다.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처럼,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처럼 그렇게 넘어지면서 계속 서있다. 나는 누가 강한 사람인가 지금은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신영복선생의 향린교회를 향해 던졌던 마지막 말입니다. “저는 향린교회가 적어도 그러한 담론들, 우리시대에 힘겹지만 가장 절실한 과제들을 열띠게 담아내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우리 현실 속에서 이러한 곳들이 우리의 작은 가정일수도 있고, 학교일수도 있지만, 기존의 도도한 논리들에 저항해서 자기의 이유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그러한 진지들을 만드는 그런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분들은 이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그런 작은 진지들을 하나씩 만들어서 버티다가 아까 노래를 해 주셨습니다만 그 나무들이 모여서 숲이 되면 무언가 바꾸어 내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오늘 두서없이 여러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사람, 세상의 변화에 민첩하게 적응하는 사람.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자기에게 맞추어 보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는 이유는 민첩하게 세상에 타협하고 적응하는 지혜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우리에게 좀 맞추어 볼 수 없을까 하는 우직함 때문에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우직함을 지키는 진지와 가마들을 곳곳에 만들어 내고 향린교회가 우리시대의 그런 뜨거운 가마, 아주 튼튼한 진지가 되기를 간곡히 바라면서 오늘 뜻 깊은 자리에 오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

 

제가 좋아하는 몇 구절을 나눠봅니다.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다.”

 

돌이켜보면 강물의 치열함도 사실은 강물의 본성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험준한 계곡과 가파른 땅으로 인하여 그렇게 달려왔을 뿐이다. 강물의 본성은 오히려 보다 낮은 곳을 지향하는 겸손과 평화이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비로소 그 본성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며 가장 평화로운 물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평등과 조화이며 갇혀 있는 우리의 이성과 역량을 해방하여 겨레의 자존(自尊)을 지키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함으로써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자유(自由) 그 자체이다.”

 

소수의 그룹이나 개인에게 전유된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모든 민중들에 의해서 이상이 공유되고 있는 혁명은 비록 실패로 끝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본질에 있어서 승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실패는 그대로 역사가 되고 역사의 반성이 되어 이윽고 역사의 다음 장에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석과불식 씨 과실을 먹지 않는 것은 지혜이며 동시에 교훈입니다. 씨 과실은 새봄의 새싹으로 돋아나고, 다시 자라서 나무가 되고, 이윽고 숲이 되는 장구한 세월을 보여줍니다. 한 알의 외로운 석과가 산야를 덮는 거대한 숲으로 나아가는 그림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찹니다. 역경을 희망으로 바꾸어 내는 지혜이며 교훈입니다.”

 

저는 향린교회가 우리 사회의 씨 과실이 되었으면 합니다. 다 없어져도 끝까지 남는 교회. 세상에 결코 먹히지 않고, 세상을 다시금 꽃피우는 교회. 그러려면 이 추운 겨울 땅 밑에서 약동하는 생명의 소리를 듣는 귀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다함께 처음처럼 피어나는 새싹을 기다리며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 박노해

 

큰 것을 잃어 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주십시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 주십시오

 

오늘 비록 앞이 안보인다고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작은 것 속에 이미 큰 길로 나가는 빛이 있고

큰 것은 작은 것들을 비추는 방편일 뿐입니다

 

현실 속에 생활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세상을 앞서 사는 희망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