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나리라

5:9-12; 32:6-11; 고전 5:16-21; 15:1-3, 11-24

 

지난 주 목요일 박근혜정부가 밀어붙인 일명 테러방지법이 국회에서 통과가 되었습니다. 이 테러방지법은 야당 국회의원들이 지적한 것처럼 현재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국정원에게 날개를 달아준 법이며 국가권력이 국민들을 무차별 감시하는 법으로 변질될 것이 분명합니다. 가끔 국가보안법 재판을 받는 목사나 교수들의 법정에 가서 검찰이 제시하는 증거 자료와 주장들을 유심히 들어보면 저들의 감시영역이 우리 일반인의 상식을 훨씬 초래하고 있습니다. 전화와 이멜 도청은 물론 심지어는 종로 5가에 가면 교회협의회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의 7층 작은 방에서 조용히 나눈 대화까지도 모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테러 방지목적으로 정권에 가시 박힌 사람들을 뒷조사를 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법원의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이제는 그 판단의 재량권마저 국정원에 주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은행거래, 신용카드내역, 모일모시에 어디에 누구랑 있었는지, 그때 누구랑 전화를 했으며 카톡에서 주고받은 내용은 무엇인지? 이제 국정원은 여러분의 사적인 일들을 다 들여다볼 수 있는 전능자가 된 것입니다.

 

[1984]

 

1949년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엘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스탈린의 전체주의 정치를 보면서 미래에 닥칠 하나의 전체주의 국가를 상상하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소설로 만들었습니다. 이 정부는 이런 구호를 내겁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그리고 과거의 역사를 지배하는 자만이 미래의 역사를 지배한다는 신념에 따라 과거 역사를 전부 재편성합니다. 역사국정교과서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재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똑똑하고 비판적인 사람들은 모두 제거하고 백성 모두를 우매한 예스맨으로 만듭니다. 오래 전 전제 군주들은 너희는 이런 일들을 행해서는 안 된다부정 명령을 말했다면, 오십년 전의 전체주의 국가는 너희는 이것들을 행하라.’는 긍정명령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1984>에 등장하는 국가는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 서술체로 사고의 못을 박아버립니다. 앞으로 닥칠지도 모르는 시민 한사람 한사람을 감시하여 이들의 행동을 제어하고 생각을 길들이는 전체주의 국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조지 오엘은 이 소설을 썼습니다만, 오히려 세상은 이런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겨울공화국]

 

1975년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던 양성우시인의 겨울공화국의 일부입니다.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 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제가 처음 향린교회에 부임했을 때에는 한주에 두세 번 남대문서의 담당 형사가 제 방에 인사를 하러 오곤 했습니다. 말은 인사이지만, 게시판에 붙어 있는 행사 안내 등을 유심히 살펴보곤 상부에 향린교회의 동향을 보고하기 위함입니다. 홍근수목사님 시절에는 이 자리에 국정원 직원이 앉아 설교 내용을 적어서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담당 형사들이 교회에 오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홈피를 보면 저의 설교가 그대로 나와 있고, 카톡, 이멜을 통해 모든 필요한 정보를 다 꿰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현실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경찰국가이고 권력은 국정원으로부터 나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우리 사회의 모든 지도자들 법관, 고위 관료, 일류 기업 부장들, 종교문화예술 등등에서 소위 이름깨나 나 있는 사람들의 개인정보는 모두 국가정보원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돈 좀 벌고 출세 좀 하려면 비리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작년엔가 술집과 침대방이 비밀통로로 연결된 강남의 최고급 유흥업소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고객 명단과 연락처가 담겨 있는 비밀수첩이 발견되었다고 경찰이 발표하였는데, 그 수첩이 누구 손아귀에 있을까요? 이 수첩을 쥐고 있는 사람이 너 말 안 들으면 이거 공개할거야라고 위협하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SNS상에는 박근혜정권의 압박을 버티던 정의화의장이 갑자기 이 나라가 국가비상사태에 들어갔다고 말하더니 테러방지법을 직권 상정한 이유가 국정원으로부터 모종의 압력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국가비상사태를 무슨 근거로 주장하는지? 이전에는 청와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여야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직권 상정을 거부하더니 이번에는 여야가 합의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의장으로서 직접 상정한다고 하는 전연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행동을 보이는 것은 정보기관의 압력 때문입니다.

 

지난 해 정치권력에 깊게 연관된 한 기업회장이 비리 사건으로 조사를 받자 뇌물을 준 6명의 관료들의 이름과 금액을 적은 쪽지를 남겨 놓은 채 자살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조사를 받고 형을 받은 사람은 한 명뿐입니다. 왜 같은 쪽지에 있었는데, 한 사람만 기소를 당하는 것입니까? 청와대의 권력 때문입니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혐의 사실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애초에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국가테러법과 삼선개헌]

 

테러란 국가를 전복할 목적으로 실행하는 폭력을 말하는 것이니 이를 방지하는 법을 마련하는 일은 어느 국가나 필요로 하는 일이고 정당한 일입니다. 문제는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수많은 형법이 있어 테러를 방지할 법이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법을 만든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에도 이와 비슷한 법을 제정했다고 말하는데, 미국은 총기 소유나 폭탄제조가 쉬운 국가이니 어떤 의미에서 이멜이나 전화 도청을 통해 대규모 살상이 일어나기 전에 미연에 방지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총기 소유가 불가능하기에 국가전복이나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테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37만 명에 달하는 국정원과 검찰과 경찰과 군수사대가 이미 국민들의 일상을 감시하고 제재하는 경찰국가이기에 이는 전연 불필요한 법입니다.

 

32명의 야당국회의원들이 기네스북에 기록될 192시간의 필리버스터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 법을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킨 이유가 무엇일까요? 47년 전 여당국회의원들은 한밤중 비밀 장소에서 따로 모여 박정희가 요구한 삼선개헌헌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순진하게도 박정희의 말을 믿었습니다. 아니 이번 딱 한번 4년만 더하고 물러나겠다고 하잖아. 경제개발 계획한 것 마무리 짓고 물러나겠다고 하잖아. 우리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잖아. 삼선개헌 허락하자구. 김대중 김영삼의원을 비롯한 야당은 종신집권을 위한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중앙정부부장이었던 김재규장군의 처단이 없었더라면 박정희는 분명코 종신집권을 꾀했을 것이고 그로 인한 민중의 저항과 국가폭력으로 인해 수 십만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국가위기사태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테러방지법은 삼선개헌과 같이 권력 장악을 위한 속임수입니다. 이 정부가 정말 나라의 안전을 위하고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려고 한다면 테러방지법이 아니라 전쟁방지법을 제정해야 옳았고, 간첩을 창조해내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평화보안법을 제정해야 옳았습니다. 조지오엘의 <1984>이 공상 소설이 아닌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언론 자유와 자기 검열]

 

저야 이제 나이 60이 넘어 어쩌면 살만큼 살았으니 제가 불의한 국가 권력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저들이 감옥에 가두겠다고 한다면 어쩔 도리가 없겠습니다만, 자라나는 세대들이 자기 양심에 반하지 않는 생각과 사상을 자유롭게 발표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다움의 최고의 가치라는 생각을 피워보기도 전에 자기 검열을 통해 스스로 입을 닫고 움츠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암울한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넘어 분노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20대를 그렇게 이 땅에서 보냈기 때문입니다. 아무데서나 내 생각을 말할 수가 없었고,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언비어의 방식 외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창의적이고 가장 자유롭게 살아야 할 20대에 저는 누군가가 저의 머리를 꽉 누르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수상한 사람을 신고하면 포상금이 얼마라는 현수막은 농촌 마을 곳곳마다 붙어 있었고, 제가 간혹 혼자 외딴 지역을 여행하노라면 여관방에 형사가 찾아와 신고가 들어왔다고 하면서 증명서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마을 입구에 퇴!하고 침을 뱉으며 떠나갔지만, 그게 어찌 그 마을 사람들의 죄이겠습니까?

 

70년대에 수없이 터져 나온 간첩단 사건, 임자도간첩단 사건, 울릉도간첩단 사건, 일본 유학생 간첩사건, 미국 유학생 간첩사건, 유럽간첩단 사건,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질만 하면 대서특필되었던 수많은 간첩단 사건들, 지금 모두가 다 거짓과 조작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지금 청년들이 들으면 설마 그럴 리가 있었겠냐고 반문하겠지만, 대학생 시절 버스에서 내려 집에 들어가다 골목을 지키고 있는 경찰의 장발 단속에 걸렸습니다. 지금 한세욱목사의 머리 길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당시 저는 신학생이었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전도사였으니 장발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할 처지였고, 그저 이발소 가는 일을 조금 미루었을 뿐인데, 단속에 걸린 것입니다. 오늘 공개적으로 처음 고백하는 얘기이지만, 당시 앞뒤 경찰들이 한명씩 감시하는 상태에서 저와 또 다른 한 청년과 함께 끌려가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친구들이 민청련사건 등등으로 수년씩 징역살이를 하는 상황에서 장발검속에 걸려 하루 밤을 유치장 안에서 보내는 일은 내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일일뿐더러 당시 시국선언과 데모에 가장 앞장서서 투쟁하고 있던 한국신학대학의 이름을 더럽히는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하고는 파출소가 보이는 사거리 대로변에 나서자마자 삼십육계의 비법 중 마지막 단계인 출행랑 작전을 감행했고, 다행히 달리기는 좀 하던 편이라 열심히 쫓아오던 경찰의 추격을 용케 피하게 되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부터 저는 평소의 정류장에서 내리지를 못하고 한 정거장을 더 지나서 내려야 했고, 넓고 편한 골목길 대신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 길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여름철이면 진흙탕에 빠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생각하고 몇 개월을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화인(火印)받은 군상(群像)]

 

감옥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3년간의 철책선 사병복무를 마치고 외국을 가서야 저는 비로소 언론의 자유라는게 뭔지, 자기 양심에 반하지 않는 발언을 할 수 있다는 양심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경험했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이 땅에서 스물 일곱해를 살아가는 동안 나도 모르게 나의 생각과 혀를 검열하는 자기 검열체제에 갇혀있었던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그런 자기 검열의 노예 상태로 살아오고 있는데, 그건 어려서부터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만한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외세가 강제로 만들어 놓은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적대감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백성들의 머리속에는 마치 소나 말의 등짝에 이 놈은 나의 소유입니다라는 증거로 빨갛게 달아오른 쇠덩이로 낙인을 찍는데, 그런 낙인이 박혀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결코 사라지지 않을 화인(火印)입니다. 저는 20여년 넘는 외국생활을 하였기에 과거 6,70년대의 화인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내안에 망령이 살아있음을 깨닫고 스스로 놀라고 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단지 버릇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사상까지도 그러한 것입니다.

 

겨울공화국의 일부입니다.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체하고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기울이며

뼈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오늘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라고 주장하지만,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가까운 목사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 속 썩히는 교인 얘기를 하면서 어떻게 이 교인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하고 질문을 던지면 하느님도 못하는 일을 왜 당신이 하려고 해!’라는 충고를 듣습니다. 사실, 바울 자신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으로 고백하고 자랑하면서도 로마서에서 뭐라고 고백합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내 안의 두 마음이 있어 서로 싸우는데, 마음이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육신이 원하는 죄를 범하고 있구나.’ 자기 변화는 영원한 숙제입니다.

 

[이 땅의 게쉬타포]

 

히틀러의 파쇼정권의 주구노릇을 했던 비밀경찰 게쉬타포들 결코 무식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당시 유럽 사상을 지배했던 독일 최고의 학부를 나온 사람들입니다. 몰라서 무식해서 유대인 600만을 학살한 것이 아닙니다. 게르만족의 순수 혈통을 강조하는 전체주의 독재 정권의 끊임없는 교육과 훈련에 자기도 모르게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600만의 유대인만 살해한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600만의 슬라브족과 집시들과 동성애자들과 장애인들과 정치적 반대자뿐만 아니라 본훼퍼 목사님들을 비롯한 하느님의 사람들을 제거했습니다. 국정원의 직원들 최고 학부를 나온 사람들입니다. 헌법재판소의 대법관들 최고 중의 최고입니다.

 

3년 전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물적 증거는 하나도 없고 그저 테러 조장의 의심이 있는 강연 몇 마디 말을 부풀려 국가전복을 꾀하는 이적단체라는 검찰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여 당시 국회의원 10명이 넘는 통합진보당을 강제 해산 시켰고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었고 이에 관련한 수십만의 당원들의 입에 모두 재갈을 물려버렸습니다. 지금도 이 나라는 그 사람의 인격과 생각에 전연 관계없이 그 사람 통진당원이었어라는 말 한마디면 거기서 끝입니다. 테러방지법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런 일을 저질렀는데, 이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이 땅의 민주주의는 죽었고, 자유는 죽었습니다. 오직 살아남은 것이 있다면 그건 물질 충족과 세상 성공이라는 개인의 욕망뿐입니다. 지난 31일은 일본제국주의의 악랄한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여 온 조선이 들고 일어난 31항쟁 97주년이기도 하였습니다만, 동시에 함석헌 윤보선 문익환 안병무 서남동 문동환목사님들이 주동이 되어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꾀하는 독재 권력을 비판한 명동성당 31구국선언 4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단지 민주주의를 원한다는 이 선언으로 인해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남산 정보부에 끌려가 빨가벗겨진 채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해야 했던 것이고 그 부인들은 남편들의 행방을 알지 못해 수많은 날들을 여기저기 길거리를 방황해야만 했으며 수년간의 감옥생활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다시 울려 퍼진 31민주구국선언]

 

지난 주 31일 명동성당에 모인 참여자들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군데군데 중략을 하며 읽어보겠습니다.

 

삼일혁명 백 주년을 세 해 앞둔 오늘 우리는, 민족·민주·인권·평화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서글픈 조종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늘과 땅에서 울려 퍼지는 이 청천벽력을 외면한다면 이는 양심의 호소를 거역하는 동시에 시민의 책무를 저버리게 되고 무엇보다 3.1혁명의 숭고했던 뜻을 단절시키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야 말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40년 전 이 자리에서 선포되었던 명동 3·1민주구국선언의 뜻을 아로새기며 다짐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적대하는 친일독재세력과 분단세력, 경제민주화를 가로막고 있는 재벌, 거짓증언으로 국민을 현혹하는 수구기득권언론, 국가기관의 부당한 선거개입 및 조작으로 탄생한 박근혜 정부를 준엄하게 꾸짖고자 합니다. 그리고 인간 존엄을 파괴하는 이 시대의 어두운 장막을 걷어내는 일이야말로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임을 고백합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친일매국세력의 식민사관이 아무 거리낌 없이 방방곡곡을 오염시키고 있는 불행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협상은 3.1혁명과 피어린 항일전쟁, 겨레의 유구한 역사를 송두리째 모욕한 굴욕의 사례였습니다. 한편 최근의 개성공단 폐쇄 조치에서 보듯, 겨레의 일치와 통일을 위한 노력을 중단하고 분단 상황을 집권 영구화의 구실로 삼으려는 음모가 착실하게 진행되는 중입니다.(중략)

 

국정원, 국방부 등 국가기관이 불법을 저질러가며 탄생시킨 박근혜 정부는 떳떳치 못한 그 탄생 이력으로 국민을 실망시키더니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정보기관 도감청, 역사 교과서 국정화 등의 참담한 실정으로 이것이 과연 국가인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습니다. 민주주의와 역사정의,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지당한 외침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는커녕 이를 종북 행위로 매도하고 민심을 교란함으로써 하고 국론분열을 일으켰습니다. 마침내 난데없는 국가비상사태를 들먹이며 의회를 무시한 채 안보를 구실로 삼아 또 하나의 폭압적 통치수단에 지나지 않는 테러방지법을 강요하기에 이르렀습니다.(중략 ...)

 

우리 역사는 고난과 시련을 헤쳐 가며 꽃을 피웠습니다. 언제나 세상을 구하는 길은 한 가지, 참여뿐입니다. 3.1혁명이 꿈꾼 이상 그대로, 어떤 순간에도 더 높은 민주주의를 지향하여 주시고, 만인에게 따뜻한 이불 같은 더 넓은 민주주의를 향한 행동을 멈추지 않으며, 인간존엄에 기초한 더 깊은 민주주의의 우물을 파는 수고에 한 분도 빠짐없이 동참하여 주십시오. 높고 깊은 그리고 넓은 민주주의에 기초하지 않는 일체의 정치와 통치는 부당한 지배이며 억압이니 다 같이 나서서 물리칩시다.(중략)

 

[성찰과 반성]

 

우리는 지금 40일의 성찰과 고난의 사순절 4번째 주일을 지나고 있습니다. 무엇을 성찰하고 계십니까? 이는 히브리 노예들이 자신들의 사고와 판단에 의한 자유로운 행동을 억누르는 애굽의 전제군주로부터의 해방을 성찰하는 기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대체 하느님의 아들로서 무엇 때문에 광야에 나아가 40일간을 금식하며 기도했는가? 도대체 그래야 할 이유는 무엇이고 그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던가? 예수의 십자가 구원 사건이란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며 오늘의 일상적 삶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히브리 민족들은 왜 제국들의 신인 오시리스와 누트와 벨과 바알을 거부하고 이름도 없는 야훼라 불리는 신을 섬기기 시작했을까요? 도대체 야훼는 무슨 뜻을 갖고 있는 것일까?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을 들어가면서 저들은 누룩이 안든 딱딱한 떡을 먹었을까? 사도 바울은 화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사명임을 선언하는데 화해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해 죄없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냥 둘이 화해하자고 서로 선언하고 악수하면 되었지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남북의 적대적 상황에서 화해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저런 물음들을 안고 루가복음 15장의 비유 말씀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 이 비유에 기초한 그림 하나를 들고 나왔습니다. 저 벽에 항상 걸려 있는 잘 아시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는 다 떨어진 신발 속에 맨발을 드러내며 아버지의 품안에 고개 숙인 둘째 아들이 있고 이 옆에는 이미 자기 몫의 유산을 다 탕진한 놈이 무슨 낯짝으로 다시 돌아왔나하며 불만과 감시의 눈초리로 째려보는 큰 아들이 서 있습니다.

 

[예수와 렘브란트가 만나다]

 

크게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아버지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초점이 없습니다. 아들을 기다리다 지쳐 눈이 멀어버린 것은 아닌가? 아버지로 상징이 되는 하느님은 우리의 겉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손을 보면 두 손의 짝짝입니다. 그냥 짝짝이 아니라 한 손은 크고 거칠고 투박하며 다른 한 손은 작고 가늘고 부드럽고 여립니다. 한 손이 남성의 손이라면 다른 한 손은 여성의 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50년 전 남성우위적 사고가 지배하던 그 시절에 이미 렘브란트는 하느님을 남성 아버지만이 아닌 여성 어머니가 함께 있음을 말하였고, 왼손이 아닌 오른손을 여성의 손으로 그림으로 여성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저는 가능하면 이 표현을 자제하든가 아니면 하느님 어버이라고 바꿔 불렀으면 합니다. 성서는 남성들이 지배하던 시대에 기록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시대라면 성서는 당연히 그 표현을 달리하여 기술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렘브란트의 당시 철벽과도 같았던 하느님의 남성성을 과감하게 부셔버리는 세계관의 혁명성을 보면서 내 안의 부셔버려야 할 낡은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두 번째 생각할 부분은 이 그림에 크게 대비되는 두 아들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안에 푹 잠겨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꼿꼿한 자세로 서서 불평과 감시가 서린 눈빛으로 아버지와 동생을 함께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오늘 비유 말씀에 첫째 아들이 집에 들어왔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아버지가 들어가서 죽었던 내 동생이 살아 돌아왔으니 함께 기뻐하자고 팔을 끄는데, 그는 이를 거부하면서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의 속을 한 번도 썩혀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 저를 위해서 잔치를 베푸신 적이 있으시나요?’ 돌아온 탕자와 돌아오지 않는 탕자 두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이 비유 이야기를 할 때 그 주위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그룹은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다른 한 그룹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들로 사회의 변두리에 밀려 있는 그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행방불명인체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집안 출신도 좋고 최고 학부도 나오고 똑똑하고 자신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도자들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사회의 오피니온 리더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늘 잔치자리에 참여를 거부합니다. 저런 죄인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북조선 출신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감추고 연변 조선족이라고 말을 합니다. 왜요?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북의 사람들을 죄인시여기고 함께 하면 자신의 거룩함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남쪽 그리스도인들은 통일을 기도할 때, 자신들은 이미 구원받은 자들로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북의 형제들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자신들은 절대 선이요 북은 절대 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하는 핵실험에 대해서는 잘했다 하고 북에 대해서는 하지 말라하고 어겼다고 징계하고 테러국가라 부르면서 세계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죄인과 세리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는 내일부터 핵항공모함과 핵잠수함이 동원되는 세계 최대의 키리졸브라 부르는 평양점령과 김정은참수작전이 명시되어 있는 한미군사훈련은 지극히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 예수의 말씀에서 제가 깨닫는 하나는 내 생각에 구원받을 것이라는 첫 아들그룹은 탈락을 하고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둘째 아들그룹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반전입니다. 첫째와 둘째의 뒤집힘입니다. 선과 악의 뒤집힘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 하늘 새 땅의 하느님 나라 역사는 지금의 역사의 진전이 아니라 뒤집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이지만, 저는 오늘의 하늘말씀을 펴는 사람으로서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하늘뜻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이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다고 하는 이 낡은 것과 새것은 무슨 핸드폰이나 자동차의 낡은 모델이 사라지고 새로운 모델로 대체된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차이처럼 우리의 모든 사고와 질서를 뒤집어 없는 세계관과 가치관의 전복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화해란 과거를 대충 접고 만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들이 여성을 억누른 역사에 대한 죄책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일제가 조선민중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한 공적인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남과 북이 화해하려면 서로가 서로에게 저지른 죄악들을 낱낱이 고백하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겨울공화국의 끝부분입니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게 맡에서

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

한 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

물려 줄 것은 부끄러움 뿐

잠든 아기의 베개 맡에서

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