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31

“‘우리를 산다!”

(시편 71:1-3; 예레미야 1:4-10; 고린토1 13:1-13; 루가 4:21-30)

   

조 은 화


교회공동체에서 많이 듣는 말, 바로 사랑이란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하자!”라는 말을 정말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지금여기에서 사랑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생각을 많이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자칫 나에게만 집중될 때에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몇 년 전부터 교회공동체 중의 한 교우를 몇 년째 쫓아다니며 괴롭히던 교우가 최근에 다시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스토킹 사건으로 해결을 위해 당회와 성평등위원회에서는 여러모로 고민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스토킹을 왜 사랑이라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 중심에서 일방적이고 상대방의 자리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관계를 불안하게 하고 깨지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지난 주 대학원 도서관에 들렸었습니다. 어린이집에 자녀를 보내고 있는 두 대학원졸업생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서로가 자녀 둘씩을 어린이집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보육비 끊기면 정말 어떻게 하지? 아직은 괜찮을 거야! 4월이 선거니 표를 생각해서라도 그때까지는 보장해주지 않겠어? 그런데 불안하긴 하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박근혜씨가 하는 정치가 왜 무섭습니까? 왜 거부감이 들까요? 보육비 지원 정책 말로는 해 줄 것처럼 생색만 내고 정작 실제적인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어려운 가정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는 일은 안하겠지요. 실천은 없는 말뿐인 정책은 화를 넘어 국가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 또한 사랑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이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방식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도 여러 고민들이 많습니다. 다양한 목소리가 함께 어우러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님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을 통해 구체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고 실천의 길을 찾아가기를 기대합니다.

 

[예레미야의 부름]

 

오늘의 예레미야 본문은 그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소명의 기대와는 달리 예레미야의 전생애가 비극과 같았습니다. 기원전 627년에 예언자로 불림 받아 40여 년 동안 활동을 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인 야훼께서 던지다, 급히 보내다.’처럼, 그가 활동한 시대에 유다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요시아 왕이 죽은 다음 유다는 동쪽의 신흥 강대국 바빌론의 압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남쪽에는 비록 위축되긴 했지만 여전히 강대국인 이집트가 버티고 있었고 유다는 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았지만 왕과 대신들은 이집트에 빌붙어 바빌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혼란기에 예레미야는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느님의 말씀과 법을 무시하는 유다인들의 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하느님의 심판이 내릴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아울러 그는 성전과 시온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에 결코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거짓 믿음과 군사외교적인 정책으로 살 길을 찾으려는 지도층을 비판합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언제 어디서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고 그분의 말씀을 깨어 들으며 그대로 실천하는 삶 그것이 궁극적인 살 길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바빌론에 항복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납득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살아가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기억하시고 새로운 계약을 맺어 새 공동체를 이루시는 희망의 미래가 펼쳐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 예레미야는 민족의 배반자, 거짓 예언자로 몰려 여러 차례 죽을 위험을 겪었습니다. 그는 유다공동체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길로 회개를 촉구하고 하느님의 심판이 내려짐을 알렸지만, 결국 귀담아 듣는 이 없어 처참하게 멸망당하는 조국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야말로 `고독한 예언자로 그의 예언은 온 나라 안에서 싸움과 불화의 외침으로 끝없는 불행만을 예고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예레미야는 예언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민족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탐욕과 안일한 삶으로 덮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보는 사랑은 대세를 따르는 대중적인것도 무조건적인 위로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날카로이 중심의 불의를 찝어내는 것이었고 그것을 변화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기에 혼란을 야기하고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기득권이 듣기에 정말 불편한 이야기들, 제발 정신 차리라는 외침으로 분란을 일으키면서까지 강행했던 그의 길은 누구보다 유다를 살리고자 한 고통스러운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속에 있는 그 사랑은 불의한 것에 대해서는 뽑고 무너뜨리고 헐어버리는 결연함과 다시 심고 세우시는 하느님의 희망의 손길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불의가 행해지는 곳에서 정의에 기반을 두어 잘못을 말하여 바로 서게 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루가공동체]

 

오늘 루가복음서의 본문은 이사야 본문에서 나타난 보복의 해 대신에 은혜의 혜를 말하며 그 구원이 여기에서 이루어졌다는 선포를 합니다. 그러나 타성에 젖어 있던 유대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롱하며 평가절하 합니다. 은혜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대공동체를 봅니다. 나사렛에서 일어난 본문은 루가복음 신학의 주춧돌이라고 불릴 만큼 누가복음에서의 위상이 높은 구절들입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나사렛 본문의 절반가량이 예수와 나사렛 회당에 모인 사람들 사이의 분노에 찬 설전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루가복음은 이방인공동체로 회당에서 쫓겨나고 늘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아야 했던 공동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결코 이방인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을 오늘의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예수가 동네에서 먹고 자란 사람이었기에 그를 하찮게 여기는 답습된 생각들이 결국 그들 스스로를 해방의 길과 멀어지게 한 것이지요. 기득권유지와 이방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폐쇄적 생각이 얼마나 큰 어려움을 갖게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고린토공동체-바울의 사랑]

 

고린토는 기원전 146년 그리스도의 도시국가들이 연합하여 벌인 반로마 항쟁에서 패배한 뒤 잔혹하게 파괴된 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서 100년 만에 재건된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재건의 이유는 동쪽으로는 에게 해를 통해 소아시아와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이오니아 해를 거쳐 이탈리아와 연결되는 항구가 있는 독특한 지형을 갖는 경제적 가치 덕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곳에 퇴역군인들과 해방노예들을 비롯한 로마시의 하층민을 이주시켰습니다. 하여 고린토시는 이들에 의해 친 황제적인 새로운 엘리트층이 형성된 도시로 재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다른 도시들에 비해 이곳은 전통적 권력이 체계화되지 않았고 도시 지배층간의 주도권 갈등이 상대적으로 심했습니다. 정착민들은 지역적 뿌리도 없는 곳에서 사회통합 체제를 마련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불안전성은 이 도시가 진취적 사상이 넘실거릴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도시 특성 상 여성의 사회적 도전이나 하층민 혹은 노예의 도전도 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도시 갈등이 바울이 구축한 고린토 예수 공동체에서도 그대로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안정된 전통이 터 잡고 있던 다른 도시의 공동체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차원의 복합적 갈등 즉 계파 갈등, 상하 계급에 대한 갈등, 자본 및 경제적 부의 갈등 등이 심각한 문제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내환으로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바울이 공동체에 보낸 장문의 서신이 바로 고린토전서입니다.

고린토공동체의 분열상에서 무엇이 정말 중요한가라고 할 때에 오늘의 고린토전서13장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모든 제도와 의식, 그리고 은사에 앞선 바로 사랑이다!” 그렇다면 고린토전서 13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요?

 

우리는 본문에서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한다고 하는 말씀을 보면서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불의한 갈등상황의 전개를 통해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고린토전서 11장에서 14장으로의 연결선상에서 당시의 공동체가 분열되는 상황이 상당히 심각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린토공동체는 당파싸움과 교인들간의 일반법정에서의 고발하는 일도 벌어졌고, 어떤 사람은 매춘을 통해, 또 우상제물을 먹는 일을 통해 자신들의 자유함을 과시했고, 성찬에 있어서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노동자들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가져온 것을 먼저 배터지게 먹고 취하며 욕되게 했습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연대성은 파괴되었고, 방언과 예언을 더 중시여기면서 여러모로 공동체의 질서는 그렇게 붕괴의 위험에 처해있었습니다.

 

[사랑의 실천]

 

로마정권과는 다른 새로운 예수공동체가 변혁의 주체로 살고자 하는 사랑, 즉 아가페로 모인 공동체가 변혁은커녕 여러방면에서 분열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13장의 사랑이 중요하게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내고자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 자기의 욕심과 아집으로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행위, 그냥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호한 결단을 내리고 정의가 기반이 되는 강렬한 맞섬이야 말로 진실한 사랑이다. 싸워 나가야할 투쟁의 자리라는 것이지요.

 

사랑은 삶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영역에 있든지 결국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하는 힘이 실천에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오는 이방종교의 제사들은 어땠습니까?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갖겠다는 욕구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맘모니즘이 지극히 정상인 세계인 것처럼 로마제국이라고 예외없이 소유냐 존재냐에 대한 에릭프롬이 제기했던 문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소유를 추구하는 가치와 존재를 추구하는 가치 사이에 충돌이 있어 왔습니다. give and take!가 만연한 세상에서 바울은 소유를 추구하는 가치 사회, 그런 소유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모든 카테고리들을 존재에 의해 재구성하려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운 존재를 가지고 기존의 질서와 다른 존재의 질서를 만들려고, 소유라는 가치를 완전히 뒤집으려 했습니다. 어떤 존재는 주면 받아야 만족하는 존재가 있고 어떤 존재는 줄 때 기뻐합니다. 줄 때 기뻐하는 존재의 속성은 무어이냐?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보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공동체를 식탁을 통해서 구체화시켰습니다. 그런 존재를 얻으려고 하는게 바울이 싸웠던 투쟁의 과정 아니겠습니까? 탐욕의 세상에서 예외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예수와 바울은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로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꿈은 그냥 되어지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탐욕이 끊임없이 공동체를 해치고 있는데 바울은 바로 이것과 싸우는 방식으로 사랑을 했던 것입니다.

 

지난 엄마부대와 관련한 기사를 하나 말씀드립니다. "24년간 해결하지 못했던 위안부 문제를 박근혜 대통령이 3년만에 해냈다"며 협의의 의의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아베총리가 직접 한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해 사과의 뜻을 비쳤다""일본이 처음으로 책임을 인정한 만큼 위안부 할머니들도 용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엄마부대는 "위안부 문제는 과거 한국이 힘이 없을 때 발생한 사건이고, 국력이 그만큼 강해졌기 때문에 이번 합의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라며 "한국이 더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위안부 할머니들이 희생해달라"고 말한 기사입니다. 우리가 무조건 사랑이라 덮어놓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요. 그래서 더욱 맹렬하게 소녀상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충돌하면서도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랑의 길입니다.


['나'와 '나들'이 아닌 우리로!!]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며 제목을 “‘우리를 산다.”로 정했습니다. 안병무선생님의 책 너는 가능성이다의 책 내용 중 한 소제목이기도 합니다. 글의 내용 중 일부를 나누겠습니다.

 

유교에서는 인간 사회의 도덕적 지표를 네 가지로 삼았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의(仁義)이다. ()은 사랑이라는 말로 대치할 수 있는 원래는 좀 더 구체적인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라는 어원을 갖는다. ‘사랑이란 관념이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에서 있고, 있어야 할 것이 사랑임을 나타낸다....사람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었기에 이기주의자로 사는 오늘, 집권세력이 권력안보를 위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비인간이 된 경우도 똑같다. 우리는 이미 이런 부류들처럼 너의 고통!’, ‘불의에 대한 불감증을 앓고 있지나 않은지!”

 

오늘 사랑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다양한 생각이 공존하는 공동체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예수의 뜻을 따르는 향린공동체가 정의의 길에 기반이 되어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바로서지 못하는 불의에 대해 말하고 충돌하지만 그 안에 상대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 정의를 앞세운 나의 맹비난이 아니기를 바라며 비난이 아닌 비판적 시각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가 사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를 사는 공동체를 꿈꾸며, 진실한 발걸음을 함께 가기를 기대해 봅니다.

 

하늘뜻을 마치며 노래 한 곡 듣고자 합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시, 류형선 작곡, 정태춘 님이 노래한 고마운 사랑아입니다. 가사 후렴 구 중 이 내용에 집중하며 들으셨으면 합니다.

 

사랑은 고마와 사랑은 뜨거워, 쓰리고 아파라 피멍든 사랑아, 살갗이 찢어지면서 뼈마다 부숴지면서, 이 땅 물들인 사랑아

 

이 가사의 내용을 생각하며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고마운 사랑아] 문익환 시,/ 류형선 작,편곡 / 정태춘 노래

 

고마운 사랑아 샘솟아 올라라

이 가슴 터지며 넘쳐나 흘러라

새들아 노래불러라

나는 흘러흘러 적시리 메마른 이 내 강산을

 

뜨거운 사랑아 치솟아 올라라

누더기 인생을 불질러 버려라

바람아 불어오너라

나는 너울너울 춤추리 이 언 땅 녹여 내면서

 

사랑은 고마와 사랑은 뜨거워

쓰리고 아파라 피멍든 사랑아

살갗이 찢어지면서 뼈마다 부숴지면서

이 땅 물들인 사랑아

이 땅 물들인 사랑아

 

우리가 하는 사랑은 때로는 쓰리고 아프기도 하고 마주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이것은 우리를 살게 하는 고마운 사랑임을 기억하며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세상에 무엇 하러 왔나 얼굴 하나 보러 왔지.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가슴에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이를 만나는 일이다.

이러한 이를 간직하는 한 어떤 난관에서도 좌절하지 않을 것이며

자기의 힘의 한계를 실감하면서도 용감할 수 있으며

때로는 자존심 따위는 아랑곳없이

어떤 사실 앞에 무릎을 꿇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기적이기 쉬운 내 눈으로만 무엇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사물을 보고 내 뜻을 그의 뜻에서 결정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영원한 동반자를 만나는 일, 그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다.(안병무)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고마운 사랑으로 우리를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