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전복(顚覆)

17:5-10; 시편 1; 고전 15:12-20; 6:17-26

 

이미 고향을 찾아 나서는 민족대이동이 시작하였습니다만, 내일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날입니다. 달을 기준으로 하는 새해입니다. 그런데 실생활에서는 해를 기준으로 하는 서양의 태양력을 갖고 있다 보니 우리는 신정 구정 하여 새해를 두 번 세고 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예수 탄생 4주 전 대림절의 시작을 신앙적인 의미에서 새해로 지키는데, 이렇게 보면 우리는 새해를 세 번 지키는 셈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과 같이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새로운 마음으로 한 해를 맞이하는 일은 좋은 일이로되 새해를 세 번이나 갖게 되니까 어느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복 많이 지으세요!]

 

설날 인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입니다. 무슨 복인지도 분명하지 않고, 어디에 가서 받으라는지도 분명하지 않지만, 상대가 들어서 좋고 말하는데 전연 부담이 없으니 수도 없이 이런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런 인사를 아무 생각 없이 마구 사용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우리네 마음이 기복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교회를 다닙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상당수가 복 받기 위함이라고 답을 합니다. 그리고 복을 받기 위해 열심을 내게 되는데, 매사가 그러하듯이 불만이 생깁니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고 더 열심을 내어 충성하는데, 왜 저한테 복을 주지 않는 것입니까?’ 언제부터인지 성서의 야훼 하느님은 모두의 하느님이 아닌 혼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이기적 하느님으로 변해 있고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고 자기가 잘못되면 이를 운명의 장난 혹은 신의 실수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위선적인 믿음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형제여,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점에서 저는 말로 모든 것을 때워버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보다는 새해 복 많이 짓고 나누세요!’라는 인사를 통해 복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책임을 상기시키는 것이 보다 신앙적인 인사라고 믿습니다. 앞뒤 좌우 주위에 계신 분들에게 이 말로 새해 인사를 하여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모두 복을 다루는 말씀입니다. 시편 1편과 예레미야의 말씀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물가의 심은 나무처럼 잎사귀가 시들지 않고 열매 맺는다는 얘기를 하고 있고 루가복음은 마태복음의 8(혹은 9) 산상수훈 말씀을 절반으로 줄였지만, 그러나 동시에 부자와 배부른 사람들에게는 불행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서신서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장의 일부를 뽑아놓았는데, 이는 최상의 복은 다름 아닌 부활과 영생의 복임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세 개의 본문 말씀이 모두 땅의 얘기를 하고 있는데 반해 죽음 이후의 일을 언급하고 있어 너무 생뚱맞습니다. 저 개인으로서는 매우 부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교분리(政敎分離)]

 

요즘도 가끔 신학논쟁이 되는 주제가 정교분리입니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주장입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 이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정교분리를 가장 소리 높여 외치는 보수적인 교회일수록 선거철만 되면 가장 충성스런 정치적인 집단이 되어 기독정당을 만드는데, 이번에도 또 만들었습니다. 사실 유럽에는 기독교정당이 많고 실제로 정권을 잡는 일도 있어 별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만,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 선거철만 되면 뭐가 생기는지 정치적 집단이 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헌법에 정교분리를 명시해 놓은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대통령 후보자들 가운데 공화당의 선두 주자인 부동산 투자로 떼돈을 번 도널드 트럼프나 테드 크루주 텍사스주 상원의원은 모두 인종차별주의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극보수 정치인들로 모두 미국 남부 보수 기독교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일제시대 대부분의 미국 선교사들은 정교분리라는 교회의 비정치화를 선택했습니다. 일부 식민정책에 반대하는 선교사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미국정부와 일본정부가 맺은 정치 밀약에 따라 일본의 조선식민지배를 정당화 했습니다. 심지어 총독 이등방문은 미국선교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정치, 물질과 몸의 문제를 전담할테니 당신들은 조선인들의 영혼의 문제만 책임지시오.”

 

당시 미국장로교 선교위원회 총무 브라운(A.J.Brown)은 일제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일본 통치에 대한 선교사들은 네 가지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적대요, 둘째는 무관심이요, 셋째는 협력이며, 넷째는 충성이었다. 넷째의 충성은 내가 믿고 있는 바에 의하면 온당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입장은 그리스도의 예와도 일치된다. 그리스도는 일본보다 더 악한 (로마와 헤롯의) 정부에 자기의 충성을 바쳤고 그의 사도들에게도 충성을 다하라고 촉구하였다. 이것은 바울의 교훈, 로마서 13장의 말씀과도 일치된다. 평양에서 모인 조선선교회는 이 네 가지 입장 중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 충분히 토의한 결과 충성의 입장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이는 히브리노예 해방 사건으로부터 출발한 제1성서 출애굽 해방 역사에 대한 오독이자 십자가 죽음으로 로마 제국의 부당한 통치에 저항했던 역사적 예수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런 정교분리 정책으로 말미암아 개화기 초기로부터 기미독립만세사건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이 기독교인들이었지만, 이후의 교회는 출애굽기나 요한의 묵시록의 말씀들은 강단에서 사라지고, 대신 불신지옥 예수천당이라는 반성서적이고 반복음적인 구호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남한 개신교는 사회 개혁을 가로막는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되었고, 남북대화와 평화통일에 있어서도 가장 큰 걸림돌 집단으로 전락을 하고 만 것입니다. 성서적으로 보더라도 교인들로 하여금 현실 정치에 눈을 감고 영혼 구원에만 몰두하도록 하는 것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도록 하라는 예수님의 기도에 역행하는 반신앙적인 일이요 빌라도와 헤롯의 독재를 옹호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교분리란 종교집단이 정치권력을 꾀하면 안 된다는 말이지 종교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종교가 참 종교가 되는 것은 정치권력을 갖고 있는 강자에 대항하여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저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할 때입니다. 지금 교회가 신뢰도가 떨어지고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된 이유는 종교 본연의 역할 곧 정치나 자본권력을 비판하는 예언자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남한 교회는 권력과 자본의 노예가 되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顚覆]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의 핵심 메시지는 오늘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 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런데 사실 이전 번역인 그냥 이라고 하는 것이 공동번역의 행복보다는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행복(幸福)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정신적 상태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선포하신 희랍어 마카리오스라는 은 단지 물질 축복 혹은 정신적 만족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편 1편에서와 같이 악을 꾸미는 자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고 야훼의 주신 말씀을 낙으로 삼아 이를 되새기는 사람, 곧 신 앞에 선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는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하기 때문에 혹은 굶주리기 때문에 그가 복된 것이 아니라 그의 가난과 굶주림으로 인해 그는 자기만족에 빠져들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만 자기 자신을 전폭적으로 내어 맡기기 때문입니다.

 

루가는 마태가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는 말이 내포하는 피안세계로의 도피를 방지하고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자가 복을 받는다는 것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가난한 자에 대한 복을 선포하고 나서 바로 이어 부자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또한 이를 불행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이는 희랍어 ouai 가 갖고 있는 저주 심판을 매우 약화시키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여기서도 가난 그 자체가 하느님의 복을 받는 조건이 되지 않듯이 부자라고 해서 무조건 화가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 농부의 비유에서와 같이 그 부를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똑똑해서 많은 소출을 얻었다는 자기 우쭐그리고 이를 함께 일하는 소작인들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창고를 더 크게 짓고 죽을 때까지 이를 누리고자 하는 물질 탐욕영혼 소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과 부를 하느님 관계에 비추어 폭넓게 해석한다 하더라도 가난한 자가 복을 얻고 부자가 화가 임하는 복의 전복(顚覆)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께서 아무리 가난한 자가 복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저들의 것이 된다고 말씀하더라도 가난을 선택하고 배고픔을 선택할 신앙인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화가 임한다고 할지라도 그건 나중 문제이고 일단 부자가 되어 보고 싶은 욕망을 대부분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실제는 예수의 말씀과는 반대로 걸어가는 신앙의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평생을 교회 안에서 살아왔고, 예수의 말씀을 연구하고 예수의 말씀을 선포하여 왔지만, 사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저 안에서도 있습니다.

 

[정치사회학적 해석]

 

나아가 어떻게 해서 가난한 자와 부자의 자리가 역전된다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를 죽음 후에 천국과 지옥 가는 일로 해결되는 것이라면 예수께서 이렇게 복잡하게 말씀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지금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텍스트()의 컨텍스트()화가 아닌 컨텍스트()의 텍스트()화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사회학적 해석입니다. 곧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의 가난한 자는 누구이고 배고픈 자는 누구이고 우는 자들은 누구이고 예수로 인해 미움을 받고 쫓김을 당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화가 임할 것이라는 부자는 당시 어떤 사람들이고 배불리 먹고 웃고 지내는 부류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예언자들이 누구였는지를 사회학적으로 밝혀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복()과 화()의 전복이 명확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식민지 체제 하에서의 유대 사회에서 이 두 부류의 경계선은 분명했습니다. 지배 권력과 한편이 된 자는 분명 부자였고 먹을 것이 많아 항상 배가 불렀습니다. 반면 로마권력에 저항하며 유대의 독립과 자유를 찾기 위해 애를 쓰던 사람들은 직장이나 마을에서 쫓김을 당해야 했고 때로는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라 불리고 옥살이를 하거나 십자가에 처형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지금 이렇게 핍박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복이 그리고 지금 세상의 모든 복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화가 임함을 선포합니다. 이게 죽음 후에 일어나는 피안의 사건이 아니라면, 이는 민중 혁명(革命)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민중 혁명이 일순간이냐 아니면 점진적이냐 혹은 폭력을 동반하느냐 동반하지 않느냐고 하는 질문은 따르겠지만, 지금 눌리고 굶주림에 있는 꼴찌가 첫째가 되고 힘센 자들과 부자들이 꼴찌로 되는 역사 전복이 일어나는 길은 민중 혁명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미완이긴 하지만, 419민중혁명이라든가 6월민중혁명을 통해 그런 일들을 실제 경험했습니다. 권력을 마구 휘두르던 독재 대통령들이 해외로 쫓겨나거나 암살을 당하거나 옥에 갇히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런 예는 세계 역사에서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후보]

 

요즘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보면서 예수께서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 혁명이 단지 허황된 꿈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미국은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 체제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 민주당 공화당 양당 모두 변두리에 놓여 있던 극우와 극좌 두 후보가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부동산 투자로 떼돈을 번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칭 사회주의자인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 후보입니다. 전 처음 도널드 트럼프를 보면서 설마하니 저런 엉터리같은 친구를 미국인들이 뽑아줄까 했는데, 공화당 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반면 전 샌더스 의원이 후보로 나서기에 아니 저런 꿈쟁이 혁명가를 미국사람들이 뽑아줄까 했는데, 민주당 후보의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인종차별 언사를 통해 국민들의 어리석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야비한 선거 전략을 갖고 있는 트럼프후보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미 화가 임한 사람이기에 언급을 피하고 꿈쟁이 샌더스의원의 얘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샌더스후보가 줄기차게 외치는 두 마디의 말은 이것입니다. ‘지난 40년동안 수천조원의 돈이 중산층에서 상위 0.01%로 이동하였으며 그로 인해 지금 미국 부의 99%를 상위 1%가 차지하는 엄청난 잘못에 빠져있다.’ ‘나는 월스트리트의 은행들을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들이 파산하기에 너무 크다면 그들은 존재하기에도 너무 크다.’ 지금까지 어느 정치인도 감히 공공연히 말하지 못했던 미국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구조 악을 비판하고 나선 것입니다. 남한에서는 이런 발언을 하면 빨갱이로 몰립니다.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가장 힘이 약한 동북부 버몬트주의 상원의원인 샌더스는 나이도 76세로 사실 은퇴 연령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민주당 후보로 나섰지만, 1년 전까지만 해도 양당제도로 굳어진 미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무소속으로 정치활동을 변방 정치인이기도 합니다. 그가 정치에 나선 이유는 유대인 아버지의 혈육들이 모두 폴란드 집단 수용소에서 죽었는데, 그런 악행을 저지른 히틀러가 선거에 의해 선출이 되었다는 사실과 부의 분배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가운데 페인트 장사꾼이 아버지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정치에 뜻을 두고 31세 때 처음 주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떨어집니다. 그때 득표율은 2.2% 2년 후 그는 주지사 선거에 나서고 그래서 얻은 득표울이 1.1%, 2년 후 연방상원에 출마해서는 4.1%, 2년 후 주지사 선거에서는 6.1%를 받았습니다. 30대에 10년을 노력해서 6%를 얻었다면 정치의 길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것이 마땅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는 10년 동안 무모한 도전을 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네 번의 선거에 출마를 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린 직후 벌링톤 시장선거에 나갑니다. 처음부터 시장선거에 나갔다면 그는 당선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무소속 후보이기 때문입니다.


벌링톤시는 버몬트주에서는 가장 큰 도시이지만, 인구 4만 명도 안 되는 소도시에 불과합니다. 제가 미국에 24년을 살았지만, 이 도시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민주당 후보에게 불과 10표차로 승리하는데, 이 열 표가 오늘의 그를 만든 셈입니다. 이후 네번 연임을 하고, 연방 하원의원에 출마했다 처음에는 낙선했지만, 다시 도전하여 당선을 한 이후 무려 8번을 연임하고 이후 상원의원에 당선된 것이 10년 전이고 재선을 하고 은퇴를 앞둔 시점이었는데, 힐러리에 불만을 품은 진보 민주당원들의 요청에 의해 작년 4월 민주당에 가입하고 대통령선거에 뛰어든 것입니다. 1년 전 아니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지금의 선풍적인 열풍을 몰고 오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 자신조차 말하기를 자기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힐러리의 보수를 깨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 첫 번째로 진행된 아이오아주 예비선거에서 힐러리후보와 박빙을 이루었고, 이번 주 화요일 뉴햄프셔주 예비선거에서는 승리가 확정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우선 미국이라는 나라가 갖고 있는 민주적 절차 제도에 있습니다. 국외적으로는 군사력에 기초하여 세계의 패권을 추구하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제의 동지도 오늘의 적으로 오늘의 적도 내일의 동지로 만드는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나라이지만, 국내적으로는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풀뿌리 시민들로부터 논의를 거쳐 후보를 선택하는 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수백 명 밖에 되지 않는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 하더라도 민주당원과 공화당원들이 서로 나뉘어서 누가 좋은 후보인지를 토론을 통해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학연 지연 혈연 등등의 연줄에 따라 후보자를 택하는데 반해 그들은 후보자의 공약과 정치적 신념을 놓고 자유토론을 통해 후보자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열린 구조가 있기에 샌더스 의원같은 진보적 사회혁명가가 대통령후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걸어온 길을 보면 매우 독특합니다.

 

[가난한 자의 편에 서십시오!]

 

50년 가까이 정치활동을 하면서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사회적 약자, 소외계층을 줄기차게 대변해왔습니다. 며칠 전 보수기독교 대학인 리버티대학에서 행한 마지막 연설 구호는 이것이었습니다. 그건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Stand with the poors!’ 가난한 자의 편에 서십시오. 그는 기성 정치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평생을 무소속으로 일해 왔습니다. 그가 정치권력을 지향했다면 진즉에 민주당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본질에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6년 전 70세에 상원에 제출된 부자 감세안을 저지하기 위해 8시간 37분 동안 발언을 하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었습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최고 부자나라이지만, 빈부격차가 제일 심한 나라입니다.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 부자는 놀고먹어도 점점 부가 늘어나고 가난한 자는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점점 가난해지는 부조리의 나라입니다. 유럽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대학생 등록금이 너무 비싸고 국민건강보험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아주 부자가 아니거나 아주 가난한 자가 아니면 결국은 돈 벌어서 의료비로 다 탕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샌더스 의원은 부자들의 세금을 대폭 올림으로 이러한 잘못된 구조를 뜯어고치겠다는 것이고 여기에 근본 악인 금융시스템을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빈부격차가 두 번째로 심한 나라가 남한인데, 지난해 남한은 부자세는 더 줄고 서민들이 즐겨하는 담배세만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당연히 중앙정부가 담당해야 할 누리보육 예산 수천억 원이 없다고 하면서 지방교육청을 옥죄이고 10조원 이상의 엄청난 세금이 들어가는 사드는 사들이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샌더스의원이 대통령에 당선이 된다 하더라도 기득권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의 혁명적인 도전과 진보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미국의 약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렸던 수많은 젊은이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구름떼같이 몰려들고 있는데, 그들이 내는 정치 후원금 일인당 평균금액은 27불 곧 3만원입니다. 기업의 큰돈을 받으면 거기에 코를 꼬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큰 손을 거부할뿐더러 다른 후보와 달리 선거 유세 중에는 버스로 이동하고 비행기를 탈 때에도 이코노미석에 앉습니다. 또한 유세 중에는 상대를 비난하는 네거티브 전략을 쓰지 않고 오직 공약만으로 정정당당한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변화의 추동과 애국심 타령]

 

저는 8년 전 흑인 오바마의 당선에도 깜짝 놀랐지만, 이번 샌더스의 돌풍을 보면서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물론 오바마나 샌더스의 능력이 뛰어난 점도 있고 미국의 정치제도의 장점도 있습니다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대의 변화입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손바닥만 한 핸드폰 하나를 통해 세계의 모든 움직임을 시시각각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라디오나 TV 신문을 통해 언론이 제공하는 제한된 뉴스만을 듣는 나이든 세대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신문 TV는 언론사가 한번 걸은 죽은 뉴스입니다. 같은 사건도 어떻게 제목을 붙이냐에 따라 전연 다른 사건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핸드폰의 페이스북과 같은 매체는 1인 기자가 본 것을 그대로 사진과 함께 올리는 살아있는 뉴스입니다. 해석과 판단은 독자의 몫입니다. 나이든 세대들은 해석된 사건을 받아들임으로 언론에 의해 조종을 당하지만, 젊은이들은 그것에 전연 조종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은 우리와 전연 생각이 다르고 그 접근 방식도 전연 다릅니다. 그래서 워싱톤포스트지는 '버니 샌더스가 시대를 따라잡은 게 아니라 시대가 그를 따라잡았다.'고 말하는데, 이 말을 기성세대들은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현자(賢者)는 변하자고 말하고 바보는 변했다고 말하는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향린인들은 변화에 떠밀려가는 사람들이 아닌 변화를 추동해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추측컨대, 만약 지금의 돌풍이 계속 이어져 샌더스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면 국내정책은 물론이요 미국의 외교 정책에도 커다란 변화를 불러 올 것입니다. 물론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여전히 추구하겠지만,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던 사회주의자 샌더스이기에 이전 대통령과는 다른 한반도정책을 기대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의 아류(亞流) 국가인 남한은 정치 군사 부문에서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의 임기 중에 남북한 국민이 바라는 남북평화협정 논의가 시작될 것입니다. 하여간 지금은 샌더스가 대통령이 되던 되지 않던 미국은 변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60년대의 히피문화와 같이 그 어떤 것도 이 변화의 거센 물결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남한입니다. 변화를 따라 미국의 뒤를 쫓아가기만 해도 좋겠는데, 오히려 뒤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애국심을 공무원의 면접시험에서 가장 큰 항목으로 정하겠다고 하는데, 도대체 애국심을 판단하는 기준이 뭐가 될 수 있을까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면 될까요? 아니면 애국가를 1절까지 부르면 D 등급, 4절까지 부르면 A 등급을 주면 되는 것일까요? 아파트 투기를 위해 위장전입을 하거나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병명으로 징집 기피를 했다면 그건 애국심도 없고 공무원이 될 자격도 없다고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겠지만, 애국심의 높고 낮은 정도를 판단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뭐가 있을까요? 미국은 사회주의자가 대통령이 되느냐 마느냐 하고 있는 판에 남한은 파쇼독재국가가 국민을 길들이기 위해 즐겨 써먹는 애국심 타령만 하고 있으니 외신에서 이런 얘기를 들으면 창피하여 머리 들고 다니기가 힘듭니다. ‘바보야! 문제는 분배야!’가 미국 정치의 화두가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가 정치의 판도를 결정하고 있으니 안타갑기만 합니다.

 

[고난과 씨ᄋᆞᆯ]

 

지난 목요일은 봄의 길목인 입춘이면서 동시에 함석헌선생의 27주기 추모일이었습니다. 함석헌선생은 유영모선생과 더불어 우리나라 철학계가 세계에 자랑하는 사상가입니다. 그가 처음 펴낸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성서를 깊게 이해하고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입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한국역사는 주위 강대국들로부터 끊임없는 침략과 강압을 견뎌온 고난의 역사이다. 성서의 역사 또한 하느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난의 역사이다. 고난에는 분명히 뜻이 있다. 거기에는 하늘의 뜻이 있다. 그 뜻을 깨닫고 헤아리는 씨ᄋᆞᆯ들만이 미래의 역사를 열어갈 수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두 다리로 서서 머리를 하늘에 두고 살아가는 점에 있다. 그래서 함선생께서는 1958년 한국전쟁이 휴전 상태로 5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가져온 하늘의 뜻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남북대결을 통한 권력쟁취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시대를 향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유명한 글을 남겼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적 숙제는 세 마디로 말할 수 있다. 하나는 통일정신이요, 하나는 독립정신이요, 또 하나는 신앙정신이다. 그리고 이 셋은 결국 하나다. 세계 어느 민족의 역사나 고난의 역사 아닌 것 없고, 인류 역사가 결국 고난의 역사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역사는 고난 중에서도 그 주연(主演)으로 보는데 그 고난의 까닭은 이 세 가지 정신 곧 통일정신, 독립정신, 신앙정신을 구현하는데 있다.’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우는 자, 권력에 의해 쫓김을 당한 자들에게 복이 임하고 부자와 배부른 자들과 웃는 자들과 위선으로 칭찬을 받는 사람들에게 화가 임하는 역사 전복의 구현(具顯)은 한반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바로 이 세 가지 정신의 실천과 맞물려 있습니다.

 

사람의 일생을 소와 개와 원숭이에 빗댄 우화입니다. 처음 신이 소를 만들고 60년을 사는 대신 사람을 위해 일하라고 말하자 소가 너무 길다고 30년만 살겠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개를 만들고 너는 30년을 살면서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키라고 하니까 너무 길다고 15년만 살겠다고 답합니다. 이번에는 원숭이를 만들고 너는 30년을 살면서 사람들을 위해 재롱을 피우라고 하니까 길다고 15년만 살겠다고 답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들고 ‘25년을 살아라. 그 대신 너에게만 생각하는 머리를 주겠다고 말하자 사람이 말하기를 ‘25년은 너무 짧습니다. 소가 버린 30, 개가 버린 15, 원숭이가 버린 15년을 더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하자 신이 허락을 하여 인간의 수명이 85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처음 25년은 머리를 사용하는 교육을 통해 성인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소가 버린 30년을 소같이 일하며 삽니다. 그래 55세가 되면 은퇴를 하여 개가 버린 15년을 개같이 집을 지키다가 70세가 되면 15년을 손자손녀 앞에서 원숭이처럼 재롱을 피우다가 간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지금 어느 단계에 머물고 계시는가요? 인간은 머리를 하늘에 두고 사는 생각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데, 과연 그러한가 생각해 볼만한 우화입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