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을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기

(시편 51:14~18; 이사 58:6~10; 코린토5:20~6:10; 마태 6:1~6/16~18) 

                                                     고상균 목사

지금 조헌정 목사님은 유치부에서 하늘뜻펴기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안식년에 들어가시기 전에 부서별로 하늘뜻펴기 혹은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교육부 각 부서의 요청에 따른 것인데요, 언제나 이 자리에서 사건의 폭풍 속으로 뛰어들라고 멋지게 말씀하시는 분이 어린이들 앞에서 안녕하세요. !!!’하시는 게 상상이 되십니까? 제가 향린교회에서 교역활동을 처음 시작한 것이 2010년이니까 올해로 6년이 되는데요. 조 목사님께서 하늘뜻펴기를 앞두고 긴장하시는 모습을 목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수년 전 유아부에 들리셨다가 아이들에게서 발생했던 수염 난 할아버지 무섭다! 대성통곡 사건이 목사님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즉 트라우마가 되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유치부 예배가 함께 하는 이들에게는 기쁨과 은혜의 시간이, 조 목사님께는 심리적 치유의 시간이 되길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설날 오전,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잠시 TV를 보며 쉬고 있는 저에게 어머니께서 매우 조심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둘째야.......올해는 이모 댁에 인사드리러 갔으면 좋겠구나.’ 저의 어머니는 북녘 땅 흥남시에서 출생했고, 부두가 내려다보였다던 그 곳에서 소위 ‘1.4 후퇴를 맞이하게 되셨습니다. 혹시 재작년 말 개봉했던 영화 국제시장을 보신 분이 계신가요? 영화의 초반부에 피난민들이 흥남부두에서 배를 향해 내달리는 상황이 등장하는데요, 195012월 열 살이 채 되지 않았던 저의 어머니도 엄마, 아빠, 그리고 당시 십대였던 두 언니와 함께 그 때 그 곳에 계셨습니다. 영화에서는 군수물자를 버리고 피난민을 택한 에드워드 알몬드 미 10군단장의 감동적인 행동으로 수많은 피난민들이 목숨을 구한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만, 실상은 전투 병력을 안전한 선내에 탑승시키기 위해 물자를 버렸고, 이로 인해 비게 된 갑판으로 피난민들이 몰려갔던 것입니다. 대낮에도 영하 20도에 가까웠던 당시, 사방이 뚫린 갑판위에서 매서운 바람을 온 몸으로 맞아야만 했던 상황 속에서 안타깝게도 제 조부모님, 즉 어머니의 부모님들은 모두 동사하시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경상도 바닷가에 얼어붙은 부모의 시신을 끌고 내린 세 명의 어린 소녀들은 주변 아저씨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가묘를 만들어 제 조부모님을 모셨고, 흘러 흘러 큰 언니는 대구에, 두 동생은 인천을 거쳐 서울에 정착하게 됩니다. 저로써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시간을 함께 했던 어머니와 둘째 이모는 유달리 절친할 수밖에 없었고, 결혼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한 동네에서 이웃으로 사셨습니다. 특히 1970년대 말과 80년대 초 다니시던 공장에서 노조설립을 추진하다 쫓겨나신 뒤에는 관련 업종으로의 취직을 포기해야 했던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는 대장수술로 성치 않은 몸에도 일을 하셨어야만 했기 때문에 두 살 형과 저는 주로 가까운 둘째 이모 댁에 맡겨져서 놀고, 밥도 먹고, 낮잠도 자면서 성장했습니다. 그곳에서 난생처음 족발의 감칠맛을 경험했고, 철이라는 이름의 강아지와 만나고 헤어졌으며, 빨간 토끼눈을 처음 살펴보았고, 밭 사이로 다니는 쥐에 소리 소리를 지르며 도망 다녀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저에게도 이모와 이모 댁은 무척 소중한 존재로 자리매김 되어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중학생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무척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된 어머니와 이모의 불화가 아버지와 이모부의 격한 싸움으로 번졌고, 장성한 6명의 이종누나들과의 사이까지 나빠지던 끝에 급기야 이제 다시는 그 집에 가지마!’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과정에서 냉랭하게 저를 대하는 이모와 이모 댁 사람들에게서 적잖은 상처를 받았던 당시 십대의 저 역시 마음의 문이 닫혀버렸고, 이후에는 오가지 않는 시간이 쌓여가면서 생기는 서먹함으로 인해 그 사랑했던 공간 이모댁은 저에게서 사라져갔던 것입니다. 지난 십 수 년 전부터 두 자매는 이전처럼 친하게 연락도 하고 안부도 전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며 함께 하던 이들 간의 다툼, 상처, 나뉨, 그리고 왕래하지 못함에서 오는 서먹함.......

 

설 연휴가 시작되던 지난주일, 전 세계는 북한 발 뉴스로 몹시 소란스러웠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계시듯 광명성 4의 발사소식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전 차원에서라도 사전 통보 후 발사하던 이전과 달리 아무런 예고 없이 진행된 일이었기에 놀라는 이들의 당황스러움은 그 어느 때보다 컸던 것 같은데요, 마치 울고 싶은데 뺨맞은 마냥, 미국과 일본, 그리고 이에 편승한 남한정권은 일제히 북한을 비난하고 나섰고, 늘 대책 없이 오바하는 것을 과단성 있는 행동이라 여기는 듯 한 박근혜 대통령은 입주 기업과 단 차례 상의나 사전 통보 없이 개성공단 폐쇄를 단행했습니다. 이후 공단 내 남측인원 추방 및 개성공단 지역에 대한 군사제한구역 선포, 남측에서 전해지던 전기와 수돗물 공급 중단, 남한과 연결되어 있던 핫라인 정지 등 마치 고수들의 탁구경기처럼 매우 숨 가쁘고 안타까웠던 이틀을 거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단 일주일 만에 1991년 채결되었던 남북기본합의서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개성공단 폐쇄는 매우 용기 있고 중요한 조치로 전적 지지를 표한다. 이를 통해 북한에 대해 핵, 미사일 개발 포기라는 전략적 결단만이 살길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평가한다. - 한반도에 사드배치를 통해 남한을 재물로 중국을 견제하고 싶은 미국의 존 케리 국무장관 -

북한이 탄도 미사일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위반한 것으로 도발적인 행동을 중단하라! - 자신이 다음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 열심히 간을 보고 있는 반기문 UN 사무총장 -

개성공단 입주자들은고위험 고수익을 선택한 당사자들인데 이런 투자로 돈을 벌 때는 아무 말 없다가 손해를 보게 되자 모든 책임을 정부에 돌리면 어느 국민이 납득하겠는가? - 이 정권의 든든한 동반자인 조선일보의 213일자 논설 -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급격하게 평화의 기운이 위협받고, 살아있는 생명모두가 탄식하며 숨죽이고 있는데, 약한 존재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드는 하이에나들처럼 자신, 혹은 무리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의 평화 따위는 매우 손쉽게 외면하는 존재들, 그 힘 있는 자들이 시시각각 그 탐욕스런 이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라는 울타리 속에서 함께 살아가던 우리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싸우고 아픈 상처를 서로에게 남긴 채 헤어진 뒤, 이제는 점차 증오를 넘어 서로에 대해 냉랭해져가고 있습니다. 세계와 국가, 이처럼 몹시도 커다란 존재들 간의 각축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긴장관계, 참으로 간절히 두 손을 모으게 됩니다만, 정반대로 멀어져만 가는 평화....... 이 가운데 참 작고도 작은 한 사람인 우리, 그리고 역시나 참 작은 우리 공동체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또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모시고 있는 하늘말씀 세 본문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1성서 이사야는 유다멸망과 이어진 포로생활 등 국가공동체의 위기를 배경으로 기술된 작품이고, 2성서 코린토후서는 엮여진 글의 한계상 통일된 주제를 발견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바울 및 그의 동역자와 코린토 공동체 간의 갈등과 오해라는 교회공동체의 위기 속에서 기록된 서신이며, 마태오복음은 유다독립전쟁 패배와 예루살렘 함락, 학살과 추방, 이후 급격히 경직되어가던 유대교 공동체로부터의 배척으로 인해 발생한 생존의 위기상황을 헤아려볼 수 있는 글입니다. 이처럼 공교롭게도 세 본문 모두가 헤쳐가기 무척 어려운 위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럼 세 본문은 위기 앞에서 신앙공동체를 향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너무 힘들어서 혹은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어 멈춰 있을법한 상황에서 역설적이게도 오늘의 본문은 모두 뭔가 해라!’ 실천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사야 본문은 전통적인 구분에서 세 번째 이사야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회복에 대한 희망을 격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벅차오르는 환희의 메시지 한 중간에서 분위기를 깨기라도 하듯 위선자의 죄상을 고발하고 나섭니다.

목청껏 소리 질러라. 네 소리, 나팔처럼 높여라. 내 백성의 죄상을 밝혀주어라. 야곱 가문의 잘못을 드러내어라. 그들은 나를 날마다 찾으며, 나의 뜻을 몹시도 알고 싶다면서, 마치 옳은 일을 해 온 백성이기나 하듯이, 자기 신의 법을 어기지 않은 백성이기나 하듯이, 무엇이 옳은 법인지 나에게 묻고 하느님께 가까이 나가고 싶다면서 한다는 소리는, '당신께서 보아주시지 않는데 단식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당신께서 알아주시지 않는데 고행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그러면서 단식일만 되면 돈벌이에 눈을 밝히고 일꾼들에게 마구 일을 시키는구나. (이사야 58:1~3)

이어서 본문은 이와 같은 위선자들의 행동이 야훼의 분노를 일으켰고, 급기야 야훼의 외면, 즉 관계의 단절을 불러왔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깨어져버린 신과의 관계....... 이사야 예언의 전통에 서 있던 예언자집단은 앞서 기술했던 국가적 재난이라는 위기에 대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졌다는 신학적 해석을 내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공동체를 향해 외친 해법은 무엇이었을까요?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너희 상처는 금시 아물어 떳떳한 발걸음으로 전진하는데 야훼의 영광이 너희 뒤를 받쳐 주리라. 그제야, 네가 부르짖으면, 야훼가 대답해 주리라. 살려달라고 외치면, '내가 살려주마.' 하리라. (이사야 58:6~9)

 

신과의 관계라는 신학적 명제에 대한 해법에 대해 놀랍게도 이들은 묶인 이의 석방을 위한 노력, 더 약한 이들과 소유를 나누는 행동 등 사회적이고 구조적이며 경제적인 실천을 말하고 있습니다. 맑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부구조에 속한 실천을 통해 상부구조의 변화를 추동해내는 것이지요. 이는 지금 당장 신과 화해를 이루어서 국가를 세워놓거나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지만, 주위에 압제받는 이들의 해방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하고, 조금 가진 것을 아예 없는 이와 기꺼이 나누어 간다면 그토록 외면하던 신은 마침내 우리와 눈빛을 마주쳐 줄 것이고, 이 회복은 국가적 운명까지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믿음인 것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코린토후서의 바울 또한 공동체 내부의 불화 속에서 정의에 기반(6:7)한 화해를 먼저 제안하고 있으며, 그 화해를 구원이라는 신앙의 지극히 높은 단계로 해석하는 가운데 급기야 그것이 하느님과의 화해라는 급진적 신앙고백을 하기에 이릅니다. 공동체의 위기상황에 대한 지난 기억을 더듬고 바울의 서신들을 모아 코린토후서를 엮어낸 이들에게도 역시 서신의 내용과 유사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지난 시간의 교훈을 통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도 화해를 향한 걸음들을 내딛어 나가기를 염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군단과 유대교 생활공동체 등 이중의 탄압에 직면했던 마태오공동체 역시 위기 상황 앞에서 더욱 결연한 신앙의 행동을 촉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회당과 거리에서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당대 유대교공동체 내에서 소위 신앙좋은 사람들의 전형이라 평가되던 상황에서 그들을 위선자로 규정하고 그와 반대의 행동이 하느님께 드리는 경건함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에 의해 이단자로 규정되고 하느님께 불경한 자들로 매도되었던 자신들의 상황을 전복적으로 해석하는 가운데 위기상황 앞에서 위축됨 없이 예수 신앙을 전해나가려던 마태오공동체의 결연한 신앙적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이번 설 연휴,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오랜 고심하던 저는 무척 오랜만에 이모 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사실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마신 후 주사를 부리는 몇 명의 매형들과 너무 오래도록 만나지 않아 낯설기만 한 조카들로 인한 어색함, 또 어수선함 때문에 한 달 치 에너지가 소진된 느낌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만, 또 언젠가, 또 언젠가, 할 수 있을 때 또 그렇게 만나가다 보면 언젠가 저는 그 옛날 동지팥죽을 한 그릇 담아주시던 이모님, 그리고 함께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놀던 이모 댁 식구들을 다시 만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니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설령, 저의 어머니께서 피난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버리지 않으신 꿈,우리 집은 엄청난 부자였어.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었지. 우리가 피난 내려올 때 땅의 경계에 사기그릇 깨진 것을 많이 묻어놓았으니, 지금이라도 통일이 되기만 하면 난 흥남에 가서 우리 집 땅을 찾을 수 있어. 통일이 되기만 하면....... 흥남에 가기만 하면.......’이라고 하시는 희망만큼 허황되다 하더라도 그 꿈꾸는 일이 두 번의 중풍과 두 번의 심근경색, 그리고 3년 전 평생을 함께 살던 남편을 황망히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지금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데 조금이라도 유의미한 무엇이 되었음에 분명한 실천이었다면, 심기일전해야 한 번 가볼까하는 이모 댁 방문을 통해 어렸을 적 관계가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역시 분명 저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어떤 것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논리학적으로는 분명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것 같은 생각이 듦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참 어색하고, 부족하며, 전혀 효과 없을 것 같은 우리들 각자의,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실천들이모여 이토록 경직된 한반도에 훈풍을 불어 올리고, 희망을 잃어버린 얼굴들에 웃음이 번지도록 하며, 작은 정체성들이 그 작음으로 인해 움츠려들지 않는 세상을 다가오게 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실천의 걸음을 지금도 우리 앞에서 이어가고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오늘부터 시작되는 사순절에 함께 고백해야 할 우리들의 신앙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와 같은 화해의 길을 지금도 걷고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삶의 자리 곳곳에서 발견하는 실천을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는 사순의 기간이 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늘 부족하지만, 마음을 다해 위로합니다.

힘을 내십시오. 평안하십시오.

그리고 진리 안에서 해방의 자유를 만끽하십시오.

 

늘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십시오. 함께하십시오.

그리고 삶 가운데 꼭 한 걸음만큼의 실천을 이루십시오.

 

작은이의 마음을 느끼고, 그 이의 숨소리를 듣는 것은

하느님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평화를 간절히 염원하고, 삶 속에서 아주 작은 실천을 이루어가는 것은

신을 만나는 일입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웃음이 피어오르게 하는 것은

야훼의 뜻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를 통해 지금도 하느님과 화해하는 삶을 앞서 행하고 계시는

예수의 발자국을 발견하십시오.

여러분의 작은 실천이 마침내 여러분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제 서로를 향한 축복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가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